<48화>
프레이야는 언제가 되든 반드시 아이작에게 복수해야겠다고 수없이 되뇌었었다.
하지만 이게 뭐지?
프레이야는 참을 수 없는 무력함을 느꼈다. 가장 큰 인생의 목표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는 괴로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고통은 제국에 대한 더더욱 강렬한 분노로 변질했다.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을 밟고 왔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무엇으로 그들의 죽음을 보상하나?
그때 안타레스가 어깨를 툭 쳤다.
“레이, 이제 우리 헤어져야 할 것 같은데. 넌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프레이야는 멍하니 허공을 보며 읊조렸다. 그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였다.
“난 황궁에 들어갈 거야.”
“……어떻게?”
프레이야는 낡아 빠진 식당의 문을 열었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 가운데 간판 하나가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일단 저기서 시작해야지.”
칙칙한 회색 건물 가장 위에 걸린 간판에는 ‘제국 공영 보육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
전쟁고아가 많아 보육원에 들어가기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프레이야는 순조롭게 본인의 방을 배정받았다. ‘신시아’라는 허구의 신분으로 말이다.
외모가 꽤 반반해서 받아 준 것이라고 프레이야는 내심 짐작했다. 그는 순간 야심의 빛이 깃들었던 보육원장의 눈을 기억하며 앞으로도 정신 단단히 차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짐은 빠른 시일 내로 찾아온 사건을 대처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날은 프레이야가 보육원에 들어온 지 일주일 조금 지났을 때였다. 동트기 시작한 무렵, 프레이야는 유리창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창가로 다가가자 작은 소포를 발에 매달고 있는 까마귀가 보였다.
“알아서 한다는 게 이런 거였어?”
프레이야는 실소하며 소포를 풀었다. 아니나 다를까, 안타레스와 약속했던 대로 변신 물약 열두 병이 있었다.
물약 만들기가 얼마나 귀찮은지 아냐고 맨날 투덜거리는 것치고 안타레스는 꽤 프레이야한테 정성스러웠다. 그를 둘째 동생쯤으로 삼은 것 같았다.
프레이야는 고맙다는 쪽지를 휘갈겨 쓰고 까마귀 발에 매달았다. 까마귀의 부리를 툭 건드리자 그가 작게 울고 단숨에 자리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일찍 일어난 김에 정령술 연습이나 할까 싶어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던 중 맞은편에서 올라오던 보육원장과 중년의 남성을 마주친 것은 우연이었다.
윤기 흐르는 머리칼과 몸에 딱 맞아떨어지는 옷으로 보아 남자는 꽤 높은 신분의 귀족이 분명했다.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생존 본능이 남자에게 인사를 하라고 명령했다.
프레이야는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보육원장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말했다.
“얼마 전 들어온 아이인데 아주 복덩이예요. 이 천사 같은 얼굴에 어찌나 영리한지.”
“흠…….”
귀족이 아주 천천히 프레이야의 얼굴 뜯어보았다. 정육점에서 고기의 등급을 판정하듯 집요한 눈길이 불쾌했다. 남자는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를 지분거리는 손길이 치욕스러웠다.
“앞으로 자주 보겠군.”
목구멍까지 욕지거리가 차올랐다. 그러나 보육원장은 고분고분하게 굴라는 듯 눈을 부라렸고, 프레이야는 이곳에서 떠나도 될 명분과 기회를 쥐기 전까진 그의 호의를 사야 했다. 그래서 그는 그저 조신하게 눈을 깔았다.
그 귀족은 잊을 만하면 보육원에 나타나 프레이야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먼 훗날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 그때까지 신시아로 살자고 결심한 것이 조금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심지어 프레이야를 괴롭히는 것은 그 귀족만이 아니었다. 보육원장은 프레이야의 외모와 능력을 치켜세우며 틈만 나면 그를 불러다가 후원자들 앞에 세웠다. 더 많은 후원금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럴 때면 프레이야는 아무리 당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모멸감을 느꼈다. 수치는 프레이야로 하여금 더욱 강한 독기를 품게 해 줬다. 그는 모든 것이 끝나 있을 미래를 그리며 지독한 불행 속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는 찾아왔다. 6년이라는 인고의 시간 끝에 수석 장학생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입학 통지서가 날아온 날, 보육원장은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사람처럼 하루 종일 실실 웃었다.
그리고 그는 프레이야가 혼자 해낸 일을 어떻게 선전할 수 있을지 궁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프레이야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참았다.
입학식까지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프레이야는 설렘과 긴장감이 혼재된 상태로 물약을 삼켰다.
장기간 복용의 부작용으로 노랗게 세어 버린 머리칼이 더더욱 옅어져 볕의 색을 띠고, 뼈가 녹는 듯한 고통과 함께 눈높이가 점점 낮아졌다. 거울 속, 진짜 얼굴보다 더 진짜 같은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프레이야는 짐을 챙겨 들며 말했다.
“네, 나가요.”
프레이야는 문턱을 넘으며 재차 다짐했다. 오랜 시간 동안 인내했던 만큼 유의미한 수확을 거두겠다고. 기필코 황궁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아 황제를 죽이겠다고.
***
제국에서 날고 기는 사람들 앞에서 수석 장학생이라는 이름으로 선서를 했을 때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은 시작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황태자와 차기 마탑주, 그리고 공녀와 얽히게 되면서 프레이야의 삶은 또다시 격변을 맞게 되었다.
아로네는 하루라도 프레이야의 심기를 긁지 않으면 죽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제이든과 에단이 ‘신시아’에게 이해할 수 없는 호감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말이다.
아로네의 추종자들은 틈날 때마다 프레이야의 앞을 가로막고 독설을 내뱉었다. 그 뒤에서 아로네는 그저 고요히 존재하며 프레이야의 표정을 관망했다.
짜증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다. 하지만 분해서 미칠 정도로 그들이 프레이야의 삶을 헤집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들의 노골적인 적의 덕분에 친구는커녕 쓸 만한 인맥 쌓는 일에 심각한 차질이 생겼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가장 유용한 두 명이 제 발로 걸어왔으니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레이야는 그들의 껄떡거림을 가소로운 마음으로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아로네의 악의는 그저 질투와 투정 따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본인이 가지지 못한 것을 너무나도 쉽게 얻어 버린 이에 대한 열등감은 살해 위협과 비교하면 어린애 장난과도 같았다.
한편으로는 효과적으로 인생을 망치고 있는 아로네가 조금 불쌍하기도 했다. 제이든을 향한 오랜 짝사랑과 기다림, 부재한 정령술 능력, 그리고 삭막한 가정 환경.
아로네의 이야기를 우연히 전해 들었을 때 그 애 또한 만만치 않은 유년기를 보냈음을 알았다. 어쩌면 프레이야도 아로네처럼 자랐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이들이 없었다면 말이다.
자기도 모르게 뺨을 때리고 아로네가 지었던 표정을 기억한다. 남이 만든 것인지 혹은 본인이 만든 것인지 모를 이미지 안에 갇혀 휘둘리는 모습이 익숙했다.
허울뿐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었구나. 순간 묘한 동질감이 일어서 프레이야는 별말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 사건을 계기로 아로네가 조금이라도 변화할 것이라 생각했건만. 그는 오히려 더욱 프레이야를 몰아세우면 세웠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아한 점은 입술은 차갑게 비소하면서도 눈은 어쩐지 괴로워 보였다는 것이다.
정신을 못 차리는 아로네가 답답했다. 제이든과 에단을 더욱 쓸 만한 패로 만들기 위해 그들 앞에서 착하고 영리한 여자애처럼 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프레이야는 결코 그들에게, 특히 제이든한테 어떠한 여지도 주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물론 언제나 인간은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마련이라 과연 그들도 프레이야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쩌면 그들은 신시아의 넘기 쉽지 않은 벽에 끌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핵심은, 이미 공고히 형성된 그들 간의 미묘한 관계를 어지럽힐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 뻔히 눈에 보이는 사실을 아로네는 자꾸만 간과했다. 어쩌면 모른 척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랑 그까짓 게 뭐라고 눈을 멀게 하고 이성을 잃게 하는 것인지. 이윽고 프레이야는 아로네의 어리석음을 멸시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로네를 골탕 먹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제이든의 성화에 못 이겨 계획에도 없던 황후 탄신 연회에 참석했을 때, 프레이야는 처음으로 제이든과 친하게 지낸 것을 후회했다.
불편한 사람이 있는 것은 차치하고, 안 그래도 뒤에서 구설수가 돌던 판국에 제이든과 연회장에 입장하다니. 그는 아로네를 내팽개치면서까지 프레이야를 파트너로 데리고 왔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게 아니면서도.
제대로 된 일을 해 보기도 전에 한낱 염문설의 주인공으로 전락해 버릴까 봐 연회에 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프레이야가 제이든의 마음에 들었다고 한들, 결국 그는 황태자 말에 복종해야 하는 평민에 불과했다.
프레이야가 전국에 비를 내릴 만큼 강하다 할지언정 그 힘으로 계급 차이를 눌러 버릴 순 없었다. 황제의 목을 그어 버리기 전까진 그 비범함을 숨기고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 하니까.
그래도 그날 얻은 게 있긴 하다. 바로 님프 공작이 공식적인 후원을 약속한 것이다.
아로네가 질색할 것이 분명했지만, 솔직히 알 바 아니었기 때문에 프레이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긋지긋한 보육원에서 벗어난다는 기쁨이 제일 컸다.
그 뒤로는 유례없이 순조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그의 삶에도 이렇게 평화로운 날이 있구나 싶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