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38)

<46화>

“그러니까 몇 년 동안 내가 걱정할 정도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실을 숨겼다는 거네.”

“죄송합니다.”

이미 알았으면 상황이 조금 달라졌을까? 프레이야는 몹쓸 죄를 짓기라도 한 양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사람들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가장 중요한 일에 자신이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화가 났지만, 이제 와서 따진다고 한들 무언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한 이상, 그들은 운명 공동체나 다름없다. 프레이야는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책임은 묻지는 않겠다. 다만 이것 하나만 내게 약속해라.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나를 믿고 이 자리에 오고자 결심했던 그대들의 의지, 그 의지가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이라고.”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맹세하건대 나와 어머니는 결코 금지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 모두가 찬양했던 내 능력 또한 삿된 주문으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야. 나를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그대들에게 분명하게 말하지. 난 내 자리를 되찾고 내게 불행을 안겨 준 사람들에게 복수를 할 생각이다.”

프레이야는 잠시 숨을 고르며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눈빛에서 두려움과 후회를 찾아볼 수 없었다.

“지치고 힘든 싸움이 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에게 묻겠다.”

그래, 이들은 이미 각오한 자들이야. 불안한 것은 오로지 나뿐. 프레이야는 강한 의지를 담아 말했다.

“나와 함께해 주겠나?”

구태여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들의 표정에서 긍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제야 프레이야는 흐리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

역시나 반란을 준비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날이 밝기도 전에 프레이야와 그 일당을 찾는다는 벽보가 마을 곳곳에 붙었다. 수배지 아래로는 거짓된 죄가 줄줄이 나열되었다.

프레이야는 왕국민이 이상한 점을 눈치채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보기 좋게 배반당했다. 그에게 환호를 보내고 웃음을 짓던 사람들은 너무 빨리 등을 돌렸다.

“아무리 그럴듯한 죄목이라 한들 이렇게 쉽게 돌아설 수 있는 건가? 구원자라고 떠받들 때는 언제고…… 그래. 이게 아이작이 원하는 전개구나.”

신과 같았던 존재의 날개를 꺾어 버리고, 그 자리를 본인이 대신 차지하는 것. 프레이야의 예상처럼 아이작은 곧장 기사단을 총출동시켰다.

나를 확실히 짓밟으려나 보군. 프레이야는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수하들과 함께 삼엄한 경비를 피해 밤낮없이 달렸다. 수도 변두리에 마련되었던 은신처는 점점 멀리, 그리고 점점 더 구석으로 향했다.

그렇게 프레이야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지도에도 표기되지 않은 산기슭 한군데에 정착하였다. 말이 정착이지, 사실상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살림살이가 가능한 한 간소화된 집이었다.

기사단의 추적이 어느 정도 느슨해진 후에는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귀족 가문들에게 비밀리에 서신을 보냈다. 왕국 전역에 퍼진 나의 혐의는 모두 거짓이니 네 두 눈으로 직접 봤던 나를 믿는다면 연락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프레이야는 수없이 많은 서신을 보냈지만, 불행하게도 돌아온 답은 단 한 통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복수는 소망에서 그치고 말 거야.”

그래서 프레이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그는 무너진 평판을 되살리고자 언젠가 갔었던 지역을 차례대로 다시 찾았다.

그는 오염된 호수와 강과 샘물과 우물을 차근차근 정화해 나아갔다. 왕국민이 그의 노력과 진심을 알아주길 바라며. 그렇게 프레이야는 묵묵히 고행길을 걸었다.

하지만 공로는 생뚱맞은 사람에게 돌아갔다.

어느 날, 브랜던은 비통한 얼굴로 말했다.

“1왕자가 왕위에 오르며 레이 님의 공적을 가로챘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이 안 나온다더니. 그때 프레이야의 심정이 딱 그랬다.

신이 새로운 왕의 탄생을 축하하고 지지하기 위해 ‘정화’라는 축복을 내려 줬다니. 그런 얌체 같은 생각은 도대체 누가 했을까? 항시 곁에 두는 게일 브라운?

신이 고작 왕위 교체를 위해 축복을 내릴 리 만무했기에, 프레이야는 국민의 차가운 반응을 예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람들은 그 선전에 꼼짝없이 속아 넘어갔다.

프레이야는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어째서? 내가 구원자라 불릴 땐 1왕자 따위 안중에도 없었으면서, 왜 지금은 아이작을 무조건적으로 믿는 거지?

아이작이 그 시커먼 속내를 꽁꽁 숨기고 친절한 가면을 써서? 그가 내 비리를 밝혀냈다는 업적을 갖고 있어서?

“……좋아, 어디까지 뺏어 갈 수 있는지 보자고.”

프레이야는 거지들과 뒷골목 패거리들에게 돈 몇 푼을 쥐여 주며, 왕국 전역에 소문을 퍼트리라 부탁했다. 그리하여, 프레이야의 의지는 단조로운 운율을 갖고 전국을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달이 둥글게 차오른 날, 하늘로부터 외면받은 땅에 희망의 눈물이 내리리라.’

누가 노래를 만들어 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노래가 누굴 가리키고 있는지는 모두가 알겠지.

부하들은 입을 모아 프레이야의 결정을 반대했다. 감수해야 하는 위험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아이작이 한결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그때가 모험을 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였다.

사실 프레이야의 조급함이 절정에 다다라있기도 했다. 그는 나날이 차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무조건 성공해야 해. 최악의 경우 죽을 수도 있겠지만 벌써 3년이야. 3년 동안 아무 성과도 없었고……. 그러니 발악이라도 해야지.”

프레이야는 전국에 비를 내리겠다는 미친 짓을 기어코 해냈다.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높이 산 하늘이 단 한 번의 기적을 내려 준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극치를 넘어선 힘을 사용한 여파로 며칠간 끙끙 앓았다. 그래도 눈을 뜨고 나서 접한 소식은 희망적이었다.

“사람들이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작이 다시 오염 물질을 투기하지도 않았고?”

“네. 당연히 레이 님이 못 하리라 생각하고 왕국 전역을 오염시킬 물질과 인력을 확보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설사 오염 물질을 투기하려고 해도 잠복하고 있는 저희 쪽 기사들이 해결할 겁니다.”

그 뒤로는 프레이야의 바람대로 상황이 흘러갔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동식물이 기형적으로 변하거나 물이 산성을 띠는 일이 일어나지 않자 사람들은 슬슬 과거의 사건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 속 몇 년 전, 수상한 차림새를 한 사람들이 멀쩡한 땅과 호수에 무언가 불온한 물질을 투기하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보복당할까 무서워 그동안 진실을 함구해 왔다고 변명했다.

귀족들도 빠르게 머리를 굴려 프레이야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렇게 프레이야의 세력은 급속도로 불어났고, 드디어 본격적인 반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변경백의 저택에 머물며 다가올 거사를 기다렸다.

그사이 아이작은 완벽한 폭군으로 변모하여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판단되는 가문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했다.

프레이야는 그의 편이 하나둘씩 파멸되는 것을 지켜보며 거사를 앞당겨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변경백이 운명을 달리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간밤에 변경백이 마차 폭발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아이작 멜러니의 소행으로 의심되며, 폭발 범위가 넓어 그 외에도 다섯 명이 더 숨졌습니다.”

변경백은 반란 가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심축의 갑작스러운 죽음 덕분에 프레이야의 세력은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는 움츠러든 그의 편을 다독이는 데 정신이 없었다. 아이작이 피바람을 일으키며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시점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결속력을 다잡고 내부 정비를 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신경 써야 하는 건 아이작이 아니었다.

얼마 후, 그날 폭파에 명을 달리한 사람 중 제국의 귀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사람이 바로 제국의 황제가 공공연하게 총애하던 정부였다. 그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관광하러 왔을 뿐이었다.

사랑에 눈이 먼 제국의 황제는 정부의 비보를 듣자마자 데우스 왕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하지만 사실상 있으나 마나 한 선전 포고였다. 황제가 명시한 전쟁 날짜가 고작 이틀 뒤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3년간 온갖 역경을 이겨 내며 준비한 반란은 예상치 못한 제국과의 전쟁에 의해 허무하게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충격을 수습할 틈새도 없이 제국의 군대가 순식간에 국경을 넘었다.

당연하게도 군대가 가장 먼저 공격한 곳은 바로 프레이야가 머물던 변경백의 지역이었다. 이쯤 되니 불행이 자신의 운명 같다고 프레이야는 자조했다.

프레이야는 돌고 돌아 다시 자신을 찾아온 죽음을 기꺼이 맞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브랜던은 결코 프레이야를 죽게 놔두지 않았다.

“비밀 문을 통해 빠져나가면 레이 님만큼은 살 수 있을 겁니다. 가방을 준비해 놓았으니 지금 당장 대피하십시오.”

“하…….”

한결같은 브랜던의 태도가 참 미련했다. 개죽음이 뻔할 미래를 알면서도 그 하나만큼은 어떻게든 살리려는 게 슬퍼서 화가 났다. 그는 이루어 말할 수 없는 무력함을 느꼈다.

“……나 혼자 살아서 뭐 어쩌라고?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아남을 만큼 내 목숨은 가치 있지 않아.”

“저희가 왜 그날 밤 모였다고 생각하십니까? 레이 님이 저희에게 소중하기 때문에 기꺼이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브랜던이 할 말을 알 것 같아서 가슴이 아렸다. 프레이야는 입술을 앙다물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브랜던이 설핏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 우스운 별일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보여 주지 않았던 웃음을 이제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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