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아로네!!”
아로네가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몸을 틀었다.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냈다. 가까이에서 본 아로네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그 애는 금방 어디론가 떠나 버릴 사람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가만히 말을 골랐다. 어둠을 품은 하늘은 음산했고, 연회장에서 흘러나온 소음은 그것이 당연하다는 양 우리를 완전히 비껴갔다. 우리는 신이 만들어 놓은 세트장 속 주연 배우처럼 고요히 서 있었다.
나는 괜스레 아로네의 옷자락을 틀어잡았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어디가?”
“돌아가려고. 집에.”
동공에 초점이 없었다. 나는 아로네의 턱을 잡고 끌어 내려 억지로 나를 보게 했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총명하고 당당한 제비꽃이 생기를 잃고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럼 같이 가자. 휴가 낼 테니까 당분간 좀 쉬자 우리. 어때?”
“신경 써 줘서 고마워. 그런데, 난 괜찮아.”
“그래도…….”
“그냥 좀 쉬고 싶어. ……혼자서.”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 모습이 지독하게 피로해 보였다. 힘없이 내뱉어진 문장이 겨울날 입김처럼 덧없이 흩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입술만 달싹이며 침묵하자 아로네가 겨우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내 손을 떼어 냈다. 의지할 곳을 잃은 손이 아래로 추락했다.
“그럼 다음에 보자. 내가 연락할게.”
나는 멀거니 서서 마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응시했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떠난 아로네가 야속하다가도 결국 걱정이 됐다. 정말 아로네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유람선을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다 갑자기 하선 요구를 받은 기분이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막막한 심정으로 터덜터덜 걷는데 건너편에서 지금만큼은 제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걸어왔다.
나는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멈추어 섰다. 그리고 이성의 끈을 꽉 쥐었다.
“어디 가셨나 했더니 산책하고 계셨나 봐요, 제이든 님.”
“여기서 혼자 뭐 하는 중이지?”
제이든은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아로네 배웅이요.”
“아, 그렇군.”
제이든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 그렇군? 그게 아로네 가슴에 비수를 꽂은 사람이 할 말인가?
그는 최소한의 대화를 마치자마자 신시아를 이끌고 자리를 뜨려 했다. 나는 요동치는 감정을 느끼며 태연자약한 제이든을 노려보았다.
“뭐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꼴을 보니 열불이 일었다. 이성의 끈이 우스우리만치 쉽게 끊어졌다.
넌 언제나 우위에 서 있을 특권을 쥐었고, 상처받는 건 언제나 아로네지. 치가 떨리도록 제이든이 혐오스러웠다. 분노 어린 격랑은 순식간에 몰아쳤고, 나는 방향키를 놓쳐 버렸다. 조금은 고의적이었다.
“뭐냐고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본데, 그럼 한번 해 봐.”
불안하게 날 응시하는 신시아의 눈길이 느껴졌다. 제이든이 건방지게 고개를 까닥였다. 나는 제이든만을 쳐다보고 악의에 가득 차 말을 짓씹었다.
“아로네는 곧 황태자님의 아내이자 제국의 황후가 될 거예요. 오늘 황태자님이 하신 일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석될지 아세요? 아로네와 입장해 놓고선 다른 여자와 자리를 뜨시다니요. 황태자로서 그 행동이 과연 적절했다고 생각하세요? 온 귀족들이 모이는 건국 연회에서 감정적으로 행동한 게 정말 옳았냐고요.”
마음 같아서는 세상이 떠나가라 고함치고 싶었다. 굳이 그러지 않은 것은 내 최후의 이성이었다.
“아로네의 평판이 바닥을 치는 것은 물론 황태자님에 대한 구설수가 돌 거라는 거, 예상하고 그러신 거세요? 왜 스스로 함정을 파세요?”
강렬한 분노가 한차례 휘젓고 간 몸이 가쁜 숨을 내뱉었다. 나는 핏줄이 불거지도록 주먹을 쥐었다. 빌어먹을 제이든은 우습게도 화가 난 표정을 했다. 그의 살기에 살가죽이 찢길 것만 같았다.
“지금 나한테 변명할 것을 요구하는 건가? 난 네게 변명 따위를 할 이유도 의무도 없어. 오히려 핑계는 네가 대야 할 것 같군. 나의 친애하는 보좌관의 정신이 잠시 어떻게 된 것 같으니 내가 친히 사실을 짚어주지. 넌 이곳에 내 보좌관 자격으로 참석했어. 공과 사 구분하라고 분명 경고했었는데, 그 간단한 명령조차 수행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줄 몰랐군.”
정말 멍청한 건 제이든이다. 나는 찬 바람 나게 하하 웃었다.
“글쎄요. 제이든 님은 본인이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시죠. 데네브 님이 파트너로 신시아를 데리고 와서 화가 나 황제 폐하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그 애의 손을 잡고 나간 사람이 누구였죠? 순간의 감정을 못 이겨 선을 넘은 사람은 저뿐만이 아니지 않나요?”
“너…….”
“제가 틀렸다는 식으로 말씀하지 마세요. 난 항상 옳으니까.”
목이 아리게 메었다. 나는 인사도 하지 않고 얼빠진 제이든을 지나쳤다. 몇 달간 새빠지게 일해서 쌓아 올린 모든 공적이 방금 5분 사이에 모두 무너져 내렸음을 직감했다.
후회스럽진 않았다. 다만 슬펐을 뿐이다. 나는 아프기만 한 구두를 벗어 던지며 들끓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뛰었다.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사나웠다.
나는 어디로 향하는 지도 모른 채 의무적으로 달렸다. 그때, 누군가 날 돌려세웠다. 필사적으로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했건만 다 수포가 되었다. 나는 신시아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거 놔! 지금 네 얼굴 보기 껄끄러우니까 놓으라고!”
“알아. 하지만 넌 내 말을 들어야 해.”
발악을 하며 팔을 비틀자 신시아가 너무나도 허무하게 손을 뗐다. 나는 신시아를 노려보며 등을 돌렸다. 그러나 간절한 손길이 드레스 자락을 약하게 붙들었다.
“제발…….”
애달픈 목소리가 호수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여전히 청아해서 듣기 싫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제발 그냥 가. 이대로라면 너한테 정말 실수할 거 같으니까.”
제이든이 손수 지핀 불길은 사그라지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활활 타올랐다. 손목을 옥죄는 고통에 인상을 썼던 얼굴을 기억함에도 불구하고 방향 잃은 분노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모든 사람이 미웠다. 철없이 행동해서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제이든이 미웠고, 안 될 사랑에 목매는 아로네가 속상해서 미웠고, 이런 상황에서조차 꾸역꾸역 날 붙잡는 신시아가 이해되지 않아서 미웠다.
그러나 가장 미운 사람은 감정 컨트롤을 하지 못하고 애꿎은 애한테 화풀이를 하는 나였다. 나는 내가 이보다는 나은 사람이라고 그동안 믿어 왔다. 하지만 이게 뭐지?
나는 탈력감에 젖어 멍하니 신시아를 바라보았다. 그가 울듯 말듯 흐리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각오하고 붙잡은 거니까.”
“도대체…… 도대체 왜?”
그 무조건적인 헌신이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이로웠다. 내가 너한테 해 준 건 아무것도 없는데, 넌 왜 그렇게 이 관계를 소중하게 여겨?
“그냥 보내 버리면 그게 마지막이 될 테니까.”
“…….”
“앞으로 나 피할 거였잖아. 제이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람들 시선이 신경 쓰여서 결국 피할 거였잖아.”
나는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그래. 이 자리를 뜨는 순간부터 나는 앞으로 신시아와 연을 끊을 작정이었다. 오늘의 사건 때문에 신시아가 싫어져서가 아니다. 제이든의 강압적인 태도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신시아를 탓할 리가 있나.
다만, 멍청한 제이든이 연회장 한복판에서 사고를 친 덕분에 아로네와의 불화는 살이 덧붙여진 채로 항간에 나돌아 다닐 것이다. 그런데 내가 스캔들의 주인공인 신시아와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를 유지한다? 그건 내 의도가 어떻든 결과적으로 아로네에 대한 기만으로 해석될 것이다.
“나는……. 아.”
맨발로 무아지경으로 뛰어다닌 탓에 생긴 생채기에서 핏물이 배어 나왔다. 신시아가 쪼그려 앉아 상처를 살폈다. 그러고선 손수 흙과 나뭇잎을 털고 정령을 불러내 발바닥을 깨끗하게 씻어 냈다.
가로등 아래 그의 속눈썹이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꾹 다문 입술이 고집스러웠다. 나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나는 발을 빼내려고 했지만 저 작은 체구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건지 신시아는 꼼짝도 안 했다.
신시아가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내 발바닥을 감쌌다. 나는 뿌리치기를 포기하고 체념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신시아가 매듭을 지으며 나긋하게 말했다.
“잘 들어, 혜라. 제이든은 절대로 날 좋아하지 않을 거야.”
“지금 나 놀려?”
“왜인 줄 알아?”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데?”
나는 못마땅하게 신시아를 흘겼다. 신시아가 살며시 웃고선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가 사실은 남자라는 거.”
“……미쳤어?”
지금같이 심각한 상황에서 뭐? 하도 어이가 없으니 분노마저 휘발되었다.
하고 싶었던 말이 고작 터무니없는 농담이면 답 나왔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신시아에게 완전한 이별을 선고하려 했다. 하지만 시계탑에서 종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벌어진 기현상이 내 입을 막아 버리고 말았다.
별안간 허공에서 나타난 꿈결 같은 빛줄기가 신시아의 몸을 천천히 휘감았다. 나는 그의 몸이 오류 난 화면처럼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펴지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긴 머리가 점점 짧아지며 파도 같은 머리칼이 언젠가 봤었던 연미색으로 물들었다. 신시아가 웬 양피지를 찢자 동화 속 공주님이나 입을 법한 드레스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멋들어진 연미복이 나타났다. 나와 비슷했던 키는 마법처럼 위로 솟았고, 이목구비는 한층 날카로워졌다.
신시아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아니, 정말 저게 신시아인가? 나는 현실을 부정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