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나는 초상화 모델처럼 작위적으로 미소 지은 아로네를 바라보았다가 제이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 모두를 꽤 잘 아는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둘 사이의 기류는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입장하기 전에 말다툼을 했다는 데에 할리의 머리카락을 걸 수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제이든은 황제의 기념사만 듣고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았다. 황제의 눈짓을 받은 악단이 느린 템포의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제이든은 정말 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아로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사전에 연습하기라도 한 양 호흡이 척척 맞는 그 둘을 바라보며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잘 맞는 게 하나쯤은 있었구나, 쟤들도.
처음 국혼이 발표되었을 때만 해도 우려를 표하던 사람들이 물 흐르듯 유려한 그들의 춤사위를 보고 아낌없이 감탄을 내뱉었다.
나는 인형극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로네를 움직이는 실은 사랑일 테고, 제이든은 뭐지? 부모의 강압?
얼음을 조각해 놓은 것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제이든이 너무 얌전하게 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쟤가 저럴 애가 아닌데 말이야. 혹시 속으로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는 건 아닐까?
곰곰이 생각에 빠지려던 참에 할리가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올리자 할리가 여름밤의 선선한 바람처럼 웃었다. 나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근데 나 춤출 줄 모르는데. 넌 알아?”
언젠가 아로네의 발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춤을 배운 적이 있긴 하지만, 나는 천부적인 몸치인 데다가 기억력도 그렇게 좋지 못했기에 다 까먹어 버리고 말았다. 할리가 당연한 걸 뭐 하러 묻느냐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알긴 하지. 다만 리드를 못 할 뿐.”
얘 진짜 뭐지? 내가 어이없어하자 할리가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선 하는 말이 참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꼭 정해진 대로 춰야 해? 우리가 추고 싶은 대로 추면 그게 춤이지.”
“말이나 못 하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할리의 그루브에 자극받아 조금씩 리듬을 탔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조금씩 흥이 돋는 거 아닌가. 나는 종국엔 모든 근심으로부터 벗어나 신나게 몸을 흔들었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에서 난리 법석을 떨었다. 메인 스테이지에서 그 짓을 했다? 제이든이 왜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짓을 하냐고 우리를 쥐 잡듯이 갈굴 게 뻔했다.
오자마자 마신 샴페인의 취기가 이제야 올라왔다. 우리는 낄낄대며 경쟁하듯 막춤을 추었다. 선율과 박자가 하나도 맞지 않았다.
“푸핫! 그게 춤이냐 이 바보야? 이 정돈 돼야지.”
나는 연체동물처럼 사지를 꿀렁꿀렁 굴렸다. 그러자 할리가 무너지듯 벽을 짚으며 폭소했다.
나는 할리의 반응에 만족하며 이번에는 팝핀을 보여 줄까 하는데, 여기서 볼 거라고 미처 생각 못 했던 얼굴을 스치듯 보고 홱 고개를 돌렸다.
“신시아?”
내가 말해 놓고도 믿기지 않았다. 나는 신시아와 그 옆을 지키듯 서 있는 데네브를 번갈아 보았다. 신시아는 조금 난감해 보였다.
“설마 둘이 파트너?”
“……응.”
낯선 조합은 아닌데 이런 자리에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조합도 아니라서 얼떨떨했다. 나는 딱 3초만 탄식하고 입을 다물었다.
신시아가 묘한 눈길로 할리를 샅샅이 관찰했다. 데네브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사이 웃음을 잠재운 할리가 내 옆에 서서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나는 그 모든 관심이 문득 부담스러워져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왜 다들 나 쳐다봐요? 서로 다 알면서. 자기소개가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대화의 물꼬를 트기를 기다렸다는 듯 데네브가 재빨리 빈정거렸다.
“일은커녕 연애질이나 하고 잘하는 짓이네. 세금이 아까워.”
아, 저 새끼는 볼 때마다 시비야.
나는 데네브의 헛소리를 능숙하게 흘려들었다. 다만 이런 종류의 비꼼을 처음 듣는 할리는 당황스러워하며 나와 데네브를 번갈아 보았다. 가련하게 떨리는 동공으로 보아하니 내가 데네브와 적대 관계인 것에 놀란 것 같았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신시아에게 말했다.
“이런 곳에서 만나니까 꽤 기분 색다르다.”
가볍게 씹혀 버린 데네브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아이고! 고소해라.
“그러게. 근데 둘이 같이 온 거야?”
“같이 오긴 했지. 그런데 그렇다고 얘랑 연애하고 그런 사이 아니거든요?”
나는 눈을 뾰족하게 뜨고 데네브를 흘겼다. 데네브는 퍽이나 그렇겠다며 코웃음을 쳤다. 그때, 할리가 내 팔을 쿡쿡 찌르고 텔레파시를 보냈다.
이 자리가 미치도록 불편하니 어떻게 좀 해 달라고? 나는 잠시 고민했다가 말했다.
“너 먼저 제이든 님한테 가 있어.”
할리는 좋다고 방실방실 웃으며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신시아와 데네브가 힐끔 돌아보았다. 그러고선 날 다시 응시하는 눈빛에 어쩐지 수긍이 서려있어서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도대체 무슨 의미지?
데네브는 악담하지 못하면 죽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나를 건드렸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나는 할리가 다른 흥밋거리를 찾은 것을 확인하는 동시에 여유롭게 데네브의 말을 받아쳤다.
신시아는 간간이 대화를 중재하며 데네브에게 인상을 찌푸렸다. 말 없는 질책을 받은 데네브가 꾸중 들은 아이처럼 시무룩해하는 모습을 보자니 토가 쏠렸다.
그래, 여기 있어 봤자 못 볼 꼴만 볼 텐데 그냥 가자. 나는 박수를 쳐서 이목을 모았다.
“자! 그럼 두 분 다 즐거운 시간 보내다 가세요! 저는 볼일이 있어서 이만!”
“방금까지 할 일 없이 노닥거렸으면 갑자기? 지금 도망가는 건가?”
지금 이거 뭐지? 날 좋아하는 신시아는 아무 말 없는데―풀 죽은 모습이 사실은 붙잡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긴 하지만― 왜 날 싫어하는 데네브는 붙잡지?
나는 진정 미쳤냐는 의미를 담아 데네브를 쳐다봤다. 빙글빙글 웃는 데네브는 그저 날 곤란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참나. 자기가 좋아해 마지않는 신시아와의 오붓한 시간까지 포기하면서까지 날 놀리고 싶다고? 그것참 지극한 정성이다.
“도망이라니요? 이거 다 데네브 님을 위한 것인데요. 제가 몸은 공작가로부터 멀리 있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모를 거 같아요?”
요컨대 네가 신시아 좋아하고, 그래서 사용인들 사이에서 소문 한 번 돌았던 거 알고 있으니 좋은 말로 할 때 멍청하게 굴지 말라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데네브는 분해서 미치려고 했다. 와중에도 신시아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안 어울리게 참 지고지순이다 싶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딱 잡아떼면 해결될 문제를 스스로 키우고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 딱했지만, 어쨌든 나는 데네브랑 빨리 떨어지고 싶었기에 이 혼란한 와중을 틈타 도망가고자 했다.
근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최종 보스가 등장하고 말았다.
“즐거운가 봐?”
제이든이었다. 그가 오자마자 나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폭설이 몰아치는 한겨울처럼 한없이 낮게 가라앉았다. 시리도록 파란 눈동자가 데네브를 노려보았다.
나는 며칠 전의 일을 떠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제이든이 신시아의 팔목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신시아의 미간이 좁혀졌지만 기 싸움을 하느라 바쁜 남정네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한심한 것들.
제이든이 명령하는 어조로 말했다.
“데려가도 되겠지?”
“안 된다면?”
“안 될 리가 있나. 가자, 신시아.”
차마 눈 뜨고 못 봐 줄 광경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에 쏠린 것이 느껴졌다. 속닥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귓가를 날카롭게 건드렸다.
네 쌍의 발이 절반으로 줄었다.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질수록 웅성거리는 소리는 더욱 커졌다. 아로네의 이름을 담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나는 눈앞에서 파트너를 빼앗긴 데네브에게 나름 위로의 의미로 샴페인을 건넸다. 미워 죽겠던 얼굴도 이 순간만큼은 아주 조금 측은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아로네를 찾아 분주히 홀을 뛰어다녔다. 자꾸만 새어 나오는 한숨이 연회장의 바닥을 함몰시킬 것만 같았다.
***
아무리 연회장 안을 샅샅이 뒤져도 익숙한 머리칼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분주하게 눈알을 굴렸다. 다리에서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드레스를 살짝 들어 올리니 구두가 너무 딱 맞았는지 뒤꿈치가 까져 있었다. 검붉은 피가 수채화처럼 살갗을 물들였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구두를 구겨 신었다.
나는 정신없이 사람들을 헤치고 지나갔다. 요즘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을 한 여자 두 명이 얼굴을 바짝 붙이고 속닥였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어투였다.
온갖 귀족이 모이는 이곳은 물밑 정치의 핵심인 동시에 사교의 장이자 구설수의 홍수였다. 막장 드라마의 시청자처럼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은 저들 말고도 흔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지나치려다가 아로네의 이름을 듣고 우뚝 멈추어 섰다.
“아까 공녀님 표정 봤어? 눈 마주쳤을 때 심정지할 뻔했잖아, 나.”
“약혼자가 대놓고 사랑싸움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기분이 안 나쁘겠어.”
나는 무례라는 것도 잊고 그들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앳되어 보이는 그들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푸드덕 떨었다.
“아로네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요?”
“어…… 방금 연회장을 나가시는 걸 봤어요. 근데 누구…….”
“알려 줘서 고마워요. 그럼.”
나는 대충 고개를 숙이고 급하게 발을 놀렸다. 그러나 복도에 나와 고개를 두리번거려도 아로네의 그림자 한 자락 하나 찾을 수 없었다.
확 잘라 버리고 싶은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자락을 잡고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사위로 그토록 찾아 헤맸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