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38)

<42화>

정말 운 좋게도 응접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나는 긴장하며 서류를 쥔 손에 힘을 줬다가 제이든 뒤로 예상치 못했던 얼굴을 보고 얼빠진 탄식을 내뱉었다. 아로네가 왜 여기 있지?

나는 속으로 의문하면서도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아로네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제이든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눈빛만 보냈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분위기는 꽤 심각했다. 서류를 들고 땀을 뻘뻘 흘리는 나를 보고도 제이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나 또한 사인해 달라고 요청하기는커녕 침묵한 채 그 뒤를 졸졸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급해 죽겠는 나만 똥줄이 탔다.

바깥으로 나오자 공작가 문양이 찍힌 마차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베키가 보였다. 왜 베키를 못 봤지? 내가 급하긴 급했나 보다. 나는 차마 소리 내지 못하고 안면 근육이 허락하는 한에서 베키에게 반갑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때, 제이든이 별안간 뒤를 돌아 아로네를 노려봤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아로네의 얼굴을 주시하며 제이든의 말을 기다렸다. 그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이제 만족하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하! 모르겠다고? 네가 그토록 원하던 내 파트너 자리를 따냈잖아. 도대체 황후를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매번 그분이 어린애들 장난 같은 다과회까지 열어 가며 친히 내게 부탁하지?”

증오의 농도가 짙었다. 나는 후두부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숨을 크게 들이켰다. 덤덤한 표정의 아로네를 보자 속이 들끓었다.

“구워삶다니요. 언행을 조심하시는 것이 좋으실 듯합니다, 전하. 황후 폐하의 궁에서 그분을 욕보이시면 안 되죠.”

“아, 그런 식으로?”

명치에 주먹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만큼 사람 속을 긁는 말투였다. 그러나 아로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의연하게 받아쳤다.

“무슨 오해를 하고 계신지는 알겠지만, 생각하시는 일은 신께 맹세코 한 적이 없습니다. 황후 폐하는 그저 곧 다가올 국혼을 염려…….”

제이든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말 한번 잘했군. 그 국혼 말인데,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일전에 말했었지? 난 너와 절대…….”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치고 말았다.

“제이든 님!”

저 개소리를 더는 들어 줄 수 없었다. 아무리 아로네가 싫다 해도 그렇지, 제국 유일의 공녀를 대하는 태도가 저게 뭐야? 인상을 찌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자 제이든이 살벌한 시선으로 되돌려 주었다.

저 죽일 듯한 눈빛을 아로네가 받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내가 언제 끼어들어도 된다고 말했지?”

“하지만…….”

꽉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네가 공과 사도 구분 못 하는 얼간이인 줄은 몰랐는데. 주제 파악 못 하나?”

나는 무심코 아로네를 쳐다보았다. 그 애는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가슴은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부추기고 있는데 이성은 아로네가 곤란해질 거라며 참으라고 설득했다. 나는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자문했다.

황태자로서의 최소한의 책임감이 있다면 아로네와 건국 연회에 함께 입장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그 당연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넘어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어떤 간교한 말로 황후를 매수했냐 따지는 제이든의 논리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춤 한 번 추면 되는 거, 그게 뭐가 어렵다고 노발대발 화내는 거지? 이런 사소한 정치적 퍼포먼스도 못 할 거면 왜 황태자의 직위를 달고 있는 거야? 그리고 황후가 주관한 자리에서 황후 본인이 직접 부탁한 사안인데 그 이유를 왜 아로네한테 묻고 있지?

왜 아로네와 파트너가 되어야 하는지 정말 납득이 안 됐다면 아로네한테 모든 분노를 쏟아 내는 게 아니라 황후에게 먼저 물어봤어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이 순간만큼 제이든이 멍청해 보인 적이 없었다. 아로네의 마음을 알면서도 부러 잔인한 말만 족족 골라서 하는 제이든을 두들겨 패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어이없는 말을 들으면서도 끝끝내 감내하기를 택하고야 마는 아로네가 미웠다. 제이든이 얼마나 더 쓰레기처럼 행동해야 그 마음을 접을까?

나는 잔잔하게 파도치는 자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결국,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꽉 쥐고 눈을 내리깔았다. 다듬지 않은 손톱이 살갗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제이든은 더 할 말 있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모든 감정을 거세시키며 입을 다물었다. 지독한 환멸감이 들었다.

그날, 나는 주말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퇴근하자마자 아로네에게 달려갔다. 제이든 앞이라서 부러 의연한 낯을 꾸며 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로네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척 연기했다. 왜 나한테까지도 감정을 숨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속으로 곪을 바에는 차라리 바깥으로 쏟아 내고 그 빈 공간에 다른 좋은 기억을 심는 게 나을 터인데.

그러나 아로네는 본인의 연기가 들통났다는 것을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모른 척했다.

애가 싫다는데 구태여 상처를 뒤집어도 되는 걸까? 정신 차리라고 화내도 되는 걸까? 지금이 바로 그 타이밍인가? 나는 한참 고민했지만 뭘 하든 상황이 더 악화될 것 같아서 결국 형식적인 말밖에 하지 못했다.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야.”

그래, 아주 통상적인 위로 말이다.

황급히 찾아갔다가 황급히 떠나는 길. 나는 차창에 기대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싸구려 유리 위로 물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장마였다. 사람들이 다급하게 뜀박질하는 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무기력하게 숨을 들이쉬자 꿉꿉한 냄새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피부에 와 닿는 습기가 찝찝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땐 내 주위를 빼곡히 둘러싼 분노와 슬픔이 사라지길 바랐다.

***

나도 모르게 제이든에게 대들은 이후 우리 사이에는 외줄 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덕분에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사이에 낀 할리만 죽어 나갔다.

반면, 폭풍 전야 속에서도 연회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달력은 어느새 건국 기념일 당일을 가리켰다.

나는 얼마 전 아로네가 선물해 준 드레스를 찬찬히 살폈다. 드레스는 또 언제 고른 거야?

내가 보는 앞에서 제이든에게 폭언을 들었던 날 이후, 아로네는 마치 그 일을 기억에서 도려내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상처에 휘둘리지 않는 것은 좋은 징후이다. 하지만 그것이 망각이 아니라 회피라면 문제가 된다. 아로네의 경우는 명백히 후자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드레스를 입었다. 길게 늘여 뜨려진 치마는 오묘한 연두색으로 시작하여 아래로 내려갈수록 짙게 물들었다. 마치 오로라를 그대로 옮겨 온 것 같았다.

나는 대강 반묶음 머리를 하고 연분홍색 립스틱을 옅게 발랐다.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니 이 정도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할리와 미리 연회장에 입장했다. 황후가 심혈을 기울여 계획한 연회는 아로네의 성인식과 결이 달랐다. 아로네가 짠 연회의 퀄리티가 구리다는 의미가 아니라 황궁의 재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셌다는 얘기다.

할리가 샴페인을 건넸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연회장을 살폈다. 연회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지금 홀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비교적 계급이 낮은 귀족들이었다. 그들이 우리를 보며 숙덕거렸다.

“황태자 전하는 평민이 취향인가 봐.”

매일 듣는 말이라서 이젠 별생각도 없었다. 나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테라스 근처는 비교적 조용했다. 나는 샴페인을 홀짝이며 생각했다. 제이든이 과연 아로네와 함께 입장할까?

흘긋 할리를 살피니 그는 뽕을 뽑겠다는 기세로 샴페인을 싹쓸이하고 있었다. 알코올 쓰레기인 할리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까 걱정되어 그의 손에서 잔을 빼앗았다.

“온갖 계급의 사람들이 다 모이는 여기서 술주정 부리려고 작정했어?”

“그래도…….”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애가 감히 볼에 바람을 부풀렸다. 이런 게 살심이라는 걸까? 나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네 사랑니 내가 뽑아 주는 수가 있으니까 똑바로 해라…….”

“네.”

“네 잘못은 곧 내 잘못이거든? 앞으로 단 한 모금이라도 술 마시기만 해 봐. 아주 즐거운 일이 펼쳐질 테니까. 알겠어?”

나는 할리에게 똑똑히 경고하고 테라스에 들어갔다. 아는 사람이라곤 할리밖에 없는데 제이든이랑 아로네가 입장할 때까지 언제 기다리나 싶었다.

나는 난간에 기대고 빼곡히 늘어선 마차의 행렬을 멀거니 응시했다. 중간에 커튼 밖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고 할리의 동태를 살피자 우려와 달리 그는 희희낙락하며 디저트를 공략하고 있었다.

나도 한 태평하지만 할리만큼은 못 됐다. 정말 부러운 성격이다.

얼마나 멍을 때리고 있었을까. 밖에서 기다리던 이름이 들려왔다. 나는 황급히 나갔다.

“제이든 헤인 황태자 전하와 아로네 님프 공녀님 입장하십니다!”

연미복을 차려입은 제이든과 고결한 분위기의 황금색 드레스를 입은 아로네는 황후의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보다 눈부셨다.

나는 철없는 제이든이 연회에 오기 싫다며 도망가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어느새 다가온 할리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와…….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까 두 분 겉모습만큼은 정말 완벽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사람들이 완벽한 한 쌍을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건너편에 있는 통통한 체격의 남자가 입을 떡 벌리고 아로네의 궤적을 쫓았다. 그 눈빛이 어쩐지 꺼림칙해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쟤 이름이 뭐더라. 미친놈? 민칠론? 뭐 비슷한 거였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