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자주 와 봐서 알겠지만 내가 데려다줄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 곧 있으면 제이든 님이 내려올 거야.”
나는 응접실 의자에 신시아를 앉히고 등을 돌렸다. 신시아를 보고 좋다고 실실거릴 제이든을 마주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오늘은 대망의 외근하는 날이다. 가끔씩 제이든은 평범한 귀족처럼 분장하고 시찰하러 나갔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오늘 가야 하는 지역은 다행스럽게도 황궁에서 별로 멀지 않았다. 제이든은 보좌관 두 명과 기사 세 명만 대동하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황태자라는 직급을 고려하면 지나치게 안일한 경비였지만, 유일한 황위 계승권자인 제이든을 죽이려는 세력이 거의 부재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딱 적당한 수이기도 했다.
때문에 나는 제이든과 같은 마차를 타야 했다. 그게 전부이던가? 나와 제이든은 무릎을 마주하고 앉았다. 계속되는 정적에 숨이 턱 막혔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창밖을 구경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할리는 능숙하게 멍을 때리며 시간을 죽였고, 제이든은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잘도 업무를 보았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가 말을 걸지는 않겠구나 싶어서 자세를 조금 편하게 하려는데, 별안간 제이든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고 보니 신시아는 네가 내 보좌관이 됐다는 소식을 그날 처음 안 모양이던데.”
“……네.”
“분명 친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제이든이 동공의 흔들림, 눈가의 떨림, 입가의 경련 등 내 안면 근육의 모든 움직임을 예리하게 주시했다. 일단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분명 그랬죠.”
“공녀한테는 바로 알렸을 테고…….”
“네.”
“근데 신시아는 아니다?”
“…….”
“갖고 노는 건가?”
할리의 얼굴에 긴장이 스쳤다. 나는 언뜻 위협적인 제이든의 눈을 가만히 주시했다.
도로 위 자갈을 밟아 마차가 덜컹거리는 소리, 창문 밖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어 대는 소리, 가판대에서 호객하는 상인들의 외침, 깔깔대는 아이들의 웃음…….
모든 소음이 순간 사그라졌다가 참참이 소리를 키워 나갔다. 나는 최선을 다해 비웃었다.
“예? 그럴 리가요.”
“공녀는 신시아를 경멸해. 그리고 넌 공녀의 최측근이지.”
그 말을 즉슨 내가 아로네와 너무나도 친한 나머지 그의 경멸까지 닮아 버리진 않았냐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결국 신시아를 상처 주려는 속셈이 아니냐고, 제이든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나는 어이없다는 심정을 차마 숨기지 못했다. 참나, 쟤는 신시아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나. 만약 내가 진짜 헛된 마음을 먹고 신시아한테 접근했다 해도 걔가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그걸 못 알아챘겠어?
제이든 쟤는 자기가 무슨 신시아 남자 친구도 아니면서 오지랖이 오졌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흠, 그거야 아로네 얘기이고요. 제 이름은 아로네가 아니라 혜라인데요? 그리고 최측근인 제가 보기에 아로네가 신시아를 경멸하지 않게 된 지 꽤 오래됐는데……. 생각보다 소식통이 느리시네요.”
난 진심이었는데 제이든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헛소리를 하는 걸로 보아 결국엔 너도 공녀의 편이라는 거군.”
“뭐, 믿고 싶은 대로 믿으세요.”
나는 아쉬울 것 하나도 없다는 양 어깨를 으쓱였다. 제이든은 내가 못마땅한지 이맛살을 구겼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든이 제이든 하는 거? 이젠 익숙했다. 그는 내게 유독 묘하게 박하게 굴었다. 아무리 그가 능력 만능주의자라 할지언정 ‘아로네 절친’ 타이틀은 너무나도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그다지 억울하지는 않다. 아로네가 아카데미에 다녔을 시절 신시아를 괴롭혔던 것은 사실이고, 보통 사람은 끼리끼리 놀기 마련이니 어떻게 보면 제이든이 내게 의구심을 품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딱히 그 의구심을 풀어 주고 싶다는 마음은 안 들었다. 고막이 터져라 외쳐도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걸러 들을 텐데 구태여 힘을 뺄 필요가 있을까?
***
우리는 수도 발할라 옆에 위치한 이노피아에 도착했다. 이노피아는 수도를 바로 옆에 두고서도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지역이었다.
신기하게도 두 지역 사이의 경계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명확하게 양분되었다. 부자 거리가 늘어선 발할라와 폐허촌인 이노피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
낡아 쓰러질 것 같은 판자 아래에서 어린아이들이 더러운 땟국물을 묻히고 구걸했다. 옷이라고 걸친 천은 군데군데 구멍이 휑하게 나 있었고, 몸에는 출처 모를 생채기가 가득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몽땅 꺼내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조하게 눈알을 굴리는 나를 눈치채고 할리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가깝게 붙어서 속삭였다.
“주면 안 돼. 그럼 떼거리로 몰려올 거야.”
“……나도 알아. 다만 마음이 쓰여서 그렇지.”
제이든이 장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언제까지고 이노피아를 범죄 소굴로 방치할 수 없어 이곳을 갈아엎기 전 사전 조사차 방문한 것이다.
그럼 기존 거주민은 어떻게 되는 걸까?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내쫓기는 걸까?
나는 멍하니 생각하며 누군가가 거리에 싸질러 놓은 오물을 빙 돌아 걸었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일평생 이처럼 구역질 나고 기분 더러워지는 곳은 처음 와 봤다.
악취가 쌓이고 쌓여 공기에서조차 썩은 내가 났고, 술과 마약에 취한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거리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정신이 깨어 있는 거지들은 돈 좀 있어 보이는 제이든을 사생팬처럼 따라다녔다.
먹잇감 노리는 짐승의 눈빛을 띤 무리들을 보니 우람한 덩치의 기사들이 없었다면 진작 전 재산을 강탈당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안도감을 느끼던 찰나, 나는 갑자기 몸통 박치기를 당하고 바닥에 엎어졌다.
“으악!”
다행히도 오물은 피했지만, 온갖 쓰레기의 잔해에 손바닥이 긁혀 핏방울이 송송 솟았다.
할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나를 일으켰고, 기사들은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제이든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난 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나 관전했다.
나는 사건의 주범을 홱 노려보았다. 그러자 일곱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아이가 얼굴을 새하얗게 물들이고 연거푸 허리를 접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제대로 봤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다짜고짜 뛰어나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목숨만 살려 주시면 무슨 처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제발…….”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아이는 내가 금방이라도 자신의 목을 칠 것처럼 굽실거렸다. 나는 머리끝까지 솟았던 분노가 휘발되는 것을 느끼며 주의 깊게 아이의 행색을 살폈다.
오랫동안 샤워를 하지 않은 사람처럼 머리카락에 기름기가 좔좔 흘렀다. 드러난 살갗은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와 멍 자국으로 도배되었고, 뺨을 맞았는지 입술이 부르터 있었다.
한눈에 봐도 체구가 작고 앙상했다. 잘 못 먹고 자란 티가 너무 나서 정확한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저토록 어린아이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도 포기하고 무릎을 꿇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저 아이가 무릎까지 꿇을 정도로 잘못했던가? 나는 아이가 제이든을 티 안 나게 흘깃거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설마 제이든이 귀족처럼 보여서 그러는 거야? 귀족의 수하를 다치게 해서 벌을 내릴까 봐?’
이게 신분제 사회의 실태라 생각하니 바다에 빠진 것처럼 숨이 막혔다.
나는 허리를 숙여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자비를 구걸하고 있었다. 그 눈빛이 어쩐지 낯익어서 묘한 감정이 들었다.
“얘, 이름이 뭐니?”
“……로빈이에요, 아가씨.”
“집은 어디고?”
최대한 친절한 어조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여전히 두려워했다. 주소를 묻자 아이가 절망적인 어조로 말했다.
“지, 집이요? 동생들이 저만 바라보며 살고 있어요! 아버지는 도박만 하더니 어느 날 집을 나가 버렸고 어머니는 편찮으시단 말이에요……. 잘못은 제가 했으니 벌은 제발 제게만 내려 주세요. 뭐든지 할게요…….”
“그런 거 아니니까 너무 겁먹을 필요 없어, 로빈. 나는 절대로 너를 벌하지 않을 거거든. 이 상처? 약 몇 번만 바르면 다 나아. 나를 포함한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네게 책임을 묻지 않을 거야. 그렇죠, ……제이든 님?”
제이든이 알아서 하라는 듯이 팔짱을 꼈다. 이 상황을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참 어린 애가 별것 아닌 일로 목숨이 날아갈까 봐 벌벌 떨고 있는 이 상황을 태연하게 구경하는 제이든이 천하의 냉혹한 같았다.
뒤통수에 박히는 시선을 생각하면, 그는 이 상황 자체보다는 내 반응이 더 궁금한 것도 같았다. 어긋난 우선순위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도통 모르겠다.
로빈은 내 말을 쉽사리 믿지 못했다.
“……정말요?”
“괜찮아. 정 네 마음이 안 놓인다면 벌 대신 네 이야기를 해 줄래? 사실 우리는 이노피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자 이곳에 방문한 거거든.”
나는 인내심 있게 로빈을 기다렸다. 그가 잠시 고민하다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저희 앞집에 사는 남자가 있어요. 빅터는 술만 마시면 난폭해지는데 그때마다 편찮으신 어머니와 동생들밖에 없는 저희 집에 쳐들어와서 난동을 부려요. 술병이 깨지고, 살림살이들이 박살 나고, 동생들은 울고……. 막을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여기선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빅터가 아침부터 술을 마셨고…….”
“너희 집에 침입했구나.”
나는 험한 말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로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울먹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