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나는 앞으로 할리와 잘 지낼 것을 다짐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얼마 전 우연히 제이든과 함께 마주쳤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게다가 할리와 나는 동갑이었다. 이외에도 공통점이 참 많았는데 일단 둘 다 평민이고, 가진 것이 제 한 몸 말고는 아무것도 없으며, 성격이 단순했다.
그러니 개싸가지인 제이든 밑에서 일할 수 있는 거지. 예민한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제이든의 보좌관이라는 극한 직업을 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 욕하는 건 귀신같이 알아채는 제이든이 벌컥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세를 바로 하고 일하는 척했다.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제이든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오늘은 다들 이만 퇴근해.”
“헉, 넵.”
나와 할리는 허겁지겁 짐을 싸고 혹여 제이든이 도로 말을 거둘까 봐 헐레벌떡 황태자 궁을 나왔다. 출발 드림팀의 한 장면처럼 손발이 척척 맞아 제이든으로부터 달아난 우리의 모습이 코미디 같았다.
내가 먼저 낄낄거리자 할리도 배꼽을 잡고 웃어 댔다. 눈물까지 흘리며 경박하게 깔깔대는 할리의 웃음소리가 우스꽝스러워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데, 별안간 유레카가 찾아왔다.
“헐? 찾았다, 내 소울메이트.”
할리가 토끼 눈을 하고 반문했다.
“소울메이트?”
아 맞다. 아로네가 하도 찰떡같이 외래어를 이해해서 무심코 다른 사람도 그럴 거라 생각해 버렸다.
“너랑 나랑 완전 잘 맞을 것 같다는 뜻이야.”
할리가 반색하며 말했다.
“와, 너도 느꼈구나!”
내가 씩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자 할리가 홀린 듯이 하이파이브를 했다.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사이좋게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앞으로 출퇴근을 같이하는 것은 물론 제이든으로부터 같이 살아남자고 서로 약속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새로운 보좌관이 됐는지 알겠다. 물론 내 능력과 자기 PR도 있었겠지만, 내가 할리와 일란성 쌍둥이처럼 똑같은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제이든 그놈. 사람으로서는 영 꽝이었지만 인재 고르는 능력은 좋은 것 같다.
《제5장: 빙글빙글 돌아가는 보좌관의 일상》
JMT공금
나는 황태자 궁에서의 첫날을 무사히 마치자마자 아로네에게 편지를 부쳤다. 답장은 다음 날 점심시간 즈음에 도착했다.
「친애하는 혜라에게.
모순적이지 않니? 제이든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네가 하루 종일 그 애 곁에 있게 됐고, 나는 언제나 미리 약속을 잡고 만나야 한다는 것이.
소식을 전하면서 별 상스러운 욕을 한 것치고는 생각보다 잘 적응한 거 같아서 마음이 놓인다.
일전에 날 설득하면서 네가 그랬지. 앞으로 독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네가 남다른 애라는 걸 알았어. 불과 한 분기가 지나기도 전에 벌써 그만한 위치에 올라가다니. 앞으로 네가 또 어떤 일들을 해낼지 기대가 되네. 언제나 응원할게.
참, 이번 주말에 한 번 와. 새로 들어온 주방장 솜씨가 아주 좋거든.
-애정을 담아 아로네가.」
나는 피식 웃고선 편지를 가방 속에 고이 보관했다. 맞은편에서 샌드위치를 와구와구 먹고 있는 할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쟤는 입가에 소스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는 거 알까?
조금 애잔해져서 나는 티슈로 그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그때, 제이든이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났다.
“식사는 다 했겠지?”
“헉, 저는 아직…….”
“뭐? 그동안 뭘 한 거야?”
나는 쭈뼛쭈뼛 손을 들어 올렸다가 싸늘한 눈초리를 받고 바로 음식을 치웠다. 에이 씨, 아직 다 못 먹었는데.
남은 샌드위치를 트레이에 올려놓고 바깥으로 빼놓았다. 그렇게 놔두면 곧 시종이 알아서 가져갈 것이다.
나는 할리더러 테이블을 치우라고 시키고 사무실 창문을 열어 공기를 환기시켰다. 아, 오늘 점심 메뉴 짱이었는데. 제이든 쟤는 밥 먹는 시간 가지고도 뭐라고 하냐. 하여간 쪼잔한 놈.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아쉬운 대로 커피를 쭉 들이켰다. 한국에서는 쓰다고 공부할 때만 먹던 것을 여기에 와선 생수처럼 마셨다. 어른의 삶이란 이런 걸까?
“1시간 내로 이것 먼저 처리해서 가져와.”
“네…….”
저 망할 것. 제이든이 누가 봐도 1시간 내로 처리하지 못할 양의 양피지들을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길쭉한 다리를 곧게 펴고 모델처럼 걸어가는 그의 뒤통수를 한 번만 갈길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제이든이 문을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자 할리가 초코바를 던져 주었다. 나는 잽싸게 잡아채고 단번에 껍질을 벗겨 내 우적우적 씹었다.
상사만 아니었으면 콱 씨.
나는 문을 향해 중지를 쳐들었다. 할리가 내 뜻 모를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업무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내가 손을 내린 것은 돌연 노크 소리가 울렸을 때였다.
“황태자님 앞으로 온 편지들입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나는 시종이 가져다준 편지 더미를 챙겼다. 급서를 제외하고 우리 사무실 주소로 온 편지는 3시간에 한 번씩 한꺼번에 배달되었다. 그때그때 받기엔 오는 편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 우리는 제이든의 업무를 보조하고 일정을 조율하고 회의 자료를 정리하는 일 외에도 그의 개인적 용무도 처리했다.
예컨대 내가 발신인 란에 신시아 이름이 적힌 편지를 제이든에게 전달해 주자 그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내게 다과상을 준비하라 명령하는 것처럼 말이다.
“3시간 뒤에 신시아가 올 거야. 시간 맞춰서 준비시켜 놔.”
“……디저트 메뉴는 알아서 준비할까요?”
아, 저 똥통에 빠져 죽을 놈. 바빠 죽겠는데 신시아 만날 시간은 있냐?
어쩔 수 없이 눈빛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제이든은 내 반응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유려하게 사인을 휘갈기다가, 내 굳은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가 오만하게 자세를 고쳐 앉고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깃펜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휘청거렸다.
“주방장에게 말하면 알아서 할 거야.”
“알겠습니다.”
주방장이 알아서 디저트를 내올 정도로 신시아가 많이 궁을 오갔다는 의미인가. 도대체 언제부터 왔던 거야?
문턱을 넘는데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일하는 도중에 사적인 감정을 자꾸 섞고 싶지 않았지만 나도 인간인 이상 자꾸만 속이 울컥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아로네가 얽혀 있는 일에만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왤까. 그 애가 모든 게 사라진 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라서?
열 뻗친 표정을 보고 할리가 무슨 일이냐고 입을 벙긋댔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주방을 찾았다.
***
진저리나게 많은 문서를 처리하고, 사인을 받고, 간헐적으로 심부름을 하다 보니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신시아가 오기 10분 전이었다.
나는 메모지 한 장을 구겨서 할리에게 던졌다. 엎드려 자는 건지 업무를 보는 건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할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른쪽 뺨에 잉크 자국이 지저분하게 묻어 있었다.
나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야, 신시아 데리러 가야 해?”
“아, 맞다! 나 지금 하고 있는 거 있는데 네가 가 주면 안 될까?”
정말 가기 싫었지만 할리의 표정이 간곡해 보여서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으.”
도대체 신시아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지? 표정 관리를 못 할 게 분명해서 걱정이 됐다. 나는 한숨을 쉬며 나가려다가 우뚝 멈춰 서고 오른뺨을 툭툭 두드렸다.
“너 여기 잉크 묻음.”
“아…… 고마워.”
할리가 소매로 뺨을 벅벅 문질렀다. 어휴, 저 손 많이 가는 놈. 나는 티슈를 물에 적셔 그에게 건넸다. 그러다 제이든의 방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후다닥 사무실을 나왔다.
단정하게 유니폼을 차려입은 하녀들이 바쁘게 복도를 오갔다. 나는 한껏 늑장을 부리며 걸었다.
한참 뒤 정문에 도착했을 때, 타이밍 좋게도 대여 전문 업체의 문양이 달린 마차가 시폰이 바닥에 내려앉듯 부드럽게 멈추어 섰다.
마부가 재빠르게 내려 문을 열자 유채꽃을 꼭 닮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신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긴 머리를 한쪽으로 가지런히 땋아 내리고 사이사이에 매화꽃을 꽂아 장식한 그 애의 모습은 봄의 여신처럼 화사했다.
채도 높은 옷차림과 달리 완벽하게 무표정하던 신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멋쩍어서 괜히 어깨를 으쓱였다. 잠시간 본인의 시력을 의심하는 듯싶던 신시아는 기겁을 하며 단숨에 달려왔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승진했거든. 이제 제이든…… 님의 보좌관으로 일해.”
나는 이 또한 업무의 일환임을 상기하며 신시아를 에스코트했다. 신시아가 무척 불편한 기색으로 뒤따랐다.
“도대체 언제부터?”
“얼마 안 됐어.”
“……그렇구나.”
우리의 마지막 대화가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한다. 주체의 의지가 상실된 강제적 만남에 죄를 부가하는 건 좀 너무한 것 같다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봐주면 안 되겠냐는 신시아의 바람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태자 궁에서 보는 신시아가 반가울 리가 있나?
숨 막히는 침묵이 계속되었다. 신시아가 한참 동안 고심하다가 머뭇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때…… 기억해?”
“응.”
“내가 했던 말, 믿는 거지?”
나는 응접실 문을 여는 찰나에 모든 사색을 마치고 신시아를 직시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응, 믿어. 근데 옛날 정도의 사이로 돌아가려면 나한테 조금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아.”
신시아의 눈동자가 작은 희망을 품고 반짝였다. 나는 조금 착잡한 마음으로 그 빛을 잠깐 바라보다가 박수를 짝 침으로써 묘한 분위기를 끊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