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하…….”
본인의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어쩔 수 없는 행위에도 죄를 부가해야 할까?
제이든이 신시아를 좋아하고, 그 마음이 아로네에게 구설수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시아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맞는 걸까?
신시아는 그저 황태자에게 끌려다녔을 뿐인데, 그 이유 하나로 관계를 끊는 게 정말 옳은 짓일까?
아마도 아니. 나는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 주, 나는 재정부 직원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 속에서 출근했다.
안 그래도 입사와 동시에 신상이 털려서 내 얼굴과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간첩으로 취급받던 판국이었는데 앞으론 또 얼마나 주목받는 삶을 살아야 할까 눈앞이 아득했다.
그 기분은 정말 당해 본 사람만 이해할 것이다.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져서 순간 내가 백화점에 방문한 백 번째 손님이라도 된 줄 알았다.
나만 모르는 행사가 있는 줄 알고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꽂혀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그렇다. 나에겐 관종의 싹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나 많은 관심을 한 번에 받으면 식은땀이 뻘뻘 났다.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바로 이런 기분이었을까? 얼굴이 달아오르고 등 뒤에서 땀줄기가 흘렀다.
결국 나는 사무실까지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내 22년 인생 중 가장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옆옆 사무실에서 일하는 그레이스를 시작으로, 오고 가며 얼굴을 익혔던 사람들이 틈날 때마다 우리 사무실에 들러 축하 인사와 소박한 간식거리 따위를 들고 왔다.
그런 마음 씀씀이가 너무나도 고마웠지만, 내가 어떤 대단한 일을 했건 업무량은 줄어들지 않았기에 10분 간격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종국엔 조금 성가셨다.
당사자인 나도 이렇게나 짜증 나는데 상사인 스칼렛은 오죽할까 싶어서 그의 눈치를 살피니 철없는 스칼렛은 그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물단지 보듯 바라볼 뿐이었다. 아이고, 환장하겠네!
점심시간에도 철장 속 원숭이 구경하기 놀이는 멈추지 않았다.
그쯤 되니 해탈해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묵묵히 밥을 먹고 있는데, 공적을 세운 부하 직원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자랑스러웠던 스칼렛이 별안간 의자를 밟고 일어났다.
스칼렛의 거친 생각과 내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
스칼렛이 커피 잔을 높게 쳐들었다. 나는 그가 하려는 짓을 깨닫고 눈을 질끈 감았다. 신을 믿지는 않지만, 만약 날 보고 있다면 곧 쪽팔려서 죽을지도 모르는 이 가련한 중생을 구제해 주소서…….
“자자! 다들 알다시피 우리 황실 예산 관리 1팀의 혜라가 어마어마한 일을 해냈죠! 다 같이 박수 한 번 줍시다!”
“아…… 팀장님 제발…….”
양송이 수프에 얼굴을 파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험한 말이 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내 이름을 외쳤다. 언젠가 딱 한 번 야구장에 갔을 때 이런 소리를 들었었다.
나는 울면서 웃었다. 어쩌다 또라이 소굴에 들어오게 된 걸까? 적성에 안 맞더라도 차라리 다른 곳을 고를걸…….
사람들은 쳇바퀴 굴러가듯 따분한 삶에 혜성처럼 떠오른 화젯거리에 열광했다. 그래, 내가 밤을 새서 리스트를 완성한 것은 가짜 광기였다. 헹가래를 치려고 슬금슬금 다가오는 저들이 진짜 광기다.
나는 황급히 식판을 버리고 뛰었다. 내가 지나가는 곳마다 파도타기가 일었다. 미친 새끼들 진짜……. 이제는 공포심이 들 정도다. 나는 좀비에게 뒤쫓기는 심정으로 출구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다행스럽게도 진짜 좀비는 아니었던 사람들은 도망가는 나를 굳이 뒤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숨을 돌리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언젠가 꼭 스칼렛에게 빅엿을 선사하기로 다짐했다.
남자 한 명이 식당에 들어오려고 문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에게 순서를 양보하려고 고개를 까닥이는데 적어도 열 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갑자기 우르르 뛰쳐나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손잡이를 더듬거렸다.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이 우렁차게 부르짖었다.
“혜라 씨! 부디 저희 부서로 와 주세요! 행정부 모든 직원의 소원입니다. 제발!”
그러자 뒤에 있던 사람이 선두에 있던 사람을 밀치고 소리쳤다.
“아니요! 행정부보다 감사원이 훨씬 혜라 씨를 필요로 합니다! 높은 월급, 가족 같은 분위기! 저랑 천천히 얘기를 나눠 보자고요!”
“비키세요, 제가 먼저입니다!”
“무슨 소리? 혜라 씨는 무조건 우리 부서가 데리고 갈 거예요!”
사람들은 엎치락뒤치락하더니 누군가가 ‘먼저 잡는 사람이 승자!’라고 외치자 그 말을 방아쇠로 무서운 기세로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몸이 굳어 버렸는지 튀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바깥에 있던 사람이 문을 활짝 열고 나를 잡아당겼다. 이놈은 또 뭔가 하고 쳐다보자, 남자가 침착하게 말했다.
“저는 황제 폐하의 보좌관 윌터입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모시러 왔습니다. 저와 같이 가시죠.”
올 것이 왔구나. 황제를 언급하자마자 얼었던 몸이 순식간에 녹았다. 나는 남자의 팔을 박력 있게 잡고 소리쳤다.
“네! 그럼 우리 좀 뜁시다!”
***
나는 죽어라 뛰는 와중에도 남자를 관찰했다. 남자는 30대 초반 즈음 되어 보였는데 한쪽으로 깔끔하게 넘겨진 머리칼이 깐깐한 성미를 짐작게 해 주었다. 역시나 셔츠의 단추는 끝까지 채워진 채였고, 강하게 틀어잡은 팔뚝에는 근육이 하나도 없었다.
남자는 잠깐 뛰었다고 숨을 헉헉거렸다. 나는 힐끔 뒤를 돌아보고 손에 힘을 풀었다. 남자가 허리를 숙이며 숨을 골랐다. 운동이라곤 안 하는 샌님인가 보지? 나는 심심찮은 사과를 건넸다.
“죄송해요. 잡히면 끝도 없이 시달릴 것 같아서 본의 아니게 무례를 저질렀네요.”
“헉, 도대체가, 으헉, 사람이, 헥, 어쩜 그리…….”
“설마 이걸로 폐하께서 저를 문책하진 않으시겠죠?”
남자는 헉헉거리느라 내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멋쩍어져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남자가 손수건을 홱 잡아채고 나를 흘기며 앞장섰다.
오고 가며 스치듯 본 적은 많지만, 제대로 궁전을 구경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절로 눈이 휘둥그레 떠지고 고개가 제멋대로 돌아가려 했지만, 촌티나 보일까 봐 애써 몸을 경직시켰다.
황제가 별거 아닌 이유로 나를 불렀을 리 없다. 분명 사람들이 하루 종일 질리도록 떠든 리스트 때문이겠지?
윤이 나는 대리석 바닥이 창창한 내 출셋길처럼 보였다. 나는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황제가 내게 어떤 보상을 내릴까 상상했다.
우리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끝도 없이 늘어진 복도를 지났다. 한눈에 봐도 값비싸 보이는 조각상과 풍경화들이 드넓은 공간을 채웠다. 덕분에 나의 행복한 망상은 더욱 크기를 부풀렸다. 아, 이것이 바로 황실의 재력인가……!
남자는 거대한 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화려하게 세공된 문을 보자니 조금 긴장이 되었다.
“황제 폐하께 재정부의 혜라 양이 도착했다고 전하게.”
남자가 우람한 덩치의 기사에게 그리 고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곤 문 너머로 사라졌다. 단호하게 닫혔던 문은 내가 노래 하나를 부르기도 전에 열렸다.
휘황찬란한 내부를 보는 순간, 한순간에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밀려왔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요동치는 심장을 잠재웠다. 온 신경을 떨지 않는 데에 집중하느라 남자가 무어라 말하는 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길고 긴 카펫을 걸었다. 장미처럼 붉은 카펫의 끝에는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는 황제가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자리에는 제이든 또한 있었다.
처음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제이든이 알듯 말듯 미묘하게 웃었다. 이상하게도 그 미소에 긴장이 턱 풀렸다. 나는 치맛자락을 잡고 예법에 맞추어 인사했다.
“제국의 가장 높으신 분들을 뵙습니다. 혜라라고 합니다.”
아로네가 속성으로 가르쳐 준 보람이 여기서 발했다. 그때 풀집중해서 안 들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았다. 예리하게 주시하는 두 쌍의 눈빛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황제가 한참 동안 뜸을 들이다가 내 인내심이 바닥날 무렵 물었다. 군대의 총사령관처럼 위엄 있으면서도 귀족답게 오만한 어조였다. 나는 비슷한 느낌의 또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자네가 오랫동안 묻혀 있던 횡령 사실을 밝혀냈다지?”
“그렇습니다.”
“혼자서 모든 조사를 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네.”
황제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찰나에 그는 냉소했다.
황제는 나이가 꽤 들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살기와 첨예함을 가지고 있었다.
마디가 굵은 손으로 각진 턱을 쓸어내리는 모습이 누아르물의 한 장면 같아서 조금 오한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황제라도 똥오줌을 비롯해 방귀와 트림을 모두 다 할 것이라 생각하니 순식간에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아, 왜 항상 나는 이런 방법으로 긴장을 푸는 거지?
어쨌든 그제야 나는 여유롭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황제가 의자 손잡이 위로 손가락을 두드리며 고심하다가 마침내 결정했다는 듯 말했다.
“풋내기가 제법이군. 좋아, 자네의 공로를 인정하여 상을 내리지. 무엇을 원하나?”
내가 해석한 게 맞다면, 황제는 금은보화든 뭐든 원하는 걸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풋내기에게 그런 파격적인 선언을 하다니. 아무래도 내가 정말 큰일을 해 내긴 했나 보다. 내 손안에 뭐가 떨어질까 기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