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38)

<35화>

방을 한 바퀴 빙 돌며 촛불을 껐더니 형편없는 폐활량이 소리를 질렀고, 코밑에 이산화탄소 냄새가 맴돌았다. 나는 콧바람을 흥흥 불어 안 좋은 공기를 내보냈다.

몸통만 한 베개를 끌어안고 비단처럼 부드러운 이불을 덮자 숨 쉬는 것만큼 쉽게 졸음이 찾아왔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곧 다가올 암전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때, 몽롱한 정신을 뚫고 이질적인 소음이 울렸다. 무시하고 눈을 감았지만, 소리는 점점 선명해졌다.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염병할, 도대체 뭐야!”

딱 삘 받았을 때 자야 하는데 누가 날 방해하는 거야? 갑자기 끊겨 버린 수면 리듬에 잔뜩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촛대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유리창 가까이에 무언가가 떠다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비명을 지르려는 입을 간신히 틀어막고 여차하면 휘두를 생각으로 촛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무언가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기이한 생물체였다. 상반신은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하반신은 물고기 지느러미로 이루어져 있었다.

인어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 작은 생명체의 몸은 달빛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렇게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지중해 바다의 색을 띠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미소 지으며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것 같았다.

아씨, 모르는 사람은 따라가면 안 되는데. 찰나에 불과한 순간 동안 저울이 수없이 왔다 갔다 했지만, 결국 나는 본능을 따르기로 했다. 거부하기엔 저 기이한 생명체가 너무 궁금했다.

피터 팬처럼 나를 신비의 세계로 인도해 주려는 걸까 하는 동심에 젖은 생각도 조금 들었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인어가 방긋 웃고 서커스를 하듯 공중을 유영하다가 힘차게 아래로 헤엄쳐 내려갔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관람하다 식겁해서 테라스 난간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어깨에 인어를 얹고 해맑게 손을 흔드는 신시아를 발견했다.

“뭐야.”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주말은 오롯이 아로네에게 반납한 데다가 최근 몇 주는 아예 오지 않았기 때문에 신시아와 단둘이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고.

“내려올 수 있어?”

나는 침묵했고, 신시아가 울상을 지었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는데 그 애의 시무룩한 얼굴이 왜 그렇게 눈에 잘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밤이 늦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손짓 몸짓을 다 해 가며 신시아에게 거기서 딱 기다리라고 신호했다.

빌어먹게도 신시아가 너무 순하게 생겨서 단호하게 거절할 수 없었다. 쟤가 나한테 조금이라도 못살게 굴었다면 이렇게 순순하게 굴진 않았을 텐데.

나는 무슨 말을 할지 속으로 정리하며 신시아 앞에 섰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일단 궁금증 해소를 먼저 하기로 했다. 나는 턱짓으로 신시아 어깨 위에 앉아 방긋거리는 인어를 가리켰다.

“밤에 만나는 데 로망이라도 있어? 왜 항상 이런 시간에 불러내는 거야. 그리고 저…… 그건 뭐고.”

신시아가 자연스레 나를 정원 쪽으로 이끌며 말했다.

“아, 얘? 물의 정령이야.”

“……그래?”

솔직히 자세히 봐도 되냐고 묻고 싶었다. 이곳에 오고 처음으로 보는 판타지적인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마법 도구는 질리도록 봤다. 하지만 작동 원리만 다를 뿐이지 사용법이나 외관은 한국과 비슷해서 딱히 감명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앞으로 할 말을 생각하면 호들갑을 자제할 필요가 있어서 말을 아꼈다. 그렇지만 나도 모르게 정령에게 굴러가는 시선까지는 막지 못했다.

다소 불편한 정적 속에서 우리는 벤치에 앉았다. 문득 밀려오는 졸음에 고개를 뒤로 젖히자 둥글게 차오른 보름달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우리만을 위한 스포트라이트처럼 달빛이 정원을 은은하게 내리비추었다.

나는 멍하니 달에 난 오점을 바라보다가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에 턱을 얹었다. 가만히 나를 관찰하는 신시아의 눈길이 느껴졌다. 그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동안 왜 답장 안 해 줬어?”

“…….”

아로네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고, 사실 그동안 신시아와도 주기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었다. 하지만 제이든이 아주 충격적인 정보를 알려 준 그날부터 나는 일방적으로 그 교류를 끊어 버렸다.

재잘거리듯 활기찬 글을 보니 도저히 답장을 할 수 없었던 탓이다. 물론 그냥 대놓고 물어보면 쉽게 해결될 문제였다. 제이든한테 이런 얘기를 들었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냐고, 난 네가 이해가 안 된다고.

그래, 쉬운 길을 알았다. 그러나 결국 하지 못했다. 돌아올 답이 조금 두렵기도 했고, 한창 바쁠 때 다른 일로 기력을 소진하고 싶지 않았기에. ……무책임한 행동이었다는 건 나도 안다.

돌아오지 않는 답장에도 불구하고 신시아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편지를 보냈다. 뜯지 않은 봉투는 점점 쌓여 가 나중에는 그 두께가 사전 두 개를 합친 것보다 더 두꺼워질 정도였다.

‘그렇게 미루다 보니 결국 여기까지 와 버렸네.’

불현듯 내 행동이 누군가와 겹쳐 보였다. 상대의 마음을 알면서도 꿋꿋이 무시한다는 점에서 제이든과 내가 다를 게 뭐가 있지?

몰아치는 환멸감에 질식할 것 같았다. 아로네와 신시아, 제이든, 그리고 나. 서로를 얽은 실이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꼬여서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차라리 그냥 다 포기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제이든과 엮이는 신시아가 불편했고, 나락이 분명한 미래를 열망하는 아로네가 이해되지 않았으며, 모든 관계의 구심점에 있는 제이든이 경솔하게 행동해서 짜증 났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화가 났다. 이래서 인간관계가 피곤해.

나는 차갑게 말했다.

“왜냐면 황태자가 너랑 주기적으로 만나 왔다고 말했거든.”

“그건…….”

신시아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나는 그 모습을 다소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제야 말하는 건데 아로네가 성인식을 치르던 날, 그때 너희 둘이 중간에 빠져나가서 노닥거리는 거 봤어. 아로네랑 같이.”

부러 뒷글자에 힘을 실었다. 신시아의 동공이 난기류에 흔들리는 비행기처럼 흔들렸다.

“…….”

“그래서 답장 안 했어. 곧 결혼한다는 사람이랑 도대체 왜 그랬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거든.”

고저 없는 어조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나는 해명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 빤히 눈을 마주 보았다.

신시아가 입을 뗐다가 다시 닫기를 한참 동안 반복했다. 달달 떨리는 손끝이 무의식적인 반응으로 보였다. 나는 그 모든 과정을 기다려 주었다.

신시아는 입술에 핏방울이 맺혔을 때 비로소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나도 당연히 나가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제이든이 너무 강경해서……. 매주 만나는 것도 같은 이유야. 제발 내 말 믿어 줘. 난 제이든한테 어떤 감정도 없어.”

두꺼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일그러진 얼굴이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처량했다. 나는 신시아가 진실을 말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적어도 신시아가 최악은 아니었음에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근데 상대방은 아니라는 거, 알고 있지?”

“……그래. 근데 그게 그렇게 중요해? 내가 정말 좋…….”

신시아가 몹시 억울해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의 말을 뚝 끊고 말했다.

“당연히 중요하지. 그 감정이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정말 몰라서 그래? 특히 아로네한테?”

신시아가 잠깐 숨을 멈추었다가 한숨 쉬듯 길게 호흡했다.

“……넌 왜 항상 그 애만 챙겨? 솔직히 말해서…… 네가 날 먼저 알았다면 내 편 들었을 거잖아.”

신시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발개진 눈가가 원망을 담고 나를 응시했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겹겹이 쌓아 온 서운함을 목도하고 잠시 말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반박했다.

“먼저 알고 말고 그런 건 상관없어. 내가 아로네를 먼저 알았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우리는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어. 네가 인내심 있게 내가 완전히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고, 그 일들이 없었다면 말이야. 내가 너랑 친하게 지내면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어 대겠어? 뻔하지. 아로네는 사람들 상상 속에서 또 버려질 거야. 난 그 꼴 못 봐.”

“……그래서, 이제 난 끝인 거야? 이렇게 허무하게?”

시체처럼 차가운 손가락이 애처롭게 내 손등을 건드렸다. 이 상황에도 저자세로 나오는 신시아가 답답해서 절로 언성이 올라갔다.

“……애초에 그냥 단호하게 싫다고 말할 순 없던 거야? 아무리 제이든이 극성맞아도 네가 별 난리를 치면 포기할 거 아니야. 너를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니까.”

신시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버석 마른 눈물 자국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혜라, 상대는 황태자야. 그에 반해 난? 아무리 천재 소리를 들어 봤자 결국 님프 가문에 빌붙어 사는 평민일 뿐이지. 내가 정말 별 난리를 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그런다 한들 그 제이든이 날 포기할 거라고 생각해?”

우습게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구름이 달을 가리며 짙은 어둠이 일순 드리웠다. 신시아가 내 손을 포개어 잡았다.

“맹세하건대 나 정말로 제이든 안 좋아하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우리 관계는 그저 형식적이었을 뿐이야. 네가 날 대했던 것보다 훨씬. 그러니까…… 제발 나 좀 봐주면 안 될까?”

“……넌 왜 항상.”

저 간절함이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숨이 턱 막혔다. 신시아는 흔들리는 내 마음을 눈치채고 종지부를 찍듯 선언했다.

“나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너야, 혜라.”

구름이 걷히며 달빛이 환하게 드리웠다. 나는 티 없이 맑은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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