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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34/138)

<34화>

내가 심상치 않은 사람인 거랑 따로 조사를 하는 거랑 도대체 뭔 연관성이 있지? 그날 처음 본 거면서? 나는 당연히 얼이 빠져서 반문했다.

“네?”

뒷조사는 대놓고 물어보지 못해 뒤에서 몰래 하는 조사를 의미한다. 따라서 뒷조사에는 무조건 특정한 전제가 따라붙는다.

상대방이 내게 악의 혹은 불건전한 의심을 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신상을 털릴 정도로 내가 제이든의 경계를 살 짓을 했던가? 아니면 제이든한테 편집증이 있나?

제이든이 성큼성큼 걸어와 코앞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파도가 수직으로 쏟아져 내렸다. 나는 익사하지 않기 위해 손발을 버둥거렸다.

“공녀가 아카데미에 퇴소하는 날 같이 있었다지. 맞나?”

아, 이제야 저 의심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알겠다. 데네브 너 이 새끼 다음에 마주치면 뒤졌어.

“맞아요.”

“그런데 이상하지……. 아카데미에 다니지도 않는 자네가 어떻게 그 경비가 삼엄한 곳에서 나왔을까? 그리고 왜 전국을 뒤져 봐도 자네 얼굴을 안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까?”

“…….”

“어때, 답이 궁금하지 않나?”

별로 안 궁금한데. 나는 능청스럽게 어깨만 으쓱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하는 말이 침묵보다 나은 것이어야만 한다.

내가 끝까지 입을 다물자 제이든은 알아서 결론을 내리고 말을 이었다.

“공녀가 신원 보장을 해 줬다, 이건가? 좋아. 그럼 그거 아나? 오늘 급서를 받았는데 몇십 년에 걸쳐 국세를 빼돌린 파렴치한 것들이 있다더군. 내가 알기론 수면 아래에 있던 것을 끄집어 올린 사람이 맹랑한 신입이었다던데. 이에 대해서 할 말 있나?”

이상하다. 공기가 축축하기는 했지만 아직 비는 쏟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번개와 태풍이 몰아치는 제이든의 심연을 마주한 순간 온몸이 비로 흠뻑 젖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전류 섞인 물방울이 살갗을 흘러내리며 찌릿했다.

“……와.”

이제야 알겠다. 애초에 제이든은 내 출신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물론 그 문제에 흥미를 느끼긴 하지만 아득바득 파헤칠 만큼 알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가 정말로 알고 싶었던 건 입사하자마자 폭주 기관차처럼 달리며 연달아 실적을 올리고, 베일에 싸여 있었던 비리를 홀로 밝혀낸 당돌하고 능력 있는 공무원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되지만 나름 칭찬하는 건가?

흥미 어린 얼굴이 보였다. 그 표정을 보자 으스스 오한이 들고 당장이라도 도주하고 싶었지만 나는 꾹 참고 일단 가식을 떨기로 했다.

“우연이었어요. 이제라도 밝혀낸 것이 다행이죠.”

“충분히 도움을 청할 수 있었을 텐데 왜 혼자서 했지?”

왜긴 왜야. 그래야 모든 공로를 내가 받으니까 그렇지.

“아실지 모르겠지만 재정부는 항상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어요. 제가 속한 팀은 저를 포함해서 단 두 명뿐이죠. 유난히 힘든 상황이라는 뜻이에요. 횡령 증거를 잡아내려면 옛날 자료부터 뒤져야 하는데 하루 종일 등골이 휘도록 일하는 제 상사한테 그럴 체력이 남아 있겠어요? 그러니 속도도 빠르고 가장 젊은 제가 힘쓰는 수밖에요.”

나는 성장 드라마 주인공이나 할 법한 말을 하고 환하게 웃었다. 어때, 내 정의롭고 선량한 연기 끝내주지? 왕년에 드라마 처돌이였던 짬밥이 여기서 나오네.

제이든이 인사 채용 면접관처럼 신중하게 내 심연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난 감정을 숨기는 것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고, 때문에 제이든은 그 어떤 가식의 증거도 찾지 못한 채 의미심장한 얼굴을 했다.

그 표정에서 내가 제이든 나름의 합격선에 충족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그런 거 필요 없어서 난감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작디작은 호의를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흠잡을 데 없는 대답이군. 만약 황제께서 그 공로를 인정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면 무어라 답할 건가?”

찰나의 순간 동안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제이든에 대한 혐오와 데네브에 대한 반감 중 뭐가 더 크지?

나는 면접 프리 패스용 표정을 꾸며 내고 말했다.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싶습니다. 더 큰 선을 위해서 말이죠.”

참나. 내가 생각해도 진짜 웃겼다.

제이든이 황당해서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보란 듯이 실소했다.

“소공작의 말이 맞군. 뱃속에 능구렁이가 백 마리쯤 들어 있나 봐.”

“예? 하지만 전 구렁이 무서워하는데요…….”

데네브, 넌 만나기만 해 봐. 진짜 제대로 조져 줄 거다. 하여간 어디 먼 나라로 유배나 갔으면 좋겠네.

“말이나 못 하면.”

제이든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떠났다. 뒷모습에서도 기가 질린 것이 느껴졌다. 이상하다, 왜 만나는 사람마다 다 저런 반응이지? 나는 그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고민하다가 불현듯 드는 생각에 비명을 질렀다.

“……아, 미친 마차!”

시계탑을 확인하자 예약 시간으로부터 10분이나 지나 있었다. 나는 가방을 부여잡고 죽어라 뛰었다.

***

아로네는 나만큼이나 내가 야근 지옥에서 탈출한 것을 기뻐했다. 그 애가 어찌나 좋아하던지, 우리는 공작이 아끼는 백 살 먹은 와인을 훔쳤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제안하자 아로네가 기꺼이 허락했고, 그래서 나 혼자서 훔쳐 온 것이다. 은취모 활동에서의 경험이 아주 도움이 됐다.

새벽까지 과음한 나였지만, 상대가 비싼 술이라면 속이 쓰려도 먹어야 했다. 애지중지하던 꿀단지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공작이 울부짖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너무 행복했다.

우리는 간간이 카나페를 집어 먹으면서 밀린 수다를 떨었다. 낭만적이었다. 따뜻한 공기, 우리밖에 없는 공간, 풍미 짙은 와인, 하녀들이 계속 교체해 줘서 절대 줄지 않는 안주…….

선선한 바람이 간간이 불었다. 나는 기분 좋게 취해서 등받이에 편안하게 기댔다. 아로네의 뺨이 복숭아처럼 달아올랐다. 나는 손가락 사이로 성의 없이 와인 잔을 굴리다가 입을 떼었다.

“맞다, 나 사실 오면서 제이든 만났다?”

“……그래?”

아로네는 아닌 척하면서 귀를 쫑긋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보자 피눈물이 흘러 한껏 어그로를 끌었다가 아로네가 승질을 부리기 전에 썰을 풀었다.

“어제 제출한 보고서를 벌써 읽은 모양이더라고?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만족해하면서 떠났어. 아마도.”

“어떻게 만족해했는데?”

“뭐랄까 좀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어이없다는 듯이 웃던데?”

아로네가 빙그레 웃고선 내게 와인을 새로 따라 주며 말했다.

“네가 마음에 들었나 봐.”

“엥 진짜로?”

나는 턱을 괴고 긴가민가하며 몇 시간 전 일을 반추했다. 나한테 딱히 부정적인 인상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게 생각한 건 절대 아닐 텐데…….

“왜 그렇게 생각해?”

“그게 일종의 신호야. 너한테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거지. 네가 이룬 성과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어. 왜냐면 그 애, 소문난 능력 만능주의자거든.”

신호 한번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툭 내뱉었다.

“그럼 승진 가능성이 높아진 거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사고뭉치 제이든이 나한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거라고? 조금은 의도한 대로 돼서 뿌듯하기도 하고, 구태여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사실 굳이 하고 싶지도 않은 아부를 떨어서 승진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면 지금 재정부에서 내 위치를 보면 하던 대로만 해도 탄탄대로를 밟을 게 분명하거든! ……하지만 한편으로는 흙탕물 한 번 밟더라도 웬만하면 지름길로 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휴, 이미 엎질러진 물을 이제 와서 어찌하리. 나는 이쯤에서 이 주제를 종결짓고 그동안 정말 궁금했던 걸 물어보기로 했다.

“이제 좀 얘기해 봐. 그…… 제이든 말이야.”

아로네가 와인 한 모금을 마시고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붉게 물든 얼굴 덕분에 그다지 총명해 보이진 않았다.

나는 연민이 혼재된 애틋함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깟 제이든이 뭐라고 혼자서 골골대야 하는 건지. 얼마 전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이 아른거렸다. 놔 버리면 편할 마음, 똑똑한 애가 그건 죽어라 못 깨닫지.

하지만 이젠 그것도 상관없다. 아로네가 계속 제이든을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나는 나대로 아로네가 덜 상처받도록 최선을 다할 거다.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두드리며 고민하던 아로네가 시선을 올렸다. 나는 바로 눈웃음을 지었고 아로네가 평소보다 늘어지게 웃었다.

“황후를 끼고 몇 번 만나긴 했어.”

“그리고?”

“역시나 도망가고 싶어 하더라. 그래도 꽤 정상적으로 대화했어. 황후 덕분에.”

“마마보이도 아닌 놈이 별일이네.”

놀랍게도 우리는 동시에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야금야금 훔쳐 온 와인병들이 텅 빈 채로 테이블 위에 굴러다녔다. 말할 때마다 알코올 냄새가 물씬 풍겼다. 아로네가 멈추지 않는 오르골 마법 상자를 키고 손을 내밀었다.

“근데 나 춤 못 추는데?”

“괜찮아, 내가 가르쳐 줄게. 쉬우니까 금방 배울 거야.”

하지만 친절하게 기초 스텝부터 가르쳐 주던 아로네는 하도 내가 목각처럼 뻣뻣하게 굴자 야차처럼 변하고 말았다.

연거푸 발을 밟자 그 애가 짜증을 내다가도, 정신 줄을 놓고 미친 듯이 웃는 나를 보고선 결국 같이 깔깔대기 시작했다. 같은 층에 사는 데네브가 시끄럽다며 쿵쿵 문을 두드렸지만 우리는 쥐뿔만큼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밤늦도록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는 체력이 동날 때까지 춤을 췄다.

***

나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취침을 위해 모든 촛불과 전등을 껐다. 마법으로 작동하는 전등이라고 해서 별거 있을 줄 알았는데 싱겁게도 끄는 방법은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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