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처음엔 그가 미친 줄 알았고, 경악이 가시고 난 뒤에는 그가 편지에 뭔가 트랩을 설치했나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예컨대 편지지에 강력한 독약을 발라 놔서 손끝이 스치기만 해도 바로 즉사한다던가 하는 그런 종류의 것 말이다. 굳이 걔가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것 같았지만 난 데네브의 인성을 믿지 않았다.
나는 두꺼운 가죽 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편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바로 구겨서 휴지통에 던졌다.
「보아하니 그 대단한 프로젝트라는 건 실패했나 보지? 심심한 위로를 보내는 바야.
-데네브 님프.」
그래. 솔직히 기발했다. 가성비도 좋고 내 혈압도 효과적으로 높였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 했지? 데네브한테 한발 밀린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 근데 걔가 왜 그렇게 날 못살게 구는데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다. 정작 친동생인 아로네한테는 어쩌다 복도를 지나가다 마주쳐도 흔한 안부 인사 한 번 안 하면서 나한텐 왜 그리 질척거리는지.
첫 만남부터 으르렁거렸는데 설마 좋아하는 여자애 관심 한번 얻자고 어그로를 끄는 것일 리도 없고. ……내가 만만한가? 맙소사, 진짜로 내가 놀리기 쉬워서 그런가?
기분은 더러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데네브의 조롱 섞인 편지는 강력한 촉발제가 되어 잔뜩 지쳐 있었던 내 몸을 어떻게든 움직이게 만들었다.
입사한 지 두 달도 안 돼서 기나긴 비리 고발 보고서를 완성할 수 있도록 친히 동기를 제공해 준 데네브에게 심심한 감사를 보낸다. 물론 반어법이고, 이 빚은 언젠가 갚아 줄 것이다.
마침내 모든 것이 완성된 오늘, 나는 퇴근까지 겨우 몇 분을 남겨 두고 비장하게 스칼렛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토록 바라 왔던 날이 도래했음에 절로 웃음이 실실 나왔다.
나는 부러 무거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갑자기 진지해진 공기에 불안해진 스칼렛이 탁자 위로 요란스럽게 손가락을 두드렸다.
요 근래 나는 누가 봐도 몹시 힘들고 기력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스칼렛은 그것이 의무라도 되는 양 하루에 한 번씩 내게 괜찮냐고 물었다. 내가 퇴사할까 봐 걱정이 됐던 것이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나는 식은땀을 흘리는 스칼렛을 빤히 바라보면서 극적인 효과를 위해 오랫동안 뜸을 들였다. 그리고 어그로에 스칼렛이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입을 떼었다.
“그 팀장님……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퇴사만은 절대 안 돼!!!”
스칼렛이 애타게 절규했다. 쨍한 비명을 직격으로 맞아 귀가 먹먹했다. 스칼렛이 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의자가 볼품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광기에 돌아 버린 눈동자가 간곡하게 나를 붙잡았다.
얼떨떨한 한편, 갑작스러운 행동에 하마터면 박장대소할 뻔했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웃음을 참고 우선 스칼렛의 오해부터 정정하기로 했다.
“저 퇴사할 생각 없는데요. ……아직은?”
“……그래요? 크흠, 내가 오해했네.”
스칼렛이 헛기침을 하고 주섬주섬 의자를 세웠다. 평온을 되찾은 스칼렛이 평소의 상사 모드로 돌아왔다. 혼자서 원맨쇼를 하는 스칼렛의 모습이 조금 깼다. 저런 사람이었어?
“……사실 제가 개인적으로 한 조사가 있는데요, 국세를 빼돌린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대략 70명 정도가 횡령을 저질렀어요.”
스칼렛이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요?”
“초창기 자료부터 조사했어요. 증거를 비롯해 총 횡령 금액과 이름을 정리해 왔으니 한번 확인해 보세요.”
스칼렛이 멍청하게 입을 떡 벌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양피지 두루마리를 건네주고 조심스럽게 입을 닫아 주었다. 그러자 스칼렛이 정신을 차리고 속독하기 시작했다.
나는 공손히 손을 앞으로 모으고 스칼렛이 다 읽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표정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내 안의 스칼렛은 자신감 넘치는 커리어 우먼이었는데 지금은……. 상사한테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사람이 조금 신기했다. 유치한 로코 드라마에 여주인공으로 나올 것 같았다.
마침내 마지막 문장에 도달한 스칼렛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 경이로움과 부러움과 약간의 질림이 혼재되어 떠다녔다.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이건…… 이건 정말……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네. 혜라 씨가 엄청난 일을 해냈고, 상사로서 그런 혜라 씨가 너무나도 자랑스러워요. 내 손자의 손자에게까지도 자랑하고 싶을 만큼. 이 보고서는 바로 상부에 보고할게요. 그동안 혼자서 고생했네요. 정말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아, 근데…… 당연히 제 이름으로 올라가는 거죠?”
“세상에, 당연하죠!”
스칼렛이 어떻게 그런 망언을 할 수 있냐며 역정을 냈다. 나는 그냥 한번 농담해 본 거라고 황급히 해명했다. 아무래도 내가 사회에 때를 너무 많이 탔나 보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핫, 그럼 저는 이만 퇴근해 볼게요!”
“그래요. 즐거운 주말 보내고 다음 주에 봐요. 다시 한번 수고했고요!”
나는 취직한 이래로 가장 즐거운 기분으로 퇴근했다. 피곤에 절어 죽상을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 홀로 환희에 젖어 빛이 났다. 무채색의 세상에서 홀로 유채색으로 칠해진 느낌이었다.
나는 속으로 신나는 노래를 부르며 춤추듯이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또라이 보듯 쳐다보며 슬슬 피해갔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야호! 드디어 앞으론 밤새도록 눈이 빠져라 젠장 맞을 숫자를 안 들여다봐도 된다! 데네브한테 한 방 먹일 수 있다!
“으아아아아아! 난 최고야!!”
***
그동안 내 가슴을 옥죄었던 프로젝트가 드디어 끝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와인을 땄다. 근래 헉 소리 나게 바빠서 몇 주간 아로네를 보러 가지 못했더니 아로네가 그렇게 할 일이 많냐면서 위로주를 보내 줬던 것이다.
뻥, 코르크 마개가 완벽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미친 사람처럼 실실 쪼갰다.
“이렇게까지 완벽할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완벽한 나한테 건배!”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나는 밤새 병나발을 불며 재정부에서 보냈던 힘겨운 나날을 회상했다.
두 달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질릴 정도로 칭찬과 감탄을 들었지만,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양 선망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웠다. 내가 여기서 유능할 수 있는 이유는 순전히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기 때문이니 말이다.
물론 여기 사람들이 멍청하다는 것은 아니다. 산수에 서툴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 왔으니 잘 못 하는 건 당연한 거고, 이곳 사람들 나름대로 특화된 분야들도 많았다. 그리고 애초에 유년기부터 교육에 비정상적으로 열을 올리는 한국이 이상하지.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스칼렛에게 극찬을 들어도 마냥 기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제출한 보고서는 그렇지 않았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끈덕지게 붙잡고 늘어져서 비리를 고발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순수하지 않은 의도가 있지만, 내 의지로 사회에 이바지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방인에 불과한 내가 아주 조금 이 세계에 받아들여진 것 같았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기뻤다.
“크흡, 새벽 감성 오지네…….”
나는 코를 훌쩍이며 턱 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렸다. 어디서든 잘 살아가는 나 자신이 미치도록 기특해서 너무 슬펐다. 난 아직도 내가 덜 컸다고 생각했지만 이럴 때 보면 다 큰 것 같기도 하다.
술에 취한 몸이 제발 잠 좀 자자고 애원했다. 하지만 센치해진 감성은 많은 생각거리를 불러일으켰다. 한숨이 나오도록 긴 밤이었다.
***
요 며칠간 맑았던 하늘이 간만에 우중충했다. 연하늘색과 회색 그 사이 어디쯤의 색채를 띤 하늘은 후 불면 흩어질 것 같은 먹구름을 잔뜩 품고 있었다. 코를 킁킁거리자 미약하게 비 냄새가 났다.
나는 다시 올라가서 우산을 가지고 나올까 말까 고민하다가 귀찮아서 관두었다. 어차피 마차를 타고 갈 것이고, 며칠 전 미리 언질을 해 놓았으니 아마 누구든 마중을 나올 것이다.
나는 느긋하게 정문을 향했다. 여유 있게 나와서 마차 예약 시간까지는 아직 넉넉했다.
그래도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만난다는 것을 알았다면 조금 더 늑장을 부렸을 텐데.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도 제이든의 외모는 여전히 눈부셨다. 남색 정장을 반듯하게 갖춰 입은 모습이 모범생처럼 반듯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헝클였다. 그가 우아한 손짓으로 살짝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빼도 박도 못하게 눈이 마주친 내게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보자 이 세계에 대포 카메라가 없다는 것이 분에 미치도록 안타까웠다. 사진을 찍어다 팔면 수입이 짭짤할 텐데……!
나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쉬는 동안 제이든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를 뒤따르는 두 남자를 빠르게 훑었다. 한 명은 무장한 것으로 보아 딱 봐도 호위 기사였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누구지?
나는 갈색 머리의 남자를 관찰했다. 며칠 밤을 새우기라도 했는지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진했고, 멀대 같은 키에 비해서 체형은 호리호리했다. 조금 더 시선을 내리자 오른손 검지와 중지에 선명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얼씨구, 손등에는 잉크 자국도 옅게 남아 있었다. 보좌관인 것 같았다.
마침내 제이든이 사정권 안에 들어왔다. 나는 기계적으로 머리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우리 전에 봤었지, 아마?”
음. 아무래도 내가 그날 강렬한 인상을 남겼나 보다.
“데네브 님과 같이 뵈었죠.”
“그때 소공작을 대하는 것이 심상하지 않아 자네에 대해 따로 조사를 해 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