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138)

<32화>

“아첨하는 솜씨가 수준급이네. 이런 식으로 그 애들을 꾀었나?”

“그게 무슨 소리세요. 걔네는 제 순수하고 밝은…….”

제이든이 서커스 쇼를 관람하듯 우리의 일상적인 말다툼을 지켜보다가 불쑥 말을 갈랐다.

“그 애들이라니?”

데네브는 옳다구나 하며 모함을 늘어놓았다.

“전하께서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로네가 끼고돈다는 애가 바로 저 애니까요. 항간에선 저 애를 아마…… 아로네의 애완동물이라고 부른다죠?”

데네브는 분명 제이든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여유롭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뭐, 그런 소문이 나돌고 있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아니, 그 차갑다는 공녀가 갑자기 달라졌는데 구설수가 안 생기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오히려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말의 수위가 약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살짝 고개를 기울인 제이든의 모습에서 실낱같은 흥미가 드러났다. 오늘의 창창한 하늘을 그대로 옮겨 닮은 듯한 새파란 눈동자가 면밀하게 나를 훑었다. 그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작게 탄식을 뱉었다.

“아, 네가 그 애군. 신시아가 말했던 것 같기도.”

태양이 기울며 순간 강한 햇살이 제이든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눈을 찡그리면서도 제이든은 환하게 웃었다. 시를 낭송하듯 신시아의 이름을 정성스레 읊조리는 데에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애정이.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신시아가요?”

특별한 일 없으면 저택에 있는 거 아니었나? 어떻게 내 얘기를 제이든한테 할 수 있지? 베키는 제이든이 공작가에 온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햇빛을 핑계 삼아 눈을 찌푸렸다. 데네브가 주의 깊게 나를 관찰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틈틈이 신시아를 만나 왔던 거예요? 그동안 계속?”

“그래. 내가 신시아를 황궁으로 초대했지.”

아, 그러니까 부인 될 사람을 내버려 두고 외간 여자를 불러들였다? 그것도 지속적으로?

“어떤 이름으로요?”

사실 의미 없는 질문이다. ‘황태자 제이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고유 명사와도 같으니까. 하지만 물어야만 했다.

“처음엔 황태자로서, 지금은 친구로서.”

다시 말해 상황에 따라 자신의 지위를 적절하게 써먹었다는 뜻이다. ‘친구’의 초대는 거절할 수 있지만 ‘황태자’의 초대는 거절할 수 없는 구속력을 가지니까.

저런 애 때문에 아로네가 마음고생한 걸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나는 속으로 숫자를 세며 거칠어지려는 숨을 가다듬었다. 잠깐 방심이라도 하면 주먹을 날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감정을 꾸역꾸역 심연에 밀어 넣어 잠근 후에야 비로소 빙긋 웃었다. 제이든이 다소 도발적인 눈빛을 했다. 언뜻 비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감히 날 떠보려고 한 게 괘씸했다. 나는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은근슬쩍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머 정말요? 신시아한테 황태자 전하의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어서 몰랐네요. 하여튼, 신시아가 제 얘기를 어떻게 했나요? 보나 마나 칭찬이겠죠? 그 애가 절 꽤나 좋아하거든요.”

“……뭐라고?”

나는 제이든이 숨겨진 말뜻을 알아챘을 거라 믿었다. 네가 그렇게 좋아라 하는 신시아 입에서 난 네 이름 들어 본 적도 없는데? 네가 신시아를 좋아하는 만큼 신시아는 널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나 봐. 어쩌지, 유감이네.

제이든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데네브가 저도 모르게 감탄과 탄식을 내뱉었다. 나는 부러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해맑게 실실거렸다.

제이든의 속을 간파하는 것은 데네브를 화나게 하는 것만큼 쉬웠다. 제이든은 아로네 친구로 유명한 내 반응을 떠보려던 것이 분명했다.

분명 아로네랑 신시아는 사이가 안 좋은데, 나는 그들 모두와 가깝다고 할 수 있으니까 그게 의아해서.

제이든은 내 건방진 말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신시아였다. 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도 멀었나…….”

그 중얼거림에서 짝사랑하는 사람 특유의 불안정한 감정이 얼핏 느껴졌다. 덕분에 분노를 가라앉힌 것이 무색하게도 다시 속이 뜨겁게 들끓었다. 신시아는 저 깊은 마음을 알고도 제이든을 만난 걸까?

그날 신시아가 한밤중에 찾아왔을 때 많은 고민 끝에 다시 받아 준 것이 후회됐다. 신시아가 주기적으로 제이든과 황궁에서 만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선을 그었을 거다.

황태자가 직접 황궁으로 초대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나? 그렇게 제이든을 자주 만나면 뒤에서 뻔한 말들이 나돌아 다닐 거라는 걸 분명 알 텐데 왜 그러는 거지?

어차피 거절해도 제이든이 황명이라고 하면 빼도 박도 못해서? 하지만 내가 다 상처받을 정도로 애틋한 표정을 짓는 제이든이 설마 그렇게까지 만남을 강요할까?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신시아?

때늦은 의문이 산발적으로 나타났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 봐도 그럴듯한 단서는 단 하나뿐이었다.

‘근데 어떻게 제이든이랑 친하게 지낼 수 있어?’

‘그러게. 왤까? 넌 똑똑하잖아.’

그때는 스톡홀름 증후군일 거라 확신하고 넘어갔었다. 하지만 만약 아니라면? 설마 아로네한테 복수하고 싶은 건가?

악마의 형상을 한 의심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나는 일단 지켜보자고 생각하면서 과부하 된 퓨즈를 끊어 내듯 감정을 잘라 버렸다. 그리고 시계탑을 가리키며 연극적으로 외쳤다. 제이든과 데네브가 내 손가락 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라! 점심시간이 벌써 10분밖에 안 남았잖아? 어이쿠, 저는 일이 바빠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그럼 즐거웠습니다. 즐거운 산책 계속 이어 가세요!”

빠르게 치고 사라지려는데 역시나 데네브가 끝까지 내 심기를 긁었다.

“편법으로 얻어 낸 자리면서 꼴에 근무 시간은 지키나 보군.”

“네? 당연하죠. 아까 황태자 전하가 말씀하셨잖아요, 제가 재정부의 혜성이라고. 저 없으면 업무 속도가 적어도 이틀은 느려지는데 근무 시간 딱딱 맞춰서 일해야 저도, 제 상사도 칼퇴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생각 좀 해라, 이 화상아. 그런 의미를 담아 한심하다는 눈빛을 쏘았다.

말꼬리 잡고 늘어질 때마다 데네브가 환장하려고 하는 게 정말이지 너무 보기 좋았다. 어느새 제이든이 팔짱을 끼고 우리의 말다툼을 구경했다. 날 바라보는 눈빛이 무슨 외계 생물 보는 것 같았다. 데네브가 빈정거렸다.

“흥.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그 말이 왜 그렇게 신경을 건드렸는지. 나는 횡령 리스트를 만든다고 잠도 줄여 가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말을 함부로 하지? 절로 말투가 공격적으로 나갔다. 나는 발목을 번갈아 느릿하게 돌렸다.

“글쎄요? 한번 두고 보세요. 지금 제가 지금 대단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

제이든이 불쑥 끼어들었다.

“프로젝트라니, 그게 무슨?”

“안 알려 드릴 거예요.”

나는 발음 하나하나를 공기에 새길 기세로 또박또박 말하고 딴지 걸리기 전에 냅다 튀었다. 등 뒤로 내 이름이 들려온 것 같기도 하지만, 바람 소리 때문에 못 들은 척 가뿐히 무시했다.

“으하하!”

말하다가 마면 은근히 짜증 나는 법. 내가 제일로 싫어하는 놈들한테 물음표를 먹여서 너무 기분이 좋았다. 나는 세상이 떠나가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안타깝게도 횡령 리스트를 완성시키는 것은 그때 그들을 마주쳤던 날을 기점으로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하늘이 날 골탕 먹이기라도 하는 건지 갑자기 업무량이 평소의 두 배로 늘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출근했더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양의 서류가 거의 내 키만큼 쌓여 있어서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실제로 스칼렛은 충격을 못 이기고 저혈압으로 쓰러졌다.

들것에 실려 나간 스칼렛의 몫까지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진작 알았으면 나도 미친 척하고 그냥 기절했을 거다. 일개 사원이 팀장의 일까지 해야 한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하극상이 따로 없었지만 스칼렛의 업무를 대체해 줄 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이 부재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다른 부서 일도 여기로 넘어오는 판에 뭔들 못 하겠어…….

점심도 거르고 야근까지 강행해야 했던 그날은 정말 악몽이었다. 스칼렛 없는 사무실은 거의 내 단독 사무실이나 다름없어서 나는 남 눈치 보지 않고 말 그대로 엉엉 울면서 쉴 새 없이 일했다.

양심은 있었던 스칼렛이 업무에 복귀하고 내게 반차를 허락해 줘서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진짜로 살인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도 나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 가며 간신히 비리를 조사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폐인처럼 산 덕분에 나는 최근 3년 치 자료를 남겨 두고 현재까지 46명의 사기꾼을 밝혀냈다. 다시 봐도 엄청난 숫자였다.

이 지경이 되도록 전혀 눈치를 못 챈 황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니, 그 이전에 재정부가 어떻게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올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첫인상이 별로라서 그렇지, 사실 재정부도 나름 아카데미 출신 엘리트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근데도 이런 실수를 범했다 이거 아니야.

“……흠.”

이 보고서를 받아 들고 황제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표정을 못 보는 게 너무 아쉬웠다.

그런데 말이다. 어느 날, 성격 고약하고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을 즐기는 데네브가 편지 하나를 보내왔다. 세상에, 우편함에서 데네브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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