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하지만 자기네들 업무를 떠넘기는 건 전혀 쿨하지 않다. 나한테 상습적으로 일을 떠넘기는 것도 모자라 뒷담화까지 까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리고 그렇게 소처럼 일하다 보니까 건수 하나 잡았거든. 운이 좋으면 최단기간에 승진할지도 몰라. 그럼 내 이름은 역사로 남겠지……!”
“무슨 건수?”
“아, 그게 말이지. 아카데미 도서관 신축하는 데 들어간 비용을 계산해 보니까 돈이 많이 비더라고. 갬프 볼락이라고 혹시 알아? 거의 2만 실버나 구멍이 났더라.”
아로네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탄식을 내뱉었다. 나는 느릿하게 레몬 맛 사탕을 굴렸다.
“네가 면접 볼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 안토닌 볼락이야. 갬프 볼락의 조카지.”
“오……. 그러면 갬프가 비리를 저질렀을 확률이 더 높아지지. 청탁에 오케이 하는 사람 삼촌인데 뒤가 깨끗할 리가 있겠어?”
내가 진짜로 대어를 문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결의를 다지듯 주먹을 불끈 쥐자 아로네는 자신의 계략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작게 혀를 찼다. 나는 발랄하게 말했다.
“하여튼 다음 주부터 틈틈이 갬프에 대해서 알아봐야……. 아니다. 갬프가 진짜로 횡령을 저지른 거라면 분명 최초가 아닐 테니 차라리 남아 있는 자료를 처음부터 훑어봐야겠어.”
“바쁘다면서?”
“야, 내가 누군데. 어차피 언젠가 해야 할 일인데 빨리 해치우는 게 나아. 만약 내가 그동안 숨어 있던 도둑놈들을 일망타진하면 완전 큰 공 세우는 거 아니야?”
아로네가 떨떠름해하면서도 마지못해 답했다.
“그렇긴 하지.”
“두고 봐. 하루빨리 승진해서 부하 직원 부려먹어야지.”
아로네를 빤히 바라보며 다짐하듯 말했다. 강한 의지와 함께 주먹에 힘이 실렸다. 딱 기다려라, 데네브. 널 생각해서라도 무조건 짱이 되겠어.
“……그래, 응원할게.”
아로네가 체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신입 사원 딱지를 떼고 멋진 커리어 우먼처럼 사람을 부리는 상상을 하자 벌써부터 행복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속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적어도 몇십 년 전 자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해진 탓이다. 하지만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슬플 때 웃는 사람이 일류니까…….
***
“얘들아 진짜 오랜만이다!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그러니까요! 혜라 님이 황궁에 계신 동안 얼마나 많은 신작들이 쏟아졌는지 모르실 거예요.”
“맞아요. 저는 그중에서도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가 최고였는데 보시면 아실 거예요. 저 거의 침을 줄줄 흘리면서 봤거든요.”
루나가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그것보다는 ‘황태자의 은밀한 비밀’이 더 맛있지 않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감 떨어졌어?”
루키와 베나가 금방이라도 한판 뜰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재잘재잘 떠드는 목소리가 그동안 미치도록 그리웠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키스할 듯 이마를 가깝게 붙인 그들을 흐뭇하게 관전했다.
그래, 우리의 모임은 항상 둘의 말다툼으로 시작했었지.
우리 셋으로 이루어진 님프 공작가 내 비밀 사교 클럽은 ‘은취모’라 불리는데, 이는 ‘은밀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의 약어이다.
은취모는 우리가 서로의 떳떳하지 못한 취향을 알았던 그날로부터 일주일 뒤 결성되었고, 지금까지도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자자, 서로 취향 존중해 주는 걸로 결론짓고, 내가 무조건 봐야 하는 게 뭐가 있는지 얘기 좀 해 줘!”
우리는 달빛을 전등 삼고 수다를 떨었다. 혹여나 다른 사람의 주의를 끌까 봐 거의 귓속말하다시피 말했고, 다리는 내내 서 있느라 저렸지만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나는 제법 이 모임에 애착을 가졌다. 무슨 고등학교 친구랑 수다 떨듯이 사소하고 무겁지 않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은 나 스스로 인지한 것보다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충분히 적응했다고 생각해도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관과 문화까지 동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서 그러한 보통의 삶이 소중했다. 뭐랄까, 아무 말 대잔치가 나를 나답게 만들어 준달까?
대화의 흐름은 내 황궁 적응기 썰을 서두로 시작해서 신시아와 데네브의 스캔들, 루나의 연애사를 지나 아로네의 결혼으로 향했다.
그들이 목소리를 작게 줄이고 소곤거렸다.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런데 혜라 님, 그때 공녀님 성인식에서 결혼 발표를 한 뒤로 황태자님이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으셨는데 그 결혼 정말 괜찮은 걸까요?”
“맞아요. 아무리 정략결혼이라도 그렇지. 보통 대외적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최소한 선물이라던가 하는 걸 보내 주지 않나요?”
두드러지게 성격이 누그러진 아로네에게 익숙해진 베키와 루나는 이제 필요 이상으로 아로네를 겁내지 않았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제 고용주에 대한 호감이 조금쯤은 생겨난 것 같았다.
입이 닳도록 아로네에게 잔소리한 것이 완전 헛수고는 아니었나 보다. 나조차도 내 잔소리에 노이로제 걸릴 정도였으니 어쩌면 아로네가 달라진 것은 당연했을지도.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애들이 아는 걸 제이든이 모를 리가 없다. 그냥 배알이 꼴려서 오기로 버티고 있는 거지.
“당연히 안 괜찮지. 그래서 문제야. 그러니까 나 없는 동안엔 너희들이 아로네 좀 잘 보살펴 줘.”
과장스럽게 울상을 지으며 두 손을 모으자 루나가 배시시 웃으며 다정하게 내 손을 감쌌다. 베키도 동의의 뜻으로 신간들을 쥐여 주고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감격하여 그들을 끌어안았다.
“역시 너희들밖에 없다!”
***
결과적으로 갬프 볼락은 나쁜 놈이 맞았다. 나는 그가 작성한 총 14건의 보고서의 금액이 실제 금액과 상이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가 누락시킨 금액을 모두 합하면 한화로 적어도 10억은 넘었다.
그리고 완전 대박인 게, 지금까지 찾아낸 갬프 같은 사람들이 무려 여섯 명이나 되었다. 상부에 제출하면 승진은 물론이고 어쩌면 황제에게 훈장이라도 받을지도 모르는 엄청난 로또였다.
하지만 아직도 자료의 날짜는 20년 전에 머물러 있었기에 완벽한 리스트를 작성하기까진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하, 미치겠다, 별들아…….
어쩐지 오늘은 혼자 먹고 싶어서 스칼렛과 그레이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오랜만에 고독을 즐겼다. 정말이지, 분수에도 안 맞는 찬양에서 벗어나니 살 것 같았다. 난 꽤 철판이 두꺼운 인간이었지만 그들은 진짜 광적이었다.
“아…… 밥을 너무 빨리 먹어 버렸어…….”
비탄에 절은 탄식이 절로 나왔다. 점심시간이 끝나려면 30분이나 남아 있었다. 어떡하지. 혼자서 차라도 마시다 갈까? 스칼렛 무리에 껴서 수다 좀 떨어?
경이로운 양의 일거리가 있는 사무실에 벌써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쾌청한 하늘을 보고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산책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래, 황궁 부지가 아주 예쁘긴 하더라.
나는 뒷짐을 지고 설렁설렁 걸었다.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닿는 머리칼이 산들바람에 흔들렸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 사이에 드문드문 있는 벤치는 이미 모두 만석이었다.
나는 혀를 차며 삼삼오오 모여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사람들을 지났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부서에서 일하길래 수다 떨 기운이 남아도는지 모르겠다.
황궁 부지는 웬만한 메이저 테마파크보다 훨씬 광활했고, 따라서 내가 가는 길마다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구내식당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소음이 차차 잦아들었다.
나는 틈틈이 중앙 시계탑을 바라보며 남은 시간을 쟀다. 그렇게 나는 한참을 걸어 아담한 꽃밭으로 둘러싸인 작은 연못을 발견했다. 그 앞에는 성인 두 명이 너끈히 앉을 수 있을 크기의 흔들 그네 의자가 있었다.
“아싸! 땡잡았다.”
나는 힘차게 땅을 박찼다. 오랫동안 방치됐는지 굳은 철이 맞부딪치면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문득 환멸이 나서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하지만 신은 날 가만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연못 너머 수풀 사이로 익숙한 낯들이 보였다. 나는 엿 됐음을 느끼고 황급히 몸을 엎드렸다.
그러나 생각보다 내 움직임이 거칠었는지 낡은 그네는 본인의 존재감을 강력하게 피력했고, 그들은 비명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극악한 확률을 뚫고 무성한 잎사귀의 아주 작은 틈새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나는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잘난 능력으로 탄식을 들은 데네브가 잘 걸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원 플러스 원으로 영문을 몰라 하는 제이든도 함께 딸려 왔다. 나는 숙였던 몸을 일으키며 자유분방하게 얼굴을 풀었다. 흠, 지옥의 주둥아리는 준비됐다.
***
“데네브 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신수가 훤하시네요. 그리고……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저는 혜라라고 합니다. 재정부에서 일하고 있죠.”
우웩, 제국의 태양이라니. 내가 말해 놓고도 토하고 싶었다. 왜 저런 말이 튀어 나간 건지 모르겠다. 소설 좀 작작 읽을 걸 그랬어.
먼저 내 인사를 받아 준 사람은 의외로 제이든이었다. 제이든이 성격 좋은 사람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그의 어조가 조금 날 서 있다고 생각했다.
“아, 자네가 재정부의 혜성이라는 그 신입이군. 반갑네. 하지만 인사법이 틀렸어. 엄밀히 말해서 제국의 태양은 내 아버지이시니까.”
내 인기 어쩔 거야. 황태자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로 파급력 있는 삶이라니. 봤냐, 데네브?
“……뭐, 지금이야 그렇지만 곧 태양이 되실 거잖아요? 지금부터 들어 놔야 익숙해지죠.”
나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잘도 거짓말을 했다. 내가 쫄지도 않고 오히려 빙글빙글 웃으며 능청을 떨자 제이든이 순간 눈을 빛냈고, 데네브는 거의 토하고 싶어 했다. 아니나 다를까, 데네브가 태클을 걸고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