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그래서 과도하게 나를 치켜세우는 두 여자를 보기가 미치도록 민망했다. 주위의 시선이 이쪽에 몰렸고, 사람들이 저들끼리 속삭거렸다. 쟤가 걔냐고 옆 사람에게 묻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아무래도 소문의 신이 내게 열렬한 구애를 보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뭐, 그래도 대기업 출근 첫날치고는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또 다시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살인적인 업무량 때문에 손목이 아작 날 것 같고, 환장하게 긴 숫자를 들여다보느라 눈알이 빠질 것 같고, 스칼렛이 내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
두 명밖에 없는 팀의 막내인 나는 부지런히 뛰어다녀야 했다. 나는 출근하자마자 커피를 타고, 스칼렛이 출근 시간을 딱 맞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활기찬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 스칼렛 또한 반갑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 그가 자비로운 미소와 대조되는 살인적인 양의 양피지를 내 책상에 내려놓으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하루 일과가 시작됐다. 야근은 죽어도 싫은 나는 바쁘게 깃펜에 잉크를 적시고 검토를 한다.
그러다가도 1시간에 한 번꼴로 스칼렛이 나를 호출하면 그가 급하다며 떠넘긴 서류를 우선적으로 처리하거나, 그의 심부름을 받아 필요한 자료를 얻으러 이웃 부서를 기웃거렸다.
그렇게 퀭한 얼굴로 옆 부서의 문을 두드리면 나와 똑같으면 똑같았지 절대 덜하지 않는 사람들이 힘없이 자료를 건네주었다.
내 삶은 아주 효과적으로 피폐해져 가고 있었다. 알바와 학업의 노예였던 전 세계에서의 삶이 차라리 나았을 정도이다. ……아니다. 그래도 여기선 나름 천재 취급을 받고 있으니 어쩌면 셔틀처럼 사는 게 더 이득일지도?
아니 근데 요즘 날 화나게 하는 일이 있다. 다른 부서 사람들이 은근슬쩍 본인들이 처리해야 할 문서를 우리 부서로 넘긴다는 것이다. 자, 여기서 퀴즈. 그럼 그 잉여의 문서가 누구한테 넘어갈까?
한두 번 업무를 봐주니 내가 호구라고 낙인찍혔는지, 그들은 그게 무슨 당연한 권리라도 되는 양 굴었다. 화가 나서 그 사람들에게 따지기도 해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어처구니없었다.
“이 정도도 못 합니까? 평민인데도 그렇게나 많은 월급을 받잖아요.”
더 어이없는 건 신분으로 찍어 누르니까 순간 말문이 막혔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퇴근할 때까지 빌어먹을 계산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때 조금. 아니, 사실 많이 비참했다.
그래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 있다면 오늘이 금요일이고, 내일 늘어지게 늦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로네를 보러 가야 하긴 하지만…….
“아 솔직히 주말 내내 빈둥거리고 싶은데.”
나는 일하다 말고 책상에 엎어졌다.
“그렇다고 안 가면 겁나 화내겠지?”
나는 우울하게 읊조리고 다시 업무에 몰입했다. 정말 하기 싫었다.
“……엥?”
나는 ‘세니스 아카데미 도서관 신축 비용’에 대한 보고서를 검토하다가 총합으로 5만 골드, 3만 실버 이하가 나와야 할 것이 한참 적은 5만 골드, 1만 실버 이하로 나왔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턱을 괴고 내가 셈을 잘못했나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하지만 검산은 정확했다. 물론 이처럼 어쩌다 한 번씩 허수가 생기는 경우가 있긴 했다. 하지만 2만 실버나 차이가 나다니? 한화로 치면 2천만 원이 공중에 떠 버린 셈이었다.
누가 봐도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나는 서류 하단에 사인한 책임자의 이름을 메모했다.
‘갬프 볼락’. 딱 봐도 구린 냄새가 났다.
그때 스칼렛이 콧노래를 홍홍 부르며 나왔다. 요즈음 그는 나 덕분에 인생 황금기를 보내고 있었다.
“혜라 씨, 오늘도 수고했어요.”
“아, 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그래요. 좋은 주말 보내시고, 혜라 씨도 하던 거 대충 정리하고 퇴근해요.”
횡령 정황은 다음 주에 살펴봐도 늦지 않다. 나는 서둘러 책상을 정리하고 허겁지겁 짐을 챙겼다. 한시라도 빨리 사무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동시다발적으로 각 건물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도 나만큼이나 세상 피곤에 찌든 표정을 하고 있었다.
노르스름한 하늘빛 아래로 사람들이 좀비처럼 터덜터덜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눈에 생기가 없었다.
내일부터 이틀간의 휴식이 주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쁠 법도 하건만, 매주 돌아오는 주말에 매번 기뻐하기엔 공무원들이 너무 직장에서 갈렸다. 일단 나부터 살인적인 업무량을 홀로 감당하고 있으니 원.
스칼렛은 젊어서 머리가 빨리빨리 돌아간다고 부러워했지만, 난 알았다. 내가 지금 어찌어찌 업무를 잘 해내는 것은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전지는 빠른 시일 내로 방전될 것이 분명하다. 그때가 오면 도대체 어떻게 9시간 동안 일해야 할지 벌써 걱정이 됐다.
뭐…… 미래의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하지 않을까?
***
내가 공작가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를 한참 넘긴 뒤였다. 그래도 간신히 다과 시간에는 늦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것도 놓쳤다면 삐진 아로네를 풀어 주느라 하루를 다 써야 했을 거다.
다정하게도 마중 나와 준 사람이 몇 있었다. 아로네와 시녀들이었는데, 그동안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얼굴들이 그 무리에 속해 있었다. 나는 우선 아로네를 가볍게 껴안았다.
“아로네! 일주일밖에 안 됐지만 오랜만! 그동안 잘 지냈니?”
“늘 같지. 근데 네 얼굴은 영 별로네.”
“참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도 이랬거든. 어쩌면 더 심했을걸?”
아로네는 눈썹을 살짝 들썩임으로써 아주 손쉽게 내 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다지 기분 나빠 보이진 않았다. 이로써 아로네가 완벽하게 그날 일을 극복했다는 것이 증명됐다. 나는 실실 웃으며 아로네와 팔짱을 꼈다.
“날 위한 디저트는 준비해 놨겠지? 나 엄청 기대했는데!”
“날씨가 좋아서 정원에 준비해 놓으라고 했어. 가자.”
금세 기분이 좋아진 나는 방방 뛰며 익숙한 길을 걸었다. 와중에 슬쩍 뒤를 돌아보아 베키와 루나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대놓고 던졌다.
나는 한밤중 그들을 찾아가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새로운 맛집을 찾은 것이 틀림없었다.
정원 한가운데에는 색감 예쁜 영화에 나올 법한 아름다운 유리온실이 있었다. 소규모 다과회에 안성맞춤인 크기였다.
유채, 목련, 작약 따위의 봄에 피는 꽃들이 화관처럼 엮여 벽면을 장식하고, 바닥 곳곳에 놓인 라벤더 화분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 지붕에 매달린 선 캐처는 햇빛을 받고 신비한 문양을 그렸다.
유리창 너머로 정교하게 관리된 정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우스를 둘러싼 탱자나무와 복숭아나무가 5월을 맞아 활짝 개화했다. 하얀색과 연한 홍색이 화사하게 어우러진 모습이 수채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나는 그 모든 풍경을 배경으로 삼은 아로네를 마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역시 아로네는 햇빛 아래에 서 있는 게 잘 어울려.
테이블은 내가 좋아하는 디저트로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 초코 마카롱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딸기 생크림 케이크가 한 판째로 있었으며, 유리 볼에는 알록달록한 색의 사탕이 흘러넘칠 듯 담겨져 있었다.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만세 삼창했다. 아로네는 가끔씩 교양 없이 구는 나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아로네가 시녀들을 물리고 직접 주전자를 들었다. 나는 발을 까닥이며 아로네가 능숙하게 차를 우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로네가 내 잔에 루이보스 차를 따르며 무심하게 물었다.
붉은빛 도는 맑은 물줄기가 곡선을 그리며 추락했고, 나는 그 애의 눈이 순간 반짝이는 것을 목격했다.
“일은 어때?”
아로네가 내 지뢰를 건드렸다. 다 알면서도 묻는 게 틀림없었다. 그게 좀 괘씸했지만 어쨌든 나는 일주일 내내 그 질문을 절실히 기다렸기 때문에 말을 골랐다.
하루의 절반을 회사에서 보내는 판에 인간관계라고는 재정부 사람들이 전부이고, 그들을 붙잡고 회사 욕을 할 수도 없고 해서 그간 모든 울분을 속으로 삼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가? 할 말을 정리한 게 무색하도록 나는 급발진하고 말았다.
“말도 마. 진짜 할 게 너무 많아. 신입이라 그런지 나한테 떨어지는 업무도 엄청 많고, 그냥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계속 일해야 해. 스칼렛한테. 아, 스칼렛은 내 상사인데. 하여튼 스칼렛한테 하루는 너무 빡쳐서 물어봤단 말이야.”
다시금 그때 기억을 떠올리니 혈압이 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차 한 모금을 들이켜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팀장님, 저희는 황실 예산 관리 팀인데 왜 국세까지 봐야 하죠? 그러니까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재정부 인력이 부족해서 그렇대. 문패는 형식에 불과하고 사실상 보는 업무는 거의 비슷하다는 거야! 아니, 이게 회사냐?”
진정시킨 것이 무색하게도 다시 열이 올랐다.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그리고 어떻게 점심시간이 유일한 휴식 시간일 수가 있어? 나 그래서 밥 엄청 느리게 먹잖아. 친한 사람도 없고 황궁에서 뭐 할 게 있는 것도 아닌데 빨리 먹으면 뭐해. 가서 일하는 것 말고 또 뭐가 있겠냐.”
입술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는데도 발음 하나 씹지 않은 게 놀라웠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갔다면 심사위원들이 내게 합격 목걸이를 쥐여 줬을 것이 분명하다.
스트레스받아서 우걱우걱 마카롱을 흡입하는 내게 아로네가 조용하게 말했다. 마침 태양의 고도가 바뀌며 아로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힘든 거면 그냥 나와도 돼.”
눈에 서린 감정은 못 읽었지만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뻔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훗, 그런 얕은수에 내가 넘어갈 줄 알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근무 환경이 그다지 나쁜 건 아니야. 스칼렛이 나한테 일을 좀 미루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이 착하고, 또 옆 부서 사람들도 잘……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