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38)

<29화>

“알았어. 말 그대로 이해할게. 대신…… 나랑 좀 있어 주면 안 돼?”

나는 바로 거절하려다가 간절한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내 태도가 미적지근하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왜 이렇게 나한테 목을 매지?

죄책감이 들었다. 순전히 자기중심적이고 다소 공감 능력도 떨어지는 데다가 생각 없이 행동할 때가 다반사인데, 이런 내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타인에게 상처 주는 일은 언제나 힘들다. 신시아처럼 복잡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라면 더욱.

“한 번쯤은 그래도 되잖아.”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다. 가만히 바라보는 얼굴이 눈에 띄게 긴장하고 있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신시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제발이라고.

어떻게든 나를 붙잡겠다는 의지가 가련해서 딱 한 번만 넘어가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겨우 입을 뗐다.

“나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밤새도록 수다 떨자는 얘기가 아니야. 그냥…… 그냥 이렇게 잠시만 있자고.”

소리에도 향기가 있다면, 신시아의 목소리에선 물망초 향이 났을 거다. 나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신시아가 침대에 누워 내 팔을 약하게 끌었다. 피할 수도 있었지만 잠자코 그 애를 마주 보고 누웠다. 푹신한 베개의 감촉을 느끼자 잊은 줄 알았던 수마가 몰려왔다.

커튼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달빛이 나른하게 우리 위로 내려앉았다. 신시아가 아기를 재우듯 느릿하게 팔을 토닥였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고, 얼굴 근육이 편하게 이완됐다.

너무 긴장이 풀렸던 걸까? 졸음에 잠식된 뇌가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고 마음 깊숙한 곳에 담아 뒀던 의문을 끄집어냈다.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 좀 무례할 수도 있어.”

말끝이 고장 난 라디오처럼 길게 늘어졌다. 신시아는 단칼에 긍정했다.

“뭐든지.”

“너 혹시…… 동성 좋아해?”

내가 말해 놓고도 놀라서 입을 헙 다물었다.

예상외로 신시아는 화내기는커녕 묘하게 웃었다. 그가 세상에 남은 유일한 사람을 보듯 나를 직시하고, 한 글자마다 힘을 실어 말했다.

“글쎄, 아닐걸?”

“근데 나한텐 왜…….”

나는 희미해져 가는 의식을 붙잡으려고 노력하면서 입천장에 달라붙은 의문을 떼어내기 위해 애썼다.

“왜 그렇게 애매하게 굴어?”

그 말에 신시아가 옅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에 힘을 주며 그의 궤적을 쫓았다. 그가 내 가슴 위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주고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거야 내가 널…….”

나는 점점 멀어져 가는 목소리를 잡아채려 안간힘을 썼지만 본능은 의지보다 더 강력했다. 결국, 나는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마지막 눈 깜박임 사이로 언젠가 봤던 것 같기도 한 남자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모자이크처럼 흐릿한 광경에 내가 잠에 취해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완전히 시야가 암전됐고, 일어났을 땐 나 혼자뿐이었다.

***

“반가워요, 난 스칼렛이에요. 혜라 씨의 상사 될 사람이죠.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30대 중반 즈음 되어 보이는 여자가 호쾌하게 미소 지으며 악수를 건넸다. 자세는 곧았고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총명하게 빛났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짧게 자른 붉은 머리칼이 여자에게 딱 맞는 옷처럼 잘 어울렸다.

스칼렛이 스몰토크를 시도하며 앞장서서 걸었다. 우리는 길고 긴 나선형 계단을 걸어 올라가 3층에 당도했다. 기다란 복도 양옆으로 수많은 문들이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나타났다.

스칼렛은 끝에서 세 번째에 있는 문 앞에서 멈춰 서더니 문을 열고 들어가라는 듯이 손짓했다. 문 위에 ‘황실 예산 관리 1팀’이라 적힌 문패가 걸려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또 다른 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눈알을 굴려 기대했던 것보다 넓은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책상과 스탠드 옷걸이, 쓰레기통 따위가 복사해서 붙여 놓은 것처럼 좌우 대칭으로 놓여 있었다.

스칼렛이 왼쪽 탁자를 가리켰다.

“혜라 씨 자리는 여기예요. 내 자리는 저 문 너머에 있고.”

“아, 넵.”

나는 어색하게 웃고선 앞으로 내가 쓰게 될 탁자 위에 간소한 짐을 올려놨다. 해 봤자 아로네가 챙겨 준 간식 상자와 공책 한 권, 그리고 깃펜 여섯 개가 다였다.

“근데 다른 분은 아직 출근 안 하셨나 봐요?”

마주 보고 있는 책상이 놀라울 만큼 깨끗했다. 스칼렛이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요?”

“반대편 자리요.”

스칼렛이 알 만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가 안타깝다는 듯이 인상을 약하게 찌푸리고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원래 저 자리는 빈자리예요.”

“……예?”

빈자리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공포심을 조성했더라?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스칼렛이 내 상사라는 사실도 잠시 잊고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럼 1팀 인력이 팀장님이랑 저뿐이에요?”

“슬프게도, 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스칼렛이 허탈하게 웃으며 귀 아래로 간신히 내려온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손끝에서 짙은 체념이 묻어 나왔다.

“제가 왜 머리를 잘랐는지 알아요?”

“……왜 자르셨는데요?”

왠지 답을 알 것 같았지만 되물었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머리 감고 말릴 시간도 없이 일을 해야 해서 차라리 잘라 버린 건 아니겠지.

“너무 바빠서요. 신입이라는 신입은 오는 족족 한 달을 못 버티고 나가 버리니, 있는 사람이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하지 않겠어요?”

“아…….”

“혜라 씨가 와서 다행이에요. 그레이스 실장님에게 전해 듣기론 기립 박수를 받았다면서요?”

“그런 걸 받긴 했죠…….”

나는 면접 날 예언했던 일이 곧 현실로 펼쳐지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골라도 하필 이런 직장을 고른 과거의 나를 죽이고 싶었다.

이래서 아로네가 탁월한 선택이라며 좋아했던 걸까? 사람을 갈아서 굴러가는 재정부에 입사하면 금세 질려 다시 저택으로 돌아올 것 같아서?

만약 그렇다면 그 훌륭한 캐 해석에 기립 박수를 쳐 주고 싶다. 출근 첫날부터 퇴사하고 싶은데 이거 정상인가요?

벌써 멘탈이 나가서 멍을 때리는 내게 스칼렛은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사무실에서 층층이 쌓인 양피지 더미를 들고나왔다.

스칼렛의 허리 부근에서부터 시작해 목 부근을 맴도는 양피지 산의 높이가 가히 경이로웠다. 나는 서둘러 문서를 나누어 들었다.

“아, 고마워요. 이건 앞으로 혜라 씨가 검토해 줘야 하는 서류들이에요.”

“어…… 제가 방금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여기 있는 것들을 다 혜라 씨가 확인해 줘야 할 것 같다고 말했어요! 흠, 내일까지면 충분히 끝낼 수 있을 거예요.”

저 사람 진짜 진심인가? 스칼렛은 빙그레 웃으며 내 어깨를 툭 두드리곤 본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 얄미운 뒤통수를 한 대만 치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다. 나는 막막한 심정으로 내 할당량을 바라봤다.

어떻게 저 많은 걸 이틀 만에 다 끝내라는 거지? 이 정도 업무량이 재정부 평균인가? 아니 진짜로? 계속 버틴 고인 물이 이젠 썩은 물이 된 거야?

이 순간만큼 내게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없어서 슬펐던 적이 없다. 나는 울 것 같은 기분으로 의자에 앉았다. 허리와 엉덩이에 와 닿는 쿠션이 빌어먹게도 푹신했다.

허리 디스크와 치질을 핑계로 병가 낼 구실을 애초에 없애 버리려는 국가 차원의 계략이 분명했다.

사무실 문을 닫다 말고 스칼렛이 활기차게 소리쳤다.

“아 맞다, 퇴근하기 전에 오늘 마무리한 분량 저한테 가져다줘요!”

“네…….”

주먹이 운다 울어.

아직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집에 가고 싶었다. 나는 분노에 부들부들 떨며 깃펜을 쥐었다.

***

나는 점심시간이라는 그럴듯한 핑계로 사무실을 빠져나와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당연히 스칼렛도 함께였다. 상사와 단둘이 하는 점심이라니. 적어도 스칼렛이 꼰대 스타일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었다.

식당은 뷔페식으로 되어 있었다. 아침부터 머리를 굴린 탓에 포도당이 급격히 떨어진 나는 혈관이 살려 달라고 소리 지를 만한 음식들을 골라 접시를 가득 채웠다.

우리는 핫 스폿이라는 창가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너무 배가 고파서 접시째 들고 먹고 싶은 욕망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 내고 평범한 사람처럼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식사를 하는 중간중간에 스칼렛과 스몰토크를 나누며 나름의 관계를 구축해 가고 있는데, 익숙한 낯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상대방은 아직 날 못 본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재빨리 눈을 내리깔고 딴청을 피웠지만, 눈치 없는 스칼렛이 반색하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광신도처럼 내게 사인할 것을 종용하던 면접관들이었다. 쾌쾌한 몰골의 그들이 커피를 생수처럼 입에 들이붓다가 우리를 발견하고 얼굴에 환한 빛을 드리우며 다가왔다. 나는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에 빙의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게 누구야! 이곳에서 보게 되어 아주 기쁘네, 혜라 양. 일은 어떤가?”

“하하……. 할 만해요.”

양심이 있다면 그런 질문은 하면 안 되죠. 나는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내가 아직까지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는 순전히 아직도 풀리지 않은 데네브에 대한 앙금과 나만의 신념 때문이다. 칼을 뽑았으면 끝을 봐야지!

“말도 마요, 그레이스. 3시간 만에 절반가량을 끝냈다고요.”

“역시……. 자네는 우리 재정부의 미래야.”

한국 초등학생에게 가져다줘도 될 법한 어렵지 않은 보고서들이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컴퓨터와 엑셀과 계산기가 없는 세계에서 수기로 작성한 보고서에 계산 오류가 없는지 재확인하는 것이 다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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