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38)

<26화>

최근 며칠간 내가 하도 면전에서 제이든을 욕해서 그런지 이제는 해탈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좋은 쪽으로 생각해 보려고 노력해도 아로네의 외사랑이 성공할 확률을 시뮬레이션 돌려 보면 결과는 언제나 완벽한 제로였다.

유난히 애정 없는 결혼을 혐오하는 제이든은 결코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야 대외적으로 결혼할 사이이지만, 결국 제이든은 결혼을 무를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런 종류의 스토리는 질릴 정도로 봐 왔다. 잘생긴 황태자와 마탑주 사이에 낀 평민 소녀, 그리고 악녀. 사각 관계의 결말은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았다. 악녀는 벌을 받고, 평민 소녀는 황태자나 마탑주와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산다.

엄밀히 따지자면 아로네의 포지션은 악녀에 해당했다. 이곳이 소설 속은 아니지만 클리셰라는 것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나름의 법칙에 따르면, 아로네는 사랑의 실패에 좌절하며 무대에서 퇴장할 것이다.

그리고 제이든은 아마 신시아와 결혼하겠지. 왜냐면 아로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제이든이니까.

나는 제이든이 정말 싫었지만 아로네가 내 거센 반대를 무릅쓰더라도 무조건 그놈을 사랑해야 하는 거라면 기꺼이 져 줄 수 있었다.

그래, ‘사랑하는 것’까지만 겨우 이해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별 같잖은 새끼 때문에 밤낮 며칠을 울고불고 우울해한다? 그럼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이 나이 먹고 동생 앞에서 재롱도 피워 보고 생전 안 해 본 베이킹도 해 봤지만 놀라울 만큼 아로네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러니 어째, 앞으로는 강경책을 써야지.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아로네의 양어깨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붉은 눈가를 보자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했다.

“너 이런 식으로 굴 거면 나 당장 여기서 나갈 거야. 이번 일로 네가 제이든을 좋아하다 못해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건 알겠다. 근데 있잖아, 옆에서 네 상처 보듬어 주겠다고 쩔쩔매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냐? 어? 그 똥 같은 놈 하나 때문에 넋 나간 친구를 지켜보는 내 심정은 어떨 거 같냐고.”

나는 벅찬 숨을 가다듬으며 얼빠진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쯤 하면 됐어. 결혼까지 아직 시간은 많고, 네가 제이든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가능성이 아직까지는 존재해. 그러니까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

나를 알기 전의 아로네와 나를 안 후의 아로네는 분명 다를 것이라 믿었다. 내가 준 애정의 크기는 그동안의 결핍을 채우기에 턱없이 모자랐을 테지만, 그래도 나는 아로네가 조금이라도 변화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니 이 정도 독설에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싶었다. 예전에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내가 있으니까. 아로네는 굳이 제이든이 아니더라도 사랑받고 싶은 상대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 아로네는 그 사실을 알아야만 했다.

그가 혼란스럽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나는…… 그러니까 나는…….”

“운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원하는 게 있다면 노력해서 쟁취해야지. 네가 일기에 썼잖아. 어떻게 해서든지 결혼이 파투 나는 걸 막겠다고.”

하루 종일 골골거릴 바엔 차라리 제이든의 마음을 돌리는 데 에너지를 쏟으라는 뜻이었다. 나는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된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아로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로네가 바르르 떨리는 내 손끝을 입술을 깨물며 응시했다.

“내 손을 잡으면 그날 일은 훌훌 털어 버리는 거야. 알겠어?”

아로네는 한참 동안 고민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닿을 듯하다가도 금세 주춤거리며 사라졌다. 딜레마에 빠진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아로네의 치맛자락에 점점이 얼룩을 만들었다.

나는 저릿한 팔을 꿋꿋이 내밀며 아무 말 없이 아로네의 결단을 기다렸다.

“……넌 맞는 말만 하니까, 그래.”

이윽고 아로네는 애써 웃어 보였다. 나는 격한 포옹으로 대신 답했다. 그러나 마음 깊숙한 곳은 절망이란 홍수로 침몰하고 있었다.

***

나는 얼마 전 배송 받은 포멀한 디자인의 원피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시녀들이 꾸민 듯 안 꾸민 듯 단정하게 메이크업을 해 주고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하나로 틀어 올려 준 후였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내가 봐도 말끔하고 똑 부러져 보였다. 아로네가 내 주위를 천천히 돌며 나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나는 긴장하며 아로네의 평을 기다렸다. 5분쯤 지났을까, 그 애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완벽해. 겉모습만큼은 아주 손색이 없어.”

“그렇지? 딱 봐도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 같지?”

“그렇다고 해 줄게.”

이제 아로네는 내가 따로 설명해 주지 않아도 현대 언어를 대강 알아들었다. 그간 하루에 적어도 열 번씩 단어 설명해 준 보람이 있군.

“힝, 쪼잔하기는.”

“어른답게 굴어야지.”

“힝입니다.”

아로네가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얼마 전까지 제이든 때문에 골골대던 모습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생기 넘치는 표정이었다.

때마침 하인이 마차가 준비되었다고 일렀다. 나는 재빨리 정문을 향해 달리듯 걸었다. 등 뒤로 뛰지 말라는 아로네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로네는 나와 달리 체면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정문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나는 마차에 올라타지 않고 문 앞에 서서 아로네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유난히 맑은 하늘을 구경하고 있는데, 정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에 고개를 내리자 신시아와 데네브가 사이좋게 담소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었다.

내 시선을 눈치챈 그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필연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데네브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떠올랐다. 나는 아로네가 오기 전에 둘이 이곳에서 떠나길 열심히 기도했다.

시선을 피할까 말까 고민하는 순간을 가르고 신시아가 발랄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그동안 아로네의 심리 케어에 집중하느라 오랜만에 만나는 거였다.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지만.

“혜라! 어디가?”

“면접 보러.”

“면접? 어디로? 왜?”

“……황궁으로. 언제까지나 놀 순 없잖아.”

개구라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머리카락이 하얗게 셀 때까지 탱자탱자 놀 수 있다. 하지만 누구의 말이 도화선이 되어서 지금 이러고 있지.

나는 몰래 데네브를 째렸다. 조용히 우리의 대화를 관전하던 데네브가 역시나 끼어들었다.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네가, 황궁에?”

“와, 참 사람 상처받게 말씀하시네요.”

“내가 틀린 말 했나? 보나 마나 아로네가 힘을 써 줬겠지.”

“믿고 싶은 대로 믿으세요.”

재수 없는 놈. 통찰력 하나는 인정한다.

우리는 서로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나는 눈에 힘을 주었다. 한번 눈싸움이 시작된 이상 먼저 눈을 감거나 피하는 쪽이 지는 거다.

소공작을 대하는 태도치고는 매우 불량했다. 그러나 데네브는 내가 그딴 건 신경 안 쓴다는 걸 진작 알아채서 내 주제넘음을 부러 꼬집지 않았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느낌이랄까?

의미 없는 눈싸움을 벌이는 사이, 결국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아로네가 도착한 것이다. 아로네는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눈싸움은 데네브가 아로네에게 대꾸를 하려 고개를 틈으로써 싱겁게 끝났다. 나는 곧 이어질 살벌한 다툼을 직감하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아로네와 데네브는 남매 아니랄까 봐 둘 다 먼저 걸어오는 싸움을 절대 피하지 않았다. 차가운 이목구비에서 시작해서 흑발, 제비꽃을 닮은 눈동자, 우수한 두뇌, 가차 없는 성미…….

둘은 많은 부분에서 비슷했다. 서로를 싫어하는 이유는 차고 넘치겠지만, 결국엔 동족 혐오 아닐까?

“말이 나온 김에 묻지. 그렇게 애지중지 감싸고돌더니 갑자기 웬 황궁이지?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한숨도 안 나왔다. 내가 취직하는 데 제일 많이 공헌하신 분이 아무것도 모르는 꼴이 코미디 같았다. 내가 정말 모르겠냐는 눈빛을 보내도 데네브는 끄떡없었다. 아로네가 찬 바람 나게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네. 네가 언제부터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고 갑자기 추궁이야.”

“말 똑바로 해. 엄연히 난 네 손위야.”

“글쎄. 하나밖에 없는 오라버니 노릇을 했어야 말이지.”

이 남매는 항상 살벌하게 말싸움을 했다. 덕분에 사이에 낀 나와 신시아만 등이 터지는 중이었다. 하물며 싸움의 주된 테마인 나는 오죽하겠는가.

말의 수위는 점점 높아졌고, 그에 비례해서 둘의 언성도 점차 커졌다. 나는 이 싸움을 중재시킬 의무를 느꼈다.

“악몽 같은 너한테 도대체 얼마나 잘해 주길 바라는 거야? 양심도 없긴.”

“헛소리를 길게도 하네.”

“분명히 경고하는데, 계속 이렇게 건방지게 굴면…….”

나는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말 끊어서 정말 죄송한데요. 아로네, 지금 안 가면 면접에 늦지 않을까?”

아로네의 손을 살짝 끌어당기며 재촉하자 그가 가시지 않은 분노를 진정시키려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노기의 흔적이 말끔히 사라진 후였다. 나는 아로네의 탁월한 감정 제어 능력에 감탄했다.

아로네가 인사 한마디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나는 작별 인사를 하듯 데네브와 신시아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닥인 뒤 아로네를 따라 마차에 탔다.

문이 닫히기 전, 데네브가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영롱한 자안이 아이러니하게도 서슬 퍼렇게 빛났다.

“지켜보겠어. 똑바로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

나와 아로네는 굳이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아로네는 대놓고 무시했고, 나는 데네브의 신경을 돋울 요량으로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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