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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25/138)

<25화>

나는 근처에 있는 여자를 따라 황급히 드레스 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혔다. 아로네의 눈이 바쁘게 굴러가다가 내게서 멈췄다.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아는 척을 했고, 아로네가 미묘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데네브가 옅게 인상을 썼다. 나는 그에게 뭐 어쩌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로네는 바로 내게 오려고 했지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차마 그러지 못했다.

나는 데네브의 눈이 번뜩이는 것을 보고 기겁하며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 데네브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와 엮이면 일이 귀찮아질 것이 뻔해서이다.

나는 또 다른 구석을 찾아 데네브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숨었다. 멀대 같은 키를 백분 활용해서 목을 쭉 펴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조금 소름 돋았다.

저 새끼, 자기 홈그라운드에서 날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고 겁나 열심이잖아? 평소에는 벌레 취급하면서 무시하던 애가 갑자기 열렬히 나를 찾는 것이 성가셨다. 100% 며칠 전의 극딜을 재현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운명의 신은 내 편이었는지 타이밍 좋게 최종 보스가 등장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그리고 제이든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가 거대한 문 사이로 세 인영이 등장하자 사람들이 동시에 허리를 굽혔다. 하여간, 신분 높은 사람이 등장할 때마다 바짝 긴장해서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건 체질에 안 맞았다. 나는 이런 관행에 죽을 때까지 익숙해지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나는 마침 지나가는 웨이터를 불러 세우고 샴페인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가 진심이냐는 눈빛으로 바라보길래 한 잔 더 원샷해 줬다. 홀린 듯이 제이든의 얼굴을 쫓는 내 눈깔을 취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하고 싶었다.

“워후…….”

내가 아는 이름은 몇 되지도 않는데 어떻게 그 이름들이 하나 같이 완벽한 피조물일 수가 있지? 나는 끝없이 쏟아져 나오려는 감탄사를 속으로 삼키며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금을 녹여 만든 듯 반짝이는 제이든의 머리칼이 샹들리에의 빛을 받고 찬란하게 산란했다. 새파란 눈은 바다같이 광활하고 시원하여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그 속에 빠져들어 갈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달콤한 목소리로 선원들을 꾄다는 사이렌의 눈동자가 그와 같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진하고 긴 속눈썹을 한번 깜박일 때마다 짙은 그림자가 팔랑팔랑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볼록한 이마의 굴곡을 타고 내려와 높이 솟은 콧대는 조각칼로 세공한 것도 아닌데 그 끝이 첨예했고, 메이크업을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함에도 입술은 보기 좋은 선홍색을 띠었다.

정복을 입은 몸도 환상적이었다. 가슴과 어깨는 멀리서 봐도 탄탄하고 넓게 벌어졌고, 길쭉하게 뻗은 다리는 2m가 넘어 보였다. 그만큼 비율이 좋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인성이 별로지.’

사고가 성품에 다다르자 갑자기 흥이 팍 식었다.

나는 혀를 차면서도 제이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는 심기가 불편한 듯 시리도록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것마저 잘생겨 보였다.

어쩌면 아로네는 신이 빚은 외모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곰곰이 그의 얼굴을 뜯어보고 있자니 그다지 신빙성 없는 가설은 아니었다. 연회장의 모든 사람들이 아닌 척하면서도 힐끔힐끔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때마침 내 가설을 입증해 줄 인물이 나타났다. 아로네가 모든 주요 인사들에게 인사치레를 마치고 다가온 것이다.

나는 아로네에게 샴페인을 건네고 드레스를 살짝 들어 올렸다. 실크 소재의 드레스가 차르르 환상적인 주름을 만들었다.

“네가 사 준 드레스 어때?”

나는 패션 잡지의 모델을 흉내 내며 멋진 포즈를 취했다. 아로네가 피식 웃고선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잘 어울리네.”

“그치? 옷걸이가 좋아서 그래.”

아로네는 침착하게 말했지만 왠지 그의 신경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로네의 시선을 따라가다 그 끝에 제이든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분 어때?”

아로네가 샴페인 잔을 만지작거리며 쓸쓸하게 말했다. 연미색 샴페인이 위태롭게 출렁거렸다.

“모르겠어. 오늘이 지나가고 내일은 어떨까,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기분이야.”

“…….”

“언제든 내 얘기 들어 줄 거지?”

아로네와는 항상 약속을 하게 되는 것 같았다. 순간 꼭꼭 숨겨 뒀던 고민들이 불쑥 수면 위로 올라와 난잡하게 얽혔다.

면접을 무사히 치르고 입사하게 되면 이전만큼 자주 아로네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한 절기 내내 함께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아로네의 엇나간 마음을 정상 궤도로 돌려놓는 데 충분했을까?

나 없는 사이에 아로네가 상처받는 일을 겪으면 어떡하지? 삭막한 저택에서 혼자 쓸쓸해하는 건 아닐까?

찰나의 시간 동안 수많은 의문이 산발적으로 떠올랐다. 결국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답지 않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취직은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지 않고, 어쩌면 그런 ‘거리 둠’이 우리 둘 모두에게 있어서 각자의 삶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이자 연습이 될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언젠간 떨어져 살아야 했으니까.

“당연한 걸 묻고 그래.”

나는 밝게 웃었다. 아로네가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고, 나는 자본주의 미소를 더욱 진하게 지었다.

아무리 아로네라고 해도 서비스직을 갈고닦으며 익힌 스킬을 꿰뚫어 보지는 못할 것이다. 애매함에 갈팡질팡하던 아로네는 공작의 부름을 듣고 내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가 봐야 할 것 같아. 지금 발표할 건가 봐.”

“그래, 난 테라스에 있을게.”

“응.”

공작이 샴페인 잔을 두드려 이목을 집중시켰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의 시선이 연회장 중앙에 몰렸다.

황제는 수십 쌍의 눈을 마주하면서도 전혀 주눅 든 기색이 없었다. 그는 뜸 들이지 않고 바로 아로네와 제이든의 결혼 소식을 발표했다.

역시나 좌중은 경악과 놀람으로 술렁거렸다. 폭탄 발언을 한 황제는 오직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는 듯이 아로네에게 몇 마디를 건네고 바로 황후와 떠났다.

그리고 나는 스치듯 눈이 마주친 아로네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빈 테라스를 찾았다.

***

연회는 늦게까지 이어졌다. 커튼 밖으로 웃고 떠드는 소리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모든 소음을 뒤로하고 석양이 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로네가 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사람들의 반응으로부터 권태와 상처를 받지 않은 것 같았다.

“방에 갈까 그냥.”

나는 테라스 난간에 턱을 괴고 고민하다가 결국 피로에 찌든 몸을 좀 쉬게 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드레스에 진 주름을 피고 자리를 뜨려는 참에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정원 한구석에서 밀회를 나누는 커플을 발견해 버렸다.

느릅나무의 잎사귀들이 얽히고설켜서 신원 파악이 어려웠다. 나는 실눈을 뜨고 두 인영을 자세히 관찰했다. 개성 있는 머리 색깔이 안타깝게도 익숙했다.

“저 새끼 진짜 또라이 아니야?”

제이든과 신시아였다. 그들은 벤치에 가깝게 붙어 앉아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몰아친 분노를 몸이 감당하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나는 손등에 힘줄이 잔뜩 불거지도록 난간을 힘주어 잡았다.

미친놈. 아무리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그렇지 결혼 발표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한눈을 팔아?

그 자리에 한시라도 더 있으면 감정을 못 참고 소리 지를 것 같아서 나는 황급히 커튼을 걷었다. 아니, 걷으려고 했지만 나보다 먼저 커튼을 걷은 인물이 있었다. 아로네가 지친 기색으로 테라스에 들어섰다.

“아, 여기 있었네.”

나는 낭패감을 느끼면서도 아로네를 실내로 이끌려고 최선의 노력을 했다. 죽어도 아로네에게 저 광경을 보여 줄 수 없었다.

“어…… 근데 그만 방에 가 보려고, 피곤해서. 너는 어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잘도 위선을 떠는 꼴이 질려서 도망 왔어. 너랑 노을이나 보려고 했…….”

아로네가 인상을 찌푸리고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고문 같은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나는 어찌할 줄 모르고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하……. 내가 고작, 고작 저런 애를…….”

달큼한 꽃 내음을 머금은 봄바람이 살랑 불었다. 그것을 기폭제로 아로네가 가련하게 울기 시작했다. 아로네는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입을 앙다물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아로네를 끌어안고 가여운 사랑을 위로했다. 불타오르는 해의 선혈이 한입에 우리를 집어삼켰다. 명멸하는 시야 사이로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로네를 더욱 꽉 끌어안을 뿐이었다.

***

최악의 생일이 지난 뒤, 한동안 아로네는 생기 잃은 꽃처럼 골골거렸다.

사람들은 꽃과 호수를 찾아 나들이에 나서는데 아로네는 아름답게 공중을 유영하는 민들레 홀씨를 봐도 울었고, 꽃을 엮은 화관을 선물해도 얼굴을 일그러뜨렸으며, 디저트를 직접 만들어 대접해도 손을 내저었다.

아로네는 느리고 순조롭게 망가지고 있었다. 나아질 것이라 굳게 믿었지만, 어둠의 기운은 점점 빠른 속도로 그 애를 잠식했다.

나는 더 이상 모든 것을 시간에만 맡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드디어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그렇게 그 새끼가 좋아? 그 얼굴만 반반한 놈이? 걔 아니면 못 살겠어?”

“……응.”

“나는 네가 도대체 걔의 어느 면을 보고 반한 건지 이해가 안 간다.”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차자 아로네가 마지막 낙엽 같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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