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신시아는 내 정체에 대해 유난히 궁금해했다. 순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은근슬쩍 과거를 캐묻는데, 그 유도 신문 실력이 정말 기가 막힐 정도다.
“수도 출신이면 등불 축제에도 가 봤겠네?”
“뭐, 그렇지.”
“작년에도 왔었어? 그때 공녀님은 혼자 계셨던 거 같은데, 여름부터 알았다더니 그 이후에 만났나 봐?”
“그런 셈…….”
잠깐. 등불 축제가 있고 나서 일주일 만에 2학기가 시작되지 않았던가?
내가 여기서 긍정을 해 버리면 데네브의 음모론이 그것 보라며 비웃는 꼴이 된다. 뭐,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마법처럼 불쑥 나타난 건 맞지. 그래서 마부도 데네브도 공작도 신시아도 모두 어리둥절해하는 거고.
하지만 누가 들어도 수상한 진실을 구태여 시인하는 건, 얼간이나 할 짓 아닌가?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신시아를 흘겼다. 하마터면 그 얼간이가 될 뻔했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양 헤실헤실 웃는 낯짝이 얄미웠다. 나는 분통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오, 가끔씩 보면 너 겁나 교묘해.”
“너 같은 애가 숨기는 건데, 너라면 안 궁금하겠어?”
너 같은 애가 도대체 무슨 의미일지 고민했다. 돌려 까는 건가? 나같이 생각 없어 보이는 애한테 비밀이 있다니까 신기해서?
“뭐래. 하여튼, 나는 네가 백 번 물어봐도 백 번 다 안 알려 줄 거야. 그러니까 내 신비주의 컨셉에 협조 좀 해. 가끔씩 밖에 나갈 때 소문의 그 사람 된 기분이 은근 재미있단 말이야.”
“하지만 공녀님은 알잖아. 진짜 네가 누군지.”
진짜 환장할 노릇이었다. 주변에 속이 시꺼먼 애들밖에 없어서 그런지 신시아는 여자 사람 친구인 내게 좀 집착하는 면이 있었다.
……아니다. 집착은 아로네한테 조금 더 어울리는 표현이고. 신시아는 뭐랄까, 내 선 안에 들어오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냥꾼 같은 치밀함이 있었다.
눈치는 기가 막히게 빨라서 진심으로 신경질 내기 전에 바로 발 빼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진작 한판 떴을 거다.
두 번째 만남까지만 해도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전형적인 캔디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은 두고 봐야 해. 맨날 배시시 웃고 다니는 애한테 이런 능구렁이 같은 면이 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알까?
그리고 신시아는 은근히 자신과 아로네를 비교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열등감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고, 아로네의 유일인 나를 빼앗고자 하는 파괴적 욕망도 느껴지지도 않는데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를 일이다.
이게 바로 인기인의 삶이라는 걸까? 나는 슈퍼스타는 피곤하다고 생각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렇긴 하지.”
신시아가 턱을 괴고 물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심정이 얼핏 드러났다.
“왜 하필 공녀님이었어?”
‘왜 하필’이라니? 나는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순간 음습한 질투가 떠올랐다가 미처 잡아챌 틈도 없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잘못 봤나? 문득 싸한 느낌이 들었지만 천진한 얼굴을 보자니 방금 본 것이 신기루 같았다.
“……뭐, 운명이었던 거지.”
“재미없기는.”
신시아가 김이 샜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입술을 삐죽 내민 그를 외면하고 딴청을 피웠다.
끈덕지게 내 시선을 쫒던 신시아가 별안간 크게 박수를 쳤다. 무의식적으로 돌아간 눈동자가 활기찬 얼굴을 담았다.
“좋아! 그럼 내 비밀 얘기해 줄게. 나중에 네 얘기도 해 줘야 한다?”
“뭐? 갑자기?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어!”
“너한테만 말해 주는 비밀이니까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알겠지?”
신시아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는 모습이 지나치게 천연해서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아무한테도 말 안 한 걸 왜 만난 지 얼마 안 된 나한테 해?
어이없어하는 내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시아가 말했다. 나는 반쯤 포기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뚫려 있는 입을 내가 어떻게 막겠어…….
“나 사실 플라스마 제국 사람이 아니야. 데우스 왕국에서 왔어.”
데우스 왕국이라. 분명 들어 본 기억이 있는데. 하여간 생판 다른 나라로 오니까 여기선 상식인 정보도 재깍재깍 안 떠오른단 말이야.
“……아, 황후의 모국?”
“맞아. 열한 살 때 이곳에 왔지.”
나는 기억을 더듬어 아로네가 간략하게 읊어 줬던 기초 상식을 떠올렸다. 그리고 신시아가 열한 살 때 전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전쟁에 떠밀려 여기까지 온 거구나. 근데 왜 출신을 속였지? 패전국 출신이라는 걸 밝히면 무조건 따라올 꼬리표가 성가셔서?
신시아가 씁쓸하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여덟 살 때 어머니가 누명을 쓰고 돌아가시면서 나는 숨어 살아야 했어. 그래서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산기슭 구석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지.”
신시아가 흘긋 내 눈치를 봤다. 나는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살 만했어. 엄격했지만 내 보호자는 분명 날 아꼈고, 시간이 흐르는 것과 더불어 조금씩 양지로 나갈 수 있었거든. 그러나 마침내 떳떳하게 살 수 있으려던 참에 플라스마 제국이 전쟁을 선포했어. 브랜던은 날 지키다가 죽었고, 결국 난 홀로 남겨졌지. ……쓸모없는 전쟁을 일으킨 제국이 죽도록 원망스러웠어.”
신시아의 눈이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나는 검붉은 감정의 조각을 멍하니 엿보았다. 쟤가 저런 눈빛을 지을 수도 있구나.
“하지만 복수 이전에 더 큰 문제가 있었어. 작고 어린 애가 그 난리 속에서 어떻게 혼자 살아남을 수 있겠어? 나는 이리저리 거지처럼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지.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어. 내 목숨은 내 것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러다가…… 운 좋게도 제국 공영 보육원에 들어가게 되었어. 그 뒤로는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일 거야.”
“너…….”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버버거렸다. 신시아가 이해한다는 듯 아리게 미소 지었다. 만나는 애들마다 불행한 과거를 가진 것이 우연일까?
나는 신중히 말을 골랐다. 신시아가 위로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그런 부문에 있어서는 영 젬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튀어나온 건 생뚱맞은 소리였다.
“……근데 어떻게 제이든이랑 친하게 지낼 수 있어?”
아, 공감 능력 떨어지는 사람 같다. 나는 속으로 자책하면서도 신시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신시아가 잠시 얼빠진 얼굴을 했다가 이윽고 깔깔대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왤까? 넌 똑똑하잖아.”
눈을 반달로 접으며 사랑스럽게 웃는 신시아의 모습이 이전과 달라 보였다. 전에는 마냥 귀여워 보였다면 지금은 어쩐지 싸했다. 기분 탓일까?
신시아는 제국에 대한 강렬한 복수심을 품었다. 쫓기는 삶이었지만 악착같이 살아남았고, 눈부신 능력을 갈고닦아 제국에서 날고 기는 이들이 모인다는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 후, 장차 제국을 이끌어갈 핵심 세력인 제이든, 에단, 데네브와 친해져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내가 신시아였다면 원망하다 못해 증오하는 제국에서 중심을 이루는 그들과 절대 친해지고 싶지 않을 거 같은데…….
왜 그랬을까? 왜 하필 그 남자 세 명이지?
“헐.”
순간 번쩍하고 신의 계시처럼 깨달음이 내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신시아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래…… 걔네 낯짝이 황홀할 정도로 반반하긴 하더라.”
그렇다. 지금 신시아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진 게 분명하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걸 여기서 볼 줄이야. 정말 말도 안 되는 증후군이라 생각했건만,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측은한 마음으로 그를 응시하자 신시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자의 눈빛이었다.
“그래, 잘못되었다는 건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겠지. 깨달음 뒤는 온전히 네 몫이야, 신시아.”
신시아가 인정사정없이 얼굴을 구겼다. 그 모습이 바람에 정처 없이 꺾이는 들꽃처럼 외롭고 위태로워 보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검지를 까닥이며 신시아의 입을 막았다.
“음~ 굳이 말 안 해도 아니까 괜찮아.”
때마침 창밖으로 마차 바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외출했던 아로네가 도착한 것이다.
나는 구겨진 옷 주름을 탁탁 펴고 멍하게 내 손끝만 쫒는 신시아에게 말했다.
“어쨌든 이 언니는 너 응원한다! 파이팅!”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 아무래도 많은 생각이 들겠지.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문을 열었다.
***
아로네를 마중하러 나갈까 싶어서 날듯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데 내 오랜 숙적을 마주쳐 버렸다. 데네브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술을 짓씹었다. 어라, 조금 상처받았을지도.
“아니 저랑 마주친 게 그렇게 끔찍해요? 요즘 쥐 죽은 듯이 살았는데 이상하다…….”
데네브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러고선 예의 그 재수 없는 말투로 내 심기를 비비 꼬았다.
“쥐 죽은 듯이? 말 한번 잘했네. 네가 객식구처럼 눌러앉은 이후로 예산 지출이 얼마나 늘어났는지는 아나?”
“……그게 불만이면 진작 얘기하시지 왜 꼭 아로네 없을 때 말해요?”
이렇게 면전에서 객식구 취급을 받으니 화가 나기도 했지만 솔직히 양심도 많이 찔렸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이 불리한 대화에서 빠져나갈 각을 쟀다. 그러자 데네브는 이때다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 옳다구나 하며 비난을 쏟아부었다.
“아로네가 네 모든 걸 감싸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 애의 성인식 선물도 제대로 준비 못 하면서 많이도 바라는군.”
“그건…….”
“혀에 기름칠을 한 너라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나 보지?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아로네가 없으면 어떻게 사려고?”
“그렇게까지 제 걱정을 해 주시는지는 처음 알았네요.”
요컨대 네 알 바 없다는 얘기다. 데네브는 같잖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