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38)

<22화>

루나와 베키가 진심으로 후회된다는 표정을 했다. 그리고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무언의 합의를 마치고 내게 책을 건네주었다. ‘북쪽 대공은 왜 마부에게만 흰 빵을 주었을까’라는 제목이었다.

전형적인 제목이 내 가슴을 뛰게 했다. 책을 받아들이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이 꿈 같은 상황이 믿기지 않아 긴가민가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인자하게 웃으며 내 양손을 부여잡았다.

“이걸 정말 내게……?”

“그럼요.”

“좋은 건 같이 나누어야죠.”

그날부터 우리는 차례대로 책을 돌려보고 정기적으로 만나서 토론을 했다. 우리는 그동안 서로 데면데면했던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침을 튀겨 가며 공이 어떠했느니, 수가 어떠했느니에 대해 떠들어 댔다.

그들은 훌륭한 덕질 메이트였다.

아, 다음 상대에게 책을 전달해 줄 때의 그 짜릿함이란. 우리는 첩보 요원을 방불케 하는 신속함으로 은밀하게 물건을 전달했다.

물건을 건네주고 듬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베키를 보고 있노라면 뽀뽀를 퍼부어 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여하튼 그런 연유로 나는 멀쩡한 책의 표지를 덧씌운 7번째 책을 읽고 있었다. 물론 아로네는 내가 이런 책을 읽는 줄 전혀 몰랐다. 와, 아로네에게 이런 음란 소설을 들킨다니.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아로네가 내 얼굴을 묘사하다 말고 말을 붙여 왔다. 마침 하이라이트가 시작되려던 참이었기에 나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로네가 내가 보던 책을 찜찜하다는 듯이 곁눈질했다. 찔리는 게 아주 많은 나는 가짜 책 표지를 더듬거렸다.

“혹시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어어, 뭔데……?”

“요즘 시녀들 사이에서 이상한 유행이 돈다던데……. 너도 남자들끼리 이상한 짓 하는 거 보는 거 아니지? 나는 너 믿어.”

“……야, 나를 뭘로 보고! 당연히 그런 거 안 보지. 그런 유행이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아로네는 의심을 거두고 다시 바쁘게 붓을 놀렸다.

나는 앞으로 책 단속을 더더욱 빡세게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아로네의 방에서 읽긴 글렀으니 내 방에서 마저 읽을 요량이었다.

뒷내용이 궁금해서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후다닥 인사하고 도망치듯 떠나려는데 누군가가 나보다 먼저 문을 열었다. 공작의 비서였다.

백발이 성한 노년의 신사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평소 공작은 아로네에게 쥐뿔만큼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수족인 집사 또한 별로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합리적 추론의 결과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챘다. 아로네가 탁, 소리 나게 붓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지?”

“공작님의 서재에서 직접 듣는 것이 나으실 듯합니다, 공녀님.”

아로네가 같이 가겠느냐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고민했지만 공작을 마주하기가 껄끄러워서 거절의 의미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

마저 책을 읽고 다음 차례인 루나에게 넘겨줄 때까지도 아로네는 오지 않았다. 나는 소파에 편안히 기댄 채 벽지에 그려진 문양의 개수를 하릴없이 세었다.

아흔 가까이 셌을 때 즈음 아로네가 굳은 표정으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렇게 경직된 모습은 이곳에 와서 처음 봤다. 어쩐지 예감이 안 좋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 그 애에게 달려갔다.

“왜? 무슨 일이래? 큰일이야? 말 좀 해 봐!”

“그만! 네가 말할 틈을 안 주잖아, 지금.”

“아.”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평상시의 페이스로 돌아온 아로네가 나를 소파에 앉히고 캐모마일 차를 우렸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나서도 아로네는 말이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심각한 일이길래 저렇게 뜸을 들일까 싶었다. 절로 다리가 덜덜 떨렸다. 눈을 내리깔고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아로네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영롱한 보랏빛 위로 다양한 감정들이 난잡하게 뒤엉켜 부유했다. 나는 그저 고요히 존재하며 검게 얼룩진 혼돈의 색을 하나씩 분류했다. 기쁨, 당황, 두려움, 의문, 그리고 다시 기쁨.

“결혼식 날짜가 잡혔어.”

“……뭐?”

아직 열아홉 살밖에 안 된 애가 뭘 한다고? 나는 찻잔을 엎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인식에서 발표하고, 내년 가을 즈음에 하자더라.”

“뭐? 네 생일이라면 다음 달이고……. 그러니까, 이런 개나리 십장생! 내년에 결혼한다고?”

정략결혼이 다 그렇다지만 약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결혼식을 올려? 설마 제이든이 헛짓거리하기 전에 빨리 해치울 심산인가? 이야, 머리 좀 썼군. 신부가 아로네만 아니었다면 진심으로 그 현명함을 칭찬했을 거야.

“……축하해 줄 줄 알았는데.”

아로네가 말을 흐렸다. 나를 살짝 비껴간 시선에서 섭섭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제이든과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겠어? 불행할 것이 뻔한 미래를 어떻게 웃으면서 기뻐하냐고. 내가 제이든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것은 본인이 제일 잘 알면서.

많은 말들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하지 못했다. 감히 그러지 못했다. 내가 반대하고 싫어한다고 틀어질 계획도 아닐뿐더러, 몇 달간 이곳에 머무르며 어느 정도 이곳의 문화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싹 다 불태워 버리고 싶은 코르셋을 부적처럼 입고 다니는 여자들, 신분에 따라 범죄의 경중이 달라지는 사회, 평민의 출세를 가로막는 유리 천장…….

사회에서 아로네의 위치가 조건 좋은 신붓감밖에 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열아홉 살이 되자마자 결혼하는 게 경악할 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공녀로 태어난 이상 아로네는 언젠가 정치적 이익 관계에 따라 정략결혼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아로네가 제이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차피 팔리듯 하게 될 결혼이라면 좋아하는 사람과 하는 편이 훨씬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물론 일방적인 관계지만.

그 애에게 닥친 현실과 미래가 가시밭길이라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는 걸 우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상대와 자신을 소진시키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눈과 귀가 멀 정도로 간절한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아로네가 무슨 생각으로 계속 짝사랑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애초에 이해하고 싶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그 마음은 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척이나 행복해하는 애를 보니 구태여 그 차가운 말을 해야 할까 의문이 들었다. 결국 난 어설프게나마 웃기로 했다.

“……축하해, 아로네. 제발 행복하길 바랄게.”

미처 둥글게 다듬지 못한 감정조차도 아로네는 기쁘게 받아 주었다. 내 떨떠름한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왜 저렇게 기뻐하는지 너무 잘 알겠어서 더 착잡했다.

주변에 그 애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그래서 반쪽 축하조차 기꺼운 것이다. 우리 아로네 안쓰러워서 어떡하냐 정말.

입가에 미소를 걸치고 그림을 마무리하는 아로네를 바라봤다. 제이든의 마음에 딴 사람한테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애랑 결혼하는 게 저렇게나 좋을까?

언제가 되든 그 을의 마음을 반드시 없애주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인생 참 얄궂다. 이렇게나 갑자기 상황이 종결되는 게 어디 있어?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

결혼이 기정사실화되고 나서부터 아로네는 나와 놀 시간도 포기하고 성인식 준비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그는 아주 사소한 일. 예컨대 연회장에 제공될 디저트의 종류부터 자리 배치 및 연회장 디자인까지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그 이유는 그날 국혼이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아로네는 하루가 멀다 하고 히스테릭해져 갔다.

그간 내가 잔소리를 지겹도록 한 덕분에 시종들에게 화풀이를 하지는 않았지만 때론 눈빛만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법이다.

스트레스에 파묻힌 아로네를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안타까웠다. 이곳 문화에 익숙해졌다 한들 중요한 행사 조직에 가담을 할 만큼 이해도가 높아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로네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닐 동안 자연스레 혼자 남겨진 나는 종종 신시아와 담소를 나누게 되었다. 물론 내가 직접 신시아를 찾아가서 성사된 만남은 아니다.

너무 심심해서 한량처럼 저택 주변을 어슬렁거렸던 날 신시아를 우연히 마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신시아는 언젠가의 나들이를 상기시키며 차 한 잔 같이하지 않겠냐고 권했다.

순간 아로네 얼굴이 떠올라서 잠시 고민했지만, 첫 말다툼이 아로네의 납득으로 이어진 것을 기억하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전의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신시아 방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로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줬다. 당연히 아로네는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때처럼 얼굴을 굳히고 따지진 않았다.

확실히 그때 서로 할 말 다 하며 응어리진 감정을 푼 게 도움이 된 것 같다.

근데 솔직히 내가 신시아라면 나랑 노는 게 조금 찝찝할 거 같은데, 신기하게도 신시아는 언제나 나를 친근하게 대했다.

아로네가 자리를 비웠을 때를 귀신같이 알고 찾아와 유명 제과점에서 사 왔다는 디저트를 흔들어 보이는 게 그 증거였다.

아로네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신시아를 돌려보내기엔 내가 그 정도로 칼 같고 매정하진 않아서 나는 항상 어쩔 수 없이 신시아를 방에 들였다.

어쨌든 신시아의 남다른 해맑음 덕분에 우리는 어느덧 개인적인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다다랐다. 반말을 튼 지도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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