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38)

<21화>

“그럼 된 거잖아. 뭐 하러 걔한테 잘해 줘? ……이제야 말하지만 걔랑 인사하고 지내기로 했으면서 나한테 말 안 해 준 거, 솔직히 서운했었어.”

아로네가 서운했는지는 미처 몰랐다. 나는 말을 골랐다.

“……첫 번째, 너한테 바로 얘기 안 해 준 이유는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올 게 뻔해서야. 경험상 신시아랑 별로 마주칠 것 같지도 않은 데다가 걔랑 통성명했다는 얘기하면 너 분명 심기 불편해할 거였잖아. 그 토라진 마음 풀어 주기가 솔직히 번거로워서 얘기 안 했던 건데, 네가 속에 담고 있을 줄 알았으면 진작 할 걸 그랬다. 그건 미안.”

나는 가쁜 숨을 고르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 잘해 준 게 아니라 그냥 보통 사람 대하듯 한 거야. 난 누구한테나 다 그런 식으로 대해. 너도 알잖아.”

나는 이 말을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확실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해 둬야 나중에 불필요한 다툼이 없으리라 확신했기에 기어코 입을 열었다.

“……근데 있잖아. 만약 내가 걔한테 진짜로 잘해 준다고 해도 뭐가 문제인지 정말 모르겠어. 어쨌든 괴롭힌 건 너고 피해자는 신시아잖아. 새빠지게 공부해서 들어간 학교에서 따돌림이나 당한 애한테 좀 착하게 말해 주면 뭐가 덧나? 너더러 그렇게 하라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내가 뭐 맨날 신시아 만나? 맨날 너랑 붙어 다니다가 오늘처럼 어쩌다 만나지.”

정말 모르겠다. 내가 너무 로봇처럼 딱딱 끊어서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중학생 때, 그럭저럭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애가 그 당시 내 가장 친한 친구를 못살게 굴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사이에서 무척 곤란했던 적이 있다.

아직도 그 애들의 이름이 기억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죽도록 힘들었다는 친구의 고백을 듣고 가해자가 어찌나 밉던지. 그 후로 난 가해자와 연을 끊었다.

그런데 지금은 가해자 편에 서 있네. 그때 느꼈던 감정이 아직도 선명하면 아로네의 미움에 동화되어선 안 되는 거 아닐까?

아로네가 차갑게 비소했다. 나는 문득 몹시 지쳐서 그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이 소모전을 빨리 끝내고 싶다는 바람이 들었다.

“……왜, 차라리 처음부터 그 애랑 만났으면 좋았을 거라고 말하지 그래?”

“말을 왜 그렇게 해?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잖아.”

아로네가 그런 말을 한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진심으로 충격받은 표정으로 아로네를 바라보았다. 그는 방금 뱉은 말을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설마 너 지금 불안해서 그러는 거야? 내가 신시아한테 가 버릴까 봐?”

아로네가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시선을 피했다. 나는 격해진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부드럽게 말하고자 노력했다.

“난 다른 사람들과 달라. 그때 너한테 약속도 했잖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네게 등을 돌려도 나만큼은 끝까지 남아 있겠다고. 왜 내 말을 못 믿어?”

“널 못 믿는 게 아니야. 그 애를 못 믿는 거지.”

“눈앞에 있는 나만 믿어. 그거면 충분하잖아.”

아로네가 침묵한 채 내 눈을 들여다보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진짜 신시아한테 아무 생각 없는 거지?”

“그래.”

“만에 하나 그 애와 가까워진다 할지라도 언제나 나를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그걸 꼭 약속해야 아는 거야? 당연하지.”

“……그럼 됐어.”

우리의 첫 말다툼은 뜨거운 포옹으로 마무리됐다.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지친 것도 사실이었으나 그럼에도 나는 아로네가 싫지 않았다. 이제 와서 멀리하기엔 아로네는 이미 내 삶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

아로네랑 너무 격렬하게 싸운 탓인가? 나는 한밤중 뱃가죽이 찢어질 것만 같은 허기짐을 느끼며 깨어났다.

“와, 너무 배고프다. 어쩜 이렇게 배고플 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정말 너무 배고프다.”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거의 천둥 같았다. 이러다 옆방에서 시끄럽다고 쫓아오는 건 아닐지 조금 걱정이 됐다. 나는 배를 문지르며 어슬렁어슬렁 방 안을 돌아다녔다. 사탕 하나쯤은 어디선가 굴러다니고 있겠지?

그러나 탁자 위 커다란 간식 상자를 뒤져 봐도 이게 웬걸, 도대체 언제 다 먹은 건지 먼지만 풀풀 날렸다.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럴 수가. 정녕 해 뜰 때까지 손가락만 빨아야 하는 것인가……?”

나는 소파에 걸터앉아 다리를 덜덜 떨었다. 그 와중에도 허기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나는 한참 고민한 끝에 나이트가운을 입었다. 이곳에 온 이래로 처음 주방을 털 생각이었다.

나는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살금살금 걸었다. 저번처럼 정원을 산책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무려 식량을 털러 가는 중이기 때문에 심장이 유례없이 빠르게 뛰었다.

밤이 늦은 만큼 사위는 고요했다. 내가 내뱉는 숨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나는 난데없이 꼬르륵 소리가 울릴까 봐 복부에 힘을 주고 천천히 층계로 향했다.

운 좋게도 나는 1층까지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내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주방에 가기 위해선 도중에 드넓은 홀을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아직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잽싸게 뛰어갈 요량으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막 발돋움을 하려던 찰나에 반대편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나는 주변에 있는 장식장 뒤에 몸을 숨기고 왼쪽 눈만 빼꼼 내밀었다.

발소리는 점점 크게 울렸다. 나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끝이 축축하게 젖었다.

어둠 속에서 나온 것은 훤칠한 체격의 남자였다. 어두워서 얼굴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지만 풍기는 분위기로 말미암아 확실히 초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무척 급해 보였다. 뭐가 저렇게 바쁘지? 화장실 급한가?

나는 계단을 세 개씩 뛰어 올라가는 그를 흥미롭게 관찰했다. 그때, 달을 가렸던 구름이 걷히며 밝은 달빛이 창문을 지나던 그의 옆태를 비추었다. 연한 금발이 반짝이는 환상이 일었다.

“맙소사…….”

옆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는 평생의 이상형을 목도하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저런 미인을 어떻게 지금에서야 발견한 거지? 내가 그동안 얼마나 저택을 싸돌아다녔는데!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눈 깜짝하는 사이에 사라진 남자의 뒷모습을 아쉬워하는 한편, 그 옆태를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했다. 그리고 원래의 본분을 잊지 않고 비장하게 주방에 쳐들어갔다. 그래, 지금 당장은 내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먼저다.

나는 딸기 한 박스를 우르르 입안에 쏟아 넣으며 굳게 다짐했다. 아침이 밝으면 반드시 남자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 누구인지 찾아내고야 말겠어.

하지만 결과는 절망스러웠다. 눈을 뜨자마자 저택을 휘젓고 다녔지만 금발의 미인에 대해 다들 애꿎은 사람만 말했다. 낙담하는 내게 아로네가 유령을 본 거 아니냐고 괜히 겁을 줬다.

나는 웬만한 사람들은 다 붙잡고 남자의 인상착의를 물었지만 어떻게 된 게 남자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쯤 되니 나도 소름이 돋아서 결국 간밤의 기억을 지워 버리기로 했다.

***

사건은 갑자기 터졌다.

그날은 여느 봄날처럼 창밖으로 꽃잎이 휘날리고, 바람이 풀 내음을 머금고 불어와 숨을 들이쉬면 싱그러운 향이 폐부를 가득 채우던 날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뒹굴면서 베키로부터 입수한 소설을 읽었다. 아로네는 그런 나를 모델 삼아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베키의 이야기를 하자면 바야흐로 나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 나는 혼자 산책 중이었다. 아로네가 황궁에 볼일이 있다며 외출했기 때문이다.

한량처럼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베키와 루나를 발견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글쎄, 둘이 담벼락 넝쿨 아래 숨어서 킥킥대는 게 아니던가.

당연히 호기심이 일어서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레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는데, 세상에나, 그들은 소년들의 사랑을 문란하게 그려 낸 소설을 얘기하고 있었다. 할렐루야였다.

이 보수적이고 꽉 막힌 세계에도 비엘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발갛게 얼굴을 물들이며 공수를 토론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부지불식간에 강렬한 환희가 몰아쳤다.

핸드폰도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할 일이라곤 정말 없었다. 이렇게까지 할 일이 한정적일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할 게 없었다.

그런데 비엘이라니요, 선생님! 나는 그 순간만큼은 어색함 따위 잊어버리고 마치 빨간 깃발을 보고 흥분한 황소처럼 그들에게 돌진했다.

“뭐야! 왜 나 빼고 맛있는! 아니, 재미있는 거 봐요?”

그때 난 반쯤 돌아 있었다. 미친 듯이 그들을 잡고 흔들자 그들은 놀랐다가도 금세 눈을 반짝이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정열이 득시글거리는 눈빛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혹시…… 혜라 님도……?”

“맞아요…… 나도…….”

우리는 동시에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해가 하늘 한가운데에 떠 있는 시간이었지만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조차 겁을 먹고 외면할 만큼 음침한 표정이었다.

무뚝뚝한 줄로만 알았던 루나가 딴 사람처럼 발랄하게 말했다. 나는 내 인간관계가 한층 더 넓어졌음을 직감했다.

“이 저택에서 동지를 찾을 수 있을지 몰랐어요.”

나는 비장하게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이 얼마나 더 있죠?”

“우리 세 명이 다예요.”

“뭐라고요? 다들 인생을 헛살고 있네…….”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비련하게 탄식했다. 이 시대 최고의 오락거리를 마다하다니.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 거지?

베키가 청량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어받았다.

“내용이 좀…… 그렇다 보니까 음지에서나 유명해요. 그런데 혜라 님도 좋아하실 줄은 몰랐어요.”

“흥, 그거야 루나랑 베키가 날 편견 어린 시선으로 봤으니까 그렇죠. 내가 얼마나 열려 있는 사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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