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제 몸을 집어삼킬 정도로 강렬한 분노와 살의를 가지는 것.”
아로네가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며 말했다. 어쩐지 싸한 느낌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아로네가 조금 웃었다가 번뜩 든 생각에 눈에 이채를 띠었다.
“지금에서야 생각났는데……. 전에 네가 말했던 그 노파 있잖아. 어쩌면 마녀일지도 몰라.”
“엥? 뜬금없이?”
“내 책장에 꽂혀 있는 걸 도대체 무슨 수로 베껴서 너한테 갖다줬는지, 우리가 어떤 원리로 만나게 된 건지, 그리고 네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는지. 만약 그 사람이 마녀라면 모든 의문이 설명돼. 마녀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거든.”
아로네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니까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어쩐지 첫 만남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니만. 마녀여서 그랬던 걸까? 하지만 만약 노파가 마녀가 맞다면 왜 하필 나한테 책을 줬지?
나는 여러 가정을 세우며 나름대로 그럴듯한 추리를 해 보려다가 결국 그만두었다. 역시 생각하는 건 너무 힘들어…….
아로네가 찻잔을 입에 머금었다. 나는 나른해진 분위기를 기민하게 감지했다.
“끝난 거 맞지? 응?”
“그래. 이 정도 지식이면 어딜 가도 놀림거리가 되진 않겠지.”
“아싸! 그럼 루나한테 말해서 디저트 좀 가져다 달라고 해도 돼?”
아주 조금 착해진 아로네 덕분에 전과 달리 루나와 한결 편해진 사이가 됐다. 그렇다고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고, 비유하자면 같은 과 동기 정도?
“마음대로 해.”
나는 쾌재를 내지르며 사물놀이패가 꽹과리를 치듯 신명 나게 종을 흔들어 재꼈다. 아로네는 쟤 또 저런다는 표정으로 재빨리 귀를 막았다.
요란한 소음을 뚫고 복도에서 다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속으로 숫자를 세며 몇 초 즈음에 루나가 올까 점치는 것은 한가한 일상 속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
아로네의 저택에서 지낸 지도 벌써 일주일이었다. 우리는 어지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바늘과 실처럼 붙어 다녔다.
식사도 아로네의 방 안에서만 했고, 간혹 정원을 산책해도 한적한 시간만 골라서 했기 때문에 운 좋게도 그동안 공작이라든지 공작이라든지 공작이라든지 하는 사람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데네브? 걔는 첫인상을 거하게 말아먹어서 이젠 뭐 무서울 건더기가 없었다.
하지만 아로네는 제국의 하나뿐인 공녀이자 차기 황후로 손꼽히는 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아로네가 나를 저택에 혼자 두고 외출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제이든과 아로네 사이의 불화가 신경 쓰인 황후가 아로네를 티타임에 초대한 것이다. 아로네는 초대를 거절하고 싶어 했지만 상대가 황후인지라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어쨌든 그러한 연유로 아로네는 나를 붙들어 놓고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를 당부를 하고 있는 중이다. 아로네는 나를 무슨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탐탁지 않아 했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를 일이다.
아로네 뒤에서 제 주인과 똑같은 눈을 하고 있는 애들을 보니 나만 이유를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자 잘 있을 수 있지?”
“야……. 자꾸 잊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나 스물두 살이야.”
이곳에 오자마자 해가 넘어갔으니 스물세 살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건 죽어도 아니 될 일이다. 내 세계는 고작 가을밖에 안 됐었는데 불과 하루 만에 한 살을 더 먹으라고? 절대 허락 못 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는 말도 있지만 원래 난 남의 말 따위 듣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무튼 난 스물두 살이다. 반박은 듣지 않겠어.
“네가 나보다 세 살이나 더 많다는 건 아주 잘 알아. 하는 짓만 보면 네 나이가 의심되지만.”
“너보다 나이 많은 딸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세요, 어머니.”
“하여간……. 갔다 올게.”
아로네가 얘를 어쩌면 좋냐는 눈빛을 했다. 어째 갈수록 취급이 가차 없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서운하지는 않았다. 편한 언행은 우리가 서로의 삶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의미와 상통했으니까.
아침부터 지금까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주의를 들었건만, 아직도 모자랐는지 아로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사고 치지 말고 있으라고 경고했다. 나는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하루 종일 곁에 있던 존재가 없어지니 조금 허전했다. 창밖을 보니 아직 한낮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무섭게 내리던 눈바람은 오늘 새벽에서야 겨우 그쳤다. 간만에 고요한 하늘은 어제의 날씨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청명하고 밝았다.
아로네가 오려면 적어도 5시간은 걸릴 것이다. 나는 침대에서 뒹굴며 게으름을 피웠다.
고요함이 편안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숨 가쁘게 달렸던 전 세계에서의 삶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난 집중력이 짧았다. 어쩌면 내 끈기는 생존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생계 고민이 없어지자마자 이런 한량 같은 삶이 내 천직이었다는 양 태평하게 살지. 내가 객식구처럼 남의 집에 얹혀살면서도 얼굴색 한 번 안 바꾸고 잘 살 수 있을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
물론 시간이 조금 더 흘렀을 때도 똑같이 태연할 수 있을 진 의문이지만.
“어쩜 이렇게 지루할 수가 있지……?”
나는 벌떡 일어나서 궁전 같은 방 안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시계를 보자 아로네가 떠난 지 불과 30분도 지나지 않았다. 이럴 수가. 적어도 1시간은 지난 줄 알았는데?
결국 나는 외투를 입고 겨울 부츠로 갈아 신었다. 간만에 볕이 좋으니 정원이라도 산책할 요량이었다.
아로네가 나를 귀빈이라고 소개했던 것처럼 내게 주어진 방은 꼭대기 층에 있었다. 아로네는 모든 저택의 최상층은 가문의 가솔이 쓴다고 했다.
이동에 편리한 1층도 아니고 왜 굳이 다리 아프게 계단을 오르는 수고를 자처하느냐고 묻자 그러한 배치에는 귀족 우월주의가 깔려 있다고 그가 답했다. 아무도 내 머리 위를 밟지 못한다나 뭐라나.
아파트 제국인 한국에서 살다 온 나로선 헛소리 같았지만 이것 또한 문화의 차이려니 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이 있다. 내가 굳이 귀족 우월주의를 들먹이며 방 배치 규칙을 설명한 이유가 뭘까?
왜겠어. 나와 같은 층을 쓰는 가문의 주인을 만났으니 그렇지.
“어…… 안녕하세요.”
내 운이 닿는 데까지 영영 만나고 싶지 않았던 공작이었다. 누가 아로네 아빠 아니랄까 봐 눈빛이 아주 서슬 퍼렜다. 세월이 노화가 아니라 모조리 카리스마로 가기라도 한 건가?
나는 공작도 문지방에 새끼발가락을 찧으면 죽어라 아파하고, 속이 안 좋을 땐 용트림을 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되뇌었다. 휴, 망가진 모습을 상상하니까 조금 덜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용기 내서 먼저 인사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차라리 줄행랑을 칠까 고민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작이 동문서답을 했다. 내 말을 무시하는 인성이 아주 놀랍지도 않았다.
“데네브를 골렸다지?”
‘데네브’를 발음하는 목소리에 일말의 정이 서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비웃으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참나. 내가 지 아들 좀 놀려먹었다고 혼내는 거야? 저 아저씨 몰랐는데 데네브는 아끼나 봐?
“누가 그래요?”
목숨이 두 개가 아닌 이상 공작에게 건방지게 구는 건 미친 짓이었고, 나 또한 그 사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초특급 빈정 스킬이 나도 모르게 발동됐다.
내 타고난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내가 머리로만 공작의 권력을 알고 있지, 직접 피부로 체감한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저택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모를 리가. 나는 모든 걸 아네.”
꿰뚫음을 자신하는 그 말이 순간 왜 그리 역겨웠는지 모르겠다. 모든 걸 안다고? 순간 울컥해서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의문이 튀어 나갔다. 급히 브레이크를 잡아당길 틈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아로네를 방치하실 수가 있으셨어요?”
“…….”
공작의 포커페이스가 일순 무너졌다. 명백한 시인의 증거였다. 이제야 언젠가 아로네가 절절한 원망을 쏟아 냈을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제 손안에서 망가져 가는 아이를 정녕 눈치채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나?
아무래도 공작이 한 말이 내 버튼을 눌렀나 보다. 감정에 앞서 행동하는 편이 아님에도 이러는 걸 보면. 아로네가 어느새 나한테 중요한 사람이 되었나 봐.
그래서 나는 멈춰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수 없었다. 이왕 시작한 김에 차라리 끝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이럴 수 있는 자격이 조금쯤은 있다고 믿었다. 아로네는 편지 없는 아버지에게 투정과 불평을 하기보다 차라리 감정을 삼켜 버리는 아이니까. 어느 한편으로는 참는 것에 익숙해진 애니까.
“설마 모른 척하실 셈은 아니시겠죠. 양심이 있다면.”
“그만. 주제넘게 남의 가정사에 개입하는 건 거기까지 하도록.”
공작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꼭지가 돌아 버린 내겐 티끌만큼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나는 불량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싫은데요? 아무도 지적하지 않으니 주제넘은 제가 해야겠어요. 왜 그리 아로네한테 가혹하셨어요? 제가 알기론 아로네는 네 살 때부터 학대를 받으며 자랐어요. 그 어린 나이부터 고립됐다고요. 그거 아셨잖아요, 모든 걸 알고 계시니까. 그런데 모른 척하셨죠?”
공작의 주먹 쥔 손이 분노로 부들거렸다. 한편 수심에 잠긴 입술은 괴로워 보기도 했다. 깊은 비탄에 빠진 자안이 아로네의 것과 다르게 구역질 났다. 그는 내 말이 듣기 싫다는 듯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첫날 보았던 모습은 다 허상이었던 걸까? 동전 뒤집듯 빌빌거리는 게 믿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