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38)

<13화>

나는 머리를 쥐어짜 내며 아로네의 일기에서 쓸 만한 내용이 있었는지 기억을 반추했다.

“그…… 수도 발할라에서 태어났어요.”

“그 사실을 증명해 줄 사람이 있나?”

“아니요. 날 때부터 고아였거든요.”

“그래도 돌봐 준 사람이 분명 있었을 텐데.”

젠장, 왜 이렇게 캐묻는 거지? 공작은 나를 무슨 애지중지 키운 막둥이를 데려가는 도둑놈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떠오르는 거짓말 레퍼토리는 수두룩했지만 그렇게 어찌 저찌 넘어간다고 해도 만약 공작이 사람을 풀면 금방 들통 날 게 뻔해서 선뜻 답하기가 주저되었다.

“곤란한 질문이었나? 좋아, 그럼 다른 걸 묻지. 아로네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지?”

“어, 그게…….”

참다못한 아로네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만하면 됐지 않나요? 언제부터 저를 걱정하셨다고 그렇게 심문하듯 물어보세요? 혜라는 아버지가 관심 없어 하실 제 일상 속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오늘 퇴소하던 중 우연히 마주쳐 데려온 거고요. 제 이름을 걸고 혜라의 신분을 보증할 테니 의미 없는 심문은 그쯤 하세요.”

공작은 여전히 의심의 기색을 숨기지 않았지만 아로네의 방어가 철옹성 같아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이 들으라는 듯이 혀를 찼다. 짧게 스쳐 간 째림이 서늘했다.

나는 사무실을 나오며 식은땀을 훔쳤다. 언젠가 필연적으로 만날 데네브도 공작처럼 굴까? 방금처럼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쩔쩔매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아로네가 자랑스럽게 웃으며 보여 준 앞으로의 내 방을 보니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갔다. 몇 번 까다로운 취조를 견디고 얻는 것이 웬만한 호텔 스위트룸을 뺨치는 방이라면 평생 그 짓을 할 수도 있다.

나는 함성을 지르며 거의 운동장만 한 방을 뛰어다녔다. 어린아이처럼 침대 위에서 팔딱거리는 나를 보고 아로네가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

“일어나. 나가자.”

“5분만 더…….”

대낮부터 아로네가 들이닥쳤다. 그가 눈짓하자 멀찍이 떨어져서 있던 시녀들이 커튼을 걷고 창문을 살짝 열었다.

한겨울의 바람이 좁은 창문 틈새로 스멀스멀 기어들어 왔다. 훤히 드러내 놓은 이마에 시린 기운이 닿았다.

나는 먹히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5분만 수법’을 들먹이며 이불 속에서 꾸물거렸다. 그러자 아로네가 이불을 훌렁 들췄다. 전날 밤, 그가 빌려준 얇은 순면 잠옷은 겨울 공기를 빈틈없이 통과시켰다.

결국 나는 항복하고 말았다. 시녀들이 앓는 소리를 내는 나를 화장실에 집어넣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내 얼굴 위로 미지근한 물을 들이부었다.

물을 맞고서야 제대로 정신을 차린 나는 손사래를 쳤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내 알몸을 보여주기엔 지나치게 일렀다.

“저 혼자 할게요. 제가 하는 게 더 편해서 그래요.”

“네? 그래도…….”

시녀들이 아로네의 눈치를 봤다. 그래, 내가 백날 천날 말해도 어차피 최종 결정하는 것은 아로네지. 그래서 나도 아로네를 보았다. 보스가 하라는 대로 해야지 뭐 어쩌겠어. 나와 눈이 마주친 아로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 봐.”

시녀들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아로네의 축객령을 하루 이틀 들어 본 것이 아닌지 잽싸게 튀는 모습이 노련했다.

나는 아로네를 밖으로 내보내고 몸을 씻었다. 수도꼭지를 열자 적당한 수압의 물이 떨어졌다. 휴, 다른 건 몰라도 수도 시설만큼은 제대로 되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시녀들이 놓고 간 옷을 입고 화장실을 나갔다. 아로네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아로네가 책을 내려놓고 눈짓했다. 푸른 광택 도는 아담한 탁자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브런치가 차려져 있었다.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 조용히 식기를 움직였다.

나는 육즙이 좔좔 흐르는 소시지를 음미하다 아로네가 무자비한 수련회 교관처럼 나를 깨웠다는 것을 떠올렸다.

“맞다. 오늘 우리 어디 가? 더 자고 싶었는데…….”

“너 옷 좀 사러 가게.”

“아하.”

양이 많지 않았기에 식사는 금방 끝났다. 외출 준비라는 명목하에 우리는 드레스 룸으로 향했고, 그 뒤를 네 명의 시녀들이 졸졸 따라왔다. 아침에 보았던 얼굴들이었다. 아로네의 특별한 명령이 없는 한 그들은 하루 종일 우리 뒤를 쫓아다녔다.

주인이 잠들 때까지 곁을 지키며 시중을 들어주는 것이 그들의 일이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한다. 하지만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나로선 솔직히 그들이 부담스럽고 귀찮았다. 덕분에 이곳에 온 첫날, 시녀를 붙여 주겠다는 아로네의 고집을 말리느라 한바탕 설전을 치러야 했다.

드레스 룸은 마치 백화점의 명품관처럼 넓고 깔끔했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정중앙의 유리 쇼케이스에는 비싸 보이는 주얼리들이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었다.

그 양옆으로는 치렁치렁한 드레스들이 색깔별로 행거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쇼케이스의 뒤쪽은 오색찬란한 구두들이 커다란 전신 거울을 사이로 두고 내 키만 한 선반에 차곡차곡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옷가지밖에 없는 방이 어떻게 내 자취방보다 크지? 우쭐해진 아로네의 어깨가 하늘로 치솟을 듯했다. 그가 옷걸이를 젖히며 물었다.

“어떤 옷이 취향이야?”

곁눈질로 쭉 둘러보니 아로네의 취향을 알 것 같았다. 무조건 화려하고 고급지고 비싼 옷 말이다. 나는 단번에 답했다.

“최대한 얌전한 옷. 처음 보는 사람이 ‘와, 이 사람 딱 봐도 보수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점잖은 옷.”

사실 그 정도로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지만 내 심미안을 심각하게 벗어나다 못해 입으면 두드러기가 날 것 같은 옷들이 몇 있었기에 부러 과장했다. 프릴이나 레이스가 잔뜩 달린 옷은 죽어도 못 입는다.

“그럼 이거 어때?”

아로네가 짙은 푸른색 드레스를 꺼내 들었다. 나는 드레스를 건네받고 꼼꼼히 살폈다.

“예쁜데? 근데 혹시 바지는 없니?”

“그러고 보니 넌 항상 바지를 입고 있었지. 너희 나라에선 어땠을지 몰라도 이곳 여자들은 운동할 때만 바지를 입어.”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나는 울상을 지었다. 세상에. 그럼 겨울 내내 치마만 입어야 하는 거야?

상념은 팔 위로 더해지는 무게로 인해 뚝 끊겼다. 드레스 위로 다른 옷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좋아. 그럼 외투는 이걸 입고, 구두는 이걸 신어. 베키와 루나가 네 단장을 도와줄 거야.”

고개를 돌리자 앳된 얼굴의 그들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흐린 눈을 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드레스에 몸을 꿰어 넣었다. 베키와 루나가 후다닥 달려와 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혼자 산 지 오래라 원피스 하나를 입어도 스스로 지퍼 올리는 데 도가 텄던 나로선 그러한 그들의 시중이 겸연스러웠다. 하지만 멋쩍은 만큼 편한 것도 사실이라 나는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리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때마침 아로네가 준비 다 됐으면 출발하자고 문을 두드렸다. 아로네는 눈처럼 새하얀 외투를 입고 회색빛이 감도는 털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외투 안에 갖춰 입은 드레스와 꼭 닮은 색의 머리띠를 했는데, 그 모습이 무슨 겨울의 요정 같아서 하마터면 달라고 하지도 않은 심장을 내줄 뻔했다. 그만큼 아로네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정문 앞에 마차 준비시켜 놨어.”

“어제 탔던 마차? 그거 완전 푹신하던데!”

“그래, 어제 탔던 마차.”

나는 반색하며 아로네에게 팔짱을 꼈다. 뒤에서 숨을 헉 들이켜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났다.

슬쩍 곁눈질하자 베키가 어색하게 눈을 피했다. 루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잔뜩 놀란 표정을 이미 들킨 후였다.

흠, 겨우 팔짱 정도로 놀라다니 심약하군. 나는 속으로 키득거리며 아로네를 따라 걸었다.

우리의 방은 최상층인 3층에 있었기 때문에 정문까지 가려면 두 번이나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때문에 그 여정 중 마주치는 사람의 숫자는 저택이 거대한 만큼 두 개의 층을 내려가기도 전에 열 손가락을 넘었다. 그러니 거물급 인물을 만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르겠다.

“이게 누구야.”

자기주장이 강한 외모 덕분에 굳이 이름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미인은 데네브가 틀림없었다.

***

아로네는 보란 듯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나는 떡 벌어지려는 입을 간신히 붙들었다. 아로네도 대단한 미인이라서 짐작은 했지만 데네브 또한 어마어마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적당히 가늘고 진한 눈썹은 남자의 단단한 성정을 암시했고,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는 어쩐지 묘했다. 분명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울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머리털 나고 저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봤다. 이곳에 와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아로네가 질리도록 욕했던 데네브의 싸가지도 지금만큼은 안중도 없었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데네브를 훑었다. 다시 봐도 전체적으로 참 훌륭했다.

어떻게 이목구비가 저렇게 뚜렷하지? 속으로 혼자 감탄하고 있는데, 아로네의 냉랭한 어조가 불쑥 현실감을 일깨웠다.

“피차 기분 더러워질 텐데 그냥 조용히 지나가지?”

“멋대로 저택에 사람을 들였다면서?”

서로 질문밖에 안 했는데 기묘하게도 대화가 진행됐다. 나는 살벌한 신경전을 부리는 남매 사이에 끼지 않고자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네가 언제부터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았더라?”

“아, 지금 네 뒤에 있는 저 여자군?”

데네브는 마치 이제야 나를 봤다는 것처럼 능청을 떨었다. 아로네와 같은 색이지만 그와 달리 온기라곤 하나도 없는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말이야. 네 귀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던데……. 어떻게 생각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