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38)

<12화>

그래. 지나간 일은 무슨 짓을 해도 돌이킬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앞으로의 일뿐이다. 떼를 쓰고 울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탈진과 부어오른 눈가만이 남을 뿐. 나는 필사적으로 자기암시를 걸었다.

아로네가 손수건으로 세심하게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까 내가 했던 짓을 그대로 하고 있어서 실소가 나왔다.

아로네가 다시 한번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온기를 느끼며 마음을 다잡았다. 부모님의 장례를 치른 그날 다짐했던 것처럼.

그래도 잘 살아 보자.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인생이란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거라고.

***

우리는 누구보다 먼저 아카데미를 떠났다. 이목을 조금이라도 덜 끌기 위해서였다. 운 좋게도 우리는 누구도 마주치지 않고 마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21세기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진 내가 마차 같은 구식 탈것을 잘 견뎌 낼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역시 공작가의 마차 아니랄까 봐 우려했던 것만큼 엉덩이가 아프지 않았다.

워프 게이트라는 것을 통해 어마어마하게 거리를 단축했기 때문에 애초에 마차 타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기도 했다.

나는 생소한 풍경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너무 생각 없이 아로네의 제안에 동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로네.”

“왜?”

“딱히 별다른 수가 없어서 바로 알았다고 하긴 했지만…… 너희 아버지랑 오빠가 날 쫓아내면 어떡하지?”

나로서는 대단히 두려운 미래였지만 아로네는 내 말이 가당치 않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내 걱정을 우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감히 그럴 리가. 내게 어떤 언질도 없이 평민을 저택을 집에 들였는데.”

평민. 아로네의 일기장에서 줄기차게 보았던 명사였다. 제대로 된 이름을 부르기 싫을 정도로 신시아를 혐오하는 걸까?

신시아에 대한 문제는 후일을 기약하며 미루기만 했다. 분명 예민하게 반응할 아로네를 알았기 때문이다.

아로네가 신시아에게 갖는 감정과 관계는 둘 사이의 일이고 웬만하면 끼어들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내게 어느 정도의 책임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로네가 잘못했다면 잘못했다고 알려 줘야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건 그래. 근데 있잖아, 넌 왜 항상 신시아를 평민이라고 불러?”

“그 명칭이 그 여자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 주니까.”

“지금 내 처지도 따지고 보면 평민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알고 있지?”

“……너랑 걔랑 어떻게 같아?”

증오는 사람을 좀먹는다. 사랑할 때보다 증오할 때 더 많은 에너지와 감정이 소비되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세상에 아로네의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고쳐 줄 사람이 있다면 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크게 숨을 들이쉰 뒤 따발총처럼 빈틈을 주지 않고 반박했다.

“다를 건 또 뭐야? 난 너희 왕한테 성을 하사받지도 않았고, 국제 정세는커녕 문화, 경제, 그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하는 바보인데? 게다가 나한텐 돈도 신분도 출신도 없잖아. 아로네, 네 친구 너 없었으면 거리에서 구걸하고 다녔을 거야. 너네 같은 사람들은 그걸 천하다고 말하지 아마?”

“말을 왜 그렇게 해? 네가 그런 부류가 아니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결국 난 널 알잖아.”

내가 간과한 점이 있었다. 아로네는 지나치게 내게 특별성을 부여했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솔직히 좀 감동해서 잠깐 침묵했다.

애초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태어난 나와 신분제 사회에서 나고 자란 아로네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다. 백날 말해 봐야 아로네는 절대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나도 그런 아로네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태생을 이유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므로 평민인 신시아가 황태자나 차기 마탑주와 어울리는 건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아로네는 받아들이지 못할 거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남녀 사이가 무조건 연인으로만 제한되는 건 아니므로, 제이든이나 에단은 차치하고서라도 신시아 또한 그들과 같은 마음이라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걸 납득하지 못하겠지.

“앞으로 내가 사람들한테 소개될 때 평민으로 소개될 건데도?”

“……어디에나 예외란 건 존재해.”

역시 아로네는 강적이었다. 나는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감정에 호소하기로 한 것이다.

“맞아. 그리고 나도 네가 사람을 괴롭히면서 희열을 느끼는 변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네가 신시아를 싫어하다 못해 증오하는 이유를 아예 모르는 건 아니지만, 너와 그 애는 신분에서부터 많은 격차가 나잖아. 네가 더 강하고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그걸 무기로 약한 사람을 못살게 굴어서는 안 돼. 그건 잘못됐어.”

“재밌네. 지금 내 앞에서 그 여자 편드는 거야? 그동안 한마디 안 하다가?”

“아니, 네 편드는 거야. 네가 남을 미워하느라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솔직히 신시아한테 그런 식으로 구는 거 너도 마음 불편하잖아.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도 스스로 잘 인지하고 있고.”

아로네가 잠시 침묵했다가 얼핏 간절해 보이는 얼굴로 떠보듯이 물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장담하는데?”

“네 일기를 빠짐없이 읽어 봤으니까 알지. 아로네, 네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분명 진실된 애정이 부재했다는 데에 있겠지. 근데 생각해 봐. 내가 완전히 이곳에 왔잖아. 다른 애들 신경 쓸 바엔 차라리 나랑 신나게 노는 게 더 생산성 있지 않아?”

나는 기민하게 아로네의 감정을 살폈다. 말려 들어간 손가락, 미세하게 경련하는 입꼬리, 살짝 올라간 눈썹, 동요하는 눈동자. 아로네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생각했다. 이쯤에서 확실하게 못을 박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멋대로 네가 악녀라고 떠들어 대지. 하지만 네가 그런 악당이 아니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같잖은 소문에 근거를 실어 주지 마. 완벽하게 선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악해질 필요가 있을까?”

그의 주먹 쥔 손이 약하게 떨렸다. 마침내 고개를 든 아로네는 어쩐지 조금 개운해 보였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어. 어차피 수준 떨어져서 애들 보고 그만하라고 한 지도 오래야. 하지만 아무리 너라도 내 감정까진 바꾸진 못해.”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마음껏 아로네를 예뻐해 줬다. 동시에 마차가 멈추었고, 마부가 도착했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아로네와 시선이 마주쳤다.

꿈의 한 단편으로서만 존재하다가 실제 현실로 나아가는 기분은 겁이 나면서도 들떴다. 나는 아로네의 뒤를 따라 가뿐하게 마차에서 내렸다.

《제3장: 절친이 재벌 2세일 때》

JMT공금

정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수십 쌍의 눈이 무자비하게 내게 내리꽂혔다. 낯선 복장의 사람들과 미술관에서나 볼 법한 고풍스러운 저택. 순식간에 부담감이 밀려들었다.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워 차라리 마차에 다시 올라탈까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아로네의 오만한 어조가 정신을 일깨웠다.

“짐은 알아서 정리하고, 내 옆방 비어 있지?”

“네, 공녀님.”

“그럼 준비시켜 놔. 내 귀인이 머물 것이니.”

아로네는 거침없이 명령을 내리고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가 지나가는 길목에 서 있는 사람들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면서도 그 아래로는 호기심에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뒤통수에 커다란 구멍이 생길 것 같았다.

그만 좀 쳐다보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로네가 나를 ‘귀인’이라 칭한 이상 그에 걸맞은 교양을 보여 줘야 할 것 같아서 간신히 참았다.

다만 누가 봐도 이질적인 내 잠옷이 너무 창피했다. 나는 엉덩이 부근에 자수 새겨진 ‘HOT’을 가리려 필사적으로 후드 티를 내렸다. 어쩌면 내 이미지는 그 도발적인 바지에서부터 이미 망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로네가 붉은 마호가니 문 앞에서 멈추어 서고, 사무적으로 노크를 했다.

“접니다, 아버지.”

나는 아로네의 등을 쿡쿡 찌르고 뒤돌아본 그 애에게 입 모양으로 생난리를 쳤다. 바로 아버님을 만난다는 말은 없었잖아!

아로네는 무어라 대꾸하려고 입을 달싹였지만 공작의 말이 더 빨랐다.

“들어와.”

업무를 보고 있었는지 커다란 탁자 위에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아로네가 내 팔을 잡고 공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부녀 사이엔 흔한 안부 인사 하나 없었다.

공작의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이 내 행색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나는 묘한 기 싸움에 지지 않기 위해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었다. 그리고 아로네가 빨리 용건을 끝내고 나가길 기도했다.

“제 손님이에요. 앞으로 이곳에 머물 거니까 알아 두시라고요.”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세상에. 유교 걸로서 저 패기를 받아들일 수 없다.

공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중후한 저음이 위압적이고 날카로웠다.

“말버릇이 고약하구나. 이곳이 여관이 아니라는 것을 굳이 짚어 주어야겠니?”

“아, 저는 또 아버지가 제 동의도 구하지 않고 그 애를 집에 들여서 상관없을 줄 알았죠.”

공작이 말없이 아로네를 바라보았다. 나는 속으로 아로네의 스코어를 올렸다. 공기처럼 존재감을 죽이며 내가 할 일이라곤 그런 시답잖은 일밖에 없었다.

하지만 돌처럼 서 있기 놀이는 금방 끝나고 말았다. 공작이 내게로 화살을 돌렸다. 강약약강이 오지다고 생각했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혜라입니다.”

“평민이라……. 출신지가 어디지?”

다른 세상이요.

사실대로 말했다간 힘 한번 써 보지도 못하고 바로 저택 밖으로 추방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아로네를 흘금 쳐다보았지만 그 애가 대신 대답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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