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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11/138)

<11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 애로선 가장 쉬운 답을 말이다. 그 이후로 아로네의 세월이 얼마나 지났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무소식에 불안해한 날이 한참이었다. 회유도 협박도 해 봤지만 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낱같은 희망으로 간간이 글을 썼지만 여전히 나는 부재했다.

모든 빛이 사그라지고 마침내 어둠만이 남았을 때, 그 애는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왜 꿈의 통로가 닫힌 거지? 나는 숨이 막히도록 세게 책을 끌어안고 간절히 기도했다.

“오늘은 제발 꿈을 꾸게 해 주세요. 그 애를 보게 해 주세요.”

눈을 뜨고 형편없는 자취방을 바라보자 맥이 탁 풀렸다. 믿는 신 하나 없으면서 도대체 누구한테 기도하는 건지. 나는 머리맡에 책을 두고 눈을 감았다. 불안과 죄책감과 약간의 희망으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눈꺼풀 아래 도래한 짙은 어둠은 순식간에 나를 무의식의 세계로 인도하는 듯했다. 하지만 의식의 끈을 놓치려던 순간, 천둥과도 같은 외침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 말, 책임질 수 있겠니?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잠깐 잠에 들었던 건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방금 들었던 환청을 떠올렸다.

하지만 기이한 목소리는 당황스러워하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마치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 일깨우려는 듯이.

-아이야, 정말 아로네의 곁에 가고 싶은 게 맞니?

“맙소사…….”

나는 어둠 속 유일하게 빛나는 책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평범했던 책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발광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말소리에 따라 빛이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나는 여전히 이 괴이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을 때렸다.

-시간이 없단다, 아이야. 앞으로 아로네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니?

희한하게도 목소리가 낯이 익었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천천히 반추하는 한편, 불가항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약속할게요.”

목소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다락방 한구석에 방치해 놓은 바이올린을 오랜만에 켜는 것처럼 듣기 싫은 쇳소리가 울렸다.

-그럼 부탁하마.

미지의 목소리가 떠남과 동시에 나는 본능적으로 그 주인공을 깨달았다. 수상한 헌책방 주인이 분명했다. 나는 황급히 노파를 불렀지만 답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책은 고장 난 로봇처럼 덜컹이더니 급기야 스스로 페이지를 휘리릭 넘기기 시작했다. 빠르게 넘어가는 페이지 틈으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점점 강해졌다.

이대로 가다간 시력을 잃을 것 같아서 질끈 눈을 감았다. 광포한 바람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몸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몸을 웅크리며 모든 일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오랜만이다?”

아로네가 있었다.

***

“……오랜만이다?”

파업을 선언한 뇌와 달리 주둥이는 잘도 입을 놀렸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지금 나는 얼간이 같았다. 아로네의 표정 또한 멍청해 보인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체감상 10분은 훌쩍 지난 것 같았는데 아로네는 얼어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굳은 분위기를 풀고자 혼신의 농담을 던졌다. 제발 먹히길 바랐다.

“너도 그런 바보 같은 표정 지을 줄 아네!”

“……뭐? 1년 만에 나타나서 하는 말이 그게 다야?”

내가 지뢰를 건드렸나 보다. 아로네가 야차 같은 표정을 지으며 달려들었다. 그가 악에 찬 비명을 지르며 내게 쿠션을 집어 던졌다.

그 애의 날선 감정이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원망, 억울함, 분노, 기쁨, 애정, 안도. 역설적인 감정들이 충돌하며 그 애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언젠가의 그날처럼 나는 모든 것을 감내하고 조용히 아로네를 다독였다. 아로네 또한 먼 과거의 어느 날처럼 벅차오른 감정을 차차 진정시켰다.

그의 등 너머로 가지런히 정리된 짐 더미가 보였다. 커다란 격자 유리창 밖에선 눈이 부슬부슬 내렸다. 그래도 다행이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늦지 않아서.

나는 아로네를 살짝 떼어 내고 조심스럽게 그 애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현실감 없는 환상적인 눈동자가 애증을 담고 나를 바라봤다.

“나도 정말 오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어. 너도 내가 진짜 천사가 아니라는 걸 알잖아. 그래도…… 떠나기 전에 와서 다행이다. 많이 늦었지만 졸업 축하해, 아로네.”

“고작…… 고작 그런 말 하나…….”

아로네가 고개를 떨구었다. 방울방울 떨어진 눈물이 하염없이 바닥을 적셨다. 내 어깨를 틀어잡은 아로네의 손이 가냘프게 떨렸다. 나는 그저 그 애의 손등을 감싸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아로네가 머뭇거리며 손가락을 얽었다. 깍지 낀 손은 절대 풀리지 않을 자물쇠처럼 빈틈이 없었다. 다시 마주한 눈동자는 오로지 나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내비치는 호의가 따뜻해서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찌 되었건 다시 와서 다행이라고 한숨처럼 중얼거리는 말이 아프게 양심을 찔렀다. 아로네가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 물었다.

“그간의 부재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면, 지금은 어떻게 온 거야?”

꼭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 아로네는 결의에 차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드디어 아로네에게 모든 것을 알려 줄 때가 된 것 같다.

***

“내가 올해 혼자 여행 갔다 왔다고 한 거 기억나?”

“응.”

“그때 정말 우연히 네 일기장을 얻게 됐어. 웬 수상한 책방 주인이 필요할 거라며 다짜고짜 내 손에 쥐여 줬거든.”

아로네가 말을 끊고 싶어 하는 기색이길래 단호하게 오른손을 들었다.

“질문은 한꺼번에 받을 거니까 일단 쭉 들어 봐. 어쨌든 그런 식으로 네 일기장을 얻고 재미 삼아 읽었거든? 근데 네 인생에 완벽하게 몰입하던 날! 무슨 우연인지 딱 그날 네가 내 꿈에 나왔어.”

“꿈이라고?”

아로네가 도저히 못 참고 반문했다. 얼토당토않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 반응이 이해가 안 돼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당연히 꿈이지! 너한테는 현실이었겠지만 애초에 난 다른 세계 사람이라고! 내가 마법사도 아닌 마당에 설마 잠결에 마법이라도 부려서 너랑 실제로 만났겠어?”

“하! 그럼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만난 건데?”

“그건 나도 모르지. 그래서 그동안 거기에 대해서 한마디도 못 했던 거야.”

급기야 아로네는 허탈하다는 듯 실소했다.

“난 또 대단한 비밀이 있나 했더니 그냥 모르는 거였어…….”

아로네가 나를 그렇게나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해 줬다니 조금 고마웠다. 나는 흠흠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오늘 실마리를 좀 쥔 거 같아. 오늘 자기 전에 너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거든? 그것 때문인지 갑자기 머릿속에서 웬 낯선 목소리가 울렸어. 그 사람은 너랑 만나고 싶은 게 확실하냐고 계속 물어봤고, 나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지. 그러니까 네 일기장이 빛나기 시작하더라? 그리고 눈 떠 보니까 여기였어.”

“뭐?”

“근데 대박인 게 뭔지 알아? 그 목소리, 분명 책방 주인이랑 똑같았어!”

이 완벽한 미스터리에 아로네가 흥미로워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신난 건 나뿐이었다. 아로네가 이마를 짚고 말없이 고민했다. 한참 뒤, 아로네는 뜻밖의 질문을 했다.

“앞으로도 꿈일 거라고 생각해?”

“앞으로도 꿈일 거라니, 당연히……. 잠깐.”

분명 노파는 ‘앞으로 아로네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겠니?’라고 말했었지.

나는 기이한 현상과 강렬한 빛, 그리고 부탁을 말하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앞으로’라는 단어는 연속성을 띠고 있지 않던가?

“……설마.”

나는 직감적으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거짓말. 내 모든 것이 다 거기에 있는데?”

익숙한 절망이 덮쳤다. 악을 써 가며 겨우 구축한 작은 세상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나는 버려도 괜찮고?”

아로네가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말투에서 얼핏 배신감도 느껴졌다. 나는 그런 의미가 아니지 않느냐고 화를 내려다가 관두었다. 안 그래도 탈력감이 드는데 괜히 더 힘을 빼고 싶지 않다.

쉼 없는 삶에 현기증을 느낄 때도 분명 있었지만 그래도 가치 있는 인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애썼고, 날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한순간에 모든 게 사라진다고? 이렇게 쉽게?

아로네를 다시 만난 거? 당연히 좋지. 하지만 그에 필적하게 내게 소중한 것들을 영영 잃게 됐다.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심란했다. 이번에 오열하는 것은 나였다.

내가 하도 서럽게 울자 아로네가 당황하면서 어설프게 등을 감쌌다. 규칙적으로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어색해서 더 슬펐다. 위로해 본 적 없는 티가 나도 너무 났다.

“……심란할 텐데 차갑게 말해서 미안해.”

“나…… 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

“내가 책임질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옷만 입혀 주고, 가장 맛있는 음식만 만들어 주고, 가장 아름다운 경치만 보여 줄게.”

관계에 서툰 애가 제 딴에 최선을 다해 진심을 고했다. 나는 그 모습이 슬프고 고마워서 등에 두른 손에 힘을 주었다.

비현실적인 절망 가운데 아로네의 심장 박동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길라잡이로 삼고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안간힘 썼다.

퓨즈를 끊어 내듯 극단적인 생각을 잘라 내고 깊은 한숨과 함께 대다수의 미련을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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