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아로네는 배를 부여잡으며 숨을 헐떡이기까지 했는데, 그 애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소 교양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허례허식이 전부인 귀족 사회에서 자라지 않은 내게 그 시원한 웃음은 보기 좋을 뿐이었다. 나는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아로네가 웃으니 따라서 허허 웃었다.
아로네가 가까스로 웃음을 진정시키고 한참 뒤에야 질문에 답했다. 웃음의 잔재가 남은 얼굴은 복숭아 같은 분홍색을 띠었다.
“그들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봐.”
짧은 고민 끝에 그것이 아로네식 칭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나는 혹시 몰라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그거 지금 속이 다 시원해졌다고 말하는 거 맞지?”
“그래.”
나를 바라보는 아로네의 눈빛이 처음 만났을 때보다 한층 부드러워졌다. 예쁜 애가 호감을 갖고 대하는 것이 어쩐지 좀 부끄러운 동시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 너 이런 취향이구나? 잘됐다. 나쁜 놈 욕하는 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거거든.”
“자랑이랍시고 하는 말은 아니지?”
“뭐래. 네 친구들 씹을 때 제일 즐거워하던 게 누구더라? 하여간 솔직하지 못해. 뭐, 그게 매력이지만.”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추파를 던졌다.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기 때문에 아로네는 윙크를 받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딱히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손을 맞대고 있었다. 오랫동안 체온을 공유한 탓인지 슬슬 손에서 땀이 났다. 나는 자연스레 손을 빼냈다. 아로네가 허전해진 빈손을 말아 쥐며 화제를 돌렸다.
“근데 좀 불공평한 거 같은데.”
“뭐가?”
“난 당신의 이름을 모르잖아.”
“……아 그랬었나? 난 강혜라야. 성이 강, 이름이 혜라. 편한 대로 불러.”
나는 기대 어린 표정으로 아로네를 바라보았다. 아로네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혜라.”
“응, 그렇게.”
아, 솔직히 저 얼굴로 수줍게 이름을 부르는 건 반칙 아닌가요? 나는 입꼬리가 실룩거리는 것을 차마 막지 못했다. 타인에게 오롯한 신뢰와 애정을 받는 일은 언제나 기뻤다.
물론 단 두 번의 만남으로 날 그리 여기는 아로네가 부담스러울 법도 했다. 하지만 어느 형태로든 나는 아로네의 삶의 단편을 보았고, 아로네는 첫눈에 반하듯 내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왔으니 이런 관계가 마냥 비정상적이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이 기묘한 만남을 통해 지친 현실을 잊을 수 있다는 점이 내게 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 서로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 것들은 앞으로 차근차근 알아 나가면 되지 않을까?
“어, 잠깐만…….”
별안간 찾아온 울렁거림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나는 소파의 쿠션을 세게 움켜쥐었다. 본능적으로 떠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어디 아파? 불안하게 왜 그래?”
“아픈 게 아니라…… 아무래도 떠날 때가 된 것 같아.”
이렇게 말하니까 슬픈 사연을 가진 비련의 주인공 같네. 이 와중에도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킬킬거렸다.
“……또.”
“괜찮아. 다시 만날 수 있어. 일기 쓰는 거 잊지 마라?”
나는 두통에 머리를 싸매면서도 아로네에게 당부했다. 그는 그러노라 답하며 놀랍게도 다정한 손길로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나는 감격스럽다가도 결국엔 조금 낯간지러워져서 농담 한마디를 건네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찰나에 시야가 뒤집혔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질리도록 익숙한 자취방 천장이 있을 뿐이었다.
***
그 후로 나는 2주 동안 꼬박꼬박 아로네를 만났다. 하지만 아로네에게는 그 주기가 불규칙했다.
매일 밤마다 만나고 싶으면 매일 일기를 쓰라고 말해서 아로네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쓴 적도 있으나, 인내심이 부족한 내가 하루에 하루치의 일기만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을성 없는 나 자신에게 진저리가 났지만 뒤쪽 내용이 죽어라 궁금한 걸 어떡하겠는가.
결국, 나는 아로네에게 적당히 시간 날 때 일기를 써도 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 애는 짧은 간격마다 기록을 남겼다.
아로네는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내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몇 번의 만남으로 그 애가 내게 맹목적인 애착을 갖기 시작한 이후였다.
“더 자주 올 순 없는 거야? 내가 얼마나 아카데미에 환멸을 느끼는지 알잖아.”
“마음 같아서는 나도 하루가 멀다 하고 오고 싶지. 근데 오는 날을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이미 여러 번 말했잖아.”
사실 거짓말이다. 내 짧은 인내심을 아로네가 눈치챈다면 쥐 잡듯이 갈굴 것이 뻔해서 일부러 내가 알아낸 법칙을 얘기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저런 말을 할 때면 양심이 너무 찔렸다. 미안, 아로네!
“하, 천사는 무슨. 할 줄 아는 게 없어.”
“야! 너 말 참 예쁘게 한다?”
“……미안.”
조금 급한 감이 있었던 우리의 관계는 차차 안정과 나름의 규칙을 갖추어 갔다. 아로네는 달력을 세며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나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마법처럼 내가 나타나면 그동안 밀린 이야기보따리를 조잘조잘 풀어냈다. 본인은 아니라고 한사코 부정하지만, 차갑고 오만방자한 성격도 내 앞에선 무장 해제가 되는 듯했다.
아로네한테 수다쟁이 기질이 조금 있다는 것은 나 말고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나는 매일 그 애의 새로운 면모를 알아 갔다.
그렇게 아로네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현실에서 내가 읽었던 일기의 내용과 조합해서 그 애에게 필요한 말, 혹은 듣고 싶어 할 말을 해 준다.
예컨대 정령술 선생에 대해선 욕을 바가지로 하고, 시험 성적에 대해선 벌이 날아들 정도로 달콤한 칭찬을 하고, 비정한 제이든 때문에 의기소침해하면 내 나름대로의 위로를 해 준다.
하지만 아직까지 신시아를 같이 욕한 적은 없다. 아로네와 어느 정도 유대감을 쌓은 지금까지도 나는 신시아에 관해서만큼은 여전히 아로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아로네가 신시아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것도 알고, 그 동기가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 기준 신시아는 명백하게 잘못이 없기 때문에 구태여 욕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로네에게 있어서 이런 내 생각이 매정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건 알지만, 내 논리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걸 어찌하겠는가.
어쨌든,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테고리는 칭찬이다. 열등감 때문에 붙잡고 있는 정령술을 제외하고 아로네는 모든 분야에서 완벽했다. 다소 냉혹한 성격이 조금 문제이긴 하지만, 나랑 오래 알고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 중이다.
물론 나라고 본받을 성격을 가진 건 아니지만, 사람의 호감을 사고 관계를 유지하는 법에 관해서라면 꽤 자신 있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평탄하게 만드는 데 조금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아마도.
다시 칭찬 얘기를 하자면, 내가 잘했다며 아로네를 칭찬할 때 그 애는 마치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미소 짓는다. 그 모습이 귀하고 찬란해서 나는 부러 화려한 미사어구를 붙여 가며 찬사를 늘어놓곤 했다.
아로네도 내가 하는 말이 다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서 그렇게나 기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금 슬펐다. 누구나 해 줄 수 있는 말을 온 힘을 다해 붙잡고 늘어져서.
그런 식으로 아로네의 차례가 끝나고 나면 내게 바통이 넘어온다. 아로네는 본격적으로 나에 대해서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표현은 안 했지만 그 관심이 기꺼웠다.
“혜라, 이제 네 얘기를 해 봐.”
“나? 재미없을 텐데.”
사실 겸손 떤 거다. 나만큼 다이나믹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도 없을걸?
“상관없어. 내가 모르는 네 시간들을 알고 싶어.”
로맨틱한 말에 힘입어 나는 몇 번을 걸쳐서 내 인생사를 얘기했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별 탈 없이 자라 왔지만 스무 살이 되자마자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그래서 그 이후로 모든 것을 나 혼자 해결해야 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천사라고 소개했던 것과 달리 매우 속세적인 삶이었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 낼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아로네는 모순을 지적했다. 하지만 그리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인간다운 삶이네.”
“그치?”
“……끝까지 속아 줄 용의 있었는데.”
“뻔한 거짓말을 뭐 하러.”
아로네는 영특하고 머리 회전이 빠르다. 그는 진작 내 평범함을 눈치채고 있었음에도 침묵했다. 내 거짓말을 밝히면 우리의 관계가 달라지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로네는 불안해 보였다. 내가 특별성과 함께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나는 그저 우리의 관계가 재정의되기를 바랐다. 아로네에게 구원자이기보다는 진짜 친구가 되고 싶었다.
애초에 난 누군가의 인생을 구해 줄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고, 그럴 능력도 시간도 마음도 없었다.
“갑자기 고백하는 이유가 뭐야?”
“그때 내가 말을 잘못했어.”
“……말해 봐.”
“천사는 무슨. 난 누군가를 도와줄 정도로 여유 있고 자비롭지 않아. 나한텐 내가 제일 소중하고 그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거든. 그런 이기적인 천사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잖아?”
이렇게 사이가 깊어질 줄 알았으면 그때 좀 더 그럴듯한 핑계를 댈걸. 순간 세기말 감성이 왜 튀어나왔던 건지 아직도 의문이다.
아로네가 뾰족하게 물었다. 곧았던 시선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래서, 이제 와서 내빼겠다고?”
“아니. 우리의 관계를 다시 정의하자고.”
“……어떻게?”
“완전 친한 친구 하는 거 어때?”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자 아로네는 말없이 내 손을 바라보았다. 제비꽃의 색을 닮은 눈동자가 격하게 일렁였다. 이윽고 아로네는 강하게 내 손을 잡았다. 마치 절대 놔주지 않겠다는 듯이 집요한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