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카이사르 25년 09월 17일.
벌써 9월의 절반이나 지나갔어. 당신이 바람처럼 왔다가 다시 바람처럼 사라진 지도 3주나 됐지. 나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수업을 듣고, 방과 후 수업을 듣고, 애들이랑 조금 어울려 주다가 기숙사로 들어가 공부를 해.
불행하게도 정령술 선생은 아직까지도 사지가 멀쩡하더라. 방학 동안 기도했는데 간절한 마음이 덜했나 봐. 차라리 저주를 할까 싶어. 물론 마녀나 할 법한 흑마법이라 진짜로 한다면 바로 처형당하겠지만.
지적받는 거 창피하다고 수업을 안 들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매번 수업에서 비난을 듣는 것과 차라리 도망가는 것 중에서 어떤 선택지가 덜 창피할까? 어쩔 땐 다 포기하고 그냥 그 인간 얼굴에 의자를 던지고 싶어.
당신은 천사라 말했지. 날 위해 그 인간을 죽여 줄 수 있어? ……언제쯤 다시 올 거야? 다 필요 없으니까 그냥 돌아오기나 해.」
다 필요 없으니까 그냥 돌아오기나 하라고? 나는 실실 웃으며 불을 껐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설렘이 가시지 않아서 눈을 질끈 감고 천천히 양의 수를 세었다.
쉰 마리 즈음 세었을 때 한 커플이 까르르 웃으며 지나가는 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왔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사이로 짜증이 불쑥 일었다가 금세 사그라졌다.
서서히 의식이 흐려졌다. 어쩐지 기대했던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나는 까무룩 잠에 들었다.
잊을 수 없는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번쩍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제와 다른 방이었는데 그에 필적할 만큼 넓고 호화스러웠다.
여느 할리우드 스타가 소유한 펜트하우스처럼 공간은 뻥 뚫린 아치형 기둥을 경계 삼아 다이닝 룸, 서재, 침실, 드레스 룸, 욕실, 다용도실 등으로 물 흐르듯 이어졌다.
마지막 일기가 아카데미에서 쓰인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곳은 아로네의 기숙사인 듯했다. 아니, 근데 여길 혼자서 쓰는 건가? 아무리 공녀라고 해도 한 명이 사용하기엔 기숙사가 지나치게 넓었다.
드레스 룸에서 거실까지 이어지는 복도는 어찌나 길던지, 그 위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도 될 정도였다. 어디서 세금 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아! 이 방에서 나는 소리였구나!
나는 부러 발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다가 궁전 같은 방에서 길이라도 잃어버릴 듯싶어 얌전히 앉아 있기로 했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모토로 삼는 어느 브랜드의 뺨을 칠 정도로 소파는 푹신했다.
나는 다리를 쭉 펴고 앉으며 귀를 기울였다. 양치질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소파에 몸을 푹 누이고 고개를 젖혀 샹들리에에 달린 인조 보석의 개수를 세고 있자니 그토록 기다렸던 인물이 등장했다. 나는 인기척을 느끼고 활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동그랗게 뜬 눈이 사랑스러웠다.
***
아로네는 편안해 보이는 진녹색 슬립을 입고 있었다. 아로네는 있어서는 안 될 그림자를 보고 놀랐다가 내 얼굴을 보고 순식간에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눈썹만큼은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치솟아 있었다. 아로네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다가왔다. 그가 팔짱을 끼고 날카롭게 말했다.
“당신네 세상에는 달력이 없나 보지?”
“아로네! 어떻게 보자마자 비꼴 수가 있어?”
나는 부러 연극적인 투로 말했다. 이 정도의 해맑음이면 보통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듯 픽 웃고 그냥 넘어갔을 텐데, 아로네의 기세는 여전히 살벌했다.
“17년간 부재한 죄를 청산하려면 자주 오기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내 일기 보고 있다면서.”
“그렇긴 한데……. 나 어제 오고 하루 만에 온 건데?”
“뭐?”
“시간이 다르게 흐르나 봐. 오늘 날짜가?”
“9월 17일.”
마지막으로 읽은 일기의 날짜와 일치했다. 내가 책갈피를 꽂아 놓은 날짜와 꿈에서 아로네를 만나는 날짜가 자동으로 연동되는 건가? 연동시켜 놓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나는 잠시 고민했다가 답이 없음을 직감하고 빠르게 포기했다. 어쨌든 그런 논리라면 내가 만약 한 달 치의 분량을 읽었을 때 다음번 만남은 한 달 뒤가 된다.
나는 새로 얻은 정보를 확실하게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고 한 번에 몇 달 치의 일기를 내리읽었다간 아로네의 화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지난밤의 꿈 이후로 아로네는 내게 있어서 더 이상 의미 없는 인물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아로네의 팔을 툭 치며 말했다.
“위로가 필요해?”
“……정말 봤나 보네.”
“응.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살인은 안 돼.”
“기대도 안 했어.”
아로네가 코웃음을 쳤다. 아니, 기대도 안 했다는 사람이 그렇게 보란 듯이 암살 사주를 하나 원래?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매서운 눈빛을 보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분명 아로네가 나보다 다섯 살이나 더 어렸지만 그 애의 포스는 나이 차를 무시할 만큼 강렬한 무언가가 있었다. 귀족은 원래 다 저런가?
옆자리를 두드리며 아로네를 쳐다보았다. 아로네는 고민하다가 못 이기는 척 살포시 앉았다. 나는 아로네를 향해 몸을 틀고 그 애의 양손을 위로하듯 토닥였다.
고생 한 번 안 해 본 귀족가의 자제라기엔 오른손 엄지와 중지에 굳은살이 선명하게 박여 있었다. 나는 어젯밤 일기를 쓰던 아로네의 손이 오른쪽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공부하느라 생긴 굳은살일까? 묻고 싶었지만 왠지 아로네가 싫어할 것 같아서 침묵했다. 대신 일기의 내용을 상기했다. 나는 미간을 팍 좁히곤 투덜거렸다.
“네 일기를 쭉 읽고 느낀 건데, 그 정령술 선생이라는 사람 정말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아.”
“……그래?”
“어! 그 인간은 교사로서의 덕목이 심각하게 부족해. 너 같이 뭐든 열심히 하는 애가 어디 있다고 칭찬은 못 해 줄망정 지적질을 하고 난리야? 그것도 다른 애들 다 보는 앞에서. 아니, 어쩜 선생이라는 사람이 그러지?”
아로네가 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미세하게 올라간 입매에는 기쁨의 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뒤이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는 말은 낮은 자존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다른 애들은 통쾌해만 하던데.”
그 말을 하는 아로네가 담담해 보여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반응에 익숙해지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험담을 들어야 할까? 나는 일부러 언성을 높였다.
“뭐라고? 걔네도 참 정상이 아니다. 진도가 아주 조금 느리다는 이유로 친구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으면 같이 싸워 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근데 뭐? 통쾌해한다고? 야, 됐어. 기죽지 마. 그거 조금 못 하면 어때? 넌 정령술 하나로 규정되는 사람이 아니잖아. 예체능이면 예체능, 체육이면 체육, 공부면 공부. 네가 잘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어휴, 숨차.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이어 말했다.
“뒤에서 너 욕하는 사람들 있잖아. 걔네 다 너를 너무 부러워해서 그러는 거야. 그래서 어쩌다 도화지에 찍힌 작은 오점을 보고 죽자고 달려드는 거라고. 그러니까 걔네 너무 신경 쓰지 마. 불쌍한 애들이니까.”
“……말은 번지르르하게 해선.”
아로네의 귓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멋쩍어서 괜히 손톱을 만지작거리는 아로네를 보자니 짠한 마음이 들었다.
아로네에게 진심으로 공감해 준 사람은 아마 내가 처음 아닐까? 레이첼이나 에이미 같은 애들은 아로네의 지위를 보고 잘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 애들의 감언이설은 마음에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고작 한마디 했을 뿐인데 그렇게 자랑하던 포커페이스를 깨뜨리고 감정을 드러내는 아로네의 모습이 애잔하기도 하고 조금 귀엽기도 했다. 알고 보면 이렇게 귀여운 애를 사람들은 왜 악녀라고 부를까?
아예 모르는 바도 아니었으나 우리 애 그렇게 최악은 아닌데요. 등불 축제에서 아로네가 봤다는 인형극의 내용을 생각하면 화가 치솟았다. 아니 근데, 진짜로 왜지? 나는 급발진해서 그간의 불만을 쏟아 냈다.
“걔 말고도 주위에 이상한 사람들 많더라? 너랑 어울려 다니는 애들은 완전 간신배고. 아놔, 걔네 그렇게 사람 뒷배경만 보고 친구 사귀면 안 되는데. 그리고 에단이랑 제이든 그놈들은 또 뭐야? 생각하니까 화나네.”
한번 쏟아진 불만은 끝없이 튀어나왔다.
“축제 때, 에단 걔는 네가 무슨 짓을 했다고 마주치자마자 눈살을 찌푸려? 사람 기분 나쁘게? 아니, 제이든 그놈이 더 죄질이 나빠. 황태자라는 애가 자기 엄마 생신 잔치에서 빅엿을 먹여? 정치가 장난이야?”
하여간 어딜 가든 책임감 모르는 애들이 있다. 나는 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파를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다.
“그럴 거면 황태자 자리 반납하든가. 아, 곱씹을수록 화나네. 내 눈앞에 있었어 봐. 확 그냥 모가지를! 또 너희 아빠랑 오빠는 뭐니? 아 진짜…… 탈룰라 할까 봐 여기까지만 하겠지만, 아무튼 진짜 별로야.”
나는 가빠진 숨을 진정시켰다. 속으로 하나둘 숫자를 세며 심호흡을 하자 머리가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일방적으로 감정을 쏟아 냈고, 심지어 아로네에게 있어서 꽤 미련 있는 관계를 신랄하게 씹어 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뭐 하나 꽂히면 그것밖에 안 보는 버릇 어떻게 고치지?
나는 뒤늦게 아차 하며 아로네의 반응을 살폈다. 아로네가 우는 듯, 웃는 듯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한껏 쭈굴거리며 겨우 입을 떼었다.
“혹시 기분 나빴니……? 미안, 그래도 네 인간관계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인데 내가 너무 세게 말했지…….”
조심스러운 물음에 돌아오는 것은 뜻밖의 폭소였다. 아로네가 답지 않게 눈물까지 흘려 대며 청아한 웃음소리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