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상황을 타개하려 급조한 달콤한 위로가 아니었다. 나는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내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다. 이건 정교하게 꾸며진 꿈에 불과한데 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지?
나조차도 형언할 수 없는 감정 구조에 따라 부지불식간에 아로네에 대한 연민과 애정과 책임감이 샘솟았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감정을 느끼는 내가 낯설면서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온기를 갈구하는 눈동자에서 순간 내 얼굴을 봤기 때문이다.
아로네가 뚫어져라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부러 시선을 아로네에게 고정했다. 보라색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영원 같던 탐색이 끝나고 그 애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나를 믿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공녀님, 종소리를 듣고 왔습니다. 시키실 일이 있나요?”
“잘못 울렸어. 필요 없으니 네 할 일 해.”
아로네가 단칼에 호통을 쳤다.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안 되는데. 하도 서럽게 울어서 본래 아로네의 성격을 잠시 잊고 있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시종들한테 조금만 너그럽게 대하면 안 되겠냐고 충고를 하려는데, 아로네가 경악하며 내 몸을 더듬었다.
“당신 몸이 왜 이래?”
“뭐, 뭐야?”
화들짝 놀라며 살피자 발끝부터 시작해서 점점 몸이 사라지고 있었다. 햇살을 갈아 만든 것 같은 빛무리가 타원을 그리며 몸을 휘감았다. 반짝거리는 입자가 공기의 일부로 편입되어 공중을 유영했다.
당황했지만 이것 또한 꿈의 일환이라 생각하니 금방 침착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아로네는 아니었다.
아로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시나브로 투명해지는 내 몸을 절박하게 붙들었다. 그가 다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만났는데……. 뭐라도 좀 해 봐!”
“기회가 되면 또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동안 조용히 지내야 한다?”
별 뜻 없이 생각나는 대로 한 말이었지만 정말로 또 만날 것 같았다.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로네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게 언제인데!”
“글쎄……?”
“봐, 결국은 안 돌아올 거잖아.”
“아니야! 일기 열심히 쓰고 있으면 올게.”
나는 이렇게 답해도 되는 건지 반신반의하며 능청을 떨었다.
“내 일기를 읽고 있었어?”
“그렇다고 하면 화낼 거야?”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좁히는 아로네의 시선을 피했다. 사실상 긍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로네가 대놓고 헛웃음을 뱉었다. 그리고 무언가 대꾸를 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땐 이미 내 얼굴의 절반이 사라진 후였다.
“화 안 낼 테니까 다시 와야 해!”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아로네가 그리 말했다. 나는 눈웃음으로 대신 답했다.
***
“아이고 삭신이야…….”
오늘 하루는 유난히 길었다. 카페를 오픈하자마자 손님이 밀어닥친 탓이다.
그 와중에도 나는 하루치의 공부를 마치고, 《아로네의 일기》를 펼쳐 들었다. 지난밤 그 애가 꿈에 나와서 그런지 오늘따라 내용이 기대됐다. 정말이지, 현실인 줄 착각할 만큼 생동감 넘치는 꿈이었다.
맥주 캔을 따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맥주 특유의 톡 쏘는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크…….”
나는 한 모금 더 마신 뒤 책갈피로 표시해 놓은 부분을 펼쳤다.
「카이사르 25년 09월 02일.
그날 내가 보고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는지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는다. 어떻게 할까 하루 종일 고민했지만 결론은 항상 같았다.
그 사람을 믿자고. 13년 만에 나타나 내 편이라고 주장하는 그 수상한 사람에게 한번 도박을 걸어 보자고.
……보고 있나?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자칭 천사?」
“미친 이게 뭐야!”
나는 경기를 일으키며 책을 집어 던졌다. 방금 읽은 구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못해 소름이 끼쳤다. 나는 괜히 주위를 둘러보며 닭살이 돋은 팔을 쓰다듬었다. 오한이 들었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제자리를 배회했다. 집에서 바퀴벌레가 나왔다고 해서 집을 버릴 수 없듯, 섬뜩한 책이라고 해서 집에서 뛰쳐나갈 수도 없었다.
왜냐면 나는 이런 사소한 이유로 덜컥 호텔을 예약할 정도로 자금 사정이 넉넉하지 않으니까!
“맙소사 신이시여…….”
믿는 신 하나 없었지만 저절로 신을 찾게 되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헐떡이는 심장을 부여잡고 드디어 생각이라는 것을 해 보기로 했다.
여태껏 모든 서술은 1인칭 시점의 평서문으로 끝났다. 하지만 방금 읽은 글은 3인칭의 누군가를 언급하며 대화체로 쓰였다. 갑자기 바뀐 문체의 원인으로 짐작이 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젯밤 꿈밖에 없다.
그러나 그 추측에는 두 가지 전제를 필요로 한다. 첫 번째, 아로네가 책 속 주인공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 두 번째, 내가 꿈을 통해 그 실존하는 아로네를 만났다는 것.
“아니 근데 솔직히 진짜 와…….”
스물두 살이나 먹은 다 큰 성인에게 이렇게나 갑자기 소설 같은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물론 미리 예고를 받고 이세계로 떠난 판타지 소설 주인공은 들어 본 적 없지만.
셜록 홈스는 말했다. 불가능을 모두 없앤 다음에 남는 것이야말로 비록 아무리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진실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제 인생의 장르가 바뀌었는데요? 따분하기 짝이 없는 드라마를 찍다가 갑자기 판타지를 찍으라니요! 세상에, 이것 참…… 개이득인데?
처음의 두렵고 섬뜩한 감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그토록 기다렸던 특별한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주체 못 할 흥분이 혈관을 타고 격렬하게 날뛰었다.
“좋아. 그럼 이제 어떡하지?”
어떡하긴. 흘러가는 대로 이끌려 가는 거지.
나는 생경한 기분으로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틀림없이 소설이라고 생각했건만, 아로네는 어딘가에 존재해 자신의 하루를 직접 기록했다.
그렇다면 아로네는 한국어를 쓰는, 뭐랄까 평행 세계 같은 데서 살고 있는 걸까? 시대도 문화도 정치 체제도 모두 다르지만 언어만 같은 그런 곳에서?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노파는 이 일기장의 묘한 힘을 알고 있었을까?
“……당연히 알고 줬겠지, 그 사람?”
꿈을 통해 다른 세계로 이어 주는 일기장이라. 가치로 환산한다면 백지 수표일 텐데 왜 돈도 안 받고 그냥 준 걸까? 나한테 잘 맞는다는 이유로 로또를 버리다니 이해가 안 되네. 심지어 고민조차 하지 않았잖아.
신기루처럼 사라졌던 책방을 다시금 떠올리니 문득 노파가 내게 이 일기장 하나를 건네주기 위해 아주 먼 미래에서 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아주 먼 과거던가.
정말 턱도 없는 생각이었지만 이미 불가능한 일이 벌어진 마당에 시간 여행이라고 못 할 게 뭐냐는 말이지.
“어라. 그러면 노파는 이미 아로네를 알고 있던 건가? 흠…….”
나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자세를 따라 하며 고뇌했다. 그리고 채 5분이 지나기도 전에 바닥에 벌러덩 누우며 소리쳤다.
“모르겠다! 그냥 모른 채로 살자!”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내게 벌어진 마법 같은 일에 고취되어 있었고, 막연히 확신했던 재회가 현실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 강혜라 직감 아직 죽지 않았다!
단순히 킬링 타임으로 읽었던 책이 한순간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꿀꺽 침을 삼키고 다음 구절을 읽어 내려갔다.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2학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왔어. 아버지는 나를 평민과 같은 마차에 태우려고 했지만 내가 격렬하게 반대한 덕분에 그 얼토당토않은 계획은 무산되었지.
내가 그 평민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그동안 날 지켜봐 왔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참, 새 학기랍시고 자리를 바꿨어. 모두에게 불행이게도, 나는 평민과 짝이 되었지. 그 사실을 알고 평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라. 보는 내가 다 안타까울 정도로.
그러니 위대한 황태자 전하가 가만있지 않고 배기겠어? 제이든은 ‘차라리’ 본인이 내 옆에 앉겠다고 말했어.
하지만 우리 반을 담당하는 선생님은 아카데미에서 고집이 황소처럼 세다고 유명한 사람이었고, 그 고집은 황태자에게도 예외 없었지.
그 애는 ‘차라리’라고 말했지만, 나라고 평민 옆에 앉고 싶은 줄 아나? 내게도 괴로운 자리 배치인데 제이든은 왜 그걸 모르지?
정말이지. 방학 중에도 평민의 얼굴을 봤더니 그 애가 더 싫어진 것 같아. 데네브가 정령술을 가르쳐 준다고 하니까 기뻐하던 꼴이란. 데네브 걔는 평민이 그렇게 좋고 마음에 들면 차라리 그 애를 친동생으로 삼던가.
아, 에단의 귀에까지 평민과 내가 짝이 됐다는 소식이 들어간 것인지, 내게 똑바로 처신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라고 경고하더라. 제이든도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다르게 했어. 웃기지 않아? 그렇게 경고해서 뭐 어쩔 건데?
나중에는 나름 연적이라는 둘이 평민을 구하기 위해 협심하는 거 아닌가 몰라. 모임이 파한 후 서로 거들떠도 안 봤던 애들이 말이야.
참고로 당신이 모를까 봐 친절을 베풀자면, 마탑과 황실은 대척점에 서 있어. 평화 조약을 맺은 지 오래라 더 이상 불필요한 전쟁은 없지만, 서로의 세력이 너무 강하고 확실해서 사실 언제라도 깨질 수 있는 것이 계약이지.
그래서 황실 세력인 제이든와 나, 그리고 마탑 쪽의 에단이 모임을 가졌던 거야. 미래의 제국을 이끌어 갈 주역들인데 어려서부터 친분을 다져 놓으면 좋잖아? 하지만 알다시피 채 1년도 못 가고 망했지.
이제 와서 생각하는 거지만, 모임이 망한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 셋이 어느 면에선 동류이기 때문인 것 같아. 근본적으로 다 자기밖에 생각할 줄 모르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이니까.
나는 그래서 그 애들과 친해지고 싶었는데, 걔네는 아니었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