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38)

<4화>

하지만 나는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말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네가 뭔데 내 행동을 구속하려고 하냐고.

분노한 에단은 무어라 내게 폭언을 쏟아 냈다. 내 뒤에 서 있던 애들이 도리어 겁을 먹고 울먹일 정도였다.

거친 문장에서 그동안 그 애가 나를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상처를 받은 것도 사실이라 굳이 글로 적고 싶지는 않다.」

***

「카이사르 25년 04월 30일.

애들은 더욱 말의 수위를 높였다. 여전히 나는 방관했다. 사실 평민이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본다고 한들 내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건 아니다. 평민을 못살게 군다고 해서 제이든이나 에단과 사이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에단이 퍼부은 말을 생각하면 뭐든 해야겠다는 심술이 들었다.

물론 제이든과 에단은 길길이 날뛰며 화냈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아버지가 아시면 꾸중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버지가 날 혼내는 게 형식에 불과한 이상, 사실상 아무도 날 막지 못하는 셈이다.

평민은 무사히 2년 동안 아카데미에서 버틸 수 있을까? 하루빨리 나가떨어졌으면 좋겠다가도 최대한 오랫동안 날 즐겁게 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련한 평민을 구하러 달려오는 그 둘의 분노한 얼굴이 참을 수 없이 우스우니까. 어쩌면 나는 그 얼굴을 보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카이사르 25년 05월 02일.

오늘은 중간 평가일이었다. 국제학, 역사, 문학, 철학 등 모든 과목의 쪽지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 당연한 일이다. 글자를 떼자마자 밥 먹듯 반복하고 익힌 학문인데.

실기 과목도 완벽했다. 전문 연주자도 어려워한다는 곡을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완주했고, 검술에서의 내 동작은 완벽했으며, 승마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평가인 정령술에서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 늙은 놈팡이는 오늘도 나를 비꼬며 최하점을 주었고, 반면 평민은 만점을 받았다.

그 애는 공부를 꽤나 잘하는 편에 속하니까 어쩌면 이번 중간 평가에서 수석을 할지도 모른다. 이미 대다수의 애들이 그리 여기고 있고.

그러나 내가 정령술에서 죽을 쓰지만 않았어도 그 자리는 내 것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 처음으로 그 애를 진심으로 해치고 싶었다.

……그래서 조금 놀랐다.」

「카이사르 25년 05월 15일.

오늘 문학 수업 주제는 ‘사랑’이었다. 교사는 절절한 애정시를 소개하며 질문을 던졌다. 생각만 해도 행복하고 마음에 불길이 이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냐고.

애들은 야유를 보냈고, 교사도 장난스럽게 웃고선 수업을 이어 갔다. 그때 난 무의식적으로 제이든을 바라보았다.

그 애는 평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쁜 놈.」

「카이사르 25년 06월 08일.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라버니에게 편지를 받았다. 쌀쌀맞고 정 없는 성격처럼 편지는 ‘편지’라고 하기 창피할 정도로 짧았다. 그게 오라버니다워서 살짝 웃었다가 내용을 보고 편지를 구겨 버렸다.

-네가 평민 여자애를 괴롭힌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열일곱 살이면 이제 그런 수준 낮은 짓은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나?

어떤 연유로 어울리지도 않는 편지를 보냈는지 뻔했다. 보나 마나 보좌관이 알려 준 내 소문을 듣고 경고하려고 보낸 거겠지.

화가 나서 신경 끄라고 답장할까 하다가 그냥 그만두었다. 어차피 내 편지는 읽지도 않을 것이다.」

「카이사르 25년 06월 16일.

기말 평가까지 얼마 안 남았다. 내가 잘하는 과목에서 최고점을 거두기 위해 공부하느라 일분일초가 아깝다.

그래서 요즘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고 있는데 오늘 늦게까지 서적을 찾아보다 문득 시계를 보니 통금 시간까지 채 10분도 안 남아 있는 게 아닌가?

급하게 계단을 내려가는데 거의 다 내려와서 미끄러질 뻔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연히 지나가던 제이든이 잡아 주었다.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도 금세 진정하고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했는데 그 애가 뭐라도 씹은 표정으로 황급히 날 떨쳐 냈다.

그렇게나 내가 싫은 걸까?」

「카이사르 25년 06월 27일.

어제와 오늘을 걸쳐서 드디어 기말 평가가 끝났다. 가채점을 했을 때 이론 과목에서 실수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예체능과 체육에서도 군더더기 없었다.

정령술은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다.

……아버지가 날 포기하셔서 다행인 걸까? 여전히 하급 정령 하나 못 불러내는 내가 밉고 혐오스럽다.」

「카이사르 25년 06월 28일.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른 아침, 워프 게이트를 통해 집으로 돌아왔다. 오라버니는 황궁에 출근했는지 저택에서 코빼기도 안 보였고, 집사에게 듣기론 아버지는 서재에서 업무를 보고 계신다고 했다.

즉, 4개월 만에 돌아온 날 반겨 준 사람이 아무도 없는 셈이었다. 시종들이 정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나를 맞았지만 난 바보가 아니다. 그들의 얼굴에서 미처 숨기지 못한 귀찮음과 짜증을 읽었다.

화를 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잔뜩 기대를 하고 간 아카데미에서 얻은 건 지식도 무엇도 아닌 스트레스와 자기혐오뿐이었다. 익숙한 내 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잠을 자고 싶었다.

간만에 모두가 함께하는 저녁 식사에서도 ‘내 가족’은 아무 말도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면 보통 안부를 묻지 않나?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나도 굳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차라리 아카데미가 나은 것 같다. 적어도 아카데미에 있을 땐 삶이 생동감 있기라도 했지.」

“뭐지? 왜 갑자기 마음이 아프지……?”

나는 잠시 책을 내려놓고 이마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로네에게 감정 이입이 되었다. 그 애가 누군가를 주도적으로 소외시켰다는 점에서 선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로네는 속이 썩은 장미 같았다. 외로움과 방치라는 해충이 그 애의 속을 갉아먹고 있고, 그 애는 아픔을 감추거나 혹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패악이라는 가시를 세웠다.

하지만 잘못된 방법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망가진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 애는 고립되어 갔다.

나는 노골적이고 거침없는 문체에서 뿌리 깊은 혐오를 읽었지만, 동시에 차마 감추지 못한 외로움 또한 느꼈다. 아로네는 신시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또한 괴롭히고 있었다.

간혹 일기 마지막 구절에 작게 덧붙이는 말줄임표와 솔직한 감정이 그 증거이다.

“누구든 제발 얘 정신 좀 차리게 해 줬으면 좋겠다…….”

나는 조금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책을 펼쳤다.

「카이사르 25년 07월 05일.

오늘 아버지가 엄청난 소식을 전해 주셨다. 서재로 오라고 하길래 무슨 일일까 걱정했는데, 차라리 꾸중을 들었으면 적어도 마음은 편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제이든과의 약혼이 황제와 이야기되었다며 내일부터 황궁으로 신부 수업을 받으러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간 우리 둘의 얘기가 어른들끼리 오가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웠다.

통보받은 지 반나절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제이든과 내가 약혼을 한다니?

제이든은 날 싫어했다. 쉬쉬할 뿐, 모든 이가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난 상관없다. 그 애를 좋아하니까.

아무리 그 애라고 해도 황제 폐하와 공작이 결정한 사항이니 함부로 이 약혼을 파기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파기하려고 하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막을 것이다. ……반드시.」

「카이사르 25년 07월 06일.

신부 수업 첫날이었다. 잔뜩 긴장하고 갔지만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내 지성과 예법은 손댈 필요도 없이 이미 훌륭했고, 때문에 황후께서 직접 선별하신 선생님은 나를 극찬했다.

하지만 사교술은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았다. 선생님께선 내가 감정을 숨기고 조금 더 교묘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약혼자 되는 사람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얼굴 한번 안 비추었다. 항의하는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안 좋았다.」

「카이사르 25년 07월 10일.

수업을 마치고 마차를 타러 가는 길에 제이든을 만났다. 그 애는 뒤에 수행원을 잔뜩 달고 있었고, 그들은 드레스와 액세서리 상자를 들고 있었다. 상자 겉면에 새겨진 상표가 익숙해서 자세히 관찰하니 요즘 인기 있는 디자이너의 로고였다.

혹시나 해서 물었다. 내 선물이냐고.

대답은 역시나였다. 그 애는 헛소리하지 말라고 했다.

오늘 배운 내용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평온함을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열심히 들은 보람도 없이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그 애는 매서운 얼굴로 경고했다. 우리의 약혼에 자신의 뜻은 전혀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결혼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헛된 기대는 하지 말라고.

딱 잘라 말하는 그 애가 야속했다. 그래서 잘해 보라고, 네 뜻대로 될 일은 없을 거라고 비꼬았다. 그 애는 대꾸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약혼 소식을 들은 후 첫 만남이 그런 식이라서 기분이 별로였다.」

「카이사르 25년 07월 13일.

벌써 2주 뒤가 황후 폐하의 탄신일 축하 연회다. 신부 수업을 받는다고 정신이 없어서 드레스를 주문하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겐 보좌관도, 충실한 수하도 없으니 이런 중요한 일정은 내가 알아서 챙겼어야 했는데. 근래 내가 들뜨긴 했나 보다.

시간을 쪼개서 요즘 제일 잘나가는 의상점에 갔다. 황후보다는 덜 튀어야 하지만 나머지 여자들보다는 돋보일 드레스를 고르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많고 많은 디자인 중 내 심미안을 충족시키는 드레스는 오직 하나였다. 하지만 디자이너는 곤란해했다. 얼마 전에 제이든이 주문해 갔다는 것이다. 황후께 선물하려는 거였을까? ……그럴 리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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