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38)

《프롤로그》


<1화>


나는 벼락같이 눈을 떴다. 이상하리만치 몸이 붕 뜬 느낌이 들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자각몽인가? 사위는 고요하고 어두웠다. 나는 기묘한 기분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개를 반 정도 틀었을 때 이 공간에 나 외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가까스로 비명을 삼켰다.


수상한 인영은 등불을 켜 놓고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여자였지만 어쩐지 친근감이 들었다.


하지만 낯선 공간은 미지에 대한 불안감을 유발했다. 나는 앙다문 입술 사이로 혹여나 탄식이 새어 나갈까 봐 힘을 주고 바쁘게 눈알을 굴렸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낯선 풍경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직 여자는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여자의 방으로 보이는 이곳은 마치 중세 시대 귀족의 침실처럼 고급스러웠다. 내 자취방을 적어도 3개는 이어붙인 듯 넓었고, 화려한 샹들리에는 내 키만큼 거대했다.


낮은 명도의 청록색 벽지가 창문 사이로 새어 든 달빛을 받아 스산한 느낌을 풍겼다. 진회색 캐노피를 단 침대는 거구의 성인 두 명이 누워도 넉넉해 보였다.


그때, 숨 막히는 정적을 가르고 구슬픈 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두려워 억지로 틀어막은 듯 먹먹한 소리였다.


나는 이곳이 꿈속이라고 확신하면서도 벌벌 떨었다. 여자가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며 깃펜을 움직였다. 그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처량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켜고 말았다.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자 신비로운 자안과 눈이 마주쳤다. 여자의 눈이 당황과 공포로 물들었다. 그가 종을 울리기 위해 손을 움직이는 모습이 느리게 지나갔다.


나는 여자의 행동을 저지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동시에 뇌를 거치지 않은 헛소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누구세요?”


여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또한 주먹으로 내 입을 내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많고 많은 적당한 말 중에 뭐? 누구세요? 내 임기응변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


“나는 아로네 님프다. 넌 누구지?”


예? 누구요?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멍하니 여자를 쳐다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요즘 즐겨 읽는 소설 《아로네의 일기》의 그 아로네?


***


대학교 3학년을 앞두고 과감하게 1년 휴학을 신청했다. 톱니바퀴 같은 일상에 드디어 질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무 살, 합법적 성인이 되었다는 고취감에 빠질 새도 없이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었다는 사실에 슬퍼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모아 둔 돈보다 빌린 돈이 많았던 부모님이 내게 빚이라는 유산을 남겼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유산 포기 신청을 하고 난 다음엔 진짜 전쟁이 시작되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전쟁 말이다. 사회에 갓 발을 내디딘 청년에게 닥친 시련치고는 꽤 가혹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런저런 장학금 덕분에 당장 학비는 해결했다. 그러나 여전히 생활비의 문제가 있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밤낮 가리지 않고 개처럼 일했다.


그래도 난 그럭저럭 잘 살아갔다. 현실을 비관하며 하릴없이 눈물만 짜내기엔 내 인생이 너무 소중했으니까.


하지만 2년 내리 혹사당한 몸은 결국 적색 신호를 울렸다. 등골이 휘어라 모은 돈을 탈탈 털어 겨우 빚을 청산하던 날,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그동안 내가 날 죽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력 없이 눈만 멀거니 껌벅거리는 날 보고 의사가 말했다.


“젊은 애가 뭐가 그리 힘들어서 쓰러지기까지 해?”


나는 그저 웃었고, 의사는 수액 처방을 내려 주며 바쁘게 다음 환자에게 향했다.


의사의 말이 메아리처럼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게. 나 진짜 왜 이렇게 힘들게 살지. 찬찬히 그간의 시간을 되짚자 의문이 들었다.


억울했다. 대학 동기들은 연례행사처럼 방학마다 해외여행을 가고, 휴일에는 인스타 카페며 맛집 탐방이며 잘만 놀러 다니는데. 왜 나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없는 시간을 쪼개서 써야 하지?


나는 더 자세하게 그동안의 삶을 반추했다. 눈가의 다크서클은 디폴트가 되었고, 매일 소화불량에 시달렸으며, 알바를 하느라 학업을 소홀히 한 탓에 성적은 간신히 재수강을 면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하지 않았나? 보상 의식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나는 느리게 떨어지는 수액을 응시했다. 두 손바닥을 합친 것보다 큰 수액의 크기가 현재의 내 상황을 단적으로 알려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충동적으로 비행기 표를 결제했다. 여행을 가자. 어릴 때부터 그토록 바라 왔던 유럽 여행을 가자.


한번 결심을 하고 나니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나는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모은 적금을 깼다. 차라리 이 돈으로 다른 걸 할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내게 즐길 자유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행은 순조로웠다. 동양인 여자 혼자서 두 달 동안 타지에서 잘 다닐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희한하게도 곤경에 처하려고 하면 누군가 나타나 친절하게 도와주었다.


정 많은 현지인 덕분에 나는 여행 내내 길을 헤매거나 바가지 쓰이는 일 없이 오롯이 관광과 힐링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덕분에 영영 잊어버린 줄 알았던 느긋함도 되찾았다. 내가 계획적이기보다는 게으른 편에 훨씬 가깝다는 사실을 오랜만에 깨달았다.


하지만 달콤함의 깊이와 비례해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마침내 여행의 끝이 도래했다. 나는 귀국을 위해 공항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도시를 둘러보기로 했다.


나는 뒷짐을 지고 여유롭게 거리를 걸었다. 내리쬐는 햇빛이 기분 좋게 따뜻했다. 그러다가 문득 갈증이 나서 잔돈도 쓸 겸 카페에서 주스 한잔을 테이크아웃했다.


나는 빨대를 쪽쪽 빨며 한가히 구석구석 골목을 누비다가 담벼락 위에 칠흑처럼 새까만 고양이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인기척을 느낀 고양이가 노란 눈을 번뜩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반색하며 한 걸음 내딛자 고양이가 우아하게 일어서더니 담벼락을 껑충 뛰어내렸다. 고양이는 후미진 골목으로 향했다.


슬슬 돌아가려던 참이라 따라갈까 말까 고민하는데 고양이가 안 따라오냐는 듯 흘긋 뒤를 돌아보며 작게 울었다.


아직 시간 많이 남아있으니까 괜찮겠지? 나는 고민한 것이 무색하도록 희희낙락하며 고양이의 뒤를 쫓았다.


고양이는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갔다. 하나둘씩 멀쩡한 상가가 사라지고,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폐허가 나타났다. 자연히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제라도 발을 뺄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고개를 돌리자 신비로운 분위기의 헌책방이 눈에 들어왔다.


세월에 닳은 간판의 글자는 알아볼 수 없었고, 낡은 지붕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웠지만 그런 모습에서 역설적이게도 고전적인 우아함이 느껴졌다.


나는 홀린 듯 책방에 들어갔다. 낡은 책 특유의 꿉꿉함이 허파를 가득 채웠다.


발을 내딛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소름 끼치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미간을 좁히던 참에 산더미 같은 책들 사이로 백발의 노파가 나타났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등이 굽어 있는 아주 늙은 할머니였는데, 눈빛만큼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듯 강렬했다.


나는 그 눈길이 부담스러워서 책 더미 뒤에 숨어 책을 구경하는 척했다. 헌책방치고는 다양한 나라의 책들이 쌓여 있었지만 하나같이 책등이 헐어 있었다.


그중에는 한글로 된 서적도 있었다. 빈손으로 나가기도 뭐했기에 나는 작가 미상의 시집을 들고 노파 앞에 섰다.


“How much?”


하지만 그는 미동 없이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혹시 소리를 못 듣나?


나는 돈을 꺼내 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파는 여전히 계산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그저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낱낱이 까발려지는 느낌이 슬슬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시집을 내려놓고 책방을 나서려는데 익숙한 언어가 귓가에 날아들었다.


“잘못 골랐구나.”


나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빛바랜 눈동자가 이채를 띠고 있었다.


“한국말을 할 줄 아세요?”


“더 좋은 게 있어. 잠시만 기다리렴.”


노파는 뜻 모를 소리를 했다. 외지에서 한국어를 쓰는 사람을 만나서 반가운 마음이 드는 한편, 상대가 괴짜처럼 보여서 당장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찌할까 속으로 저울질을 하는 와중에 노파는 산처럼 쌓여 있는 책 뭉텅이 사이에서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는 다짜고짜 그것을 내게 떠안겼다.


“어, 전 이런 책 필요 없는데요.”


“아니, 필요할 거란다. 돈은 됐으니 그냥 가져가렴.”


“하지만…….”


“그냥 가져가래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책을 살펴보는 척했다.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저렇게 강매하듯 떠넘기는 건지 조금 궁금했다.


책의 외관은 매우 독특했다. 단단한 겉표지 위로 금색 선이 타로 카드에서나 볼 법한 신비로운 문양을 그렸다.


선을 따라 쓱 손가락을 훑자 미세하게 파인 홈이 느껴졌다. 표지 정중앙에는 반듯한 필체로 《아로네의 일기》라 적혀 있었다.


처음 본 사이에 이런 귀해 보이는 책을 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못 받겠다고 말하려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는 텅 빈 공간을 목도했다.


“맙소사…….”


책방을 가득 채웠던 헌책과 노파가 감쪽같이 없어졌다. 나는 혼비백산해서 황량한 방을 돌아다녔다. 몰래카메라의 일종인가 싶어서 비밀 문이나 수상쩍은 장치들이 있나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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