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후 (67/67)

해후

샬로트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꿈에나 그리던 남편이 멀쩡한 모습으로 자신의 손등에 키스를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는 샬로트의 다리 옆에서 조심스레 마타하리를 보았다.

“이 아이가 우리 아이요?”

눈물을 글썽이며 샬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카이라고 해요. 카이야, 뭐 하니? 아빠한테 인사드리렴.”

어색한지 카이는 쭈뼛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아, 아빠.”

마타하리가 격정에 달해 몸을 낮게 웅크리며 카이를 끌어안았다.

가까이에서 그 광경을 보는 발데르와 보탄, 켈타스와 제라드, 그리고 오딘과 엘레느는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최근 들어서야 엘레느는 깨우쳤다.

오딘이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알았으면서도 무정하게 대했음을. 그리고 자신이 배 속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알고 누구보다 기뻐하였음을.

이는 오딘이 별로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아 습관이 되었던 탓이기도 했지만, 신하들이 자신을 보는 눈도 못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을 잊었던지 마타하리는 자신의 몸에서 아이를 멀게 했다. 그리고 일어서 오딘을 향해 몸을 돌린 후 오체투지를 하였다.

“하잘것없는 저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셨으니 제 육신과 영혼, 오딘 님께 바치겠습니다.”

“필요 없어.”

마타하리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오딘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장난스런 표정이었다.

“말이나 잘 들으면 되지, 육신과 영혼을 왜 바쳐?”

주변에서 졸지에 웃음들이 터졌다. 사정을 모르는 마르크라 할지라도, 무뚝뚝하고 쌀쌀맞던 헤르미온도 따라 웃었으니 예외가 되는 대상이 거의 없었다.

헤르미온은 고개를 돌려 엘레느를 바라보았다.

‘그분, 행복하게 해주세요.’

이미 여러 번 아레인에 드나들었다.

여왕이 오딘의 아이를 가졌단 것을 알았을 땐 큰 시름에 빠졌었다. 자살 생각이 들기까지 했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시간이 약이 되어주었다.

그렇다고 아주 포기한 건 아니었다.

‘다시 태어나서 만날 땐 양보해주세요.’

같은 시각,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아레인 왕성 밖에서 그곳에 있을 오딘을 생각하는 이리스. 꿈에도 오딘을 그렸고, 그새를 못 참고 보아야 직성이 풀리겠다며 무리를 이탈해 그를 쫓았었다. 그리고 몇 차례 훔쳐볼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이리스는 오딘이 너무 차가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녀 또한 바보가 아닌 이상 오딘이 낌새를 알아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아니라는 얘기다.

‘다음에 내가 깨끗한 여자로 태어난다면, 그때는 날 안아주세요.’

처음으로 이리스는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슬픔을 헤아리기라도 하는지 두 템플 기사들은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떠나겠어요.”

템플 기사들이 그녀를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사정을 알게 되어 측은지심이 들었던지 템플 기사 중 한 명이 물었다.

“따를까요?”

“괜찮습니다. 혼자 있을까 해요.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겠어요.”

비센의 걱정대로 템플 기사들이 그녀와 몸을 섞지는 않았다. 이리스 역시 그들을 유혹하지 않았다. 그래서 안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음이 향하는 이에게 다가가는 중에 다른 남자와 몸을 섞기는 싫었던 것이다.

잠자코 있던 템플 기사가 돈주머니 하나를 꺼내들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종잣돈은 될 것입니다. 크게 도움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

들리는 소문대로 이리스가 나쁜 여인만은 아니었다. 특히나 자신을 책임지는 두 템플 기사는 사람의 정으로 각별히 대했었다.

“마음이시니 받겠어요. 그럼 이건 내 답례.”

이리스는 왼손에 낀 팔찌 2개를 빼어 각자에게 전해주었다.

“위급할 때 쓰세요. 종잣돈은 될 겁니다.”

템플 기사들은 가벼이 웃었다.

그렇게 그들은 헤어졌다.

이후, 이리스는 속세를 버리고 산으로 숨어들어 작은 움막집에서 기거하며 죽을 때까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 *

마령은 분명 처절하게 괴로워하며 사라졌다.

그러나 령이 나오기 전, 오르골은 진한 핏물을 튀겨 냈다. 그 핏물은 땅바닥으로 튀었고 일부가 바닥으로 스며들었는데, 이는 오딘도 놓치고 있던 부분이었다.

뇌옥을 더 사용할 이가 없었던 까닭에 안은 텅 비어버렸다.

버려진 뇌옥. 그 안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바닥으로 스며든 핏물이 부글부글 끓더니 땅을 비집고 나와 서로와 엉키기 시작한 것이다.

뭉친 피들은 한동안 굳어 있었다.

얼마 후, 굳어진 껍질을 비집고 칙칙한 벌레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암흑 속에서 손톱만 했던 벌레는 점점 커져 갔다. 급기야 벌레가 손가락만 해졌을 땐 뿌옇게 빛이 났다.

마령이 무서운 것은 그 생명력이 지독할 정도로 질기다는 점이었다.

원래의 기억을 떠올릴지는 미지수지만, 분명한 건 이제 머지않아 껍질을 벗고 새로운 마령이 깨어난다는 점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단지 기다리기만 하면…….

끼이이.

아그리스는 뇌옥 문을 열었다.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검은 구름이 개었을 때, 아그리스는 오딘의 싫은 소리 속에 검은 달 역시 내려야 했다.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인간이나 드래곤이나 욕구가 존재한다.

당장에 답답해서 아그리스는 어두운 곳을 찾아 헤맸지만, 쉬이 욕구를 채워주는 곳이 없었다.

문을 닫고 창문을 닫아놓아도 일정량의 빛은 들어온다. 적어도 아레인 왕성의 모든 구조물이 그러했다. 이곳만 빼고.

아그리스는 이곳을 찾았을 때,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적잖이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벽 등을 끄고 광망을 토하는 광인만 재우면 만사가 오케이였다.

이곳이 비게 되어 아그리스는 더더욱 좋았다. 그 이후 처음 온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못 보던 것이 여기에 있었다.

“응?”

그가 본 것은 뿌연 빛을 내는 한 마리의 벌레였다.

‘별식이다.’

위기를 짐작했을까.

벌레의 머리는 아그리스를 보고 있었다.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꾸물꾸물.

아그리스는 다가가 벌레를 손으로 잡고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쩝쩝, 씹는 맛이 일품이군.”

정말 맛나게도 먹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대륙에 발을 디뎠던 마령의 최후였다.

설령 아그리스가 벌레를 집어삼켰다고 해도 마령이 정신을 지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기에 드래곤은 정신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 * *

제르딘, 카르만은 한자리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메이와 쿤도 함께 있었다.

네 사람 모두 어색한 분위기였다.

제르딘과 카르만 둘은 처분만을 기다리는 입장이었고, 따로 안면도 없어 서먹서먹했다.

반면에 쿤과 메이는 안면이 있었다.

어색함 속에 먼저 말을 꺼낸 건 쿤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 쉽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너 혹시 이름이…….”

“메이라고 해.”

새침데기처럼 메이는 툭 쏘아붙이고는 더 보지 않겠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두 사람, 아니 두 블러드 엘프의 인상이 굳었다.

“메이? 정말 메이야? 티리팔츠숲의……?”

쿤의 되물음에 메이는 더 이상 평온할 수 없었다. 놀란 토끼 눈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제르딘이 격정을 금치 못하고 달려와 메이를 껴안았다.

“왜 이래요? 숨 막혀요.”

메이와 다르게 카르만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쿤이 그를 입증했다.

“메이야, 오빠야. 그리고 널 안은 사람은 아빠고.”

메이의 동공이 흔들렸다.

“응?”

“미안하다, 아빠가 미안하다.”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얹은 제르딘의 표정은 참담했다.

부인이 죽은 후, 쿤은 그래도 혼자서 세상을 살 수 있을 나이에 두고 떠나왔지만 메이는 그렇지 못했다.

블러드 엘프들이 독립성이 강하고 자식들을 어릴 때 두고 떠나오는 경우가 많다지만, 제르딘은 잘못이 있었다.

아이에게 아빠의 얼굴조차 상기시켜 주지 못한 잘못, 그것이었다.

메이는 오랫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카르만이 고개를 낮춰 그런 메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너무 푸근했기에 메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메이가 카르만을 그렇게 따랐던 것도 부모의 빈자리가 컸던 탓이었다.

“아빠? 내가 어떻게 믿어? 난 아빠 얼굴도 모르는데.”

그 말이 흡사 제르딘의 가슴을 비수로 찌르는 듯했다. 몸이 찢어지는 고통보다 그 말을 견디기가 더 어려웠다.

쿤이 눈을 흘겼지만, 메이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럼 안 되잖아. 그러진 말았어야지. 날 낳지 말든가. 왜 낳았어?”

이 자리의 누구도 그녀를 말릴 사람이 없었다. 다가오는 한 사람만 제외하고 말이다.

“행복에 겨워 살았군. 부모를 부정하다니…….”

조소 섞인 말을 내뱉은 사람은 오딘이었다.

메이가 평소답지 않게 앙칼지게 소리쳤다.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함부로가 아냐, 꼬마 아가씨. 널 위해 하는 말이다.”

“뭘 위한다는 거죠? 자식을 버린 부모를 용서하란 말인가요? 그때 난 너무 어렸다고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두고 떠날 수 있는 건가요?”

다른 사람 같으면 할 말이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딘은 달랐다.

“그래도 낳아주었으니 다행이지. 안 그래?”

“나… 낳아주었다고요?”

“스스로 기어 나온 녀석도 있다. 그 녀석은 배 속에서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지. 부모가 제 역할을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야.”

오딘 본인의 얘기였다. 남들에게 한 번도 털어놓지 않았던…….

놀랍게도 그는 그 일을 기억했다.

“영원히 버린 것도 아니고, 일이 있어 떠난 것이라면 어떻게 할 테냐?”

메이는 벙어리처럼 말을 잊어버렸다. 그러다 그 말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 그럴 리 없어. 아이를 두고 일이 있다니, 그럼 안 되는 건데…….”

메이의 눈물은 하염없이 쏟아졌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그녀가 흘린 눈물은 여태 제르딘이 흘린 눈물만큼이나 많았다.

“이 아이 말이 맞소. 난 일이 있어 떠난 것은 아니었소. 세상에 대한 궁금증에…….”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거짓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겐 항상 먹을 것이 부족했다. 제르딘은 둘을 먹여야 할 의무가 있었다. 따뜻한 부모의 존재를 알려 주는 것보다 배를 굶는 것을 막아줘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가 노예 상선에 팔려가게 된 이유였다.

오딘은 이를 알고나 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그리스를 데리고 와 기억을 뒤져 볼까? 누구 말이 맞는지 말이야.”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딘은 그의 뒷조사를 이미 마쳐놓았으므로.

“본 좌는 바보가 되기 싫다…….”

제르딘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메이는 정도 많을뿐더러 눈물도 많은 소녀였다.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그녀는 진작 자신의 몸에서 떨어진 제르딘을 보며 물었다.

“저, 정말이에요? 그런 거예요?”

오딘은 두 사람이 더 말을 섞을 기회도 주지 않았다.

“이틀을 주지. 그 시간 안에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너희 셋은 죽어야 한다. 정확히 이 자리에서 보기로 하지.”

3명이란 쿤을 제외한 3명이었다. 방금 오딘의 손짓은 분명히 카르만도 가리켰으므로.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쿤이 말을 더듬었다.

“오, 오딘 님…….”

오딘은 쿤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그 자리에서 멀어져 버렸다.

그리고 이틀.

사람에 따라서 매우 길기도, 짧기도 한 시간이다.

일에 치여 사는 사람들이나 시간이 아까운 사람들에게는 짧을 테지만, 제르딘과 메이 부녀에게는 지극히도 긴 시간이었다.

‘이건 분명히 오딘 님 잘못이야. 그리고 메이는 또 무슨 잘못이 있다고 죽이신다는 거야?’

약속 장소로 걸음을 옮기며 쿤은 그렇게 생각했다.

가장 많은 생각을 한 사람은 메이였다.

그가 했던 말.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할 것 같았다. 자신은 그에 비하면 그의 말마따나 행복에 겨운 것이다.

더군다나 카르만도 살펴야 했다. 이 일로 인해 그가 목숨을 잃는 건 싫었다.

슬그머니 메이는 쿤을 지나쳐 제르딘의 옆으로 섰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축 처진 손에 자신의 손을 대었다. 무척이나 거친 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게 아빠 손이야?’

제르딘은 목이 메었음에도 내색할 수 없었다. 아직도 딸애의 기분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았으니까.

역시나 메이는 제르딘의 손은 잡지 않은 채 팔을 내렸다.

딸애가 어떻게 대답하건 그는 상관없었다. 카르만을 볼 낯이 없을 뿐.

[미안하게 되었소. 우리 때문에…….]

그에 카르만은 환히 웃었다.

[어차피 각오는 했었습니다. 저 또한 템플 기사단장의 뒤를 쫓아가리라는 걸. 제 무덤도 찾는 이는 없겠군요.]

마령이 빠져나왔을 때 오르골은 죽었다.

신성 제국의 영지에 묻혔어도 누구에게도 환영받을 수 없는 죽음이었다. 그의 죄악이 너무도 컸던 탓이다.

알려진다면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이 훼손될 것. 카르만은 자신도 그런 죽음이기를 바랐다.

‘그대만 당하기엔 억울할 거요. 다 내 불찰이오. 그대에게 한이 있다면 날 향했겠군.’

잠시나마 하늘을 보며 카르만은 그렇게 생각을 품었다.

오딘은 미리 그 자리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발소리를 들었던지 시선은 그대로 둔 채 그가 물었다.

“그래, 꼬마 아가씨, 결정은 섰나?”

메이는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못할 것도 없지요.”

“그럼 불러봐.”

메이는 잠시 눈알을 굴리다 제르딘을 보고 입술을 열었다.

“아… 빠…….”

오딘은 슬그머니 메이를 보곤, 다시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우며 제르딘을 향해 요구했다.

“그대도 답해줘야지.”

명백히 강압적인 말임에도 제르딘은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메이에게, 이렇게 귀여운 딸아이에게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불렸다는 게 너무 큰 감동으로 자리했다. 억지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 난…….”

오딘이 망설이는 제르딘의 뇌리에 전음을 넣었다. 물론, 협박이었다.

-서로라고 했다. 설마 일을 핑계로 또 버릴 생각은 아니겠지?

제르딘은 딸이라 칭하는 것을 뒤로 미뤄두고, 오딘을 향해 돌아서서 땅에 대고 머리를 조아리며 고마워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메이도 격정에 달했다. 그녀는 엎드린 제르딘을 껴안고 펑펑 울어댔다.

“아빠……! 흐엉.”

쿤도 코끝이 찡해졌다.

그리고 근처엔 성녀 세실리가 있었다.

카르만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상쾌한 공기를 빨아들이고는 마음을 안정시킨 후에 오딘에게 말했다.

“여러모로 고맙소. 난 내 목숨 대신에 부탁할 것이 있는데…….”

“말해봐.”

“성녀님을 부디 돌봐주셨으면 하오. 부디 간절히 부탁하오.”

카르만도 몸을 굽혔다. 제르딘과 같은 자세로…….

오딘이 이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누가 보면 날 악마로 보겠구나. 너희들, 아무 데도 못 간다. 다 내 밑에 남도록……. 날 위해 일해라.”

훗날, 카르만은 신성 제국의 성황으로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마다했다. 모두 죄의식 때문이었다.

또한 제르딘은 마도사탑의 수장 지위를 유지한 채 오딘의 손과 발이 되었다.

* * *

아레인 왕성은 사람들로 붐비고 들끓었다.

바리톤에서 온 사람들, 로만 연합에서 온 사람들을 비롯해 아레인과 연줄을 대고 싶어 하는 군소 왕국들이 줄을 이었다.

상단의 질서도 새로 쓰였다.

‘이스론 & 아레인’이 상단의 최고봉을 점하였으며, 가리온과 그를 따르던 상단들은 한없이 밀려났다. 파산을 한 곳도 수두룩했다.

그럼에도 마르크는 목에 힘을 주고 다니진 않았다.

약한 자를 돌봤으며 강한 자에게는 겁을 심어주었다.

불미스러운 일은 즉각 처리했다. 다시는 상업에 발을 대지 못할 정도로 엄하게 대했으니, 양심 있는 상인들이 돈을 버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와중에 작금의 현실을 불평해대는 이가 있었다.

“미친놈들. 세상 바뀐 게 대수냐? 네놈들은 평생 행복할 것 같으냐?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나도 한때는 잘나갔다고… 끄억…….”

트림을 하는 이는 파르티잔이었다.

그는 그 이후로 술독에 빠져 살았다.

세상은 자신에겐 너무한데 타인들에겐 관대하다. 그게 그가 이렇게 술을 퍼마시는 이유였다.

따로 일을 안 해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 그런데도 농부들은 제 할 일들을 버리지 않았다. 인생이 지루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에 겨운 표정의 농부들을 지나쳐 파르티잔은 옆구리에 술병을 낀 채 반나절을 넘게 걸었다. 그리고 한 언덕에 다다랐다. 이 자리는 멀게나마 아레인 왕성이 잘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푸하하하! 과거의 파르티잔이 아니로다! 겁낼까 보냐?”

문득 파르티잔은 고개를 털었다. 술기운이 점차 가시며 불안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찬바람은 술기운을 더 빨리 털게 만들었다.

급기야 파르티잔은 자신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내가 미쳤지. 여기 왜 온 거야?’

자책에 빠져 있을 무렵, 어디선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여어, 파르티잔~”

파르티잔의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목소리는 바로 그 목소리였던 것이다.

역시나 다정하게 뒷말이 이어졌다.

“제 발로 돌아온 거야?”

파르티잔은 이제는 지척에서 들린 목소리를 향해 몸을 돌리고 대상도 확인하지 않은 채 바닥에 납작 웅크렸다.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의 주인은 오딘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대륙의 패자인 그가 한가하게 왜 이런 곳에 온 것일까.

추측은 거듭될 수 없었다. 그가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온 것 맞지?”

파르티잔은 헛숨을 삼키고 즉시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진심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을 알 텐데도 오딘은 마땅히 반겼다.

“그래? 그럼 들어가야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일. 그러나 파르티잔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곧 왕성의 한 방이 그에게 제공되었다.

기름지고 맛깔스런 요리가 배 속으로 들어갔는데도 소화가 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구나.’

파르티잔은 이게 인생의 끝이라고 받아들였다. 그와 함께하는 것은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님을 체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창밖을 바라보니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을 사로잡았다.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거야? 저 사람들한텐 다 잘해주면서…….’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 눈물이 되었다.

울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 눈물이 쏟아져 팔뚝으로 하염없이 훔쳤다.

그 눈물을 그치게 하는 노크 소리가 있었다.

똑똑.

응어리진 가슴을 달래고 푹신한 베개로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그런 후에 답했다.

“드, 들어오세요.”

오딘이면 노크할 리가 없다.

과연 들어오는 대상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파르티잔의 사고는 경직되었다. 그는 한때 자작의 칭호를 갖고 있던 조르바였던 것이다.

“하하! 오랜만이구나. 파르티잔! 나인 줄 몰랐겠지?”

조르바는 당장에 다가서서 침대 위에 앉아 있던 파르티잔을 껴안았다.

파르티잔은 두려움이 저절로 샘솟았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있어서다.

조르바가 오딘에게 끌려왔을 때 얼마나 놀려 댔던가? 그가 자신을 죽이려는 마음까지 품었음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자신을 대하는 낯은 그때와는 분명 달랐다.

조르바는 진심으로 대하고 있음에도 파르티잔은 밀려드는 두려움을 제지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증폭되기까지 했다.

파르티잔이 떨고 있는 것도 모르고 조르바는 기뻐 말했다.

“나 말이다, 자작이 되었다.”

이제 보니 진짜 옷차림이 그랬다. 도리어 과거보다 더 좋은 옷감, 멋스러운 그림의 복장이었다.

“추, 축하드립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파르티잔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자작이 되었다고? 왜? 그가 그럴 위인이 아닐 텐데…….’

흔들리는 동공을 이제야 알아차렸는지 조르바는 파르티잔에게서 눈을 거두며 옆쪽에 앉았다.

“아직도 변하지 않았구나. 난 오딘 님께 많이 감사해하고 있다. 그분,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면도 많다. 너도 그때 나가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왜일까? 조르바의 말투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과거 그의 말투는 격이 있었다. ‘경, 그러시오, 책임을 져야 할 거요…’ 등등.

계기가 된 게 단둘이 서로를 헐뜯기부터라고는 하지만, 지금 대하는 투는 너무 다정하다. 마치 친구를 대하듯 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마음은 그렇지 못한데 말이다.

“자작님, 과거를 뉘우치고 있습니다. 이러시면 더 무섭습니다.”

“하하! 마음 두지 마라. 진즉에 미운 감정은 접었다. 난 말이다, 오늘 네가 반가워서 그러는 거다. 정말이야.”

시선 둘 데를 몰라 파르티잔은 요리조리 눈알을 굴렸다.

그때, 조르바가 난데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큭, 오딘 님이 말씀하시더구나. 네 나이, 거짓이라며?”

파르티잔이 뭐라 답하려는 찰나, 오딘이 열린 문에 기대어 묻고 있었다.

“식사는 입에 맞아?”

파르티잔은 황급히 침대 아래로 내려서 바닥에 또 납작 웅크렸다.

“맞습니다, 맞고말고요.”

조르바도 일어서 자세를 바로 했다.

“폐하를 뵈옵니다.”

오딘의 호칭이 달라져 있었다.

이미 아레인은 제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따라서 대표가 되는 그가 아직도 ‘님’이라는 호칭이 붙어서는 안 되었다. 이는 오딘 또한 허락한 사안이었다.

오딘은 두 사람을 보며 싫지 않은 미소를 떠올렸다.

“대충 얘기를 들었는데, 파르티잔 너도 부러우면 성 하나 줄까?”

성이 장난인가? 파르티잔은 오딘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해서 속마음 그대로를 털어놓았다.

“아닙니다. 소인은 먹여 주시고 재워주시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옵니다.”

오딘은 낮게 웃고 뒷말을 이었다.

“오늘 파르티잔과 할 얘기가 있는데… 뭐, 자리에 있어도 괜찮아, 조르바 자작은.”

문이 닫히고 얼마지 않아 파르티잔의 지독한 비명 소리가 성을 울렸다.

“끄아아아~”

* * *

그것이 마지막 쇠침이었었다.

파르티잔은 거울 앞에서 탄력이 생긴 볼 살을 꼬집어보았다.

“아아~”

아픈 것으로 보아 꿈이 아닌 듯했다.

이마의 주름들이 사라지고 쭈글쭈글했던 피부는 탱탱해졌다. 허옇게 세었던 머리는 변하지 않았지만, 두피에 붙은 머리카락이 다른 색으로 자라는 것으로 보아 머지않아 제 머리카락을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정말 젊어졌다는 얘기다.

파르티잔은 기쁨을 접어두고 사색에 잠겼다.

‘그럼 고통을 주려 했다는 게 아니라는 얘기야? 정말 고쳐 보려고?’

며칠 전,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에 오딘은 파르티잔에게 더없이 살갑게 대했다. 치료가 성공적으로 끝난 것도 한몫했다.

더불어 조르바와 과거의 감정을 씻어버리라며 귀한 술과 안주까지 대접받았다.

그 자리에서 파르티잔은 조르바에게 얼마 전 오딘 님의 아이가 태어났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저렇게 기분이 좋은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황비 엘레느 또한 시종들을 이끌고 이 자리에 들렀다.

그녀는 자신에게 뭐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죽으란 법은 없구나.”

야밤임에도 불구하고 거울을 보며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만취가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 때에 술에 몸을 못 가눠서야 쓰겠는가.

똑똑.

“파르티잔, 깨어 있는가?”

“네, 네. 소인 아직 잠을 청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쉬바인과 쿤이었다.

쿤은 신기한 듯이 파르티잔을 쳐다보았고, 그 시선은 쉬바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쉬바인은 해야 할 말을 잊지 않고 전했다.

“불이 켜져 있어서 혹시나 하고 들어와 봤더니 역시나군. 피곤할 테니 할 말만 전하지. 폐하께서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하셨네. 자네도 일을 해야 해. 부족한 마법이야, 내 십시일반으로 도울 테니 너무 염려는 말게.”

말인즉슨, 놀고먹지는 말라는 얘기다.

파르티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사실이네.”

“아, 아닙니다. 원하는 일입니다. 정말 원하는 일입니다.”

정말 기뻐서 어찌할 줄 모르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파르티잔, 그의 불운은 오늘로 끝을 맺은 셈이었다.

* * *

요람 안에서 아기가 웃고 있었다.

아기에게 웃음을 안겨 주는 것은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였다.

“보로보로보로보로~ 까꿍~”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입 안에서 혀를 굴리는 게 그렇게 재미있는지 아기는 자그마한 손을 흔들며 방긋이 웃고 있었다.

“케에… 케에엣.”

아그리스가 인간의 아기를 못 보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까이한 적도 없었을 뿐 아니라, 이렇게 귀여운 아기는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희끗희끗 자라나는 검은 머리카락이 아그리스의 발길을 이리로 이끌었다.

벌써 며칠째인지 몰랐다. 야심한 밤마다 몰래 이곳으로 와서 아기를 보는 일이…….

그는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가는 발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아기의 웃음은 더욱 환해졌다.

그때, 돌연 인기척이 들리자 아그리스는 당황했다.

오딘에게 발각되면 또 싫은 소리를 한바탕 들어야 할지 모른다.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었음에도 당황한 까닭에 아그리스는 아기 발을 내려 두고 다급히 요람 아래로 숨었다.

과연 구둣발이 보였다.

그 구둣발은 요람 앞에서 정지했다.

아그리스는 숨도 참아가며 구둣발이 멀어지기를 계속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오딘 냄새가 아니었다.

둘째, 그가 오늘 신은 구두와 달랐다.

셋째, 그가 왔다면 누군가 대동했을 텐데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넷째, 요람 앞에서 너무 오래 머무른다.

평소 관찰했던 그는 오래 머물지 않고 아기를 안아들고 엘레느의 방으로 가거나 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그리스는 대상을 확인하기로 마음먹고 슬며시 목을 내밀어 구둣발의 주인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즉시 요람 밑에서 빠져나와 으르렁거렸다.

“고르다노스 네놈…….”

“아, 아그리스…….”

그랬다. 요람에 다가와 아기를 보고 있던 자는 괴짜 노인 고르다노스였다.

떠났던 그가 왜 다시 돌아온 것일까.

그는 오래도록 엘레느 곁을 맴돌았다. 그녀가 부른 배를 붙잡고 전쟁터에 있었을 때도 그러했다.

끝내 참아가며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이 아기가 태어난 이상 맹세는 무너졌다. 손녀딸의 아기는 그의 맹세마저 무너뜨릴 정도로 너무도 작고 귀여웠던 것이다.

정체가 판명 난 이상 아그리스가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요람을 차지하기 위해 고르다노스를 어깨로 툭 밀었다. 평소였다면 고르다노스는 양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기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넌 그거나 가져라.”

아그리스가 성급하게 아기를 손에 안았다.

고르다노스도 요람 따위를 가지려 온 건 아니어서 그의 손에서 아기를 낚아채갔다.

아기는 아그리스와 고르다노스의 손으로 옮겨 다녔다.

그럼에도 울지 않고 꺄르르 웃기만 했다. 정말이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녀석이었다.

참다못해 아그리스의 목소리가 급격히 커졌다.

“네 녀석, 나와 해보겠다는 거냐?”

이 순간만은 고르다노스도 지지 않을 기세로 눈을 흘겼다.

그러나 둘이 싸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너무 아이에게 집중한 탓에 아이 부모가 이곳에 걸음을 옮겨 놓은 소리를 못 들었던 것이다.

“지금 두 분, 뭐 하시는 거죠?”

못마땅한 눈초리로 둘을 쏘아보는 오딘의 옆에서 엘레느가 앙칼지게 낸 소리였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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