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패자
바리톤에 파병을 나갔던 아레인군이 되돌아오고 신흥 제국까지 가담했으니 제국의 황제라 해도 대패를 면할 수 없었다.
아레인의 전쟁은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오딘은 제국이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끔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일환으로 그는 황제를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최후의 항전에 항전까지 거듭했지만, 황제는 결국 오딘의 앞에 서게 되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생애 최악의 수치였다. 대륙을 평정하던 황제가 그다지 알려지지도 않은 아레인의 수장에게 무릎을 꿇었으니 말이다.
1. 크레노스 제국은 아레인 허락 없이 군사를 증강할 수 없다.
2. 페노강 이남의 제국의 영지는 아레인에 귀속된다.
3. 황제는 더 이상 상단의 질서에 관여하는 것을 금한다.
4. 크레노스 제국은 매년 아레인에 성의를 표해야 한다.
5. 황제의 아레인 방문은 한 해에 한 번으로 정한다.
황자를 곁에 두고 황제는 눈물을 머금고 이 조약에 동의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크레노스 제국은 대륙에서 사라질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엔 오딘 말고도 바리톤의 국왕 로테노아도 함께였다.
바리톤은 즉시 왕국의 칭호를 되찾았다. 이후에는 번영이 함께할 것이었다. 아레인을 믿고 따른 결과였다.
세상만사가 일정하지 않다. 때로는 신념이 필요하며, 그를 뒷받침해줄 용기가 필요하다.
로테노아는 오늘 그것을 깨달았다.
역시나 오딘은 마도사탑의 양지를 허락했다. 대신 여러 가지의 조건을 달았다.
위협을 조장하는 마도사들에 대한 가차 없는 처벌 조항이 그것이었다.
작금, 대륙의 중심은 아레인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성 제국의 치세는 기울어 곳곳으로 불길이 치솟고 도적이 날뛰었다. 신도들은 줄어가며 크고 작은 신전들에는 거미줄이 내려앉기까지 했다.
이는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안의 마령, 즉 오르골이 미쳐 날뛰며 닥치는 대로 학살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그 수가 무려 7천 명에 달하였으니, 신성 제국이 더 이상 축복받은 땅이 아닌 저주받은 땅으로 불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 * *
어느 날, 오딘에게 정말 의외의 손님이 찾아왔다.
그 손님이란 다름 아닌 카르만이었다.
카르만의 옆에는 메이가 있었으며, 성녀 세실리 또한 함께였다. 오는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던지 메이와 세실리는 매우 지친 기색이었다.
오딘은 짓궂은 얼굴이 되어 붉은 카펫 위에 선 카르만을 굽어보았다.
“안 그래도 찾으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제 발로 오다니. 그래도 매를 먼저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군.”
“뉘우치고 있소.”
“뉘우치고 있다고? 무엇을?”
“한때나마 당신을 적으로 돌린 것, 또한 무고한 양민들에게 학살을 자행했던 것.”
“알긴 아는군.”
잠자코 듣던 메이와 세실리의 동공이 급격히 부풀었다.
그녀들이 아는 성황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위인으로만 비춰졌다.
결국 메이가 카르만의 말을 부정했다.
“폐하, 왜 거짓말을 하시는 거예요?”
“저 사람의 말이 맞아. 난 그런 사람이야.”
쿤은 오딘의 옥좌 옆에 서서 멀뚱멀뚱 메이를 살폈다.
작금, 메이는 카르만 말고는 아무도 안중에 없었다.
“자, 잘못된 기억이에요. 누군가 이상한 기억을 집어넣었…….”
“증인이라도 불러줘야 할 때 같군.”
오딘의 말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어린 메이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으니 말이다.
충격으로 굳어버린 메이를 뒤로한 채 오딘이 말을 이었다.
“한 가지를 더 빼먹은 것 같군. 바리톤과의 전쟁은 어떻게 설명할 생각이지?”
“그건 이분께서 일으킨 게 아니에요.”
계속 끼어들어서일까. 오딘의 눈초리가 가늘어지며 메이를 노려보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숨통이 꽉 조이는 느낌이 들까. 정말 모를 일이었다.
‘크…….’
두려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메이는 단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뚝심이 있었다.
쿤을 한 번 쳐다보더니, 오딘은 메이에 대한 적대적인 시선을 거두었다.
“변론은 하지 않을 생각이냐?”
카르만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는 의외롭게도 순순히 잘못을 시인했다. 아니, 덤터기를 썼다고 봐야 할 것이었다.
“할 말이 없소. 모두 내 탓이오.”
메이는 복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자신이 모시던 성황 폐하가 왜 모든 죄를 뒤집어쓴단 말인가. 설움이 북받쳐 올라 예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랐다.
오딘 또한 비센이 전쟁을 일으켰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전쟁이 벌어진 도중 오간 첩보들은 대다수가 정확한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카르만을 탓하고 있다. 오딘은 그를 시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가 달라진 것 같은데 그걸 모르겠군.’
돌연, 과거 카르만과 사투를 벌이던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목에 걸린 펜던트를 떼어내던 순간의 일 말이다. 카르만은 마귀처럼 변했었다.
오딘은 그 점을 짚었다.
“펜던트는 버린 모양이군.”
“그렇소.”
“왜지?”
“이제는 필요가 없으니까.”
모를 말들이었다. 오딘은 당시의 일을 착각이라고 받아들였다.
‘펜던트와는 별 연관이 없는 걸 수도…….’
유순해진 태도가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당장 데리고 가 마타하리의 원한을 풀어줄까 했지만, 궁금한 것부터 푼 후에 그럴 참으로 오딘은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이는 물론 전음이었다.
-이유를 알고 싶군. 죽을 자리임을 알면서 왜 제 발로 온 것이냐?
카르만은 성녀와 메이를 씁쓸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통신 마법으로 답했다.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서 왔소.]
-부탁?
[그렇소. 당신이 내게 아직까지 미움이 있다면 목숨을 거둔다 해도 원망하진 않겠소. 하지만 한 가지만 들어주시오. 이는 당신과도 연관된 문제일 수 있으니…….]
-나와 연관이 있다?
[부디 내 말을 믿어주시오. 내가 학살을 자행했던 것은 마령 때문이었소. 한순간 원망이 커져 어리석게도 마령을 받아들였었소. 그 마령이 오르골의 몸으로 옮겨 갔소. 내가 당신을 미워하고 적으로 돌렸던 것도 다 그…….]
오딘의 표정이 흥미로워졌다. 그러나 카르만의 말 모두를 부정했다.
-더 들어주기가 짜증나려 하는구나. 역겨운 녀석, 일행들 앞에서는 잘못을 시인하더니 이제 와서 발뺌을 하는 것이냐? 하나도 네 잘못이 아니라 하는구나.
카르만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부정하지 않겠소. 내 잘못이오. 내 불찰이고, 내 탓이오. 모두를 시인하겠소. 모든 잘못에 대한 처벌을 따르겠소. 그 대신 오르골, 그만은 막아주시오.]
지금 카르만에게 진실 따윈 중요치 않았다. 그는 생명을 내버릴 각오로 이곳으로 향하지 않았던가. 마령의 폭주를 막아줄 위인은 저치 말고 떠오르지 않았던 까닭이다.
또한 분명히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몸을 허락한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카르만이었으니 그 정도였다. 만약 마령이 타인의 몸을 빌렸다면 지금 일어나는 학살만큼이나 지독한 일이 벌어졌을 테니까. 좋게 보자면 카르만이 마령의 마성을 최대한 제어했단 말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저울과 같아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다. 그 또한 범인을 뛰어넘는 정신력과 신성력으로 버텨 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밉보여서인지 오딘은 그 말 또한 문제 삼았다.
-결국 본 좌를 끌어들이려 왔단 말이로군. 네 녀석의 복수를 위해서겠지?
이 점만은 명백히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카르만은 오르골을 미워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으므로.
설혹 아니라고 부정한들 오딘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게 애석했다.
신성 제국이 기울어가는 것보다도 그는 많은 사람들의 이유 없이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게 싫었다. 주신을 믿건 믿지 않건, 사람의 존엄성은 공평하다.
주신은 자신을 믿는 자에게 복을 내리지도, 믿지 않는 자에게 벌을 가하지도 않는다.
그건 대륙을 창조한 주신의 의무였다.
신은 방관자였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결코 나서는 법이 없다.
카르만 자신 또한 그랬지 않은가.
그녀를 잃던 그날, 주신 아스카론은 도움을 주지 않았다.
주신에게 기대었던 건 비겁함이었다. 늦게나마 깨우친 어리석음이었다.
우상 숭배를 말라는 건 잘못된 길로 빠질까 염려되어서였다. 작금, 카르만처럼 말이다.
‘이 죄를 어떻게 씻으리. 내 목을 베어 들판에 던지고, 몸을 바다에 빠뜨려 물고기 밥이 되게 하더라도 원혼들의 아픔을 달래줄 수 없다.’
오딘은 비슷한 내용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네 녀석 때문에 괴로워하는 놈이 있다. 같이 가줘야겠다.
* * *
끼이이-!
워낙 두껍고 무거운 까닭에 강철문은 윤활유를 붓다시피 발라도 괴음을 냈다.
잔인하게도 오딘은 이 자리에 메이와 세실리를 동행하게 했다. 그녀들에게 진실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였다.
카르만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오딘에게 사정은 들었지만, 그의 원한을 달래주는 것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오르골을 제거하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 가지만 약속해주시오. 만일 나로 인해 그의 원한이 달래지지 않는다면 오르골을 잡아주시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 없어.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니까.
좋은 꿈을 꾸는지 마타하리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광인이 되기 전의 얼굴을 떠올리게끔 했다.
“일어나라, 마타하리.”
오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타하리의 눈꺼풀이 열리며 백색의 광망을 토해냈다.
그에서 서릿발처럼 싸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 춥지 않은 곳이었는데도 오한이 돋을 정도였다.
“너로 인해 미쳐 버린 놈이다.”
“뉘우치고 있소. 어서 시행해주시오.”
지금 이 시간에도 무고한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 보려 보채었을 뿐인데, 너무 서둘러서인지 그 말이 오딘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내일 할까?”
카르만의 안색이 싹 변했다.
“반성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면 미안하오. 잘못했소.”
이로도 화가 풀어지지 않았는지 오딘은 시큰둥해 보였다.
카르만은 마타하리를 향해 돌아서선 차가운 바닥에 엎드렸다. 이 바닥은 유난히도 찼다. 마타하리의 화기를 억누르기 위해선 추운 장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얼음장 같은 바닥에 몸을 밀착시켰어도 카르만은 인상도 찌푸리지 않은 채 정말 미안한 낯빛을 띠고서 말했다.
“내가 그대의 가족들에게 몹쓸 짓을 한 놈이오. 용서를 바라지는 않겠소. 잘못을 뉘우치고 있소이다. 찢어 죽인다 해도 할 말이 없소. 뜻대로 하시구려.”
“사과해봤자 필요도 없어.”
오딘의 말에 카르만이 고개를 돌렸다.
“왜……?”
“듣질 못하니까. 광인이라고. 네 경우와는 달라. 이 녀석은 아주 미쳤거든.”
카르만의 얼굴은 무거워졌다. 모두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 무슨 벌을 내린다 해도 달게 받을 수 있었다.
마음을 독하게 먹어서인지 다음 오딘의 말이 별 위협이 되지 못했다.
“괴로울 거다.”
오딘은 카르만에게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게 했다.
경건한 마음으로 임하려는 생각을 품어서인지 카르만의 자세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러고 오래 있다 보니 오딘의 입에서 웃음보가 터졌다.
“큭, 크큭…….”
이는 펼칠 사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 조금 전의 보챔이 거슬렸던 까닭에 치기가 발동한 것이다.
뒤쪽의 아론은 역시나 하는 얼굴이었다.
그조차 긴가민가했었다. 수차례 광인들을 양성해왔고, 그 화기를 다스리기 위해 사술을 펼쳤음에도 이런 자세로 시작되는 것은 없었으니까.
터진 웃음으로 인해 그 자세는 장난으로 판명되었다.
메이의 얼굴이 붉어지고 세실리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들은 모두 오딘의 도움을 받았지만, 메이는 전적으로 성황 편이었다.
“이보세요! 지금 장난친 거죠? 그렇죠?”
메이의 태도는 당차기 그지없었다.
오딘과 아론은 그렇다 치고, 이 자리엔 여러 시종들과 허우대 좋은 장정들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기죽지 않고 따질 것은 따지고 있는 것이다.
말을 섞으면 우스운 꼴이 되기에 오딘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초를 꺼내오도록.”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종들이 대답했다.
“분부를 따르겠나이다.”
곧 5백 개의 초가 담긴 나무 상자가 대령되었다.
오딘은 상자에서 일일이 초를 꺼내들어 일정한 배열로 나열했다. 곧 카르만을 중심으로 반경 3미터의 원이 먼저 만들어졌다.
“철창을 열어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대답을 한 건 아론이었다. 이 자리에서 마타하리에게 근접할 수 있는 사람은 오딘 말고는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론이 벽 쪽에 다가서 쇠로 된 작대기를 내리자 두꺼운 철창이 양쪽으로 열리며 소음을 냈다.
드드드드드.
“떨어져.”
말할 것도 없었다. 이미 눈치 빠른 시종들이 메이와 세실리를 뒤쪽으로 물러나게 하였으므로.
마타하리의 주변에도 초의 배열이 같아졌다.
다만, 원 안의 모양새는 다르게 그려졌다. 엄밀히 마타하리는 피해자였고, 카르만은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두 원 사이에는 하나의 길이 있었다.
서로에게 통하는 길. 이것으로 두 혼이 마주치게 될 것이다.
초들은 안내자인 동시에 매개체였다.
오딘은 초를 잇는 길에도 기름을 뿌렸다. 혹 혼이 샐 것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이어 그는 흑룡검을 빼어들었다.
하필이면 카르만의 앞이었기에 메이의 눈에는 수심이 가득해져 갔다.
“하, 하지 말아요.”
오딘이 냉랭한 시선으로 메이를 쏘아보았다.
“잡음을 넣으면 정말 죽게 되는 수가 있으니 침묵하도록.”
세실리가 메이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그녀의 따뜻한 손길은 커다란 위안이 되어주었다.
흑룡검의 날카로운 예기로 인해 각자의 팔뚝에 생채기가 났다. 오딘은 팔뚝에서 흐르는 피들을 검지와 중지를 이용해 쓸어 뿌렸다.
착- 착-!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손가락이 용기도 아닌데, 피는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고 그의 손을 타고 가리키는 쪽으로 뿌려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을 가져오도록.”
명령이 떨어지자 시종들이 대답과 동시에 한쪽으로 뛰어가더니, 구석에 자리한 문의 빗장을 풀고 다리가 넷 달린 쇠로 된 항아리 하나와 칙칙한 색의 도자기 하나를 꺼냈다.
도자기를 드는 것은 시종 혼자였지만 항아리를 드는 사람들은 장정을 포함, 자그마치 8명이었다. 옆 둘레만도 사람의 키만큼이나 컸으니 어련하리오.
더더욱 기가 찬 것은 오딘이었다.
시종들과 장정들이 낑낑거리며 들고 온 항아리를 오딘은 한 손으로 받아들어 빙그르 돌리며 혼을 잇는 길목의 정중앙에 내려 두었다.
쿵!
메이의 앙증맞은 입술이 찢어져라 벌어졌다.
들고 온 무게를 한 손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드는 것도 그렇지만, 항아리를 내려 둘 때 적잖은 충격이 땅을 강타했는데도 불구하고 쓰러진 초가 없었던 것이다.
오딘은 뚜벅뚜벅 걸어 다니며 초를 지나쳤다. 스쳐 가는 손길마다 초가 타올랐다. 삼매진화나 열화장을 모르는 메이와 세실리로서는 믿기지 않는 광경들이었다.
마지막 초까지 불을 붙였을 때, 오딘은 타는 촛불 속에 손을 집어넣어 손바닥으로 불길이 옮겨 붙게 했다. 그리고는 툭 털자 불은 미리 뿌려 놓았던 기름으로 옮겨 붙어 하나의 불길을 형성케 했다.
오딘이 손을 내밀자 시종이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받쳐 든 도자기를 내밀었다.
윗부분이 여러 겹으로 밀봉이 되어 있었는데, 오딘이 그것들을 걷어내었을 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뇌옥 안을 떠돌았다.
메이가 코를 막고 어렵사리 물었다.
“그, 그게 뭐……?”
“말해줘도 모를 게다. 박쥐 피, 개구리 내장, 어린아이의 눈물, 황새 배설물, 구더기 등등이 들어갔지.”
구역질이 나려는 것을 메이는 겨우 참아 넘겼다. 그로 인해 코를 벌린다면 코가 썩어 문드러질 것만 같았으므로.
오딘은 안에 든 수저로 진녹색 액체를 카르만과 마타하리에게 뿌렸다. 그런데 각기 튀는 부위가 달랐다.
영이 드나들 때 도움을 주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빠져나올 때 서로를 구분할 수 있게끔 하는 조치이기도 했다.
“염화(炎火), 멸옥(滅獄), 한수(恨水), 필장(畢長), 나한(羅漢)…….”
통 모를 말들.
지루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눈을 감고 합장을 한 채 입술을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오딘이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날래게 움직이며 카르만과 마타하리의 목을 젖혀 기도를 개방시켰다.
허연 기체가 두 사람의 입 안에서 흘러나왔다.
과연 영들은 범위 안을 벗어나지 않았다. 혹 지나치려 할 땐 촛불이 솟구치며 열기가 나가는 것을 방해했다.
두 영은 항아리 위쪽의 허공에서 만나더니 빙글빙글 돌며 서로를 살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들은 이내 제자리로 돌아갔다. 각자의 몸으로 들어갔다는 얘기다.
서서히 카르만이 눈을 떴다. 마타하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둘은 아주 잠시 서로를 직시했지만, 더 이상 진지하게 바라보지는 않았다.
“끄응.”
괴로운 듯 오딘이 이마를 매만졌다.
‘골치 아프게 됐군.’
마타하리조차 자신의 원수를 마령으로 인지하고 있음이었다. 영이 기억한 대상이니 육신보다는 상대의 영을 기억할 것이다. 카르만의 말이 맞았다.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부아가 치밀었다.
‘망할 자식, 감히 본 좌를 농락해?’
카르만은 오딘의 표정을 살폈다. 넋을 잃어가며 각오를 했었지만, 아무 일도 벌어져 있지 않다. 혹 아직 끝나지 않은 게 아닐까 해서 생긴 반응이었다.
“한 가지 묻지. 그 녀석을 잡으면 만사가 해결되나? 아니면 또 다른 녀석으로 옮겨 가는 거냐?”
오딘의 물음에 카르만은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분히 신경질적인 말투였지만, 그는 기꺼이 대답했다.
“그런 일이 없도록 나도 돕겠소.”
그리고 카르만은 다짐했다.
“마령을 막게 된다 해도 따로 벌해주시오. 내 마음도 가볍지만은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