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령
희박한 확률일지언정 지옥진을 탈출하는 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토록 입에 올리던 주신 아스카론의 가호가 함께해서일까? 비센은 피투성이가 된 채 가까스로 지옥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악… 하악…….”
새빨갛게 변한 왼팔을 오른팔로 부여잡고 있었다. 깊은 자상으로 오른쪽 다리마저 절뚝거렸다. 시꺼멓게 죽은 얼굴색과 두려움에 질린 동공은 그곳에서의 참혹함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이렇게나마 헬 게이트를 빠져나왔다는 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필경 그리 생각했다. 그곳은 지옥이었다고.
지상에 어째서 지옥이 존재하게 되었는지 의문을 풀 방법이 없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라이벤 대신관을 밀어 넣지 않았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미안함도, 사라져 버린 이리스에 대한 그리움도 없었다.
오직 제 한목숨 건져 황도로 돌아가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생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탓인지, 비교적 외곽에 머물렀던 사제의 도움을 받아 비센은 무사히 황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황좌와 인접한 마법진 주위엔 성황의 무사 귀환을 반기는 이가 없었다.
안은 너무도 한산했다.
“누, 누구 없느냐?”
식사 시간, 취침 시간까지 이 마법진 주위는 고위 사제 둘과 템플 기사 둘이 배치된다. 이는 예로부터 혹여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처사였다.
내면에서부터 불안함이 샘솟았다.
걸음 옮기기를 망설이는 비센을 보며 사제가 마땅히 자처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에게서 건네받은 지팡이에 힘든 몸을 지탱하며 비센은 조심스럽게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복도를 돌았을 때 사제의 움직임이 멎었다.
“왜 그러느냐?”
사제에겐 대답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조차 참지 못하고 비센이 고개를 드밀어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을 바라보았다.
대전 문이 박살이 나 있었다.
잔해들이 붉은 카펫을 어지럽혔다.
눈이 뒤집혀 비센은 목격하지 못했지만, 사제는 더 자세한 상황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이 복도의 골목골목에는 축 늘어진 누군가의 손이나 다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곳마다 붉은 카펫이 진한 피로 얼룩져 있었다.
모두를 살피지는 못했지만, 대전 문이 박살난 것만으로 비센은 무엇인가 잘못됨을 느꼈다.
“이, 이럴 순 없다.”
수십 년을 기다려 얻은 지위. 그 지위에 금이 간 게 아닐까란 불길한 느낌에 앞뒤 생각할 것 없이 그는 지팡이조차 내팽개친 채 절뚝절뚝 뛰었다.
역시나 무리한 움직임이었다.
비센은 꼴사납게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서, 성황 폐하…….”
사제의 걱정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피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은 눈이었다. 그 눈이 비센의 몸을 나아가게끔 재촉했다.
‘무슨 일이냐, 도대체 무슨 일이냐.’
비센은 바닥을 기어서 기어코 대전 앞에 다다랐다.
템플 기사들과 고위 사제들의 피와 육편들이 기둥이고, 대리석이고, 카펫이고 가릴 것 없이 대전 안을 더럽히고 있었다.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그러나 이 슬픔의 감정을 지배하는 시선이 있었다.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는데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어렵사리 비센이 고개를 들었을 땐 황좌에 앉은 인간이 다리를 벌린 채 턱을 괴고 자신을 오만한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쯔쯧, 어디서 만신창이가 되어서 왔구나.”
“네, 네가 어떻게…….”
비센의 놀람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가 보고 있는 대상은 다름 아닌 오르골이었던 것이다.
반역을 꾀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정신이 죽은 식물인간이었으므로.
또한 그를 돕고 있는 자들이 없었다.
혼자서 여기까지 들어와 템플 기사들과 고위 사제들을 죽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하긴 했지만 오르골이 결단코 그 정도의 힘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건 비센 자신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사안이 아닌가.
오르골은 자신의 두 팔을 감상하듯 들여다보았다.
“이 녀석의 몸이 그 녀석보다 훨씬 낫더군.”
“무, 무슨 소리냐? 그 녀석이라니……?”
“카르만 말이다. 애초에 이 녀석의 몸을 가졌다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을 텐데…….”
언뜻 비센의 뇌리에 스치는 게 있었다.
‘기생 생물?’
카롤레스란 자가 쓴 『몬스터와 지배자』라는 책에 등장하는 부분이었다.
지능이 낮은 몬스터들은 의지와는 관계없이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하는데, 그는 그 원인이 기생 생물에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고 해도 영장류인 인간의 몸에 들어와 기생하는 놈은 없을 것이었다. 인간의 정신력이나 뇌의 기능은 기생 생물들이 살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를 제외하니 단 하나의 해답이 섰다.
‘마령(魔靈)이다.’
소름이 쫙 끼쳤다.
마령.
마계에서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또한 마계에서도 어지간한 지위의 마족이 아니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정도로 위험하다 했다. 실제로 마령이 탐닉하는 대상도 보통 상위 마족이나 마왕이었으니까.
믿기지 않는 현실에 비센이 버럭 소릴 질렀다.
“환경이 다르거늘 어떻게 이 세상에 왔느냐!”
오르골은 과거의 기억을 그렸다.
“멍청한 마왕이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이 땅에 쓰러졌다. 덕분에 오랜 시간 마왕의 잔해에 숨어 있어야 했지. 아주 오랫동안 말이야. 인고의 세월이었지. 인간 세상의 시간은 너무도 길더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려니 지루함이 더했지. 지난 세월은 정말 무척이나 지루한 시간이었어.”
말을 마친 오르골은 황좌에서 일어나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 이후 가만히 있는 시간은 신물이 났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말이야. 카르만 놈은 마성을 제지해보겠다며 내내 펜던트를 가지고 다녔지. 가만히 따르면 편했을 것을…….”
느닷없이 그는 표정을 지독하게 구겼다. 그럼으로써 몸 주변으로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피어나며 카펫을 태웠다.
위험을 느낀 비센은 상체를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으나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된 탓에 신성력도 미비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이라도 짜내려 했지만 오르골의 구둣발이 먼저 광대뼈에 와 닿았다.
사제가 이를 외면할 수 없어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 순간, 오르골이 뻗은 손바닥에서 검은 화염이 소용돌이쳤다.
펑!
사람의 육신이라기엔 너무도 초라했다.
화염은 사제의 몸을 단숨에 육편으로 뒤바꿔놓았다.
그의 몸은 형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오르골은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크하하하! 역시나 카르만의 육체보다 훨씬 나아. 마왕의 힘을 끌어 쓸 수도 있으니. 그놈은 자격이 없었다. 너무 선했어. 나와는 잘 맞지 않았다.”
사라져 버린 생명에서 관심을 거둔 채 오르골은 비센의 얼굴을 짓누른 발에 서서히 힘을 가했다.
강박관념에 시달렸을까? 살기 위해 비센은 해서는 안 될 말까지 지껄이고 말았다.
“그, 그럼 내 몸을…….”
“주제도 모르는 녀석. 네놈같이 약해빠진 녀석의 몸은 필요 없다. 고통스럽냐? 사는 게 힘이 들겠지? 너도 곧 해방시켜 주마.”
엄청난 무게감에 얼굴이 사정없이 짓눌리며 비센의 눈알이 튀어나올 듯 볼록해졌다.
영혼을 쥐어짜는 비명 소리가 입에서 길게 퍼졌다.
“안… 돼에…….”
끄그그그극.
파그작.
뇌수가 튀고 신경이 끊어진 눈알이 나뒹굴었다.
머리뼈가 바숴지며 뭉쳤던 피가 대전의 기둥으로 튀었다.
자신이 벌인 일에 희열이라도 느끼는지 오르골의 표정은 만족 그 자체였다.
과거 카르만의 탈을 뒤집어썼을 때 보인 잔인한 미소보다 훨씬 잔혹한 미소가 오르골의 얼굴에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는 그놈을 찾아야겠군.”
* * *
타츠만과 알베른, 그리고 엘룬은 그 지옥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이는 모두 알베른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제르딘 덕이었다.
순간적으로 결계에 구멍을 내고 강제 공간 이동을 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에게 있어 마도사들은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그랬던 그가 마도사들을 포기하고 이들을 데려온 데에는 이유가 따랐다.
‘처음부터 타락해서 태어나는 자가 어디 있더냐? 세상은 기회를 주었어야 한다. 환경이 더러우면 몸이 더러워질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것을.’
이는 각 마도사장들에게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었다.
제르딘이 마도사탑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려 했던 까닭은 바로 이에서 비롯되었다.
그 역시 타락한 자였다. 새 출발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의 싸늘한 시선은 그것을 용납지 않았다.
10년을 넘게 자신을 따른 수하들. 그들을 잃는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 특히나 눈앞에서 벌레처럼 끔찍하게 죽어가는 수하들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었다.
아그리스를 비롯한 드래곤들에게 자비란 없었다. 마도사들은 별 흥미를 못 안겨 준 실망스런 장난감일 뿐이었다.
‘아그리스 그 혼자 있었다 해도 감당하지 못할 일이었는지도…….’
잘못은 자신에게 있었다. 베르난이, 그리고 가르투스가 아그리스의 비위를 거스르기 전에 막았어야 했다.
오만이 불러온 참극이었다.
타츠만이 당혹함을 금치 못하고 탄식을 내뱉듯 물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면 되오?”
밤도 저물고 동이 틀 무렵까지 하염없이 걷기만 하니 답답했을 만도 했다.
제르딘이라고 해서 달리 내줄 답은 없었다.
“이곳 또한 안전하진 않겠지.”
이곳뿐 아니라 세상 어디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드래곤들을 적으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들의 기억력과 직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 번 보고 익힌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으며, 외형을 바꿨다고 해도 알아챌 것이었다.
눈 밖에 난 이상 죽은 목숨이라 봐야 했다.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서도 드래곤들이 시큰둥하게 쳐다보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아그리스의 마음에 앙금이 남아있는 한, 언제고 자신들은 저들에 의해 붙잡힐 것이므로.
구두둥, 구둥.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뒤흔들며 자욱한 먼지가 일었다.
기우가 아니었다. 소리가 점차 커지는 것으로 보아 근방에 다가오는 중인 듯했다.
인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상당수가 말에도 오르지 않은 상태로 허겁지겁 뛰는 중이었다.
의외롭게도 이들은 제국의 군대였다.
타츠만의 눈이 의심을 품을 무렵, 가장 먼저 다가선 기사가 숨도 고르지 못하고 황급히 말을 전했다.
“화, 황자 전하!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아레인의 전력이 다가올 것입니다. 어서 빨리 떠나십시오.”
자초지종까지 설명해주어야 하였거늘 기사의 말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퍽!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하나가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그렇지 않아도 깨진 갑주 사이를 날카로운 화살촉이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황자의 얼굴에 핏물을 튀기며 기사는 맥없이 쓰러졌다.
곧 더 많은 인파가 들이닥쳤고, 뒤이어 지평선 위로 셀 수 없이 많은 군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리야 제법 벌어졌다지만 갑주까지 걸친 사람이 말의 속도를 능가할 순 없었다.
아레인군이라 예측되는 기병대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잔인한 활극이 벌어졌다.
이를 보면서도 타츠만은 손을 쓸 수 없었다. 충격에 충격이 더해 패닉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하늘이 다 무너지는 것 같았다.
분명 제르딘과 엘룬, 자신이 힘을 합친다면 이 상황을 어느 정도 헤쳐 낼 순 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의욕이 없었다.
“난 가겠소.”
엘룬의 목소리였다.
그는 이들에게 몸을 위탁했다는 사실에 치가 떨렸다. 심정 같아서야 모두를 도륙내고 싶지만, 제르딘이 있는 이상 무리한 일임을 알았다.
이제라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볼 참으로 말을 꺼낸 것이었는데, 뜻밖의 목소리가 그를 제지했다.
“가긴 어딜 가?”
동이 트는 가운데, 무수히 스쳐 가는 군마들 사이에서 거만하게 뒷짐을 진 채 유유히 다가오던 한 남자에게서 들린 말이었다.
눈앞의 인간은 분명 그였다. 자신의 기반이자 모든 것과 다름없던 카반의 울프를 와해시킨 흑발의 청년.
엘룬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는 진정 복수의 때가 도래했다고 착각하는 중이었다.
기병대들이 걸리긴 했지만, 그 하나 죽이고 도망치기에는 무리가 없을 듯 보였다. 기병대들은 저마다 퇴각하는 적을 쫓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으므로.
검 자루를 쥘 무렵 타츠만에게서 예기치 않은 격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오, 오딘…….”
그 이름에 엘룬은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저, 저놈이 오딘이었다는 말인가? 그럼 난…….’
손에 잡히지도 않을 구름을 향해 팔을 뻗고 있는 것과 같았다. 스스로 우물 안 개구리라고 떠들고 다닌 꼴밖에 되질 않은 것이다.
얼굴색은 이미 하얗게 질려 버렸다.
차라리 대륙의 패자들이라 칭해지던 신성 제국의 성황이나 제국의 황제, 신흥 제국의 대제를 노리는 게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엘룬이 끝 모를 혼돈에 빠지고 있는 동안, 내색은 하지 못했지만 알베른도 충분히 기겁하고 있었다.
“크큭, 골고루 모여 있구나.”
마치 시선이 자신을 직시하는 듯했기에 제풀에 놀란 알베른은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내 얼굴이 달라졌을 리가 없을 텐데…….’
문제가 있었다. 만져지는 느낌으로 보아 분명히 모양새에 변화가 있었다.
“베르난이 죽은 모양이로군.”
제르딘의 중얼거림이었다.
“무, 무슨 소리요?”
답을 주는 제르딘의 얼굴은 침중했다.
“시전자가 죽었으니 원래대로 돌아올 수밖에…….”
과거 알베른의 외모를 바꿔주었던 것은 제르딘으로부터 부탁을 받은 베르난이었다.
이는 하나의 입증이었다. 아그리스는 일부러 베르난을 끝까지 남겨 두려 했다. 최대한 고통을 가하기 위해서…….
말인즉슨, 거기 있는 마도사 전부가 죽었다는 얘기가 된다.
알베른은 기겁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어렵게 혀를 잡아 뺐더니 제 상태로 고친 모양이군. 이번엔 잘라주마. 다시는 세 치 혀를 못 놀리도록. 그리고는 로테노아에게 선물로 줘야겠다.”
극악무도한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 오딘.
타츠만은 오딘의 행동에 기겁을 한 상태에서도 따져야 할 건 따지려는 각오로 알베른을 쏘아봤다.
“책사,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얼굴을 가장했다는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딘은 전혀 모르는 이라고 말하질 않았던가. 그는 가당찮게도 자신을 속였다. 이는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그토록 자신을 살갑게 대했던 황자가 잡아먹을 듯한 눈을 하고 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두려워졌던 탓에 알베른은 등을 돌려 서툰 뜀박질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오딘의 전음이 울렸다.
-저놈을 잡아라.
이를 지근거리에 있는 기병대들이 들었던지 적을 뒤쫓던 기병대 중 일부가 알베른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기겁한 나머지 앞뒤 좌우를 살펴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는 알베른.
시선이 딴 데 팔려 있을 때 한 기병이 마상에서 옷을 창대로 꿰어 그의 몸을 높게 들어올렸다.
알베른은 창대에 대롱대롱 매달려 팔을 허우적거리는 것조차 버거웠다.
물론, 이로 인해 알베른은 터럭 하나 다친 곳이 없었다.
타츠만의 뇌리에 요란한 경종이 울렸다. 기병들의 숙련된 정도가 상식을 벗어났음이다.
‘하나같이 괴물들이다.’
창이 가볍다 할지라도 이해가 가질 않는 일이었다.
사방에 무서운 적이 스치고 있다.
알베른에 대한 분노보다 두려움이 커져 타츠만의 머릿속이 새까매졌다.
‘이 난관은 또 어떻게 극복을 해야 하는 것이냐…….’
산 넘어 산이었다. 왜 이렇게 어려운 일들만 닥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이 자신을 버린 것만 같았다.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작금의 상황은 너무도 생생했다.
제르딘의 얼굴색도 좋지 못했다.
마도사탑의 마도사들을 양지로 내보내겠다는 목표는 크게 어그러진 뒤였다. 드래곤이 개입된 순간부터이니, 제국이 아레인을 침공했을 당시부터 틀렸다고 봐야 했다.
대륙의 패자는 이미 아레인이었다.
‘하늘은 끝내 저들을 돌보지 않는구나. 태생이 나쁘면 죽을 때까지 나빠야 한다는 말이냐?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뒤도 돌아보지 말라는 말 같구나. 후회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데 어찌…….’
그 또한 패악을 저질렀다.
자신이 죽였던 마도사들, 그중 한 마도사가 죽어가며 자신을 향해 내뱉었던 경멸스런 말투가 가슴에 아로새겨져서다.
‘제 잘난 맛에, 같은 마도사가 우리의 속은 한 치도 헤아리지 못하는구나. 네놈도 언젠가 세상에서 버려지는 날이 있을 것이다.’
더불어 태어난 생명이었다.
그들도 마땅히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제르딘의 가슴속에 와 닿았다.
그렇게 걸어온 길이었다.
지내온바 이들도 같은 인격체였다.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한다. 억울하게 세상에서 소외당한 이들에게 측은지심이 들었던 나머지 마도사들을 구제해보겠다는 마음을 품은 것이었다.
결국 자신은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다.
작금의 상황은 너무도 힘든 것이었다. 9서클의 가공할 마법이 있다면 무얼 하겠는가. 눈앞의 위인은 절대 간단한 상대가 아니었다.
언젠가 알베른이 자신에게 주의를 주었던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이다. 아니, 그것보다 더 대단했으면 대단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직감이었다. 강자가 강자를 대하는 직감…….
마나에 한계가 따르는 이상, 이 많은 대군을 상대로 전세를 뒤집을 수도 없을뿐더러 드래곤의 분노 또한 감당해야 한다.
자신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 아닌 이상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제르딘은 까마득히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신이라는 존재가 있기나 할까…….”
그 말이 오딘의 시선을 제르딘에게로 움직이게 했다.
바로 이때, 투박한 말발굽 소리가 기병들의 틈으로 섞여 들었다.
따가각, 따각.
쿤이 탄 말이었다. 그는 다다르기도 전에 오딘을 여러 차례 불러댔다.
“오딘 님, 오딘 님…….”
오딘의 고개가 돌아갔을 때를 놓치지 않고 타츠만이 제르딘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때요. 우리만이라도 여기서 빠져나가야 하오.”
지금 빠져나가면 뭐 하리. 언제고 시련은 닥칠 것을.
제르딘은 체념한 듯 팔을 늘어뜨렸다.
쿤은 오자마자 말에서 내려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꽤 먼 거리를 달려와서이리라.
“헥헥…….”
오딘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보며 쿤은 전할 말을 했다.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
여기서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의 크기로.
누군가의 안부에 안도하는 듯하더니, 오딘은 자못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아그리스가?”
쿤은 또 한 차례 조심성을 보였다.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인 것이다. 이미 아그리스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매사에 조심을 기울일 필요성이 따랐다.
뿌드득.
야멸치게 이빨을 가는 소리가 오딘의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그 자식이 또 사고를 쳐?”
쿤은 다시금 오딘의 귀에 대고 덧붙여 속삭였다.
“성벽까지 허물어졌다고요.”
분에 가득한 목소리가 예외 없이 흘러나왔다.
“뭐? 이 자식이 성을 까맣게 만들더니, 이제는 아예 날려 버리려고 해?”
삼중의 결계라도 구멍이 난 상태에서는 헬파이어의 파괴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위력이 반감되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성내에 잔류하는 병력들과 백성들에게까지 여파가 미칠 수도 있었다.
성벽이 허물어지는 데에서 끝난 것은 어쩌면 다행이었다.
아그리스는 걸레가 되어버린 베르난의 형체조차 지우기 위해 헬파이어의 캐스팅까지 한 것이다.
제르딘은 일말의 기대조차 접어버렸다.
이로써 명백해졌질 않은가. 오딘과 아그리스는 한데 엮여 있다는 것이…….
“네 뜻에 따르겠다, 죽이든 살리든 간에…….”
“그래도 개중에 낫다고 생각했는데, 시시한 녀석이었군.”
조롱을 듣고도 제르딘은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에 한 가지의 요구를 달았다.
“다만 조건이 있다.”
“조건?”
“이 일로 우리 마도사탑 전부를 적으로 두지는 말았으면 한다.”
“오호라, 그곳에서 나온 녀석이었군. 우선 얼굴이나 좀 봐야겠어.”
본래는 꺼리는 일이었음에도 사태가 이 지경이 된 이때 무엇을 가리겠는가. 제르딘은 얼굴을 가리는 후드를 벗었다.
적발이었고 귀가 매우 뾰족했다.
내리깔고 있는 눈매 사이로 붉은 동공이 엿보였다.
창대에 매여 실신해 있는 알베른은 보지 못했지만, 타츠만은 그를 보며 적잖은 놀라움을 드러냈다.
‘블러드 엘프였다니…….’
그가 사람이건, 오크건, 엘프건 오딘은 중요치 않았다. 이미 여러 종족들을 접해보아서였다.
이 세상엔 보다 많은 유사 종족들이 어우러져 산다. 종족이 다르다고 해서 차별을 둘 이유는 없었다.
“본 좌는 애초에 마도사탑에 대해 몰랐다. 최근에 알게 되었지. 마도사탑의 녀석들이 배짱 좋게 도전장을 내밀어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을 하다 보니 곁에 있는 쿤의 낌새가 이상했다.
쿤은 멀뚱멀뚱 제르딘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정말 의아한 소릴 내뱉었다.
“아빠?”
오딘은 이어 ‘꼬랑지를 말아버리다니’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쿤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어색한 분위기가 될 뻔했다.
제르딘이 주의 깊게 쿤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보니 그는 어렸을 적 떠난 자신의 아들과 매우 흡사했다. 보면 볼수록 그 판단은 더 확고해지며, 잃었던 눈물이 메말랐던 눈을 적셔 갔다.
‘이렇게나 커버렸다니…….’
내심 반가우면서도 차마 아는 체를 할 수가 없었다.
원래 블러드 엘프들이 가족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짙다지만 제 식구를 모른 척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지금 일이 아들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하나뿐인 아들에게는 아비의 이런 초라한 몰골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오딘이 전음을 이용, 쿤에게 물었다.
-맞느냐?
쿤은 오딘과 얼굴을 마주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리스 탓에 이제는 이런 식의 대답이 습관화된 것이다.
여전히 엄한 목소리였지만 오딘은 제르딘을 아까와는 다른 투로 대했다.
“그대는 향후 마도사들이 아레인에 대해 끼친 피해에 따라 심판하겠다. 피해가 미비하다면, 그 바람을 외면하지는 않겠다.”
큰 피해가 있을 턱이 없었다. 오히려 재수 없게 아그리스와 맞닥뜨렸으니 희생된 것은 마도사들이라 봐야 했다.
오딘의 성격에 비추어본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차후 제르딘의 속사정을 듣고 그의 바람을 들어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물론, 엄한 제약이 가해지겠지만…….
남은 것은 엘룬이었다.
“네놈이 나를 노리고 다닌다는 소문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 본 좌 역시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제르딘을 대할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큭, 크윽…….’
형언하기 힘들 위엄과 기개, 살심이 깃든 눈은 마주치는 것만으로 숨을 쉬는 것도 버겁게 만들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다. 알았다면 복수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저놈을 상대로 검이나 꺼낼 수 있을까.’
솔직한 심정이었다. 대륙에 이런 인간이 존재하리라고는 미처 몰랐다. 모두가 오딘이 방심하게끔 만든 탓이었다.
이제는 꼼짝 없이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오딘의 입에서 조건이 줄줄 쏟아졌다.
“더 이상 도적질을 하지 마라. 아녀자도 훔쳐보지 마라. 사람을 죽여서는 더욱 안 된다. 땅을 일구거나 가축을 키워 땀 흘려 먹고사는 것만 허락해주마.”
엘룬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살려는 준다는 얘기였다.
지금 처지에선 그에 감지덕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딘은 엘룬의 잠시 느슨해졌던 긴장을 다시금 일깨웠다.
“대륙 어디에서건 그 같은 일이 발각될 시에는 뼈도 못 추릴 줄 알아야 할 것이니라.”
“마, 말을 따르겠소.”
지금의 엘룬은 무림인과 많이 닮아 있었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같은 모습도 그랬지만,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것 또한 그러했다.
따지고 보면 오딘이 자비를 베풀어준 것만도 아니었다.
기실 오딘은 강탈당한 게 없었다.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은 위인이자 악당이었을 뿐이다.
굳이 빗대자면 날강도가 큰소리치는 격이랄까.
막상 소리치고 보니 오딘도 찔끔했는지 부러 시선을 딴 데 두었다. 그곳엔 타츠만이 서 있었다.
“아레인 침공은 네놈이 주장했으렷다?”
“아, 아니요. 황제 폐하로부터 결정을 내리게 만든 것은 가리온이었소.”
사실이었고, 아니더라도 혼자서 책임을 떠안을 수는 없었다. 죽기에 그는 아직 젊었기 때문이다.
“고얀 녀석.”
모르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혀를 찼을지 모른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자신보다 연배인 사람을 따끔히 혼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딘이 가지는 위엄은 황자의 그것을 능가해 있었다.
또한 그의 나이는 적지 않았다. 환골탈태에 반로환동까지 한 그였으니 외모로 짐작되는 나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었다.
“네놈에 대한 처분은 뒤로 미루도록 하겠다.”
그 같은 말로 오딘은 이 자리를 마무리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