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진
그 무렵, 신성 제국의 병력들은 자화자찬에 빠졌다.
난공불락이었던 레고타 후작의 베르무트성을 기어이 거머쥔 것이다.
“이제 드디어 승패가 갈렸소이다. 정말 질긴 작자들이었소.”
“하나, 지휘관이 빠져나간 것은 향후에도 걸림돌이 되지 않겠소?”
“그렇지 않소이다. 첨병들과 정찰병들에 의하면 바리톤 왕성 주변은 산세도 험하지 않아 보급도 용이할 것이라 하였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보급이었다. 신성 제국은 여러 차례나 기습을 당해 적들에게 군량을 빼앗겼던 것이다.
자연히 이것이 전투가 길어진 원인이 되었다.
“끝까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라이벤 대신관의 말이었다. 여러 지휘관들이 한목소리가 되어 답했다.
“귀담아듣겠사옵니다.”
라이벤은 정말 혀를 차면서 전투를 바라봤었다. 도저히 바리톤은 군소 왕국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너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러다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신성 제국의 힘의 뒷받침이 되는 것은 비단 신앙심만은 아니었다. 이만한 무력이 없었다면 대륙의 패자가 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자리를 로만 연합이 대신했었을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라이벤은 아레인의 정황을 알아보는 한편, 로만 연합에까지 눈을 두었다.
이 ‘눈’이란 과거 막스마라 대신관의 세력을 이용한 것이다.
신성 제국 내에서 정찰이나 정탐에서만큼은 그들은 최고였다. 그런 만큼 내용은 확실했다.
‘최근 로만과의 싸움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들었거늘, 바리톤에만 전력을 기울일 수도 없는 노릇인데…….’
그 생각에까지 미치자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라이벤은 관자놀이를 어루만졌다.
‘제국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신흥 제국이 내심 걸리는구나.’
신성 제국과 제국이 패배한다는 전제를 두고 하는 생각이었다.
“대신관님, 큰일이옵니다.”
얼마나 급했던지 한 신관이 막사 안으로 경박스럽게 뛰어들었다.
같은 신관이 추태를 보인 동료가 미덥지 않아 다그쳤다.
“무슨 일이기에 호들갑이오?”
“신흥 제국에서… 신흥 제국에서…….”
라이벤의 목소리가 본의 아니게 커졌다.
“신흥 제국에서 어쨌단 말이냐?”
“아레인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려 하고 있다 합니다.”
“무엇이라?”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렇게 되면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다. 승리는커녕 자칫하면 패장이 될 수도 있다.
“확실한 얘기냐?”
“‘눈’으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크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라이벤을 향해 옆의 신관이 조심스레 말을 올렸다.
“대신관님, 너무 과민한 반응을 보이시는 게 아닐까 합니다. 전투가 길어지고 저희 쪽의 피해가 만만치 않다고 하지만, 전체로 볼 때 어디까지나 소수입니다.”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정확한 피해 산출은 아직 불가하지만, 대략 5천의 병력을 쓸 수 없을 뿐 나머지는 운용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라이벤이 이리 놀란 건 여태의 싸움이 쉽질 않아서였다.
아직 끝나지도 않은 싸움에 피해액만도 어마어마했다. 이번 전쟁으로 날린 피해액은 어쩌면 바리톤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필히 그럴 것이었다. 이 자그마한 왕국에 무슨 돈이 있겠는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라이벤은 입을 굳게 닫았다.
‘최대한 피해를 줄여야 한다. 권모술수를 써서 비난받는 한이 있더라도……. 어쩌면 이 전쟁으로 차후 신성 제국의 향방이 갈릴 것이다.’
보고에 따르면 이미 진행되고 있는 얘기라 봐야 맞았다.
객관적으로 볼 때 아레인이 그 손길을 거절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작전 시간이 도래했다.
이 작전은 바리톤 왕성으로 나아가는 진입로를 확보하고, 주위의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막 막사 밖을 빠져나가려는데 휘황한 문장이 눈앞을 가렸다. 예고도 없던 성황 비센의 행차였다.
각양각색의 보석들로 치장된 금빛으로 넘실거리는 고급스러운 가마 위에 비센이 있었는데, 그 옆에는 이리스가 요염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라이벤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구겨졌다.
황제도 아니고 성황이다. 성스러워야 할 성황이 추해 보이니 어찌 기분이 좋을 수가 있을까.
‘왜 그렇게 변하셨습니까.’
라이벤은 그 탓을 전부 이리스에게 돌렸다. 그녀가 온 뒤 비센이 육체의 쾌락만을 추구하게 됐다고 믿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인사는 올려야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비센이 힐난을 가했다.
“쯧, 가장 믿었던 대신관이 이렇게 무능했다니…….”
비센은 아직도 바리톤을 점령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사옵니다. 하오나 폐하, 바리톤은 그리 약한 왕국이 아니옵니다. 저희 또한…….”
“듣기 싫다.”
이리스도 겁 없이 라이벤을 쏘아보고 있었다.
사실 비센이 이곳으로 행차한 것은 이리스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레인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보고 싶다고 들볶았던 것이다.
물론 속내는 오딘을 보고자 함이었다. 한데 아직까지 바리톤에 있으니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고, 그 까닭에 비센을 쌀쌀맞게 대했다.
비센이 라이벤 대신관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비센은 오래도록 함께하고 자신만을 향해 충성했던 측근보다, 눈 맞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인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라이벤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했다.
성황의 여인이라지만 미워 보이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는 일. 라이벤이 이리스를 없애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때였다.
이리스는 정말 사라졌다.
비센의 기분이 땅으로 꺼졌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는 경계를 소홀히 한 이유를 들어 경비들을 숙청했으며, 의심이 가는 모두를 불러들였다.
한 신관이 노발대발하는 성황에게 기분을 거스를세라 조심스레 말을 올렸다.
“템플 기사 둘도 함께 사라졌으니 산보를 나가신 게 아닐까 합니다. 성황 폐하께옵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헤아려 주십시오.”
“그놈들이 사심을 품었구나. 뭣들 하느냐? 당장 그놈들부터 잡아들여라!”
억지가 따로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잡아들이라고만 한다.
그 템플 기사들을 찾는다면 이리스를 찾는 건 그다지 어려울 일도 아닐 터였다.
그러나 이 자리엔 그녀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라이벤 대신관이었다.
그는 사정을 알고도 이에 대해 함구했다.
‘스스로 가지 않았다면 언제고 내 손에 죽었을 것이오.’
그는 되도록 낙관적으로 생각하고자 했다.
시간이 흐르면 언제고 성황이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라고…….
그러나 이로 인해 비센의 욕정은 더욱 부풀었다.
한껏 부푼 욕정을 채우기 위해 하룻밤에 5명의 여인들을 불러들이기도 하였는데, 그중엔 여사제들과 여신관들도 여럿 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빈자리를 채워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급기야 비센의 욕정은 엄한 데로 불똥을 튀겼다.
나이가 어린 미소년들까지 불러들여 시중을 들게 하였으니 말이다.
개중 눈 밖에 난 이들은 생명을 부지하지 못했다.
폭군으로 변해가는 비센을 보며 라이벤의 얼굴에 자리한 그늘은 점점 짙어져만 갔다.
‘머리가 부서질 것 같다. 일단은 이 전투를 종식시키자. 그것이 최우선 과제다.’
스산한 안개가 옷깃을 여미게 만들었다.
사념에 빠진 나머지 주위를 살피지 못했다. 하지만 이 안개는 자신뿐 아니라 주위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뭐지?’
땅이 물컹물컹해졌다.
지근거리에 있던 경비의 모습이 한없이 멀어져만 갔다.
더욱이 기분 나쁜 것은 기괴한 형상의 요물들이 땅을 벌리고 기어 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살아생전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누구 없느냐?”
소리를 쳐 보았지만 허공에서 공허하게 맴돌 뿐이었다.
이 현상은 비단 그만이 겪고 있는 일이 아니었다. 주위 모두가 겪고 있었던 것이다.
레고타 후작이 베르무트성을 내주고 왕성으로 줄행랑을 친 것은 다 오딘의 명에 따라서였다.
오딘, 그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만든 지옥진이 현실에 펼쳐지고 있는 순간이었다.
* * *
역시나 아그리스의 심사는 편치 않았다.
하찮은 인간들이 감히 자신이 깔아둔 먹구름들을 제멋대로 걷었기 때문이다.
불시에 솟은 7개의 불기둥이 마도사들과 황자 일행 주변으로 매섭게 솟구쳤다.
마도사 중 하나가 이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보통내기가 아니로구나. 마왕의 졸개 주제에 제법이로군.”
아그리스의 표정이 더욱 불쾌해졌다.
직선으로 솟구치던 불기둥이 확 꺾어지며 서로와 뒤엉켰다.
화르르르륵!
열기가 주변을 녹일 정도로 뜨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도사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성질이 우리만큼 더럽다는군. 그걸 말하고 싶은 거겠지?”
한 청마도사의 말이 끝날 무렵 청마도사장 가르투스가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매섭게 타오르며 주위로 회전하던 불길들은 하늘로 솟구치며 사라졌다.
“댁의 존함을 물어도 되겠소?”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추켜세워준다는 기분이 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그리스는 저놈이 벌써 자신의 정체를 간파했다는 낌새를 알아차렸기에 그 말투가 거만하게밖에 들리지 않았다.
“인간 주제에 마법 좀 안다고 기고만장해하는구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적마도사장 베르난이 이죽거렸다.
“네놈이나 드래곤이라고 너무 기고만장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게다. 킬킬.”
기분이 상했던 탓에 안 그래도 가늘었던 아그리스의 눈매가 더 가늘어졌다.
황자 타츠만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
“저, 저자가 정말 드래곤이오?”
가르투스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알베른뿐 아니라 그를 따르던 기사들의 놀람도 매한가지였다.
마도사들의 표정 또한 굳어졌다. 그러나 겁을 먹은 눈초리는 아니었다.
이 자리에는 자신들뿐 아니라 적마도사장과 청마도사장이 있었고, 더 무서운 존재도 있었으므로.
협박은 도리어 베르난이 했다.
“나대지 마라. 드래곤 하트를 빼앗기기 싫거든…….”
드래곤 하트는 마력의 무한한 원천이다.
한술 더 떠 가르투스가 말을 보탰다.
“그게 블랙 하트라도 상관없다.”
그는 아그리스의 정체를 정확하게 간파했던 것이다.
황자 타츠만과 알베른은 이들이 무얼 믿고 이러는 걸까 의심까지 들었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배짱일까? 아니면 정말 자신이 있는 걸까?’
아그리스는 더 이상 말상대를 해주지 않고 주위를 두루 돌아다니며, 손을 뻗고 회수하고 다시 손을 뻗고 회수하고를 반복했다.
“결계를 쳐 놓는군. 남들 눈에 보이는 게 걱정이 되나 보지? 인간들 손에 죽으면 비참할 테니까 창피라도 면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베르난은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아그리스의 속을 박박 긁어댔다.
이중, 삼중의 결계 벽을 둘러서야 아그리스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긴 할 모양입니다. 와브루아스룩.”
마도사 중 하나가 내뱉은 말이었는데 뒷말은 모를 내용이었다. 어느새 아그리스가 장난을 쳐놓은 것이다.
언어 변이 현상.
베르난이 볼따구니를 찌푸리고 입가를 씰룩거렸다.
간단히 입술을 움직인 것만으로 멀리 있는 마도사에게 해괴한 마법을 걸었다는 데 적잖이 놀랐던 탓이다.
“용언 마법을 할 줄 안다고 자랑하지 마라. 그 마법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디스펠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
분명 아그리스의 입술이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베르난에게도 향했었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음에 아그리스는 약간이나마 진지해졌다.
아그리스의 눈이 저들을 훑기 시작하다가 파르티잔에게서 멈췄다. 파르티잔은 이때까지 그를 전혀 모르는 존재로 외면하려 하고 있었다.
‘아그리스 님, 왜 저를 끌어들이시는 것입니까. 제발…….’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아그리스의 손바닥이 좍 펴지자 파르티잔의 몸이 중력에라도 이끌리는지 그를 향해 달려 왔다.
이때 가르투스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점차 파르티잔이 느려지나 싶더니 둘 사이에서 멈춰버렸다.
“끼아윽.”
파르티잔이 괴상한 비명을 내질렀다. 양쪽에서 잡아당겨 몸이 찢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데려가려면 죽여라.”
가르투스의 말은 듣는 파르티잔에게는 너무한 처사였다.
“제발 죽이지 말아주… 끄아윽.”
가르투스는 물론 베르난도 실눈을 떴다.
둘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저놈, 저 드래곤과도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기어이 베르난은 아그리스의 분노를 팔팔 끓게 만들었다.
“여보슈, 드래곤 양반, 어째 이쪽이 더 유리한 것 같은데 원래 몸으로 현신할 생각 없소?”
그 입장에서는 당연한 욕심이었다.
기왕에 잡을 드래곤이라면 원래 육신 그대로를 손에 넣고 싶어 하지, 껍데기가 인간인 드래곤을 손에 넣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드래곤 하트야 거머쥘 수 있다지만, 비늘과 날개, 드래곤 본을 날려 버리게 된다.
그 모든 게 돈으로 매겨질 수 없을 만큼의 가치를 지니는 것들이었다.
자신을 사냥감으로밖에 보지 않는 인간의 말에 아그리스가 파르티잔을 놓아준 후 실없이 웃기 시작했다.
“크큭, 크크큭.”
너무도 어이없어 하는, 마치 그런 웃음이었다.
베르난은 자신이 별생각 없이 꺼낸 그 말이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 기다려라.”
일방적인 말을 내뱉고 아그리스는 홀연히 사라졌다.
마도사들의 지루한 기다림이 이어졌다.
“혹시 내뺀 게 아닐까요?”
슐트는 진지하게 말했다. 이쪽의 실력 행사가 너무 과하게 느껴져서이다.
그는 드래곤이 겁을 먹었을 것이라고 오판하는 중이었다. 다른 마도사들 역시 그 의견은 매한가지인 듯했다.
하지만 이들이 펼친 마법의 깊이와 정도를 가늠하지 못하는 엘룬으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고작 저 정도로 드래곤이 꼬리를 내렸다?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겨우 그 정도였나? 꾸미고 과장하기 좋아하는 게 인간이라더니, 역시 덩치 큰 도마뱀에 지나지 않았군.’
마도사들에 비하면 마법에 대해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황자 일행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알베른이 가지는 감회는 남달랐다.
‘내가 정말 대단한 힘을 등에 업었구나. 어쩌면 황자보다 가치가 높은 건 마도사탑의 마도사들일지도…….’
기선 제압으로 드래곤을 쫓았단 것만으로도 대단해 보였다.
달리 표현하면 이들은 무엇을 앞에 두고도 굴하지 않는다는 뜻과 같다.
천군만마를 등에 업은 것 같았다.
이들이 오딘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임은 지금 일로 보아서도 능히 예측 가능할 것.
이번엔 정말 제대로 된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에 알베른은 한껏 기대로 들떴다.
과거에 비해 그의 얼굴은 많이도 달라져 있었다.
그의 스승 클라베르가 살아 돌아온다면 모를까, 그를 알아볼 인간이 있을 리 만무했다.
역경과 고난, 그리고 악한 마음이 커져서라곤 하나 예전의 얼굴과는 천양지차의 변화가 있었다.
모두 제르딘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수치스러웠던 과거의 일을 떨쳐 버리고자 그에게 외모의 변화를 각별히 부탁했던 것이다.
이러하니 오딘과 마주친다 해도 하나 두려울 것도, 겁먹을 것도 없었다.
베르난도 입맛을 다셨다.
좀처럼 찾기 힘든 게 드래곤이었으니 놓쳤다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탓이다.
또한 이런 자리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여기 있는 마도사들은 스스로가 자신의 힘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어 이렇게 몰려다니는 일이 드물었다.
만약 드래곤과 혼자 조우했다면 겨뤄보기는 했겠지만 내빼는 건 자신이 될지도 몰랐다.
쉽게 오지 않을 기회. 그 기회를 놓친다는 게 너무 아까웠다.
드래곤만 잡는다면, 그것도 사악하기로 정평이 난 블랙 드래곤을 잡는다면 그로 인해 얻어지는 이익은 엄청날 것이었다.
드래곤의 사체를 해체하여 각종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이로 인해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한 서클에 변화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는 세인들이 듣는다면 놀라 까무러칠 8서클의 경지에 올라 있는 몇 안 되는 위인이었다.
본래의 정설에 따르자면 적마도사들이 사용한다는 정신 마법들은 9서클부터 가능해야 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논리였다. 일례로 6서클에도 오르지 못한 쿤이 정신 마법을 사용했으며, 여러 적마도사들 역시 정신 마법을 사용하고 있다.
너무 오래 기다렸을까.
기다림에 지친 황자 타츠만이 먼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제 가야 하지 않겠소?”
“떽!”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베르난이 빽 소리를 질렀다.
작금, 그는 오딘이라는 사내보다 방금 나타났던 드래곤에 대해 욕심이 기울어버렸다. 그건 청마도사장 가르투스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더 기다리지.”
타츠만은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알베른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귀엣말로 황자에게 양보를 종용했다.
“황자 전하께옵서 넓으신 아량으로 조금 양보해주셨으면 하옵니다. 왕성이 눈앞에 있는 이상, 오딘 그자가 어디 가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하오니…….”
듣기 싫은지 타츠만은 알베른의 얼굴에서 귀를 멀리했다.
타츠만이 아무리 인내심이 덜하고 성격이 불같다고는 하나 조금 기다려 주는 것쯤이야 문제없었다. 그러나 지금 분위기로 봐선 내일이고 모레고 언제까지고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약속의 중요성도 모르는지 이들은 최우선 과제 또한 멋대로 바꿔버렸다.
열이 받은 나머지 황자는 속이 다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마도사들 흉을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베르난 저자는 생각까지 읽을 수 있다고 하니 말이다.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멀리 아레인 왕성의 성벽 위엔 여러 사람들이 나와 그 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좋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또한 피해자라면 피해자였다. 누가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을 인 채 살고 싶겠는가.
마도사들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것과 진배없었다.
돌연 빛이 일었다.
그곳엔 이들이 학수고대하며 기다린 존재 아그리스가 떡하니 서 있었다.
“역시 드래곤은 드래곤이군.”
청마도사장 가르투스의 칭찬에 아그리스는 의미 모를 미소를 떠올렸다. 그 미소가 더없이 사악해 보이고 위협적이었다.
조금 전과 비교해보았을 때 외형상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옷이라도 빼입고 올 줄 알았는데, 도대체 뭘 하다 온 거야?”
이 역시 비꼼이었다.
죽을 땐 왜 옷을 곱게 차려입는다지 않았던가.
한 마도사의 이죽거림에 베르난이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또다시 드래곤이 사라져 버릴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는 아무 곳에도 안 갈 뜻을 확실히 피력했다.
“오늘 일을 영광으로 여겨라. 죽은 후에도…….”
마치 큰마음 썼다는 투다.
영문을 알지 못한 마도사들은 눈알만 굴렸다.
“그럼 시작하기로 할까?”
가르투스가 마나를 재배열하며 묻는 소리에 아그리스는 팔을 뻗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기다려.”
성질 급한 마도사 하나가 대들었다.
“이놈,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말이냐?”
베르난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웃음을 흘렸다.
“킬킬, 성질 급한 녀석. 위대하신 분께서 원하면 기다려 줘야지.”
되도록 비위는 맞춰주자는 얘기였다. 드래곤이 치명상을 입기 전에는 언제고 방금처럼 사라질 수 있을 것이므로.
부웅-!
파공음에 이어 한 대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그리스의 오른쪽, 그곳에 금색 머리카락이 잘 어울리는 앳된 엘프 소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아그리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가장 먼저 가르투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쩌면 저 엘프는 드래곤일지 모른다.’
비슷한 추론이 자리했는지 차츰 소름이 전율을 담고 마도사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저들의 심장 박동은 염려해주지도 않고 아그리스가 엘프 소녀에게 물었다.
“말은 전했겠지?”
끄덕끄덕.
소녀가 긍정을 표했을 때, 가르투스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마도사들의 뇌리에 경종을 울렸다.
-빨리 수를 써야 한다. 소녀 또한 드래곤. 한 녀석이 더 올지도 모른다. 서둘…….
우웅-!
의사를 전달하기 전에 다시 한 번 공간이 열리며 사타구니 부분에 천 조가리만 걸친 한 오크가 돌망치를 어깨에 인 채 천연덕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미처 예견하지 못한 사태에 직면하며 베르난마저 입을 떡하니 벌린 채 멈춰버렸다. 그 입에서는 용케도 말이 흘러나왔다.
“도… 도망…….”
우우우우웅-! 부웅-! 바앙-!
동시 다발적으로 여기저기서 공간이 어그러졌다.
각양각색의 종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 중에 일부는 드래곤으로 현신한 채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결계 안이 비좁았던 까닭에 어이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드래곤의 등 위로 다른 드래곤이 올라타 있었던 것이다.
괴상망측한 비명 소리가 마도사들 틈에서 들렸다.
“께에에엑-”
드래곤의 등에 올라탄 드래곤이 인간의 놀람에는 아랑곳 않고 아그리스에게 물었다.
“형님, 왜 부르셨수?”
아그리스의 바로 뒤에는 샤브리오스가 드래곤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었다. 언젠가 아그리스에게 아이스메이드 드워프를 선물했던 화이트 드래곤 말이다.
[오라버니, 왜요?]
의문은 여기저기서 터졌다.
그러나 아그리스는 그 질문들에 일일이 대답해줘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지 일언으로 마도사들을 깔아뭉갰다.
“같잖은 것들 같으니라고.”
공포가 거미줄처럼 마도사들의 사지를 옭아맸다.
이 자리 누구도 이 많은 드래곤을 두고 마력을 방출할 간 큰 위인은 없었다.
이때 숲에서 한 인영이 튀어나왔다.
인영은 오딘이 처음 이 숲을 찾았을 때 그에게 맞았던 숲의 상급 정령 사이하드였다.
그는 놀란 기색이 다분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가늠하기조차 힘들 거대한 마나의 운집.
1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륙의 숲이란 숲은 전부 옮겨 다녀 본 그였지만,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왕이 그 군사들을 이끌고 세상에 올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하늘이 검어진 이유는 그도 알고 있는 바였다. 다만, 장시간 해를 보지 못해 유난히 칙칙해진 숲이 걱정되어 들어왔다가 피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세상에…….’
기겁할 정도로 많은 드래곤이 각기 다른 형상으로 한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에 사이하드는 드래곤들 앞으로 나섰다.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대륙을 없애기라도 할 참입니까?
기우도 아니었다. 이 많은 드래곤들이 작당한다면 대륙을 없애는 것쯤은 문제도 아닐 것이다.
누군가 그를 알아보았는지 아는 체를 했다.
“사이하드, 오랜만이구나.”
오크의 형상을 하고 있는 드래곤이었다. 그는 숲의 정령과 친한 그린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가… 갈렉크노스 님.
갈렉크노스는 그린 드래곤 중 제법 유명한 드래곤이었다.
그것도 노룡에 다다른 상태였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드래곤이어서 상위 정령인 사이하드도 평소 그 대하기를 조심스러워했다.
보통 그린 드래곤은 다른 드래곤들에 비해 수명이 짧다. 때문에 그들은 타 드래곤들보다는 약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갈렉크노스 역시 아그리스에 비하면 한참은 어린애였다.
무서운 형이 불렀으니 하던 일도 제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이하드는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게 두려웠던 모양이다.
갈렉크노스가 다가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한쪽으로 불러냈다.
“형님이 열이 많이 받으셨어. 자네가 이해해.”
-이해하라니요? 저 또한 정령왕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분께서도 이미 눈치 채셨을 겁니다.
갈렉크노스가 종잇장처럼 이맛살을 구겼다.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 성사될 리 없었다.
숲의 정령왕뿐 아니라 물, 불, 바람, 대지의 정령왕이 모인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을 사안이었다.
운 좋게 해결이 된다고 해도 대륙이 지도상에서 사라진 후가 될 것이다.
달리 해결책이 없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180도 태도를 바꾼 사이하드를 보며 갈렉크노스는 찌푸려진 얼굴을 원상태로 되돌렸다. 그리곤 잔뜩 기가 죽은 마도사들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저기 멍청해 보이는 녀석들 있지? 저 마도사들이 형님의 비위를 슬근슬근 긁은 모양이야. 우리도 좋아서 온 게 아니라고. 자네도 알잖나, 아그리스 형님 성격을.”
성질 더럽다는 말밖에 안 된다.
뒷말은 귀에 대고 조곤한 목소리로 하였지만, 아그리스가 자신의 욕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직감이 들어 실쭉이 눈을 째렸다.
시선을 마주친 갈렉크노스는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하하! 형님, 별 얘기 아닙니다.”
이제야 사이하드는 한시름을 놓은 듯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정령왕께 별일이 아니라고 말씀드리면 되겠군요.
“그렇지. 그럼 수고 좀 하라고.”
-네.
대답을 마치고 사이하드는 자리를 뜨려 했다. 드래곤들이 모인 이유가 크게 걱정할 사안이 아니었던 탓이다.
그러나 마도사들에게 측은지심이 곁들은 눈길이 향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쯔쯧, 어쩌자고…….’
사이하드가 자리를 뜸으로 인해 드래곤들의 관심은 다시 마도사들에게 집중되었다.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아그리스가 입을 열었다.
“자, 어느 녀석부터 나설 테냐? 수에 맞게 데려왔으니 한 녀석씩 나서봐라.”
* * *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오딘은 히죽거리는 중이었다.
그의 표정은 못된 장난을 치는 어린아이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오딘의 시선이 향한 곳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생채기를 떠안은 채 제 목을 붙들고 신음을 내뱉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피가 줄줄 흐르는 눈을 감고 봉사처럼 바닥을 기는 이도 있었다.
신체 부위가 떨어져 나가 피를 콸콸 쏟으며 비명을 내지르는 자도 있었고, 공포에 눈이 뒤집혀 미쳤는지 닥치는 대로 둔기를 휘둘러 동료들까지 살해하는 성기사도 있었다.
저들끼리 죽이는가 하면, 원인 모를 현상에 죽는 사람들.
이것이 오딘이 펼쳐 놓은 지옥진의 위력이었다.
그의 눈에 악령의 모습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진 밖이었기 때문이다.
진 안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오딘이 그 광경을 보며 즐기고 있으니, 높다란 나뭇가지 위에서 비밀스레 그를 관찰하던 이들은 경각심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아닌 듯합니다.”
아들러 총기사단장의 말에 로이센은 자신도 모르겠는지 양어깨를 으쓱 들어 보였다.
-거기 두 사람, 내려오는 게 좋을 거야.
오딘의 전음이었다.
진즉부터 그는 누군가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습을 하면 오히려 놀래준 후 실컷 괴롭힐 심산이었건만, 저들은 자신을 훔쳐보기만 할 뿐이었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불쾌해지는 법.
본래 아들러는 로이센을 모시고 바로 그를 대면하려 했다. 하지만 정말 의외의 광경을 보고 차마 다가설 수 없었다.
들킨 이상 별수 없었던지 아들러는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운지 착지했을 땐 흙먼지도 일지 않았다. 뒤따라 내려선 그랜드마스터인 로이센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기분을 거스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우린 아직까지 당신과 적이 아니기도 합니다.”
오딘이 쭈그린 자세 그대로 아들러의 면상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럼 훔쳐보며 흉을 봐도 된다는 거야?”
서슴없는 하대. 아들러는 이를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와 동급이 되어야 할 것은 로이센 대제지,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황하는 얼굴 그대로 아들러는 손사래를 쳤다.
“휴, 흉은 보지 않았습니다.”
“본 좌는 거짓말하는 놈을 싫어한다. 방금 날 보고 사람이 아니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 소리를 들었단 말인가? 땅과 자신들이 서 있었던 나무 위는 무려 20미터의 차이가 난다. 그것도 작은 목소리로 했던 말이다.
발뺌을 해봐야 역효과만 불러올 것 같아 아들러는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무례가 되었다면 사죄하겠습니다.”
“태도가 나쁘지는 않군.”
이때 진 안에서 한 사제가 문이 서 있는 곳을 향해 뛰쳐나왔다.
바로 그때,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썰뚝.
길게 내뺀 머리가 예기가 흐르는 칼날에 베여 어이없이 땅으로 나뒹굴었다.
아들러의 눈이 경직되었다.
친절하게도 오딘은 이에 대한 설명을 했다.
“사(死)문이지. 총 구십구 개의 사문, 그리고 하나의 생문. 이게 무서운 거라고…….”
자화자찬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지옥진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저놈은 운이 좋군. 그래도 머리는 빠져나왔으니까 말이야. 킥킥.”
악마가 따로 없었다.
아들러는 자신이 지금 누구와 있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 선택이 올바른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되짚어봤다.
반면에 로이센의 눈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결국 그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오딘에게 물었다.
“왜 저렇게 허둥지둥하는 거지?”
오딘이 선심이나 쓰는 셈치고 답했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거든. 들어가 보겠어?”
로이센의 눈으로도 도통 모를 일이었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오딘이 피식 웃었다. 로이센의 눈은 아주 먼 곳까지 훑었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저 문이 안전하겠군. 네가 말한 생문이라는 게 저거겠지?”
오딘의 시선이 그제야 로이센을 잡았다.
자신과 같은 외형. 적어도 환골탈태는 경험했으리라. 게다가 기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여태 보았던 인간들 중에서 가장 강하겠군.’
한편으로는 호승심도 솟구쳤다. 오딘에게 이런 마음을 품게 하는 것만으로도 로이센은 강자였다.
그러나 그 호승심을 오딘은 기약 없이 밀어버렸다.
“눈썰미가 상당하군. 하지만 들어가면 경우는 달라질 거야. 안에서는 밖을 못 본다는 얘기지. 방향이 계속 바뀌니 저 진을 알지 못하면 죽어도 나올 수 없다.”
정말 그런 듯 보였다.
진 안에서는 사방을 분간하지 못하는지 더듬이 떼인 개미처럼 제자리를 배회하는 인간들도 많았다. 그것은 템플 나이트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진이라……. 상당히 무서운 곳 같은데, 따로 부르는 이름이라도 있나?”
“지옥진이다.”
놀라는 건 아들러였다.
로이센은 오딘의 얘기를 곧잘 들으면서도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는 반면, 아들러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이 둘이 싫진 않았는지 오딘이 적의 없이 물었다.
“그래, 쓸데없이 오진 않았을 테고… 날 찾은 용건은?”
이번에도 아들러가 나섰다.
“중차대한 일을 의논하기 위해 왔습니다.”
“중차대한 일?”
“그렇습니다.”
“말해봐.”
아들러는 입에 고인 침을 삼키고는 정중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신흥 제국의 총기사단장 아들러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로이센 대제십니다. 두 분은 초면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봤었군.”
로이센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아들러는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시 저희는 신성 제국과 제국의 뜻을 달리했습니다. 그 뜻이란 당신을 제거하는 일에 동참해달라는 요구였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아레인과 바리톤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대해 전해 들었고, 조사를 통해 당신이 아레인의 전신이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 서론이 길어. 짧게 좀 말하면 안 될까?”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레인과 바리톤이 이번 전쟁에 패할 경우, 신흥 제국도 향후를 대처해야 합니다. 그 화살이 저희에게 향할 수가 있기…….”
“그만.”
오딘은 부러 말을 잘랐다. 그리고 물었다.
“저 안에 신성 제국이 있어. 그럼 제국만 해결하면 되겠지?”
황당함이 머리를 지배했던지 아들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에?”
“저 안에 신성 제국이 있다고. 바리톤의 전쟁은 이미 끝났어, 이 진이 완성된 순간에.”
얼마나 입이 벌어졌는지 아들러는 턱뼈가 다 빠질 것 같았다.
여태 말을 아낀 로이센도 놀람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러의 놀람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우아, 저걸로 전쟁이 끝난 거야? 대단한데.”
“비꼬는 거야?”
“아냐, 진짜 대단해서 그래. 나도 진 만드는 방법 좀 알려 주면 안 될까?”
“우린 그렇게 친한 사이가 못 되는 것 같은데.”
“이제부터 친해지면 되지.”
기가 찬 나머지 오딘은 고개를 저었다.
무공이라거나 진법은 아무에게나 알려 주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진은 오딘의 수족들에게도 알려 주지 않은 내용이 많았다. 그런데 몇 번 보지도 않은 놈이 알려 달라고 한다.
오딘은 어디서 이런 엉뚱한 놈이 튀어나왔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 표정이었다.
대제가 채신머리도 잊어버리고 보채는 모습이 경박스러워 보였던지, 아들러가 땀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그의 소매 깃을 두 차례 잡아끌었다.
그제야 로이센이 입을 닫았다.
어색해진 분위기임에도 아들러는 오딘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선 전쟁에 대한 고민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오딘이 직면한 위험을 상기시켜 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말씀대로 신성 제국이 저 진으로 끝났다고 하셔도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아레인에 제국의 대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더한 문제는…….”
강조를 하기 위해 아들러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에 오딘이 되물었다.
“더한 문제는?”
“마도사탑의 개입입니다.”
“마도사탑? 그게 뭐지?”
“마도사들이 모여 이룬 단체입니다. 위험성으로 따지자면 신성 제국이나 제국보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마도사? 마법사와 같은 건가?”
“비슷하기는 합니다만, 마도사들은 사악합니다. 물불을 안 가리는 자들이어서 위험성도 배가 됩니다.”
“그다지 솔깃하지는 않아.”
역시나 혼자서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오딘을 보며 아들러는 보다 강한 위험성을 역설했다.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아레인 전역이 화염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오딘의 눈빛을 진지하게 만들었다.
대륙에 온 이래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아레인이다. 그도 사람이었으니, 자신이 공을 들여 키운 왕국이 사라지는 건 원치 않았다.
“너희들과 손을 잡으면 그 일을 면할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나?”
“피해를 최소화할 순 있을 겁니다.”
“원하는 것은?”
“아레인과의 동맹입니다.”
로이센이 시큰둥하게 아들러를 쳐다보았다.
마지막 말은 자신과 상의되지 않은 부분이다. 또한 그가 다 말하고 있질 않은가. 이래서야 온 보람이 없다. 눈도장을 찍은 것 말고 뭐가 있겠는가 말이다.
맺고 끊는 것만큼은 오딘도 확실했다.
“나쁠 건 없군. 마도사탑이란 곳은 모르겠지만, 당장 느끼기에는 너희들이 제일 위험해 보여. 동맹을 원한다? 무리가 되는 것도 아니니 받아들이지.”
속 시원한 답변에 아들러는 밝은 표정이 될 수 있었다.
이로써 신흥 제국과 아레인과의 동맹이 체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