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왕성 (62/67)

마왕성

오래도록 함락되지 않은 성이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베르무트성은 견고해져 갔다.

처음엔 볼 수 없던 소형 투석기와 발리스타 같은 병기들이 타워에 배치되었으며, 제법 뛰어난 장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리톤은 베르무트 수성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오딘에 의해 신성 제국의 병력이 퇴각한 때, 이스론은 아레인 병력의 호위를 받으며 공성 병기를 비롯한 병장기들과 군량을 들여왔다.

로테노아는 궁정 마법사를 비롯한 마법사들로 하여금 베르무트성 주변의 공간 이동 왜곡장을 걷어내게 하여 마법진을 통한 왕성과의 이동을 원활하게 만들었다.

유프라와 팔테스, 두 왕자를 베르무트성으로 보낸 것은 이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로테노아도 인간이었다.

제국이 신성 제국과 뜻을 같이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는 하늘이 샛노래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레인에 등을 돌릴 수도 없는 노릇.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지켜 나갔다. 그 덕분인지 바리톤을 수호해주려는 아레인의 병력은 점점 증강되었다.

오늘, 레고타는 화색을 짓고 있었다.

그 앞에 있는 아레인에서 온 2명의 귀족이 그 원인이었다.

“두 분께서 와주셨으니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습니다.”

레고타가 환히 맞는 두 사람은 보탄 백작과 제라드 후작이었다. 보탄의 뒤에는 샤르트가, 제라드의 뒤에는 무귀와 악귀가 서 있었다.

“이웃이 어려우니 도와야지요.”

사실 레고타는 두 사람, 아니 다섯 사람의 무력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지 못했다. 선례가 있었다면 과거 바리톤이 아레인에 굴복했을 때 정도랄까.

그저 와줬으니 고마울 뿐이고, 힘을 보태주겠다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레고타는 표정을 바꿔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단단히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오늘부터는 총공세를 펼친다고 들었습니다.”

“정 안 되면 성을 내주고 도망치면 되지요.”

순간, 제라드의 말에 살갑기만 하던 레고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농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진지하게 얘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보탄이 한마디 거들었다.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바리톤이 패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세상만사가 말 같으면 얼마나 좋으리.

로테노아가 심혈을 기울인 만큼 레고타는 이미 이 성에 자신의 사활을 건 상태였다. 이곳이 밀린다면 병력들의 사기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질 것임은 명백했기 때문이다.

“피치 못해 잃는다 해도 성에 너무 연연해 마십시오. 다시 찾을 성입니다.”

“그리된다면 좋겠지만…….”

문득 샤르트가 먼 곳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저기 오는군요.”

까마득히 먼 곳, 안개까지 끼어 있어 레고타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다.

“보, 보입니까?”

“얼추 삼만은 되어 보이는군요. 전방에 있는 적만…….”

레고타는 더 크게 놀랐다.

샤르트란 준남작도 자신 이하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수까지 가늠하는 보탄, 이 사람의 능력은 상상을 불허할지 모른다.

물론 시력이 무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태평함을 보라. 대전투를 앞에 두고도 겁을 내는 기색들이 아니다.

‘마스터다. 그러나 너무 안일하게 생각들을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신성 제국의 템플 기사단들도 그 이하는 아닐 텐데…….’

레고타는 섬뜩한 기억이 떠올랐다.

전에 벌어진 전투에서 순식간에 사다리를 뛰어오르던 템플 기사의 면상.

다급히 사다리를 치워버렸음에도 그는 허공에서 세 발이나 휘저어 하마터면 성 위로 올라올 뻔했었다. 또한 그 높이에서 떨어졌다면 즉사했어야 정상인데도 그는 멀쩡하게 바닥에 착지한 채 위쪽을 죽일 듯 쏘아보았다.

“우리도 나가야겠군.”

제라드가 돌아서자 쌍귀도 따라 뒤돌아섰다.

그때, 보탄이 의미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저희가 성 주변을 돌면 뒤쪽을 공략해주십시오.”

“예?”

설명이 더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던지 보탄은 광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성문 옆의 소문이 열리며 다섯 사람이 빠져나갔다.

위에서 지켜보는 레고타는 기가 찰 지경이었다.

“말도 없이?”

기동력에 있어서 탈것이 빠진다면 얘기가 되질 않는다. 경기병이 중요한 것은 말의 기동력 때문이다.

도통 모를 상황에 레고타는 미간만 심하게 찌푸렸다.

‘자살을 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말 타는 걸 까먹은 거야?’

얼빠진 표정만 짓고 있는 레고타를 총관이 일깨워주었다.

“후작 각하,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대군이 몰려옵니다.”

그제야 레고타는 고래고래 소릴 치고 부랴부랴 서둘렀다.

‘결전이 다가온다.’

눈을 빛내며 레고타는 이 전투가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각오로 전투에 임했다.

성 밖으로 나간 5명의 인원들은 성 위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워낙 성벽에 바짝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자 레고타는 미련을 접고 수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전쟁 물자를 충분히 들여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대항해볼 엄두도 나질 않았을 것이다.

서서히 사다리들이 걸쳐졌다.

탁! 타닥!

불화살이 하늘을 덮는 것보다도, 신성 마법이 주위로 날아드는 것보다도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점하고 있는 자리를 내주게 되면 성 위는 신성 제국의 병력들로 가득 찰 것이다.

“사다리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하라!”

명령은 내렸지만 이상하게 대응하는 이들이 드물었다.

발끈한 레고타가 소리를 치려 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사다리들이 제멋대로 주저앉는 게 아닌가.

원인을 분석하려 성 아래를 내려다보려 했는데, 총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위험합니다!”

놀래 앞을 보니 백색의 광망이 면전으로 날아드는 중이었다.

“아뿔싸!”

식겁하여 레고타는 허리를 꺾었다.

후웅-!

목표를 잃은 광망은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하마터면 레고타는 어이없게 생명을 날릴 뻔한 것이다.

신성 마법의 위력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스친 것뿐인데도 허리끈이 녹아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레고타는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살핀 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다리가 주저앉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섯 사람이 도처에 깔리는 사다리를 잘라내며 앞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신성 제국의 병력들은 그 이유가 되는 다섯 사람을 향해 무차별한 공격을 거행했다.

무수한 피가 흩뿌려지며 안개를 형성했다. 그 피는 모두 신성 제국 병력들의 것이었다.

보탄을 주축으로 한 다섯 사람이 지나간 곳에는 너른 공동묘지가 형성되고 있었다.

분을 참지 못해서인지 성기사들에게서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들이 튀어나왔다.

“찢어죽일 놈들!”

“잡히는 순간 네놈들은 죽은 목숨이다!”

정말 약 오를 만도 했다.

사다리를 잘라버리고 그 밑동을 차 쓰러뜨리면서 주변의 동료들을 무참히 살해한 자들은 요리조리 잘도 내뺐다.

순간의 분노가 이성을 지배했던 탓에 성 아래에는 무수히 많은 인파가 몰려 버렸다.

불현듯 누군가의 음성이 후작의 머릿속을 때렸다.

-지금이오.

보탄 백작이 고개를 올려 레고타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아마 그의 뜻이었으리라.

이에 레고타가 황급히 명을 내렸다.

“쫓고 있는 자들의 후미를 노려라.”

성 위에 수북이 쌓인 돌들이 아래로 굴렀다.

우루루루루!

떨어지는 돌들의 크기는 제각각이었는데 개중엔 주먹만 한 돌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무서운 무기가 될 것이다.

보탄을 주축으로 다섯 사람은 매우 빠른 속도로 성 주변을 돌며 사다리란 사다리는 죄다 날려 버렸다. 물론 그 위를 오르던 이들도 무사할 순 없었다.

더해서 낙석에 부상을 입은 이들이 늘어나며 신성 제국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삽시에 무려 1천 명의 피해자를 내고서 신성 제국의 병력은 상부의 명령을 따라 뒤쪽으로 빠졌다.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 문제의 원인이 된 다섯 사람에게 수많은 시선이 꽂혀 들었다.

그러나 보탄과 제라드는 아직 물러설 마음이 없는 듯했다.

“이거 운동거리도 안 되었습니다.”

“대단한 놈들이 나올 테지?”

“아마도 그렇겠죠.”

대화가 끝날 무렵 무수히 많은 화살과 마법들이 이들이 있던 자리로 날아들었다.

빠르게 자리를 뜨며 제라드가 투덜거렸다.

“우릴 너무 얕보는군.”

다섯 사람이 성 측면으로 돌아서자 더 이상 화살을 낭비하는 이는 없었다.

결국 쟁쟁한 템플 기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다가오는 자들을 두려워하는 아레인의 눈빛은 없었다. 그들은 그 너머에 있을지도 모르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 * *

푸욱!

석양이 진 평야에서 한 인영이 상대의 가슴팍에 꽂았던 검을 거칠게 뽑았다.

푸확!

피를 뿜어내며 한 생명이 땅으로 쓰러졌다.

“오딘 님은 아직이신가?”

목소리의 주인은 금색의 고리로 한 눈을 봉한 외눈박이 발데르였다.

갑주는 피로 젖었고, 사람을 베었던 검에서는 핏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곁에 있던 크레멘이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답했다.

“그렇사옵니다.”

크레멘은 승작하여 자작이 되었지만, 발데르를 대하는 태도만은 예와 변함이 없었다.

발데르는 주위를 가만히 굽어보았다. 철왕대의 무사들이 시신을 확인하고 있었다.

“곧 전면전이 다가올 텐데 걱정입니다.”

과연 발데르의 얼굴에서도 수심은 있었다. 그 역시 오딘이 없는 아레인이란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존이시여,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옵니까?’

* * *

정했던 대로 마도사탑의 인물들은 아레인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직접 관여하진 않았다.

또한 이에는 많은 인원이 나오지 않았는데 까닭인즉슨, 오딘을 제거하기 위한 일종의 계산이었다.

이쪽의 전력을 보여 봐야 저쪽은 준비를 할 테고, 그렇다면 일이 복잡해질 수 있다. 시일이 더 걸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하여, 제르딘은 마도사탑의 기둥과도 다름없는 청마도사장과 적마도사장, 그리고 일부 마도사만을 데리고 왔다.

그러다 보니 주된 화젯거리는 오딘이었다.

이 자리에는 마도사탑의 인원들 말고도 알베른과 황자 타츠만이 있었으며, 타츠만을 엄호하는 쟁쟁한 기사들이 함께했다.

“클클, 내가 그놈과 겨뤄봤으면 좋겠어.”

“또 그 소리.”

비록 마도사장들이 아니더라도 대륙에서 워낙에 유명한 마도사들이다 보니 누구도 무리한 일일 것이란 생각을 품지 않았다.

이들에겐 외눈박이 거인인 사이클롭스나 집채만 한 와이번 등을 사냥했다거나, 소드마스터를 꺾었다는 무용담 따위는 별다른 자랑거리가 못 될 정도였으므로.

슐트는 감히 이 자리에서 껴들지도 못했다. 각 마도사장들이 없는 자리에선 이들이 왕이었다.

떠들던 와중에 잠자코만 있던 적의 로브가 입을 열었다.

“녀석들이 돌아올 때쯤 되지 않았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마치 손톱으로 쇠를 긁는 듯한 소리를 연상시켰다.

점수라도 따고 싶었던 것일까? 슐트가 잽싸게 그 답을 대신했다.

“나흘이나 흘렀으니 돌아올 때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 부흥이라도 하듯 두 사람이 막사의 중간에 자리한 피를 칠해놓은 듯 붉은 마법진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둘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질겁한 얼굴들이라는 점이었다.

“무슨 일이냐?”

점잖은 흑마도사의 질문에 퉁퉁한 사내가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크, 큰일입니다.”

“큰일이라니?”

“아, 아레인…….”

계속 말을 더듬는다.

그를 보며 엘룬은 속으로 혀를 찼다.

‘쯔쯧, 저러고도 주문 영창이나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군. 어쩌면 이 녀석들 상당수가 실력이 부풀려졌을 수도…….’

여태 엘룬은 이곳의 마도사들을 눈여겨보았는데, 상당수가 행동이 경솔하고 가벼웠으며 채신머리가 없었다.

답답한 말투에 짜증이 치솟기는 마도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요놈, 혓바닥을 잘라줄까?”

협박에 놀랐는지 퉁퉁한 사내는 입을 벌리다가 어벙한 표정 그대로 멈췄다. 또다시 말을 더듬을 것 같았던 모양이다.

그를 대신해 짝달막한 옆의 동료가 빠르게 입을 놀렸다. 말소리가 어찌나 빠른지 제대로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마왕이 거주하는 것 같습니다. 성이 온통 까맣습니다.”

두 마디가 남들 숨 한 번 내쉴 시간에 이뤄졌으니, 알아듣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괴로운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청마도사가 왼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다 옆에 놓인 금속 오브를 콱 움켜쥐며 안면을 확 구긴 채 테이블 위로 올라서려 했다. 기세로 봐서는 내려칠 용도로 쓰일 것 같았다.

옆에 있던 흑마도사가 그를 다급히 뜯어말렸다.

“아이고, 형님, 참으십쇼.”

청마도사가 씹어 먹을 듯한 눈을 하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거 놔! 못 놔?”

“저놈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형님 오브가 불쌍해서 그럽니다. 그게 얼마짜린데… 다시 구하기도 힘들 물건을…….”

그제야 청마도사는 자세를 바로 했는데, 신경질적인 표정은 가시지를 않았다.

잔뜩 겁을 먹었던 두 사람은 멀거니 그의 눈치만 살폈다.

이때, 다섯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제국의 황자 타츠만과 그 책사 알베른, 그리고 적마도사장 베르난과 청마도사장 가르투스, 마지막으로 파르티잔이 그들이었다.

마도사장들의 등장에 얼마나 긴장했는지 퉁퉁한 사내는 더욱 당황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고, 짝달막한 사내는 식은땀을 흘렸다.

퉁퉁한 사내가 몰아쉬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내부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흐~ 허… 흐~ 허…….”

베르난이 퉁퉁한 사내를 아니꼽게 쳐다보았다. 살심이 커지며 그의 흰자위에 핏발이 사방으로 곤두섰다.

안을 더럽히기 싫었던지 가르투스가 그런 베르난을 제지한 후, 찬찬히 주위를 쓸어보며 나직한 어투로 물었다.

“누가 설명할 테냐?”

용케도 말을 알아들은 이가 일어서며 답했다.

“아레인 왕성에 다녀온 모양입니다. 마왕이 있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아 분위기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마왕? 왜 그렇게 생각했지?”

이번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답했다.

“성이 온통 까맸다고 하더군요.”

적어도 로마노스 대륙에 국가의 상징인 성을 어둡게 칠하는 바보는 없었다. 그것도 보통 어두운 색이 아닌 흑색으로 칠하는 이들은 더더욱 없을 것이었다.

이는 일종의 미신과도 같았는데, 어두운 분위기는 암담한 미래를 불러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후… 후우…….”

눈치만 살피다 이제야 겨우 숨을 고른 퉁퉁한 사내가 제법 안정이 되었는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주변도 온통 그랬습니다. 하늘엔 검은 달이…….”

“검은 달?”

“검은 구름과 무서운 눈을 가진 검은 달…….”

짝달막한 사내가 모기 소리로 아까처럼 빨리 말했다. 아무래도 습관 탓인 듯했다.

“낮은 구름은 망루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보였습니다.”

말이 시작과 동시에 끝나버렸음에도 청마도사장 가르투스는 용케도 이를 알아들었다.

그는 되도록 믿으려 하는 눈치였다.

반면에 적마도사장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모으며 둘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틀림없으렷다?”

“누구 안전이라고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누구 안전…….”

퉁퉁한 사내는 미처 말을 끝내지 못했다. 안 그래도 말이 느린데 짝달막한 동료가 맥을 끊어버린 탓이다.

상황을 지켜만 보던 알베른이 타츠만에게 아뢰었다.

“황자 전하, 날을 정해주십시오.”

“괜찮다면 말이 나온 김에 오늘로 하지.”

이로써 마도사들의 아레인 왕성행이 결정되었다. 결정권은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파르티잔에게도 인생무상의 순간은 찾아왔다.

‘덧없는 인생. 이러면 어떠하리, 저러면 어떠하리…….’

황자 타츠만과 엮일 때만 해도 이처럼 인생을 포기하진 않았었다.

그러나 마도사탑의 악질 마도사들이 들러붙으며 발 앞에 수많은 가시가 깔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놈들은 성격도 개차반 같아서 윽박지르고 고통 주기를 즐겨 했다. 마치 오딘과 있었던 한때를 추억하게 만든달까?

기실, 대로 한복판의 잡초처럼 살아온 마도사들한테 온실 속의 화초 같은 마법사가 달가울 리 없었다.

그 점이 파르티잔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차라리 그라니트성에서 탈출을 하지 않았다면 하는 후회.

셀 수도 없이 해봤다. 이제는 더 해봐야 소용없다고 깨우친 상태니 별 헤듯 해가 뜨고 지고를 손가락으로 세며 죽는 날을 헤는 게 나았다.

오죽 불쌍했으면 타츠만이 책사가 된 알베른에게 주의를 줄 정도였다.

덕분에 고통을 받는 횟수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가 없을 때는 더한 고통을 겪었다.

황자 앞에서 표정 관리를 잘하지 못했다는 게 이유였다.

얼마나 당했으면 몸 안에 암흑의 마나가 자리하는 착각까지 들었다.

총 15인의 마도사와 타츠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제국의 구성원들은 전쟁과는 별도로 아레인 왕성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이들의 목적은 오딘의 제거였다.

특히 청마도사장과 적마도사장, 이 두 사람은 황자도 말을 섞기 꺼리는 존재들이었다.

저들은 타츠만 자신에게 존대를 하지도 않았고, 눈초리가 아랫사람 대하듯 꼭 깔아보는 듯했다.

‘목표만 제거하자. 혹 저들이 위협이 된다 해도 황제께서 처리 못하실 부분은 아닐 것이다.’

알베른이 미리 주의를 주고 몇 번이나 간청했으니 타츠만도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이에 반해 파르티잔은 이들이 오딘을 제거하건 말건 관심이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일인데 말이다.

정신으로는 환골탈태였다.

헤아릴 수 없이 당한 일들에 면역력이 생겼는지 겁을 벗고 무념을 즐겼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게 불쌍해 보였는지 알베른이 입을 열었다.

“전하, 이제 저자는 보내주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타츠만은 이에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럴 수 없다.”

가여워하기는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딱 잘라 거절했다. 데리고 있으면 약간이라도 이득이 갈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의외로 당사자가 굽실거리며 고마움을 표했다.

“저도 원하는 바입니다. 전 나가봐야 고생만 할 테니 데리고 가주십시오.”

파르티잔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괴팍한 마도사들이 소리 없이 뒤쫓아 와 목숨을 취할지도 모르는 형국이니 같이 있는 편이 나았다.

그래도 생명에 대한 집착은 질기게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적은 인원으로 움직이는 만큼 아레인 왕성에 다가서기는 어렵지 않았다.

멀리 성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앞장서 가던 흑마법사 슐트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팔뚝을 쓸었다.

“어쩐지 음산한데?”

퉁퉁한 사내의 말대로 아레인 왕성 자체가 시커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늘엔 고양이 눈이 아로새겨진 검은 달이 걸려 있었는데, 그 눈이 마치 사방을 감시하는 듯했다.

그 아래로는 숯처럼 까만 구름들이 걸려 있었다.

곁에 있던 엘룬도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저게 그놈의 성이라고? 오딘이라는 놈은 정말 마왕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지를 되짚어보았다.

타츠만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했던 말. 오딘이란 그놈은 인간이라 생각하기엔 무리가 갔다.

황자를 호위하는 녀석들도 자신보다 뛰어났으면 뛰어났지, 못하지는 않았다. 저런 근위병들이 떼로 달려들어도 어쩌지 못했던 인간이라 하였으니, 이렇게 경각심을 곤두세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러다간 제 복수를 하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꾸만 망설여졌다.

불행히도 아직까지 엘룬은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알베른도 눈썹을 모았다.

자신이 보았던 아레인 왕성은 절대 저렇지 않았다.

지금 분위기로는 마족들이 돌아다닌다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외관도 많이 달라졌으며, 무엇보다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게 내심 걸렸다.

단 두 사람만이 이를 깨우쳤다.

“장난을 쳐 놓았군.”

청마도사장 가르투스의 말에 적마도사장 베르난이 맞장구를 치며 물었다.

“같은 생각입니다. 걷어버리는 게 나을까요?”

“아무래도…….”

가르투스는 품에서 검지만 한 호리병 하나를 꺼내 땅 위에 내려 두었다. 그리고 마개를 열자 멀건 연기가 그칠 줄 모르고 하늘로 꾸역꾸역 솟아올랐다.

이때 파르티잔이 뭔가에 홀린 듯한 눈을 하고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적마도사장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파르티잔의 팔뚝을 그었다. 생채기가 난 팔뚝에서 붉은 피가 비산하였는데도 파르티잔은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이미 적마도사장 베르난의 적마법에 취한 까닭이었다.

땅으로 떨어지던 피들은 뱀처럼 뭉쳐 들며 베르난의 눈을 따라 움직였다.

일정량의 피들이 선과 도형을 그리며 호리병을 중심으로 하나의 진을 완성시켰다.

가르투스가 입술을 놀리는 속도도 빨라졌다.

시기적절하게 베르난이 소리쳤다.

“자리를 점해라!”

그러자 숨을 죽이며 광경을 지켜보던 마도사들이 각 도형의 꼭짓점에 가서 섰다.

마법진을 이루는 피가 부글부글 끓었다.

그런가 하면 작디작은 호리병에서 하염없이 흘러나온 연기는 반경 10미터에 이를 정도의 두꺼운 구름층을 형성했다.

가르투스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의식을 잃은 마도사들의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그들 신체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청, 적, 흑의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하나의 촉매제가 되어 구름을 한 점으로 빨아들이고 차츰 식어가던 피를 흡수하며 작은 소용돌이를 형성시켰다.

손바닥만 하던 크기의 소용돌이는 가르투스가 가리킨 쪽을 향하며 주위의 흙먼지를 집어삼켜 거대해졌다.

마도사들이 땅에 착지하며 서서히 정신을 차렸을 땐, 진녹색 소용돌이가 검은 구름을 집어삼킬 듯 다가서고 있었다.

검기만 하던 구름은 맹위를 자랑하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쪽 구름이 구멍을 드러내며 기어이 하늘이 열렸다.

밝은 빛이 검은빛을 몰아내며 검은색 구름들도 사방으로 흩어졌다.

가르투스는 호리병의 마개를 닫은 후 품으로 회수하며 말했다.

“달은 안 하는 게 낫겠어. 하루에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마도사들 모두가 놀란 얼굴을 거두지 못하던 중이었다.

알베른과 황자, 그리고 제국의 근위 기사들은 한술 더 떠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특히나 황자가 품고 있던 경계심은 배가 되었다.

‘이놈들은 너무 위험한 놈들이다. 내 당장은 협조를 하고 있지만, 걱정이구나. 혹 사자를 잡으려고 하이에나들을 끌어들인 건 아닌지…….’

갑자기 베르난이 기분 나쁘게 웃었다.

“킬킬킬, 황자는 너무하는구나.”

반말을 듣는 것도 달갑지 않은 상태에서 흉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어 황자가 발끈해서 되물었다.

“뭐가 말이오?”

“분명 우리는 제국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고 했다. 불가침조약을 잊어버린 건 아닐 테지?”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딴생각이라도 품었단 거요?”

베르난은 파르티잔의 피가 묻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황자의 코를 찌를 듯 들이댔다.

“내 앞에서 거짓말할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다. 난 생각까지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그 말에 타츠만의 등골이 다 오싹해졌다.

이맘때쯤 파르티잔이 정신을 차리며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훑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머리가 핑핑 도는 기분에 한자리에 서 있질 못하고 뒤뚱거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이다.

베르난의 눈짓을 받은 슐트가 다가가 파르티잔의 목을 젖히고 붉은색 포션을 들이켜게 했다. 비릿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파르티잔은 오만 인상을 찌푸렸다.

“꿀럭, 이건……?”

“박쥐 피와 돼지 피를 섞어 만든 포션이다. 피가 모자랄 땐 그만이지.”

역겨운 맛은 둘째 치고 속이 부글거려 구토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또 무슨 핍박을 당할지 모른다.

고통스런 자신을 구경하며 키득거리는 마도사들이 미치도록 얄미웠다.

울컥한 나머지 눈물까지 핑 돌았다.

이놈들이 죽어나가는 꼴을 보아야만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풀릴 것 같았다.

바람이 간절했다.

하늘이 그 간절함에 동한 것일까. 한 남자가 대담하게 단신으로 무리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색 실크 셔츠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흑발에 흑안의 청년이었다.

“저놈은 또 뭐야?”

“마왕의 부하가 아닐까요? 크큭.”

비아냥대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이에 반해 파르티잔은 저 청년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그리스였다.

* * *

그녀는 전장의 꽃이었다.

멀리서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으나 가까이서는 그 꽃을 꺾어버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유난히 윤기가 흐르는 백마 위에 올라탄 그녀는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천하일색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법 지팡이에서 줄기줄기 뻗어 나온 빛은 제국의 전력을 하염없이 축내었다.

만천하에 울려 퍼질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가 재차 경각심을 일깨웠다.

“예로부터 사람을 홀릴 정도로 예쁜 꽃은 독이나 가시를 조심하라 했다! 여왕을 쓰러뜨리는 자에게는 부귀와 영광이 함께할 것이다!”

작금, 이 전투 지역에서 제국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아레인의 여왕이었다.

외모와는 다르게 그녀는 너무도 위험했다.

그녀의 마법에 절명한 자들의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으니 오죽하겠는가.

만약 임신으로 부른 배가 아니었다면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임은 자명한 일. 이는 제국에 있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제국이 이 전투의 승패를 가늠 못할 정도로 어려운 건 아니었다. 제국의 군사가 수배는 많았으므로.

한 지휘관이 이 와중에도 죽어나자빠지는 수하들을 보며 바드득 이를 갈았다.

‘네년이 얼마나 견디나 보자. 이제 후발 부대가 도착할 때가 되었으니, 여기서 살아나가는 건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게다.’

여왕이 있단 소리에 증원을 요청한 상태였다.

퇴로를 이미 차단했으나 아직까지는 불확실했다. 그녀의 곁을 지키는 무장들의 실력이 워낙에 출중했기 때문이다.

과연, 지금의 수와 맞먹을 정도의 제국의 군대가 들이닥쳤다.

아무리 아레인의 힘이 대단하다고 해도 이 수를 감당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그렇다고 아레인의 무장들은 패색을 떠올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조금 전보다 더 힘을 짜내어 펄펄 날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레인의 여왕을 놓치지 않으려는 일념으로 제국의 군대는 겹겹이 둘러싸였다.

조금 전 큰 소리로 제국에 경각심을 일깨웠던 지휘관이 이를 보며 비죽거렸다.

“흥, 그 자리에 성황이 있다 해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힘이 빠질 것은 당연지사. 그의 예측대로 서서히 아레인에도 한계가 찾아드는 듯했다.

‘어디로 가신 건가요? 손녀가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는데, 어디에 계신 건가요?’

엘레느는 괴짜 노인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항상 지치고 힘이 들 때마다 손을 내밀었던 사람이 곁에 없다.

그가 아레인을 떠난 것을 알았을 땐 허망함이 찾아들었다. 그에 위로가 되었던 것이 배 속에 있는 아이였다.

그녀는 자신이 아주 어렸을 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를 아이에게 다정하게 들려주었다. 이 중에 많은 비중을 아이의 아빠인 오딘과 괴짜 노인이 차지했다.

‘할아버지는 언젠가 돌아오실 거야. 언젠가…….’

배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생각하고서 그녀는 상념에서 괴짜 노인의 존재를 어렵게 지워버렸다.

이 광경을 본 근위 기사 하나가 주변을 대신해 소리쳤다.

“그대들의 목숨보다 소중한 분이 계시니 죽어도 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로 말이 필요하진 않았다. 근위 기사들은 모두 그럴 각오였다. 그 대단한 각오 덕분인지 대군에 맞서 무려 반나절을 버텨 냈다.

제국의 지휘관들은 그 오랜 시간 동안 버틴 저들이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하하하! 여왕, 드디어 한계에 부딪쳤구려. 그러게 진작 말을 들었으면 좋았잖소.”

멀리 있어도 엘레느의 귀에 와 닿을 정도의 목소리였다. 그는 그녀에게 미리 항복을 종용했던 것이다.

엘레느가 말머리를 돌려 지휘관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뿐, 자신을 농락한 그에게 어떠한 화답도 주지 않았다.

여태 오만 가지 인상을 쓰며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댔던 지휘관의 표정이 의지와 다르게 다정해졌다.

‘인상을 쓰니 더욱 아름답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어. 세상에 저런 여자가 존재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마음 같아서야 첩으로라도 삼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위험한 여자다.’

방법을 찾자면 분명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마법을 빼앗는다 해도 저 표독스런 시선은 언제고 복수의 칼날을 겨눌 것만 같았다.

그가 사념에 빠져 있는 동안 제국의 군대는 아레인의 병력을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이제는 탄력까지 붙었는지 아레인의 병력이 가운데로 밀집되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쯤 되면 으레 절망에 부딪쳐야 했다.

그러나 눈이 웃고 있다.

방금 말을 건넨 지휘관을 향해서 엘레느의 눈이 웃고 있었다.

측은지심을 곁들인 눈이랄까.

그 눈은 흡사 그런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미쳐 버린 걸까?’

부우우우우우우-!

영혼을 부르는 듯한 뿔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이어 수레바퀴가 자갈들을 바수며 굴러오는 소리가 들렸다.

크르륵, 크륵.

기괴한 걸음걸이로 정체불명의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림잡아 50은 되어 보였다.

그 중심으로 커다란 수레가 있었으며, 그 위에는 흰자위만 보이는 거구의 사내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개중 멀쩡한 인간들이 조심스레 쇠사슬들을 풀기 시작했고, 곧 포박에서 풀려난 거인은 괴성을 내질렀다.

“크워어어어어!!”

땅이 울릴 정도의 포효에 사투를 벌이던 이들도 고개를 돌렸다.

쿵! 쿵!

수레에서 내려 두 발을 땅으로 내딛는 소리가 이러했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던 자들은 그가 발을 내디딘 곳의 땅이 움푹 꺼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괴, 괴물…….”

제국의 병사들 중 담력이 약한 자는 그 모습만 보고 질겁하여 뒷걸음질을 쳤다.

괴상한 무리들 틈에서 마혈단의 단주 아론이 얼음처럼 싸늘한 눈을 하고 앞으로 나섰다.

“여왕 전하, 신이 곧 구해드리겠사옵니다. 마타하리 님, 부탁드립니다.”

마혈단의 단주가 되었어도 아론은 아직까지 마타하리에게 존칭을 붙이고 있었다.

그의 뜻을 알아들었다는 듯 마타하리가 또 한 번 포효를 질렀다.

“크아아아아!”

듣는 이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심어주는 소리였다.

마타하리의 두 발이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50의 광인들도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각 광인들은 저마다의 검을 쥐고 있었다.

이들 모두가 수련을 하다 주화입마에 걸린 탓에 생명은 버릴지언정 검은 놓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 검들은 오로지 파괴와 살육만을 바랐다.

촤캉! 스걱!

붉은 피가 비산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광인들은 사방을 휘저었다.

그들은 전혀 제 몸을 돌보지 않았다. 살이 찢겨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으며, 피가 흘러도 아파하지 않았다.

제국의 군사들 간에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산 자의 비명과 말이나 코도들의 울음은 공포를 배가시켰다.

히히히힝.

“크악!”

“사, 살려 줘~”

퍽!

도망치다 죽는 이들도 태반이었다.

머리가 잘리거나 부서지고 허리가 잘려 나가는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제국군의 피가 안개가 되어 사방으로 자욱하게 퍼졌다.

“전열이 무너진다!”

마혈단의 경천동지할 무력에 힘입어 오래지 않아 아론은 여왕을 알현할 수 있었다.

“신 아론, 여왕 전하를 뵈옵니다.”

엘레느가 입술을 열다가 산통이 찾아오는지 배를 만지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 근엄하게 말했다.

“경은 들으라.”

“하명하시오소서.”

“태아는 쉬고 싶어 한다. 하지만 눈앞의 승냥이들이 조금도 쉬게 두질 않는구나. 짐은 저들이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순간, 아론의 눈이 참을 수 없는 살기로 번들거렸다.

“지엄하신 명을 받들겠나이다.”

곧 광인들의 뇌리에 아론의 전음이 전해졌다.

-하늘에 닿으려는 자들에게 어리석음을 일깨워주도록… 눈에 보이는 모두를 멸하라!

이후부터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광인들의 눈구멍에서 광망이 눈부신 빛을 토해내며 무려 10여 개의 오러 블레이드가 주변을 깡그리 태울 것 같은 기운을 뿜어냈다.

아론의 검에도 살기 짙은 오러 블레이드가 비죽이 고개를 드밀었다.

그는 첫발을 내디뎠다.

다가서는 모든 적들이 그의 오러 블레이드 아래 끔찍한 몰골이 되어 파편처럼 사방으로 튀겼다.

검끝에 응축된 마나가 뱀처럼 적진으로 파고들었다.

쿠쾅!

반경 5미터의 적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흰자위를 드러낸 아론의 모습은 흡사 광인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제국의 지휘관들이 아무리 다그치고 소릴 쳐도 제국군은 듣질 않았다. 공포가 전장을 지배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 것이다.

사방이 죽어나가고 있다.

이를 보는 제국의 지휘관들은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고 경악성을 터뜨렸다.

“어디서 악마들이 튀어나온 것이냐? 도대체 어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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