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헥토르의 최후 (61/67)

헥토르의 최후

왕비는 공왕의 정복 끝단을 붙잡고 섧게 울어댔다.

헥토르의 시신이 양도되었으매, 공왕은 굳은 얼굴로 장례도 지내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흑흑, 죽은 것도 서러울 텐데 어찌 이러실 수가 있으시옵니까? 일 왕자도 전하의 똑같은 자식이옵니다. 부디 명을 거둬주시옵소서.”

로테노아는 볼을 씰룩이며 차게 말했다.

“나라를 팔아먹으려던 놈은 내 자식이 아니다.”

이미 얘기를 전해들은 후였다. 반역자는 헥토르였다는 것을…….

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그는 왕비에게 전에 없던 거친 말을 내뱉고 말았다.

대전에 주저앉은 채 원망 담긴 시선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왕비. 그러나 로테노아가 다시 꺼내는 말에는 일체 동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저놈에게는 관도 아깝다. 뭣들 하는 게냐? 당장 저놈을 공국 밖으로 내다버리지 않고!”

왕명을 어길 수는 없었던지 미리 관을 들고 왔던 근위 기사들이 다시 관을 들어 대전 밖으로 향하려 했다.

하나, 왕비가 이를 가만히 둘 리 없었다. 그녀는 신발 한쪽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관을 향해 달려갔다.

“안 된다, 이놈들아! 냉큼 내려놓질 못하겠느냐!”

왕비의 말 또한 무시할 수 없었기에 근위 기사들은 관을 든 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로테노아가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내 여태 왕비의 소소한 잘못을 눈감아주었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 없소. 당장 그 관에서 비켜서지 않으면 필경 후회할 게요.”

로테노아의 눈에는 살심이 깃들어 있었다.

평생을 함께하면서도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눈. 그 눈이 왕비 자신을 보고 있다.

덜컥 겁이 났다.

자신의 배로 낳은 자식도 자식이지만, 지아비의 저런 모습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무엇이 로테노아를 독하게 만들었는가.

이유는 그녀에게 있었다. 오냐오냐하며 키운 자식이 결국 아비의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이다.

분이 가시질 않는지 로테노아는 근위 기사에게 명했다.

“내 오늘은 더 왕비를 못 볼 듯하니 데려가라.”

근위 기사들에 의해 대전을 빠져나가면서도 그녀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질 못해 한마디도 꺼내질 못했다.

이어서 제지해줄 대상을 잃은 관이 유유히 대전 밖을 빠져나갔다.

대전 안에는 몇몇 중신들과 이 왕자 유프라, 삼 왕자 팔테스가 있었다. 로테노아는 헥토르의 관을 보던 매서운 눈길을 거두고 두 왕자에게 자상한 눈길을 건네었다.

편치 않은 마음이기는 했다. 그래도 두 자식만이라도 제자리로 돌아온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기쁜 것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싸우던 두 왕자에게 어렸을 적의 우애가 싹텄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분께서 직접 도와주셨더냐?”

로테노아의 질문에 유프라와 팔테스는 동시에 입을 벌려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그렇사옵니다.”

그분이라 지칭하는 사람은 오딘이었다.

노기가 한결 더 수그러들었다.

‘현자, 당신의 말이 틀리지 않았구려. 내 끝까지 그대를 신임하지 않았다면 이번 역시 크게 일을 그르칠 뻔했소. 이제는 그대가 편히 눈을 감아도 될 것 같소이다.’

남다른 감회에 젖은 로테노아를 보며 유프라와 팔테스는 같은 각오를 다졌다.

앞으로 결코 아레인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은 없을 것이며, 서로 간에 우애를 잃어버리는 일 또한 없을 것이라고…….

헥토르의 시신은 메마른 들판에 버려졌다. 그것도 바리톤이 아닌 타 지역에.

그 시신을 까마귀들이 달라붙어 뜯어먹었다.

어찌 보면 가장 비참한 죽음일 것이다. 이는 그 누구보다 신뢰되어야 할 왕자가 저지른 반역에 대한 대가였다.

* * *

로만은 도움이 절실했다.

급작스레 이뤄진 신성 제국의 증원이 이들에겐 난관이었다.

또한 아레인 왕성에서 내려온 명령으로 인해 음영대주 켈타스 후작과 적의질풍대주 헤르를 포함해 전력의 일부가 빠진 형국이라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지휘 막사에서는 오늘도 어김없이 회의가 열렸다.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구려.”

“그러게 말이오. 전에는 모르고 아레인 분들을 괄시했지만, 이젠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여실히 깨달았소.”

“그래도 아직까지는 우리가 병력이 많지 않소이까. 이렇게 당하고 있을 게 아니라 뭔가 계책이 필요하오.”

“아직 안 해본 게 있소? 랜스병을 이용해 밀어도 봤고, 측후방도 공략해봤소. 그런데 어땠소? 처음에만 먹혀들었지, 결국엔 저들에게 무기마저 빼앗겼지 않소.”

이뿐이 아니었다. 숱한 야습이 실패로 돌아갔고, 머리들을 싸매 꺼낸 묘책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죽은 로만의 병사도 문제지만 전투 도중 잃어버린 병장기들도 골칫거리였다.

신성 제국과 비교해볼 때, 로만 연합은 그리 부유한 편에 속하지 못했던 것이다.

문제는 또 있었다.

“듣자하니 요사이 뜬소문으로 진영들이 술렁인다고 합니다.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어요.”

“뭐라 합니까?”

“지금 투항하면 살려 줄 뿐 아니라, 가솔들과 식솔들을 포함해 살길 또한 열어줄 것이라고 합디다.”

“허!”

심각한 문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수세에 몰리고 있는 판국에 누군가를 이용해 간교를 펴고 있으니.

듣기만 하던 가르텐도 눈앞이 다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후, 산 넘어 산이로군요.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자구책을 강구해봅시다.”

그는 차마 몰랐다. 이 말은 자신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꺄악!”

막사 밖에서 들린 놀란 여인의 목소리였다.

의아한 생각이 들었던지 지휘관들은 보이지도 않을 막사 밖을 향해 눈을 두었다.

그 목소리는 또 이어졌다.

“이봐요, 실수라도 숙녀 몸을 건드렸으면 사과를 해야지, 어딜 가요?”

여럿의 발소리가 들리다 소란은 이내 잠잠해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막사 밖에서 기별이 들렸다.

“이스론 상단에서 가르텐 백작님을 뵙고자 합니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던지 가르텐은 자리에서 일어나 답했다.

“어서 들어오시라고 하여라.”

차양이 걷히고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앞의 두 사람은 남자였고, 뒤의 한 사람은 여자였다.

남자들은 앞을 보고 들어왔지만 여인은 뒤를 돌아보며 뭐가 못마땅한지 툴툴거렸다.

“생긴 건 꼭 족제비 같아가지고…….”

그게 결례임을 알아차렸는지 앞에 선 구릿빛 피부의 청년이 황급히 뒤로 돌아 여인의 팔뚝을 붙잡고 다그쳤다.

“헤르미온!”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돌아서다 그랬다지만 손이 내 가슴을 스쳤다고. 켕기는 게 없으면 도망은 왜 쳐?”

의도치 않게 그녀의 얘기를 경청하게 된 지휘관들. 그중 가르텐 백작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지휘 막사 안에서 회의가 열릴 때에는 막사 곁으로 다가설 수 없다. 경비들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 정상이다.

조금 전 들린 소리로 유추해보았을 때, 도망친 대상은 지근거리에 있다가 달아난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또한 족제비 같은 인상… 그건 자신의 근처에 있는 인물의 인상착의였다.

꼭 칸멜 자작이 그랬다.

‘그놈이 기어이…….’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백작은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어쩌면 진영에서 묘책을 내었을 때 유포한 작자가 그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의 눈에 핏발까지 설 무렵, 구릿빛 피부의 청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어, 가르텐 백작님…….”

두 번을 불러서야 가르텐은 노기를 접고 청년을 보았다.

“마르크 부상단주, 미안하오. 내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어서…….”

둘은 안면이 있었다.

가르텐은 얼마 전 이스론에 쓸 만한 병장기를 부탁할 요량으로 사람을 만났는데 그게 마르크였다.

마르크가 부상단주에 오른 것은 채 두 달이 넘지 않았다. 현 이스론의 상단주 폴켄은 이미 마르크를 차대 상단주로 정한 것이다.

언제나처럼 마르크는 고객을 웃는 낯으로 대했다.

“오히려 제가 송구스럽습니다. 무례를 끼쳤군요.”

“아, 아니요.”

마르크는 어색한 분위기를 걷고자 옆 사내 틴을 가리켰다.

“전에 부탁하신 물품들의 일부입니다.”

틴은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고 등에는 각궁을 메고 있었으며, 손에는 메이스와 마법 지팡이 등을 휴대하고 있었다.

“돌아주세요.”

부탁에 따라 틴은 한 바퀴를 서서히 돌았다. 그래서 거기 있는 지휘관 모두가 그가 휴대한 장비를 지켜볼 수 있었다.

이어 틴은 자신이 휴대한 장비들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진열해놓았다. 바랜 색 때문인지 지휘관들을 대하는 마르크의 표정은 어려워 보였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이처럼 상당수가 쓰던 물건이라…….”

“쓰던 물건이면 어떻소? 상태가 이 정도로 양호하면 되었지. 하루만 써도 헌 물건 취급받는 것을.”

검을 집어 날을 차근히 쓸어보던 지휘관의 감탄 섞인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마르크가 보인 병장기들은 중고치고는 꽤 쓸 만한 것들이었다.

딴에는 비용이 걱정도 되었던지 턱을 괴고 물품들을 보던 지휘관이 넌지시 물었다.

“이것들은 모두 얼마요?”

“검은 개당 사 실버입니다. 각궁도 사 실버, 메이스 육 실버, 아니 마법 지팡이 빼고는 모두 사 실버에 드리겠습니다. 부위별 방어구 또한 그 가격에서 크게 어긋나진 않을 것입니다.”

지휘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4실버라면 거저가 아닌가.

검 한 자루만 하더라도 1골드를 호가하는 물건들이 수두룩하다. 한데, 그 가격을 부르니 도리어 지휘관들은 당황스러웠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보며 질문을 퍼부었다.

“중고라지만 너무 싸게 받는 거 아니오?”

“내 아는 고물상에 떠넘겨도 비슷한 가격이 될 텐데…….”

반응이 저러니 마르크도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품었다.

‘너무 싸게 불렀나? 에이, 뭐 어때. 오딘 님한테 더 싸게 얻은 물건들인데…….’

오딘의 부하들은 드워프들과 장인들에게 새 무기와 방어구를 지급받아 예전 물건들이 소용없게 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서 남아돌 무기들을 처리하려면 수급이 빨라야 했다. 언제까지고 창고에 보관해둘 수 없다는 얘기다.

그래도 아레인과 적잖은 친분이 있고, 협력하는 곳이 이스론이라는 말을 들었던 탓에 가르텐 백작은 상대에 대한 걱정을 들추어냈다.

“부상단주, 우린 그 정도로 가난하지 않으니 조금 올려도 상관없소. 저 정도 양호한 상태면 보관을 해두었다 구매자가 나타날 때 팔아도 두세 배는 넘게 받을 거요.”

마르크는 양손바닥을 교차해서 저었다.

“아닙니다. 비싸게 팔았다는 게 알려지면 오딘 님께 쓴소리를 들을 겁니다. 애초에 싸게 받은 물건이니 싸게 드리는 겁니다.”

또 그 이름이 거론되었다.

과거와 다르게 이제는 오딘이란 이름을 모르는 지휘관이 없었다.

뭔가 신비스런 존재, 대단한 힘과 위엄을 가진 사람, 그러면서도 로만과 자신들의 공국에 힘을 보태주는 고마운 사람이 그였다.

“허, 허허… 이 와중에도 그분이 계속 우리를 도와주시는구려.”

이미 제국과 신성 제국이 연합해 아레인을 몰아붙인다는 소문이 자자한 상태였다. 그러니 지금처럼 일부 세력을 빼간 것에 누구도 원망을 않는 것이다.

“이럴 게 아니라 병장기나 구경하러 갑시다.”

마르크 일행을 따라 지휘관들은 우르르 몰려나왔다.

수레 위에서 내린 물건들은 틀림없었다.

마르크 일행은 몇 번이고 ‘고맙다’, ‘앞으로 이스론의 물건을 애용하겠다’는 소리까지 듣고서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어 가르텐 백작과 함께 무리 안을 빠져나왔다.

함께 걸음을 옮기며 가르텐은 각오 서린 말을 내뱉었다.

“이 전투, 기필코 승리해야겠소. 향후 이스론과 좋은 인연을 맺으려면…….”

마르크는 기꺼이 웃었다.

“꼭 그래주십시오.”

가르텐의 배웅을 받으며 마르크가 외곽으로 빠져나왔을 때는 정체불명의 무리가 앞쪽에서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러나 너무 먼 거리라 저들의 얼굴까지 식별이 가능하지는 않았다.

[클클, 꼬마야, 오랜만이구나.]

통신 마법으로 누군가 마르크의 뇌리에 의사를 전했다.

“누, 누구……?”

서로가 서로를 향해 나아가니 오래지 않아 둘은 맞닥뜨릴 수 있었다.

낯이 익은 사람들이었다.

언젠가 마르크의 나귀를 잡고 실랑이를 벌였던 농부들이 그들이었다.

예사로운 사람들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니 마르크가 대하는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어르신들께서는…….”

한 농부에게서 나온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쩝, 조용히 살려고만 하면 이 난리들이니…….”

노인이 빙긋이 웃고서 마르크의 얼굴에 가득한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우린 네가 지나쳐 온 다섯 공국들을 돕기 위해 가는 거란다.”

“의무죠, 의무.”

그동안 다섯 공국들의 공왕들이 전장에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데 대하여 지휘관들의 불만은 많이도 쌓여 있었다. 그러나 그간 공왕들은 이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 정성을 퍼붓고 있었던 것이다.

다섯 공국이 가진 비밀 병기란 이들을 일컬음이었다.

공국들이 신성 제국에 굴하지 않고 큰소리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들이 배경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의 일은 아니었지만 마르크는 기뻐 마지않았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이스론 상단의 부상단주 마르크입니다.”

물건을 팔자고 하는 것도, 지위를 자랑하고자 함도 아니었다.

농부들 또한 이를 트집 잡지는 않았다. 다만, 개중 턱수염이 수북한 이가 손바닥만 한 빵을 게걸스럽게 먹다가 비죽거렸다.

“뭐야? 상단 광고하는 거야? 우린 돈 없어.”

그때와 마찬가지로 마르크는 당황한 기색을 띠었다.

“아, 아닙니다.”

그 모습을 즐기기라도 하는지 농부들은 왁자지껄 웃음을 터뜨렸다.

또 한 농부가 마르크와 헤르미온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둘은 혼인한 사인가?”

“아, 아닙니다. 얘는…….”

“그럼 사귀는 모양이군.”

헤르미온이 그를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멋대로 추측하지 말아요!”

“아니면 아니지, 뭘 그리 성을 내시나? 좋아하긴 하는 모양이군.”

여러모로 짓궂은 농부들이었다.

헤르미온도 더 상대하기 싫었던지 고개를 홱 돌렸다.

이 중에서 가장 연로한 노인이 미소만 짓다가 가만히 입을 뗐다.

“그만 가지.”

“네.”

그때나 지금이나 노인의 말은 이들에게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마르크는 멀어지려는 그들의 뒤에 대고 허리를 숙이다가 잘 가시라는 말을 차마 못했다. 노인의 입이 열리는 게 먼저였기 때문이다.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으매 노인의 목소리는 지근거리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생생히 들렸다.

“참, 아레인에 자네 친구가 있지? 그에게 조심하라고 이르게. 마도사탑에서 그의 생명을 노린다고 말이야.”

마르크가 소리쳐 물었다.

“제, 제라드 장로님 말입니까?”

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 말고, 자네처럼 구릿빛 피부를 지닌 흑발의 사내. 오딘이라고 했던가?”

질문을 받은 농부가 바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마르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떻게 저들이 오딘을 알고 있으며, 그들을 노리는 세력까지 안단 말인가.

“저 어르신…….”

이 점을 묻고자 입을 열었지만, 어느새 그들은 멀어지고 있었다. 마치 유령처럼 말이다.

* * *

바야흐로 추수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모작을 하는 아레인이었지만, 이번 추수는 제대로 이뤄질 수가 없었다. 사방으로 불길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일반 백성들의 피해란 미비하기 그지없었다.

백성들은 인근 영주들의 성으로 숨어들어 유난히 빈집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바리톤도 마찬가지였다.

전투는 아레인과 바리톤 두 곳 모두에서 치러지는 중이었다. 바리톤은 신성 제국 관할이었고, 아레인은 제국 관할이었다.

펄럭이는 거대한 깃발들 사이로 수천의 기병들과 마법사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단체, 그리고 저들이 자랑하는 최강의 기사단이 한데 모여 그 위용을 자랑했다. 장창병들을 포함한 보병까지 합한다면 족히 7만에 이를 정도의 대군이었다.

먼 언덕에서 그런 제국의 군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있었다.

“장엄할 정도군.”

“황공하오나 대제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옵니까?”

과연 미리 말을 내뱉은 이는 로이센 대제였으며, 질문을 하는 이는 그의 수족과도 다름없는 아들러 총기사단장이었다.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아들러의 목 언저리에 선명하게 찍힌 붉은색 베누스의 낙인이 엿보였다.

“뭘 묻는 거지?”

“이 전투 말이옵니다. 만에 하나 아레인이 패한다면 그 화살이 저희에게 돌아올 것 같아서 말이옵니다.”

로이센은 넉살 좋게 미소 지었다.

“두려운가 보지?”

“꼭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그럼 우리가 아레인을 돕는 게 어떻겠냐고 묻는 것 같군.”

아들러는 말을 아꼈다. 대제의 의중이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로이센도 빙 말을 돌렸다.

“황제가 나설 줄은 몰랐어. 황자가 그렇게 간언을 올려도 귀를 막았었다고 들었는데…….”

“가리온 상단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 가리온 때문이겠지. 이스론이 아레인의 힘을 빌려서 상단의 질서를 휘 뒤집어놓았으니, 가리온으로서는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겠지. 돈이 무섭긴 무섭군.”

아들러도 동감하는 표정이었다.

다시 로이센이 물었다.

“아레인의 전력은 알아보았나?”

“그렇사옵니다. 총 다섯 개의 단체가 아레인을 지탱하는 기둥이라 하옵니다. 단, 한 단체가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한 단체?”

“예. 저들끼리도 말을 아끼는 것인지, 아니면 저들조차 모르는 것인지 모르겠사옵니다.”

“베일에 싸여 있다? 궁금해지는군. 그들을 제외하면 어느 쪽이 유리하지?”

“실력 면으로 비추어볼 땐 개개인이 비슷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근래 제국은 영초를 습득했고, 또 수가 더 많습니다. 솔직히는 가망이 없다고 사료됩니다.”

“그래도 우리가 힘을 실어준다면 할 만한 전투가 되겠지?”

“대제께서 황제를 맡아주신다는 전제라면 그렇습니다. 다만, 이는 제국에만 해당하는 사항이 될 것이옵니다.”

로이센의 이맛살이 제멋대로 구겨졌다.

“신성 제국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사옵니다.”

“간단한 문제는 아니군. 왜 아레인은 저렇게 큰 사고를 친 거지?”

말하는 게 도대체 뭘 믿고 저런 일을 벌였는지 궁금해하는 투였다.

아들러가 가벼운 웃음을 떠올렸다.

‘어쩌면 대제께서도 그러셨을 겁니다.’

그가 알던 로이센은 전후 사정도 보지 않고 일을 저질러놓는 인물이었다. 그 점에서는 오딘과 상당히 많이 닮아 있었다.

신흥 제국을 일으킨 건 전적으로 그랜드마스터 로이센의 가공할 무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대륙의 3대 기사단 중 하나인 베누스는 로이센이 양성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었다.

“참 그건 그렇고, 광인의 행방은?”

전에 로이센이 내렸던 명령이었다.

브란트에서 광인에게 습격을 당해 3명의 베누스 기사들이 죽어나갔다.

복수를 차일피일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 자리에서 행방을 추적하라 했는데, 얼마 전까지도 이는 깜깜무소식이었다.

지금 대답도 그러했다.

“아직도 묘연합니다.”

로이센이 찾는 광인은 지하 석실에 감금되어 있으니 찾을 리 만무했다.

“괘씸한 놈. 그때 잡았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뭐 하겠는가.

그래도 로이센은 두고두고 잊지 않을 것이었다. 만약 때가 오면 그놈을 제 손으로 요절낼 작정이었다.

돌연 후광이 일었다. 뒤쪽의 마법진에서 내는 빛이었다.

중년의 마법사가 다가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서 아뢰었다.

“대제님을 뵈옵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나?”

로이센의 질문에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바로 보셨습니다.”

“호오, 이번은 무슨 정보지?”

“마도사탑에서 움직였다고 합니다.”

“마도사탑?”

되묻는 로이센의 눈이 조금 커졌으며, 아들러도 커진 눈으로 마법사를 직시했다.

“그렇사옵니다. 아무래도 이 전투… 제국 쪽의 승리로 끝이 날 듯합니다.”

“제국에 붙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마도사탑은 마법의 총본산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신성 마법과 백마법 등을 제외한 것이라고들 하지만, 그와 비슷한 효과를 가지는 마법들은 수두룩했다.

항간엔 언젠가 저들이 대륙의 패자로 군림할지 모른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기에 로이센은 이맛살을 구겼다.

“까다롭게 됐군. 그놈들은 싫은데… 쩝.”

아들러가 다그치듯 물었다.

“왜 그 녀석들이 마도사탑 밖으로 나온 것이냐?”

“아마도 저들은 구실을 찾았던 듯합니다. 음지가 아닌 양지로 나올 구실 말입니다.”

두 사람은 마법사의 답이 맞을 것이라 생각했다.

“평소에 배척하던 이들을 가까이할 정도로 아레인이 위험한가?”

“그것과는 별개인 듯합니다. 저들을 데리고 있는 것은 타츠만 황자라 하옵니다.”

골치 아픈 문제에 직면한 로이센은 무릎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인물 났군, 인물 났어.”

좀 전까지만 해도 여유를 찾아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마도사탑 얘기가 나온 후로 로이센의 얼굴에서 그 여유는 사라졌다. 그들이 정말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얘기이리라.

아들러는 사태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

‘가뜩이나 마법사가 부족한 판국에 큰일이군.’

이제는 도와주고 싶어도 내키지 않을 상황에까지 이르렀다는 얘기다.

답답한 나머지 로이센의 입에서 당사자가 들었다면 싫을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와중에 군대를 두 패로 나누다니, 도대체 오딘이란 놈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정확히는 세 패입니다.”

“세 패?”

“바리톤에 보낸 병력 외에 로만 연합에도 일부 잔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로이센은 어처구니가 없어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배포 하나는 정말 끝장이구나. 갑자기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드는걸.”

결국 로이센에게서 결단이 내려졌다.

“일단은 아레인에 청해야겠어. 오딘을 찾아봐. 지금으로선 달리 방법도 없으니…….”

* * *

상황이 점점 힘들어져 가고 있는데도 오딘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공백을 메우는 건 네 단체. 즉, 음영대와 질풍대, 그리고 흑풍단과 철왕대였다.

처음 흑풍단과 철왕대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안이하게 대처했던 제국과 신성 제국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그도 몇 차례일 뿐이었다.

라이벤 대신관은 이 전쟁이 간단히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직시하고 비센 추기경에게 청을 올렸다.

아무리 비센이 여자에 눈이 멀었다고는 하나 최측근인 라이벤의 말을 묵살하지는 않았다. 그는 주저 없이 후발 부대를 편성하여 바리톤에 내려보냈다.

황성에 잔류하는 고위 사제들과 템플 기사들보다 이곳에 나온 이들이 많았으니, 신성 제국은 그야말로 전력을 투입한 것이다.

좌우로 즐비한 시신들 사이를 라이벤이 뒷짐을 진 채 걷고 있었다.

“문제로군.”

뒤를 따르던 고위 사제가 이에 동의하며 염려 섞인 말을 꺼냈다.

“그렇습니다. 주요 거점을 공략하지 못하는 한 이 같은 게릴라는 계속될 것 같습니다.”

게릴라식 전투는 바리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당연한 것이었다. 수가 적고 군대의 질이 떨어지니 달리 선택의 기로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황성으로 쳐들어갈 리는 없겠지?”

“물론입니다. 이곳 말고도 사방으로 병력이 깔려 있어 저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만일 저들이 저희 수도로 향한다면 발 빠르게 바리톤을 점령하고 추격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얼굴에서는 여유가 넘쳤다.

이미 신성 제국이 바리톤의 다섯 성을 무너뜨리거나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바리톤을 손에 넣는 건 시간문제라는 소리였다.

고위 사제가 말을 이었다.

“아쉽게 되었습니다. 그때 세 왕자를 손에 넣었다면 쉽게 끝날 전투였으니 말입니다.”

“그랬겠군.”

“복면인만 아니었어도…….”

“그자의 실력이 그렇게 뛰어났었나?”

“듣기로는 두 왕자가 레고타 후작의 베르무트성으로 향할 수 있었던 데에 그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소드마스터임은 이미 입증이 된 상태입니다.”

문득 라이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군소 왕국 하나 취하자고 이렇게 많은 희생자를 내다니… 손해도 너무 손해로군.’

속된 말로 무척이나 끈질긴 녀석들이었다.

이미 전쟁의 승패가 갈렸거늘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이렇게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향후 바리톤에게 전쟁 보상을 받아낸다 해도 손해를 메울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때려치우고 싶은데…….’

정말이지 별 득이 될 것이 없는 전투였다.

그렇다고 아레인의 여왕이 대놓고 신성 제국을 깔아뭉갠 일을 등한시할 수도 없었다.

“우리가 지금 전력을 기울일 쪽이 베르무트성이라 하였나?”

“그렇습니다. 그곳만 손에 넣는다면 차후의 전투는 손쉽게 풀릴 것입니다.”

“속단은 이르다. 최후까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저번 같은 경우를 당하지 않으려면…….”

“죄송합니다.”

돌연 두부를 자른 듯 반듯하게 잘린 기사의 상하반신이 라이벤의 눈을 사로잡았다.

“흐음, 오러 블레이드에 잘려 나간 것 같군. 아레인 기사의 소행인가?”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아레인의 개입만 없었어도 지금쯤 끝날 전투였겠지?”

“물론입니다. 바리톤이 똘똘 뭉쳤다 하더라도 크게 두각을 드러낸 존재는 없었습니다. 파헤쳐 보면 뛰어난 자들은 죄다 아레인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쩝, 아레인과 무슨 원수를 졌다고…….’

객관적인 입장으로 보았을 때 아레인 왕국은 별로 대단하진 않았다. 그런 왕국에 이렇게 고전을 면치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저들은 개개인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하나로 똘똘 뭉쳐 있다. 그 구심점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 마주한 사람의 마음을 앗는다는 여왕? 아니면 제국의 황자가 말한 오딘?’

주위 어느 곳에서도 속 시원한 답변을 들려준 사람은 없었다.

바리톤의 일 왕자 헥토르를 회유했을 때 아레인에 대해 더 캐물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죽었으니 다른 대상을 찾아야 한다.

‘접자. 실마리는 언제고 풀어질 것이다. 당장 풀리지 않는 의문에 매달려 있어봐야 하나 좋을 것 없다.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줄 터이니.’

부우우우우우우-!

뿔 나팔 소리가 중후하게 울려 퍼졌다. 시작을 알리는 의미였다.

흩어져 있던 병력들이 집결하며 전열이 정비되었다.

막스마라 대신관의 눈이 멀리 있을 베르무트성을 향했다.

‘우리 신성 제국에 주신 아스카론 님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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