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우애
바리톤은 뜻밖의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내부에 협력자가 있다.’
이는 로테노아를 포함해 대다수의 귀족들이 가지는 생각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신성 제국이라 하여도 손쉽게 무너질 성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루 만에 백기를 드는 곳도 있었으며, 함락된 성들의 영주들은 하나같이 실종되었다.
공국 내의 사정을 잘 아는 내부 인물이 협력함이 아니라면 이해가 가질 않는 일이어서 로테노아의 배신감은 극에 달했다.
바리톤의 세 왕자들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직접 왕명을 받은 그들은 각자의 세력을 이끌고 배신자 찾기에 골몰했다.
다른 때였다면 몰라도 공국의 존망이 걸린 때라 왕자들은 서로가 협심했고, 이 중에서도 유프라와 팔테스의 연계가 두드러졌다.
팔테스가 가죽 병에 든 물로 목을 축이며 투덜거렸다.
“이런 때도 공 세우기에 안달이 나 있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그래도 큰형님이다. 형님 또한 열심이신데 너무 몰아세울 건 아니라고 본다.”
“형님은 그래서 틀린 겁니다. 아바마마께서 누차 얘기하셨지 않습니까. 유약함은 판단력을 흐린다고…….”
둘째 형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는 해도 평소였다면 하지 않을 얘기였다. 왕세자 자리를 놓고 싸우는 판에 뭐 하러 충고를 해주겠는가.
듣기 싫은 소리일 수 있음에도 유프라는 동생의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반반한 얼굴에 어울릴 만한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이만큼이나 가까워졌구나.’
내우외환이 있고 나서부터였다. 나라 안팎으로 어려워지니 사그라졌던 우애가 드러났음이다.
어쩌면 작금의 사태는 두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될는지도 모른다.
유프라는 아쉬워했다. 이 자리에 맏형 헥토르가 없다는 것을…….
모처럼 동생을 보는 유프라의 시선이 자애로워졌다. 미운 정에 고운 정까지 쌓이고 있으니 기쁘기 한량없었다.
‘내 너를 위해서라면 왕세자의 자리를 양보할 생각도 있다.’
반면 팔테스는 유프라에게서 아무런 답변이 들려오지 않자 혹 상처를 받았을까 하는 미안함이 앞섰다.
“거, 너무 새겨듣지 마십쇼. 동생이 위해서 한 말이니까.”
“아니다, 내 새겨들으마. 이 자리에서 자인하마. 내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너무 등한시했던 것 같다.”
형의 깊은 속내는 보지 못했지만, 팔테스 역시 그에서 모종의 형제애를 느꼈던지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 또한 너무 투정과 어리광을 부렸다.’
둘의 이런 모습은 그들을 따르는 기사들에게까지 남다른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두 분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구나.’
‘진즉에 두 분이 이런 모습을 보이셨다면 우리가 티격태격할 이유도 없었을 텐데…….’
본의 아니게 양측의 기사들은 서로를 적대시했었다.
당연한 이치였다. 주군을 받들고, 그들의 손발이 되어 뜻을 따르는 게 기사들이었으니까.
묵은 미움을 삭이고, 누그러지는 감정들은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급작스러운 변화는 반감을 불러오는 법.
갑자기 민망한 분위기가 되어버려 두 형제는 서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숲을 훑었다. 어색함을 떨치기 위해서였다.
둘 모두 창피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유프라는 형이라서 그런지 더 넓은 마음을 품었다.
“팔테스, 이 숲에 왔던 기억나? 너무 어렸나?”
유프라의 목청을 비집고 새어나온 시원한 목소리는 어색함마저 환기시켜 주는 듯했다.
“너무 애 취급하지 말아주십시오. 누가 어렸답니까. 다 기억납니다. 형님이 제 손을 끌고 오셨었지요.”
떽떽거리는 목소리였지만 유프라는 흡족히 웃었다.
자신이 그때 잡았던 팔테스의 손은 조막만 했다. 그 자그마한 아이가 이렇게 커서 어른이 되었으니 기특할 뿐이었다.
태도는 야멸쳤지만, 정작 팔테스는 형이 가리킨 숲을 요목조목 둘러보며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 숲은 변한 게 없군요.”
“자라기는 했지. 너와 나처럼…….”
뭔가 깨달은 게 있었다.
팔테스는 뒤따르는 기사들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유프라의 손을 덥석 잡았다.
“형님.”
말은 짧았지만, 그 어조에는 자신만 생각하고 제멋대로 군 것에 대한 미안함이 숨어 있었다.
돌이켜 보면 유프라는 제자리 같았다.
차마 미안하다는 말을 못했음에도 유프라는 동생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던지 그에 걸맞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래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게 있었다. 이는 두 사람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다 양보해도 그녀는 안 된다.’
엘레느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마음이 아직 식지 않았음이다.
심정이 같았던 나머지 너 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돌렸는데, 그 순간 앞쪽에서 빛이 일렁였다.
공간 이동 마법진이었다.
밤이어서 그런지 마법진의 문양은 유독 밝은 빛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그 빛이 사그라질 때쯤, 유프라와 팔테스는 그 위에 한 남자가 올라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신성 제국의 고위 사제에게나 허용되는 백의 로브를 입은 채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무려 십오 보 정도쯤 떨어진 거리였다.
인기척을 느꼈을까. 불쑥 그가 몸을 돌렸다.
그러나 동작이 이루어지기 전, 유프라가 기민하게 팔테스의 어깨를 누르며 함께 몸을 낮췄다.
간발의 차이였다.
덕분에 그자의 눈에 두 사람은 발각되지 않고 그를 더 살필 수 있었다.
눈치는 있었던지 팔테스는 제법 목소리를 낮췄다.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요?”
“글쎄, 봐야겠지.”
오래지 않아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목격하는 순간, 팔테스와 유프라는 놀라 까무러치는 줄만 알았다.
분명 그는 자신들의 맏형인 헥토르였다.
유프라는 반신반의하는 데 반해 팔테스는 벌써부터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었다.
당장 일어서 달려가려는 팔테스의 어깨를 유프라의 손이 짓눌렀다. 진중하게 조금 더 지켜보길 원하는 것이다.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팔테스는 유프라를 째려보았고, 그 바람에 볼살이 푸르르 떨릴 정도였다.
로브를 걸친 신성 제국의 인물을 대하는 헥토르의 표정은 간신배의 그것과 진배없었다.
“오래 기다리셨는지요?”
“하하하! 덕분에 수고로움을 덜었습니다.”
더 두고 볼 것도 없었다.
팔테스는 유프라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치고는 저들이 있는 돌무더기를 향해 냅다 달려갔다.
“형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헥토르는 꽤나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 아니, 네가 어떻게…….”
“배신자는 형님이었습니까?”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에 팔테스는 버럭버럭 소리를 치고 있었다.
헥토르는 낯빛을 바꾸며 그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하하, 오해다, 오해…….”
“오해는 무슨 오해란 말입니까?”
분명히 조금 전엔 놀랐던 기색이었다. 유프라가 이를 주시하고 있었던 데 반해, 팔테스는 헥토르의 감언이설에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이분은 우릴 도와주시는 분이다. 요 근래 붙잡혔던 귀족들이 풀려나 돌아왔다는 얘기는 너도 들었지?”
모를 리 없었다. 덕분에 로테노아를 포함한 바리톤의 중신들은 누군가 자신들을 돕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정말입니까?”
그제야 당황했던 고위 사제의 표정도 바뀌었다.
“비밀로 하고자 했는데, 저희가 협조했다는 사실을 꼭 알려야 합니까?”
유프라는 경각심을 늦추지 않았다.
‘거짓.’
조금 전 고위 사제의 지팡이에 마나가 뭉쳐 들었다. 그를 놓칠 유프라가 아니었다.
달리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떨어져라.”
유프라의 말에 팔테스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예? 형님, 왜요?”
팔테스가 다칠까 걱정이 되었던 나머지 유프라의 입에선 매몰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떨어지란 말이다!”
엉거주춤 떨어지는 팔테스를 보며, 헥토르는 유프라를 설득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우, 왜 그래?”
몇 걸음을 다가가 보았지만, 헥토르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동생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만큼 지독한 살의가 담긴 유프라의 눈초리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형님, 이러실 줄은 몰랐습니다.”
오싹한 기분이 들게 하는 차디찬 목소리였다.
“뭐, 뭐가?”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헥토르의 눈이 경계의 빛을 띠었다. 유프라의 호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좋든 싫든 형님은 바리톤의 왕자입니다. 형님 일신의 영달을 위해 모두를 팔아넘길 생각이었습니까?”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헥토르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날 몰아세우고 왕세자가 되려는 속셈이냐?”
“끝까지 인정하시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뉘우칠 생각은 정녕 없습니까?”
슬픈 생각이 들었던지 유프라의 눈시울은 금세 촉촉해졌다.
아무리 형제끼리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고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탓이다.
이즈음 다른 인기척이 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둘의 목소리가 워낙 컸던 탓에 기사들은 이를 사전에 숙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팔테스조차 얼빠진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을 뿐 향후 닥칠 어려움은 계산하지 못했다.
모습을 드러낸 인원은 10여 명이었다.
“마침 잘 왔다. 어서 와라.”
이제까지 분위기만을 살피던 고위 사제가 내심 반기며 하는 말이었다.
팔테스와 유프라, 그리고 그들이 거느린 기사를 합한다 해도 이들에 비해 수가 달렸다.
의외롭게도 헥토르가 했던 말을 부정하는 것은 고위 사제였다.
“일 왕자, 이들을 데려갑시다. 두 왕자 분들을 인질로 삼으면 이 의미 없는 항전도 끝나지 않겠습니까?”
썩 좋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헥토르는 그 말에 찬성하고 나섰다.
“이렇게 된 이상 별수 없지요.”
먼저 폭발한 건 팔테스였다.
팔테스는 일갈을 지르며 당장에 빼든 검으로 헥토르의 목을 겨눴다.
“이 짐승보다 못한 놈아!”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검은 헥토르에게 닿을 수 없었다.
고위 사제가 미처 방비를 못한 헥토르를 대신해 급히 실드를 쳐주었기 때문이다.
콰창!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줄만 알았던지 헥토르는 식겁한 얼굴로 팔테스를 나무랐다.
“너 이 녀석, 형을 죽이기라도 할 생각이냐?”
“형이라고 하지 마! 네놈은 형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어!”
팔테스의 눈이라고 유프라와 다르진 않았다.
언제부터 흘렀는지 모를 눈물이 뺨을 적셨다.
그러나 두 아우의 눈물에도 헥토르의 냉한 가슴은 변함이 없었다.
신성 제국의 무리들이 위협이 되어 다가오는 것을 보며 바리톤의 기사들도 저마다 검을 빼어들었다.
“기사들을 물리치고 두 왕자를 포박하라.”
“왕자이기를 포기한 배신자다. 반항한다면 즉살해도 좋다.”
뒷말은 팔테스의 입에서 나왔다.
얼룩진 이 가슴을 억누르거나 진정시키려면, 우선 저들을 제압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내뱉은 명령이었다.
두 무리 간에 난전이 벌어졌다.
숲을 울리는 병장기 소리들이 메아리쳐서 되돌아왔다.
하나, 상대는 바리톤의 기사들에게는 무리한 상대였다. 두 무리 간에 실력 차이가 극명하게 엇갈릴 정도였다.
한 가지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리지를 않는다는 것!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비약할 정도의 성장을 보인 유프라의 검술이 그 까닭이었다.
다소 떨어진 거리에서 야전을 지켜보던 고위 사제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아까운 인물이다. 바리톤에 저런 인재가 있었다니…….’
공을 들여서라도 될 수 있다면 포섭하고 싶었다. 해서 그는 자신의 패거리들에게 더한 당부를 주었다.
“인질로 삼아야 하니 왕자들의 목숨을 해쳐서는 안 된다.”
가뜩이나 우위를 점하기 힘든 판국에 조건을 달게 되니, 이는 불리함으로 작용하여 자연히 전투는 혼전 양상을 띠어갔다.
유프라의 실력은 가히 발군이었다.
흙속에서 빛을 발하는 진주처럼 대단했던지라 보는 고위 사제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천재다. 만약 저 왕자가 제대로 된 스승 밑에서 검술을 익혔다면 지금보다 더한 실력자가 되어 있었겠지.’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치질 않는 유프라의 체력 때문에 신성 제국의 성기사들은 수세에 몰리기까지 한 것이다.
그를 죽인다는 전제를 붙인다면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하여, 고위 신관은 자신의 결정을 번복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리고 기어이 조용하기만 하던 사제의 지팡이에 신성력이 응집되고 있었다. 악화되어가는 사태를 파훼하려 유프라를 해하려고 각오했음이다.
밤하늘을 환히 비추는 빛 덩어리가 한 생명을 집어삼킬 듯 장엄한 위엄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사이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실력이 뛰어난 왕자가 전세를 뒤바꿔놓았던 탓에 막내로 보이는 왕자가 여유를 되찾고 죽일 듯 헥토르를 뒤쫓기 시작한 것이다.
“바리톤을 대신해 네놈을 심판하겠다!”
눈이 뒤집힌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맏형에 대한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자랐던 까닭이었다.
이 변화는 사제에게 기대 심리를 부추겼다.
헥토르의 주변엔 실력이 쟁쟁한 성기사가 둘씩이나 지근해 있었다. 자신이 손을 쓸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지팡이의 상단부에 응집된 기운은 웅웅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무를 뿐이었다.
이번에도 허둥대며 팔테스의 검을 피한 후, 헥토르는 잘잘못을 따졌다. 적어도 막내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내가 왜 너한테까지 그런 말을 들어야 하냐?”
“그 더러운 입 놀리지 마라, 네놈은 형이기를 포기했다! 모두를 내모는 배신자일 뿐!”
형이기를 포기했다는 부분은 다툴 때마다 곧잘 들었던 얘기이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심금을 울리면서 귀에 닿을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팔테스의 말은 진실이었으리라.
헥토르의 허리를 찔러가던 검은 목적을 달성할 것만 같았다. 뒤로 물러서다 돌부리에 걸려 몸의 균형을 찾느라 헥토르가 잠시 둔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팔테스의 검은 그의 신체와 이격된 채 멈추고 말았다. 2개의 검이 팔테스의 목 언저리로 아가리를 벌린 뱀처럼 다가와서였다.
“왕자, 검을 버리는 게 좋지 않겠소? 저분께서 죽이지 않겠다고 공헌했었지만,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이 점 유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더 이상의 강요가 필요치 않았다. 고위 사제가 다가와 그의 손에서 검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머물렀다.
사제는 이 상황이 더 지속되고 나아가 주도권을 쥐길 바랐다. 해서 그는 유프라를 향해 항복을 종용했다.
“경이로울 지경이로군요. 빼어난 실력은 충분히 보았으니 왕자께서도 이만 검을 놓으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간교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유프라의 동공이 꺼질 듯 어두워지더니 땅바닥에서 이내 쇳소리가 울렸다.
딸캉.
검을 놓았음이다.
바리톤의 기사들이 한목소리가 되어 성토했다. 유프라의 속단이 그들에겐 응어리져서 목을 메이게 했다.
“저, 전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프라의 목소리는 매몰차기 그지없었다.
“더 이상의 전투는 금한다.”
팔테스가 격정을 누르지 못하고 크게 소리쳤다.
“형님!”
지금 그의 동공에 박힌 유프라에게 형다운 기개는 없었다.
동생의 눈을 마주하는 게 힘들었던지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그를 보며 팔테스는 악에 받친 소리를 질러댔다.
“또 그 유약함! 작은 형님은 바보입니까? 형님마저 무릎을 꿇는다면 우리 바리톤은 누가 짊어집니까? 아바마마께서 퍽이나 좋아하시겠습니다!”
잠시 후, 유프라의 입술을 비집고 나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말이 맞다. 난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바보로구나. 미안하다. 널 잃는 것은 볼 수가 없었다.”
말을 듣는 즉시, 팔테스의 눈에는 그렁그렁한 눈물이 차버렸다.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에 그는 울면서 말했다.
“나 하나면 되잖습니까. 내가 희생하면 되었는데, 왜… 왜!”
세상이 미치도록 싫었다.
그 원인은 헥토르와 자신에게 있었다.
유프라에게 짐이 되었다는 생각에 감정은 점점 더 격해져만 갔다.
돌연 팔테스의 시선이 목 언저리를 위협하는 2자루의 검에 머물렀다.
‘아직 늦지 않았다. 어쩌면 내 죽음이 바리톤에 희망을 안겨 줄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여태의 삶에 대한 희비가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개중 유프라와 싸웠던 기억도 떠올랐는지 팔테스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래도 형님에 대한 미움은 가지지 말자.’
단 한 가지! 의 기억에 머물며 팔테스의 움직임은 경직되었다. 이 기억은 되도록이면 하지 않으려던 것이었다. 생애 가장 끔찍했던 순간을 누가 떠올리고 싶겠는가.
하지만 소리 없이 뒤쪽에 드러난 복면을 쓴 인영이 입가에 떠올린 웃음은 어쩐지 그의 그것과 매우 닮아 보였다. 소름 끼치는 그 웃음이 떠올리기 싫었던 과거까지 떠올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서, 설마…….’
겁도 없이 무리 한가운데로 다가서는 발걸음.
묵묵히 쥔 검으로 팔테스의 목을 겨누던 성기사가 그 소리를 들었던지 위엄찬 목소리를 냈다.
“웬 놈이냐?”
복면의 주인은 질문을 묵살해버리고는 계속해서 다가왔다.
발소리가 등 뒤로 바짝 다가섰을 때, 기사는 확 돌아서며 날카로운 검끝을 인영의 가슴팍으로 들이밀었다.
피가 튈 것이라도 예상했을까.
주변인들이 눈살을 찌푸릴 무렵 인영이 가볍게 손을 놀렸다. 물 흐르듯 이동한 손등은 다분히 위협적이던 성기사의 검 면을 가볍게 쳐내었다.
돌연 회수된 인영의 손이 성기사의 복부에 와 닿으며 낮은 타박음이 흘렀다.
퍽.
어이없이 무마된 공격에 놀람으로 부릅떠지던 성기사의 눈이 실처럼 얇아졌다.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고통이라도 느끼는 자의 표정을 하고 성기사는 배를 움켜쥐며 신음 소리 한 번 내보지 못하고 꼬꾸라졌다.
그러나 동료의 부상에 겁을 집어먹은 성기사들은 없었다.
한 성기사에게선 성난 음성이 터졌다.
“네놈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이로구나!”
일말의 위협조차 느끼질 못하는지 복면인은 그 소리마저 흘려들었다.
그는 도리어 성기사들을 사냥이라도 하려는지 거리를 좁혀 왔다. 그러나 이를 가만히 놔둘 성기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리가 한뜻이 되어 움직였다. 일부는 자신의 몸과 동료의 몸에 신성 방어막을 펼쳤으며, 준비를 마친 일부는 복면인을 죽이려 대들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허공을 가르는 얕은 파공음들 뿐이었다.
휙! 휘익!
복면인의 움직임은 그리 빨라 보이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갈래에서 들어온 공격들은 그의 터럭 하나 건들질 못하고 있었다.
돌연 최초의 마찰이 일었다.
복면인의 일장이 신성 방어막을 뚫고 성기사의 몸에 들러붙은 것이다.
콰창!
신성력을 동원해 운집시킨 공기막이 깨어지는 모습은 유리창이 깨어지는 모습과 흡사했다.
복면인의 손과 발이 성기사들에게 달라붙을 때마다 그곳에선 비슷한 소음들이 일었다.
창! 카창!
성기사들은 땅에 발을 디딘 그대로 뒤로 죽 밀려나기 일쑤였으며, 허공으로 떠오르기도 하였다.
그로도 모자라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각혈까지 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성기사들이 빼어난 실력은 아니라지만, 바리톤에 온 신성 제국의 병력들을 통틀어 볼 때에 결코 녹록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명의 성기사들은 삽시간에 무릎을 꿇었다.
복면인은 한 성기사를 더 무력화시킨 뒤 다른 먹잇감을 쫓고 있었다.
돌연 그의 등 뒤에서 단말마가 울렸다.
“악!”
눈을 돌리니 바리톤의 한 기사가 심장을 찌른 성기사의 검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어이 사단이 벌어진 것이다.
그를 찌른 성기사는 뜨겁게 달아오르다가 차츰 식어가는 육신을 밀쳐 내고는, 미리 무장해제를 시킨 뒤 무릎을 꿇린 바리톤의 기사들을 두고 복면인에게 엄포를 놓았다.
“한 발자국이라도 옮겨 놓는다면 여기 있는 모두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복면인은 뒤쪽에 눈을 한 번 두었을 뿐 고개를 돌려 사냥을 계속하려 했다.
위협이 먹혀들지 않으니 당황하는 것은 성기사 자신이었다. 그를 대신해 고위 사제가 말을 덧붙였다.
“비명횡사하는 게 바리톤의 왕자라도 상관없나?”
정말 그럴 생각인지 고위 사제의 지팡이 상단부에서는 백색의 화염구가 팔테스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이글거렸다.
그제야 복면인의 움직임이 멈췄다. 하지만 입이 열리며 튀어나온 말은 정말 의외였다.
“거참, 시끄럽군.”
고위 사제의 귀에는 저자의 말이 바리톤의 왕자라도 죽이건 말건 개의치 않겠다는 뜻처럼 들렸다.
그럼 취미 삼아 사람 사냥이라도 나왔다는 말인가?
순간 멍해져 고위 사제의 사고는 일시적으로 경직되고 말았다. 굳어진 머리를 애써 다독이며 그는 다시금 생각을 거듭했다.
‘아니다. 저놈은 분명 이들과 연관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우리만 노린다는 말이냐…….’
바로 이때, 뜻하지 않게 헥토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인지 헥토르는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잔뜩 겁을 먹은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고위 사제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왜 그러시오? 아는 자요?”
헥토르의 떨리던 입에서 한 남자의 이름이 들렸다.
“오, 오딘…….”
다소 거리가 멀어진 성기사들을 쫓으려던 복면인은 움직임을 멈추고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사악한 음성이 그 입에서 튀어나왔다.
“너 이 녀석, 안 본 사이에 말이 많이 짧아졌구나.”
그 스스로 오딘임을 자인한 것이다.
파장은 일파만파 커져 갔다.
혹시 그가 오딘이 아닐까 긴가민가했던 팔테스나 유프라를 포함해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던 바리톤의 기사들에게는 두려움과 의문이 교차했다.
바리톤에 알려진 바로는 오딘은 워낙 괴짜였다.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기 일쑤였으며, 가신들이 보는 앞에서 바리톤의 왕자들을 괴롭히거나 면박을 주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공왕 로테노아를 여러 중신들이 보는 앞에서 시시때때로 꾸짖기도 했다.
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던 작자가 자진해서 자신들을 돕는다는 것은 당최 믿기질 않는 일이었다.
‘그가 왜 여기에 온 것일까?’
‘이 와중에 욕구나 채워보려는 심산일까?’
욕구라는 것은 남을 괴롭히던 그의 취미 생활을 일컬음이었다.
하지만 기사들과 달리 유프라와 팔테스에게는 공통적으로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얼굴 없는 조력자는 혹시 그가 아니었을까?’
하나, 아직도 불분명해 보이는 태도는 그 의문에 확신을 심어주지 못했다.
비록 헥토르가 눈 밖에 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의 목숨까지 지켜 준다는 보장은 없다. 여태까지의 작태를 보면 오딘은 능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해서 유프라가 용기를 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우릴 도와주십시오. 그래주신다면 앞으로는 우러나는 마음으로 따르겠습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삼 왕자의 대답도 듣고 싶은지 오딘의 눈동자는 팔테스에게로 옮겨 갔다.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팔테스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당장 깨달았는지 팔테스 또한 유프라와 태도를 같이했다.
“저 또한 그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딘은 헥토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헥토르는 이 상황이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이 없다고 여겼다.
두 동생이 숙이는 모습은 그에게는 더없는 경각심만 불러일으켰고, 결국 그는 고위 사제의 소매를 붙들고 채근했다.
“어서 저자를 막아야만 하오.”
경황없는 헥토르의 행동에 고위 사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질문엔 속 시원히 대답해주지 않고 요청만 하고 있질 않은가.
‘바리톤의 왕자들을 질겁하게 만들 만한 위인이라……. 누굴까? 오딘이란 이름에 대해선 들은 적이 없는데…….’
이미 오딘이 공들이지 않고 성기사들을 무력화시켜 버리는 데에서 고위 사제는 놀래버렸다. 쉽게 쓰러트릴 것이란 기대는 일찌감치 접는 게 옳았다.
‘결코 섣부른 행동은 금물이다.’
어쨌거나 쓰러뜨리긴 해야 할 적! 고위 사제에게서 명령이 떨어졌다.
“저자를 포위해라.”
성기사들은 두려운 적을 앞에 두고 기가 죽은 상황이었기에 고위 사제는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줄 필요성을 느꼈다.
“신의 권능(Power Word)!”
희뿌연 빛이 성기사들의 보호막 안으로 스며들었다.
고위 사제의 신성 마법 덕분인지 성기사들은 대담해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먼저 다가서길 자청하는 이는 없어 조금 전과 비교해볼 때 오십보백보였다.
결국 고위 사제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뭣들 하는 것이냐! 당장 포위하라 하질 않았느냐!”
소리를 치고 나니 이상한 낌새가 들었다. 부근에 호흡을 곤란하게 할 무언가가 있었다.
왠지 모르게 소름이 훅 끼쳐 왔다. 사악한 기운이 주변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암흑 투기?’
풀풀 날리는 마기에 달리 형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위 사제는 그것을 암흑 투기라 단정 짓고 말았다.
그의 경각심은 극에 달했다.
괴로움을 견디다 못한 성기사들이 픽픽 쓰러졌다.
고위 사제마저 호흡이 가빠지다 못해 숨이 턱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성기사들에게 신의 가호를 캐스팅하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제 자신의 몸도 부지하기 힘들 상황에, 오딘과 비교적 멀리 있던 성기사의 둔기 하나가 허공을 날며 파공음을 흘렸다.
휘리리리릭!
둔기는 회전을 거듭하며 폭발적인 위력을 지닌 채 오딘의 허리를 바숴버릴 듯 날아드는 중이었다. 그것은 신성력까지 깃들었는지 희뿌연 빛까지 머금었다.
허리를 돌린 오딘이 둔기의 손잡이를 움켜쥐었을 때였다.
퍼펑!
둔기가 느닷없이 폭발을 일으키며 연기가 오딘을 감쌌지만, 고위 사제는 안도할 수 없었다.
‘살아 있다.’
더 생각해볼 것도 없이 그는 당장에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부지하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과연 고위 사제의 판단은 정확했다. 연기는 걷혀졌지만 오딘의 몸에는 일체의 부상도 없었으므로.
무리도 아니었다. 마법에 대해 간파한 상태에서 주의를 하고 있었으니, 폭발이 일어날 때 기를 응축시켜 손을 보호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오딘은 작정하고 도망치는 고위 사제에게 관심이 없었다. 뒤떨어진 곳에서 눈치를 살피며 도망치려는 헥토르에게만 있을 뿐.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헥토르는 재깍 몸을 돌렸다.
그러나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들어설 무렵 무엇인가와 부딪치며 둔탁한 소음을 일으켰다.
쿵!
사물의 구분이 어려울 시간이기도 했지만, 워낙 경황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머리가 부서질 듯한 통증에 헥토르는 자신과 부딪친 딱딱한 물체에 눈을 두었다.
얼핏 드러난 모양새로 볼 때는 사람이었다.
오딘이 뒤쫓아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헥토르는 손을 쓰지 않고 그를 지나치며 경고만을 내뱉었다.
“너 이 자식, 운 좋은 줄 알아라!”
그러나 채 두 발을 내디디기 전, 헥토르는 그에게 뒷덜미를 붙잡혔다.
공교롭게도 그는 아그리스였다.
* * *
바리톤의 베르무트성은 예로부터 군사 요충지였다.
부근엔 다가오는 적들에 대비해 은폐, 엄폐할 수 있는 곳들이 많았고 높은 성벽 덕분에 멀리까지 시야 확보가 가능했다.
성문과 성벽은 견고했으며 드넓은 터 덕분에 수만의 인파를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고전을 면치 못하는 중이었다.
소문은 박살이 난 지 오래였고, 열린 성문으로 신성 제국의 대군이 비집고 들어오려 했다. 당연히 아래서는 목숨을 건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기필코 성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각오에 베르무트성의 성주 레고타 후작은 목청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결단코 저놈들이 성으로 들어오게 하여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만 한다!”
성 위의 파수꾼들은 활을 쏘거나 돌을 굴리고, 뜨거운 물을 부어 성 아래 있는 적들을 공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조차도 버거운 일이었다. 아래에서 석궁이나 발리스타에 재어놓은 크기가 다른 화살들과 사제들에게서 발현된 화염구가 빗발치듯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측면을 공략하고 있는 공성 병기 캐터펄트는 명중률은 떨어졌지만 그 파괴력만은 가히 위력적이었다.
캐터펄트에서 날아든 바위가 성벽에 부딪치기라도 할 때면 지진이라도 난 듯 성이 다 들썩거렸다.
고위 사제들이 쳐 놓은 왜곡장에 의해 공간 이동 마법진은 효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외부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다는 얘기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간 것은 전적으로 헥토르 때문이었다.
1백의 병력을 이끌고 간 헥토르가 일부를 꾀어오겠다며 자정 무렵 성문을 열어놓고 자신을 도와달라고 귀띔을 해놓았던 것이다.
분명 앞에서는 1백의 병력과 그보다 많은 적과 난전이 벌어졌었다. 그러나 그를 돕기 위해 성문을 열고 나섰을 때, 후작의 기사단장은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들이 싸우는 것은 연극이었던 것이다.
뒤늦게 이를 간파한 기사단장이 병력을 물려 성문으로 다가왔을 땐 저들도 함께였다.
바리톤 마법사의 옷을 빼앗아 입은 신성 제국의 사제가 하늘로 쏘아올린 빛은 사방에 숨어 있던 무리들을 몰려들게 만들었다.
레고타 후작이나 그 기사단장은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했다.
일 왕자 헥토르가 자신들을 속인 것인지 아니면 저들에 붙들리거나 염탐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에 대한 미움이 씻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힘에 부치더라도 본성으로 돌아와야만 헥토르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가 이 시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저들에게 억류되어 자백했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여기서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레고타의 헥토르에 대한 미움과 의심은 점점 더 짙어져만 갔다.
‘내 일 왕자를 그렇게 따르고 옹호했거늘,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관에 잠겨 있을 무렵, 곁에 있던 기사가 다소 놀란 어투로 말했다.
“후작 각하, 저길 좀 보십시오.”
레고타가 고갤 들어보니 멀리 바리톤의 병력들이 다가서는 게 보였다. 그들은 신성 제국의 병력과 마주하며 병장기를 마구 휘둘러댔다.
일 왕자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그의 감정을 격하게 만들었다.
레고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호, 혹시 일 왕자 당신이오?’
생각은 점점 더 그쪽으로 기울었다.
하나, 감상에 잠길 수만은 없는 노릇인지라 레고타는 눈을 빛내며 몸을 돌렸다.
이를 본 총관이 물었다.
“어딜 가실 생각이시옵니까?”
“보면 모르느냐? 냉큼 내려가 성문을 뚫고 일 왕자 전하를 영접해야 한다.”
“하오나 각하!”
기사단장이 내려가 있는 판국에도 아래는 별다른 진척을 보이질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총관에겐 혹 후작이 저 밖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하여도 나가는 순간 십중팔구 죽게 될 것이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아까보다 훨씬 많은 병력이 물밀듯이 몰려온 상태이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레고타의 고집은 완고했다.
“어차피 죽게 될 몸, 아껴서 무얼 하겠는가.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잠시나마 전하를 원망한 죄나 씻을까 한다.”
이에 대해 제일 처음 말을 꺼낸 기사가 전방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는 입을 열었다.
“후작 각하, 일 왕자께서는 저 복장이 아니셨습니다.”
기특하게도 그는 후작이 좀 더 냉철한 판단을 하기를 바랐던 총관을 대신해주었던 것이다.
“뭣이? 그럼 누가?”
레고타가 홱 등을 돌려 그들을 주시해보았다.
산만하고 혼란스러웠던 정신이 맑아지며 시야가 밝아졌다.
무려 4백 보는 떨어진 거리인데도 레고타는 저들의 안면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른 만큼 안구의 기능도 비약적으로 상승해 그의 시력은 기사의 시력보다도 배는 좋아졌던 것이다.
과연 20의 무리를 이끌고 전투를 벌이는 사람들은 이 왕자 유프라와 삼 왕자 팔테스였다.
80 정도의 병력을 잃고도 일 왕자 헥토르가 용맹함을 내비추었다고 생각한 기대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더불어 그는 한때마나 헥토르를 왕세자로 옹립하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미련한 것이었던가를 절실히 깨달았다.
‘내가 어리석었다, 내가 어리석었어…….’
그 역시 나라가 잘되기를 바란 위인 중 하나였다.
이제라도 판단을 달리해야 할 때였다.
“병력을 이끌고 내려가겠다.”
굳은 각오가 서린 일언이 침묵을 깨웠다.
영주가 내려가겠다고 결단을 내린 이상 총관은 거들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지금 총관은 그렇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앞쪽에서 도무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 현상이 원인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앞쪽 두 왕자가 이끄는 바리톤의 무리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던 신성 제국의 세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총관의 목구멍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 도대체 저곳에서 무슨 일이…….”
그들을 향한 고함이 사방에서 들렸다.
이어 신성 제국의 군세가 그쪽으로 쏠린 덕에 날아오는 위협들이 줄어들어 성 위에 있던 파수꾼들도 이 의문의 상황에 눈이 팔렸다.
신성 제국의 병력들이 더 많이 몰려와도 상황을 뒤집진 못하는 듯했다.
얼음처럼 시린 느낌의 마나 줄기가 사방을 휘저으며 처절한 비명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급기야 몰려들었던 신성 제국의 병력들은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때는 이미 바닥에 널브러진 자들이 흘린 피가 도랑을 이뤘다. 이는 멀리서도 식별이 가능할 정도였다.
성 아래로 내려가는 레고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성문 앞의 적과 대치하던 기사단장은 부상투성이였다.
이제 더는 버티질 못하겠다는 자괴감에 물들 때쯤 적들이 제 발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가려진 시야에 그는 앞쪽에서 벌어진 일을 목격하지 못했던 것이다.
느닷없이 내려온 레고타 후작이 굳은 얼굴로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앞장서라.”
성 위에 있어야 할 분이 내려왔으니 이 또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인지라 기사단장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옵니까?”
“앞장서라고 하질 않았느냐!”
책망을 듣고서야 기사단장은 모든 의문을 접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노여움을 거둬주십시오. 명을 그대로 따르겠나이다.”
성문을 수호하던 대규모의 병력이 밖으로 빠져나간 뒤에도 베르무트성으로 들어서는 신성 제국의 병력은 없었다.
등 뒤에서 나타난 정체불명의 강대한 적.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 10에 이르던 병력이 배로 불고, 또 그 배로 불기를 수차례. 이 때문에 전열은 무너진 상태였고, 이 상황에서 베르무트성안의 병력이 빠져나와 합세를 한다면 지금보다 더 큰 피해가 일어날 것임은 자명했다.
무조건 퇴각하라는 명령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신성 제국의 병력들은 저마다가 내빼기 바빴다.
기사단장이 이 수수께끼 같은 현상을 궁금해하고 있을 때, 레고타 후작은 경직된 얼굴로 몰려 있는 바리톤의 인파 속에 자리하고 있을 복면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 안에 괴물이 있다.’
* * *
헥토르는 으르렁거렸다.
자신을 붙잡은 이는 일면식이 있던 자였다. 그것도 아주 불쾌한 경험을 안겨 주었던, 쉬이 잊을 수가 없는 존재.
“네 녀석이 영초를 도둑질해가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굴욕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잖아도 조마조마해하던 차에 쉬바인은 이 소리를 곁에서 듣고서 모골이 다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놈이 드디어 미쳤구나.’
오딘은 쉬바인에게 헥토르를 데리고 있을 것을 지시했는데 아그리스 또한 이곳에 남게 되었다.
그는 아그리스가 그 길에 동행하지 않기를 원했을 뿐이다. 힘을 조절해 사용한다면 모르겠지만, 아그리스가 눈이 뒤집힐 때 주위 정황을 살피던 위인이던가?
때문에 그 성질머리를 주체하지 못한다면 신성 제국의 인간들뿐 아니라 레고타 후작의 성까지도 파손될 여지가 있었다.
안 그래도 동행을 거절당해 심사가 곱질 못했는데 헥토르가 기름을 끼얹은 격이라 아그리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광포한 눈동자는 야생마 같은 헥토르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겁 없는 것은 여전하구나.”
아무리 드래곤이라는 것을 모른다지만 저 눈동자를 접하고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이리라. 하지만 헥토르는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더 몹쓸 말을 내뱉었다.
“개자식!”
이렇게 기어오르는 인간이 또 있다는 것에 아그리스는 쓴웃음을 머금고 헥토르를 흥미로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다시 한 번 말해봐라.”
“그래, 개자식아! 원한다면 백번도 말해줄 수 있다. 더 들려줄까?”
개자식.
드래곤더러 개의 자식이라고 한다.
하찮은 인간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서인지 아그리스의 기분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곧 지옥의 불꽃이 그의 손바닥 앞으로 알알이 맺혀 들었다.
헥토르는 더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한 보가 떨어졌다고 하지만 열기가 옷자락을 태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헥토르는 아그리스에게서 황급히 떨어졌다.
그러나 열 보도 가질 못해 멈추고 말았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당장에 그를 태워버릴 것 같은 불길.
곧 사단이 벌어질 것을 염려하며 쉬바인이 다급히 쉰 목소리를 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이 녀석이 밉기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를 오딘 님께서 아시게 된다면 두 분 사이가 멀어질까 두렵습니다.”
틀린 얘기가 아니었다.
손에 간직한 헬파이어같이 끓어오르던 아그리스의 동공이 차츰 평정을 되찾았다. 평소의 그였다면 꿈에도 못 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아그리스는 불길을 거두며 헬파이어의 캐스팅을 포기했다.
헤츨링 시절부터 드래곤 어르신들에게 참을성이 없다고 얼마나 핀잔을 들었던가. 자신이 생각해봐도 지금 일은 매우 대견해 보였다.
그렇다고 같잖은 녀석의 행동을 눈감아줄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동시에 아그리스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크큭… 그래, 그게 있었지. 이놈을 첫 번째 시험 대상으로 삼아야겠다.’
오딘의 이마에는 골이 깊게 파여 있었다.
“이게 뭐 하자는 짓거리지?”
심각한 표정으로 그는 해괴하게 꼬인 헥토르의 육신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아그리스는 자신이 저질러놓은 일에 책임은 느끼는지 오딘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쉬바인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젠 분근착골수를 알겠다며 헥토르를 대상으로 시험한 것은 아그리스였지만, 그를 제지하지 못한 쉬바인 역시 일말의 책임이 따랐다.
‘어쩐지 비명 소리가 묘하게 바뀌더라니…….’
그러나 쉬바인이 무슨 힘이 있는가. 말리겠다고 나섰다간 자신 또한 저 꼬락서니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결단코 아그리스는 죽이려는 마음을 품지 않았었으니까. 그저 고문을 가하겠다는 것뿐이었다.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신경을 거스른다면 쉬바인을 먼저 시험하겠다고 했을 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죽은 사람은 그가 되었을 수도 있다.
잠시나마 아그리스를 말려야겠다고 품었던 생각에 쉬바인은 등에서 식은땀이 죽 흘렀다.
헥토르의 죽음은 오딘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가 어떤 인간이건 로테노아의 아들임은 변함이 없다. 지금 일이 향후 바리톤과의 관계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모르는 일이다.
줄곧 우호적인 태도를 내보이며 협력하겠다는 뜻을 보인 공국의 왕자. 그 왕자가 저들이 믿고 따르려던 사람의 손에 죽게 되었으니 오딘 본인으로서는 골치가 아플 만도 했다.
쉬바인이 두 어르신의 마음의 짐을 덜게끔 오딘에게 말을 올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그래도 일 왕자가 반역을 꾀한 것만은 틀림없지 않사옵니까.”
이에 풀이 죽은 아그리스의 안색이 밝아지려 했다. 그러나 오딘은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받아쳐 버렸다.
“죽이든 살리든 그건 바리톤의 소관이지, 아레인이 나설 일이 아니지 않느냐.”
이러니 쉬바인도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솔직히 아그리스는 이렇게까지 기가 죽을 필요는 없었다.
그가 누구인가. 대륙에 잔존하는 모든 생명체 중 가장 강하고 위대하다는 드래곤이다.
그 드래곤에게 눈을 치켜뜨고 대들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음의 합당한 이유가 된다. 분명 그 나름의 논리를 펴자면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그리스는 기를 못 펴고 있었다. 이는 자신이 방관자라는 입장이 크게 작용했다.
좀처럼 거두어지지 않는 오딘의 냉랭한 시선에 아그리스는 어렵게 입을 뗐다.
“살릴 수 있다.”
“살릴 수 있다고? 어떻게?”
그래도 드래곤이라니 물은 말이었다. 인간이 모르는 무엇인가를 요놈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작용한 것이다.
“원래대로 돌아오기는 힘들겠지만 가능하다.”
곁에서 듣고만 있던 쉬바인이 혹시나 해서 물었다.
“혹시 아그리스 님, 좀비로 만드시는 건……?”
끄덕끄덕.
기대로 들떴던 쉬바인의 어깨가 축 처지고, 오딘의 표정은 다시금 싸늘해졌다.
더 상대하기도 싫었던지 오딘은 등을 돌리며 거두절미하고 딱 잘라 말했다.
“데려가.”
이 일로 인해 아그리스는 오딘과 떨어져 아레인성에 처박히게 된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오딘은 장차 그가 어떤 사고를 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