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괴짜 노인
발데르와 보탄은 내내 침중한 표정이었다. 믿고 의지해왔던 대상이 말도 없이 왕성을 떠나서이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괴짜 노인이었다.
“너무 마음 두지 말기로 하세. 어르신도 나름의 인생이 있으신데 우리가 언제까지 잡아둘 수는 없지 않겠나.”
서운함조차 훌훌 털어낸 발데르와 달리 보탄의 눈은 부릅떠지고 입에서는 감정 실린 목소리가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저희들에게까지 말도 없이 떠나시다니요. 정말 섭섭합니다.”
보탄의 투정은 계속되었다.
“아무리 둘러대실 핑계가 없으셔도 그렇지, 드래곤이라니요!”
사실 어이가 없기는 발데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엉뚱한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해도 그렇게 둘러대고 떠나리라고는 예상도 못했었다.
드래곤이 드래곤임을 밝혔다면 아주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발데르도 보탄도 그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하니, 자연히 이런 불평이 나올 수밖에…….
속내를 내비치지 않으려 했지만, 발데르의 입에서도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우리보다야 여왕 전하께 뭐라고 전해드려야 좋을지 모르겠군.”
보탄 역시 통감하는 바였다.
아무리 발데르 공작과 본인이 괴짜 노인과 가까이 지냈다고는 하지만, 그녀보다야 덜할 것이다. 소싯적부터 그를 할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던 그녀가 가질 상실감이란 두 사람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그에 대한 걱정이 앞서고 있었다.
* * *
엘레느의 곁엔 오딘이 있었으며, 어린 시종 둘이 뒤를 따랐다.
그 일 때문에 굳이 그녀가 여러 신하들의 눈치를 살필 필요는 없었다. 급작스레 발생한 정사(情事)는 도무지 그칠 줄 몰랐던 탓에 대전 회의는 차후로 미뤄져 버렸으므로.
무려 일주일의 정사 후에도 그녀의 부끄러움은 한결같았다. 아직도 화끈거리는 볼은 식을 줄을 몰랐고, 떨림으로 요동치는 가슴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사모하던 사람이 다정히 옆에서 걷고 있는 현실이 그녀에게는 마냥 꿈만 같았다.
지금 역시도 연못 사이에 놓인 돌다리 위를 걷는 것뿐인데도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며칠 밤낮의 행위를 엘레느는 희열이나 쾌락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정녕 사랑하는 이가 아니었다면 경험하지 못할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괜한 욕심이 일었다.
‘이분도 날 사랑하실까?’
그녀의 눈에 비친 오딘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를 보며 엘레느는 모질게 마음을 다졌다.
‘욕심을 가지면 안 돼. 애초에 마음을 그렇게 품었잖아.’
사실 오딘의 초연함은 위장이었다.
일평생을 무공에 일로정진하여 살아오다시피 한 그로서도 요 며칠간은 감당하기 힘든 시간이었다.
왜 일주일이나 엘레느의 침실에서 머물렀겠는가. 욕정이 그치질 않으니 그라고 한들 별수가 없었던 것이다.
‘수치로구나. 본 좌가 한낱 여자 앞에 무너지다니… 그것도 이런 꼬맹…….’
뒷생각이 차마 이어지지 않았다. 다시 그녀를 보는 순간, 욕정이 치솟아 와락 껴안을 것 같았기에 애써 시선을 돌려 버렸던 것이다.
더 이상 그녀는 예전의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성숙미가 물씬 풍기다 못해 철철 흘러넘치는 숙녀가 되어 있었으므로.
중원에 아무리 미녀가 많기로서니 엘레느의 미모는 그에 비할 게 아니었다. 엘레느는 살아생전 그가 보았던 어떤 여인들보다도 아름다웠다.
이 때문에 오딘은 말 한마디 붙여 보질 않고서 묵묵히 길만 걸었다.
‘무심코 던진 말이 더 큰 정으로 번질 수 있다.’
이성을 누르지 못해 일을 벌였지만, 수습이 안 되는 상태여서 오딘 또한 혼란스러웠다. 애초에 선을 그어놓지 않았다면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 일을…….
“저어기…….”
뒤따르던 어린 시종이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다.
오딘이 고개를 돌리자 시종은 어렵게 뒷말을 이었다.
“지하 뇌옥으로 가는 방향은 이쪽이옵니다.”
아니라고 잡아뗄 일이 아니었다. 미리 행선지를 그곳이라고 말해놓았으니까.
상념에 잠겨 직선으로만 걸었던 탓에 그답지 않게 우스운 꼴을 보이고 말았다.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오딘은 방향을 틀었다.
“크흠.”
그렇게 얼마를 나아가자, 누군가가 바닥에 몸을 납작 웅크리고는 아뢰었다.
“오딘 님을 뵈옵니다.”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오딘은 그 자리에 마혈단의 단주 아론이 서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가 부복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러나 알게 된 이상 반기고 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기다리게 했구나.”
“신도 방금 나왔사옵니다.”
오딘은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실 시종들로부터 기별을 받은 즉시 아론은 줄곧 이 자리에서 오딘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여왕 엘레느의 침실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있는 귀족들은 서로가 입단속을 한다고는 했지만, 주요 직책에 있는 단주들과 대주들의 귀에까지 들어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아론 또한 대강의 소식은 접해들은 상태였다. 당장에 두 사람의 관계를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감히 자신이 나설 자리는 아닌 듯해 아론은 그가 가는 길에 안내자가 되어줄 것만 자청했다.
“제가 앞장서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러려무나.”
아론은 더 이상 일개 병졸이 아니었다. 떡 벌어진 어깨가 늠름한 한 사람의 대장부가 되어 있었다. 마혈단의 단주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부터 뼈와 살을 깎는 수련을 거듭하여 얻은 결과였다.
뒤따르는 어린 시종들은 조심히 서로의 표정을 살폈다. 이렇게 높은 분들을 모신 것이 오늘이 처음이어서이다. 또래의 시종들에게 이 소식을 전한다면 거짓부렁이라고 놀려 댈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는 길 내내 이분들처럼 높으신 분들만 계신 건 아니었다. 과거 발데르 공작의 시녀로 알려진 샬로트와 그녀의 아이가 합류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종들에게 그녀의 이름이 각인된 이유는 간단했다. 마혈단의 대명사 격인 광인 마타하리는 아이들에게는 대단한 화젯거리였던 것이다.
샬로트는 오딘과 엘레느를 뒤따르며 자신의 아이 또래인 시종들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다. 혹여나 제 아이를 멸시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탓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걱정은 기우였다.
마타하리는 아이들에게 있어 아레인을 구한 영웅 중 한 명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여왕과 오딘만 아니었다면 시종 아이들은 마타하리에 대해 그간 품어왔던 궁금증들을 스스럼없이 물어봤을 것이다.
딱히 시종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자 샬로트는 한시름을 덜 수 있었다. 하나, 여전히 가시지 않은 걱정이 있었으니 아이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제 몇 번이고 얘길 했지만, 막상 철문 앞에 서니 걱정이 되어 샬로트는 아이를 살포시 껴안았다.
끼익!
‘두려워하지 마렴, 제발…….’
철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리는 동안 샬로트는 마음속으로 아이에게 그렇게 빌었다. 행여나 아이가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가슴이 미어터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각또각.
정적을 깨고 날카로운 구두 소리들이 뇌옥 안을 울렸다.
그녀는 꿈에서라도 이 순간을 학수고대해왔다. 광인이 된 그일지라도 자신의 남편임은,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임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단, 아직 준비가 안 된 아이가 함께라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천근만근이나 무겁게 만들었다.
안을 비추는 빛은 벽 등이 전부가 아니었다.
정면으로도 소름 끼치는 빛을 내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마타하리의 동공이었다.
철그럭철그럭.
제 주인이 온 것을 알기나 하는지 마타하리가 몸을 뒤틀자 그 몸에 감긴 쇠사슬들이 요란한 소음을 냈다.
“오랜만이로구나.”
오딘의 말에 샬로트는 억지로 울음을 참았다. 고맙게도 아레인의 하늘이라는 오딘은 아직도 자신의 남편 마타하리를 살갑게 맞아주고 있질 않은가.
‘보잘것없는 여인은 이 은혜,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옵니다.’
이에 힘을 얻었던지 샬로트는 용기를 내어 아들의 귀에 나직한 목소리로 일렀다.
“카이, 네 아버지란다.”
카이는 입술을 굳게 닫고 있었다.
샬로트뿐만 아니라 아론의 눈도, 엘레느의 눈도, 그리고 오딘과 두 시종들의 눈도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침묵을 깨고 다문 입술이 열렸다.
“나, 난… 아빠가 부끄럽지 않아요.”
샬로트의 감정은 급속도로 격해졌다.
여태 아이의 앞에서만은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만은 그럴 수 없었다.
감정이 격해진 샬로트는 카이를 부둥켜안고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
제 어미가 울고 있다는 것을 등을 적시는 물기와 흐느끼는 소리로 느낄 수 있었는지, 카이는 고사리 같은 손을 불끈 쥐어 보였다.
‘엄마, 울지 말아요. 카이가 강해져서 대신 원수를 갚을 거예요.’
모자를 보는 오딘의 눈은 연민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와의 약조를 잊지 않았음이다.
안타깝게도 오딘에게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눈앞에서 성황을 놓쳐 버렸다. 장차 신성 제국을 박살내는 한이 있더라도 마타하리의 원수인 그를 잡아끌고 올 심산이었다.
이들의 상봉을 말없이 지켜만 보던 엘레느도 가슴속에 한 가지의 다짐을 새겨 놓았다.
‘보잘것없는 힘이지만 이 엘레느도 잃어버린 여러분의 행복을 찾아줄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하겠어요.’
본래 오딘이 이 자리에 엘레느를 데려온 것은 이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자신과 그녀의 분위기를 환기시킬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마타하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강한 마기는 강한 색기를 눌러줄 수 있다고 믿었다. 해서 겸사겸사 찾아온 터였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뇌옥을 나섰을 때는 오딘의 가슴속에 다시금 욕정이 꿈틀거렸다.
그렇다고 항시 마타하리를 데리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른 어중간한 마기들로는 색기를 더욱 부채질할 것은 명백한 일. 오딘은 자신의 일생에 있어 가장 최악의 실수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 *
로만 공국.
신성 제국은 남으로는 아레인에 파병을 하였으며, 인접한 로만에 싸움을 걸어왔다.
최초의 전투가 벌어진 곳은 로만의 아셈브룩 영지였다.
본디 아셈브룩은 잦은 영지전이 벌어지긴 했지만, 이처럼 대규모의 침공이 이뤄진 적은 없었다.
로만 역시 레오노 공왕의 지시 아래 아셈브룩으로 군사력이 집결되었다.
로만의 군병들은 즐비하게 깔린 막사들 사이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이 중에 더러는 첩보를 가지고, 또 더러는 소식을 가지고 막사를 드나들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개개인의 얼굴에는 신성 제국에 대한 미움이 서려 있었다.
마침 그를 대표하는 목소리가 한 막사 안에서 날카롭게 터져 나왔다.
“로만을 침공한 것도 저들이요, 성녀님을 납치해간 것도 저들이요! 돼먹지 못한 행동들을 한 건 저들인데 귀공은 어찌하여 화평을 주장하시는 겝니까!”
로만에서 목소리의 주인공만큼 신성 제국에 이를 갈고 있는 자를 찾기는 드물었다. 그는 아셈브룩의 영주 가르텐 백작이었던 것이다.
본의 아니게 호통을 듣게 된 칸멜 자작은 볼멘소리를 냈다.
“모, 목소리를 줄이시지요. 이러다 다 듣겠습니다.”
“들으라지. 뭐가 겁나시오? 그렇게 겁날 소리였다면 애초에 꺼내지를 말았어야지!”
가르텐 백작은 칸멜 자작을 한심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원래부터 그가 겁이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불의 앞에서도 굽힐 줄은 몰랐었다.
더 상종조차 하기 싫었는지 가르텐은 확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밖에서 기별이 들려왔다.
“아레인의 가인 자작께서 오셨습니다.”
찌푸려졌던 그의 인상이 절로 펴지며 반기는 목소리로 당장 답했다.
“오오~ 어서 들어오시라고 하여라.”
차양이 걷혀지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가인 자작은 일전에 레오노 공왕을 통해 본 적이 있었으나, 옆의 남자는 가르텐 백작도 보지 못했던 위인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멍한 얼굴로 살필 수만은 없어 우선 손을 내밀어 아는 사람부터 반겼다.
“반갑습니다. 어서 오시지요.”
가인은 마땅히 그의 손을 잡고 화색을 지었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일이 있어 조금 늦었습니다.”
질세라 가르텐이 반색을 했다.
“아닙니다. 이렇게 발걸음을 해주신 것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기분입니다.”
가르텐 백작이 과도하게 가인을 반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미리 공왕으로부터 그에 대한 언질을 받았던 것이다. 자연히 그가 데려온 손님이라 해도 접대에는 소홀함이 없어야 했다.
“이분은……?”
화기애애해진 분위기에 주저 없이 가인은 옆 사람을 소개했다.
“음영대의 대주님이신 켈타스 후작님이십니다.”
음영대, 백의질풍대, 적의질풍대… 이런 단체들은 가르텐에게 생소한 것이었지만, 후작이라는 작위는 익숙한 것이었다.
해서 가르텐은 큼지막하게 눈을 뜨고는 놀랬다.
“아, 아레인의 후작님이시라고요?”
“그렇소. 반갑소이다.”
“가르텐 폰 아셈브룩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뜸 내민 손. 얼결에 가르텐은 켈타스 후작과 악수를 했는데 왠지 모르게 황송한 기분까지 들었다.
아레인은 자작과 남작만도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다. 하물며 그곳의 후작과 대면을 하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이 와중에도 칸멜은 세 사람의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자연히 아레인의 두 귀족 나리들을 접대하는 것은 가르텐의 몫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어찌 보면 과도한 친절이었지만 가르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권을 바라지 않고 돕겠다고 했던 것에 일찌감치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로만에는 꽤 많은 병력들이 있구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 같소.”
“바로 보셨습니다. 형제 국들이 힘을 실어주고 있는 실정이어서 그렇습니다.”
켈타스의 말에 곧장 대답하는 가르텐의 목소리가 낭창낭창했다. 그 모습이 너무 상대에게 수그리는 듯하여 칸멜은 슬그머니 눈살을 찌푸렸다.
‘흥, 백작께서는 내 말을 새겨듣지 아니하시고 어찌 변두리의 왕국 따위에 몸을 기대시는지…….’
그래도 강성한 제국에 기대었다면 칸멜 역시 스스럼없이 이 분위기에 동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아레인. 평소에 별 소식도 접하지 못했던 곳이어서 떨떠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도 켈타스 후작과 가르텐 백작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전세는 어떻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희 쪽이 열세입니다. 보다 많은 지원병이 오기 전까지는 판세를 뒤집을 수 없을 듯합니다.”
“신성 제국도 그만큼 병력이 많소?”
가르텐은 머뭇거렸다. 신성 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로만의 군병들이 약하다는 소리를 직접 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칸멜이 대신하여 나섰다.
“신성 제국의 전투력은 무시 못 할 지경입니다. 앞서 대패를 한 것은 신성 제국의 성기사들, 사제들과 저희 병력 간의 압도적인 힘 차이를…….”
듣다 못한 가르텐이 눈을 부릅뜨고 대노하여 소리 질렀다.
“자작!”
“틀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생각을 고치시지 않는다면 큰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결국 칸멜은 못할 말을 하고야 말았다.
‘드디어 미쳤군, 미쳤어.’
가르텐은 생각을 짧게 마치고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여봐라, 누구 없느냐?”
풍채 늠름한 기사 하나가 차양을 걷고 고개를 내밀었다.
“부르셨사옵니까?”
“자작을 즉각 숙소로 모셔 드려라.”
기사는 눈치를 살피더니 바로 허리를 굽혀 보였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기사에 의해 끌려 나가면서도 칸멜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듣는 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신성 제국에 등을 돌려서는 안 되옵니다. 이는 로만에 불행만을 안겨 줄 것이옵니다.”
그렇게 말하며 막사 밖으로 끌려 나가는 칸멜은 가르텐의 눈에 철부지 어린애와 같아 보였다.
가르텐 백작 역시도 신성 제국과의 힘의 차이를 여실히 느끼고는 있었다. 하지만 설혹 그의 말대로 죽게 된다 하더라도 로만의 귀족으로서 명예는 지켜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것도 조력자들 앞에서 그런 말을 서슴없이 늘어놨으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칸멜은 귀한 손님들에게 실례를 저질렀다. 맞대면을 했음에도 통성명을 안 한 것부터가 그러했다. 이에 대해 가르텐은 변론을 해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저, 두 분께옵서 못 들은 것으로 해주시오면 안 되겠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로만 대다수, 아니 칸멜 자작만 빼고는 저런 생각을 품는 귀족들이 없습니다.”
“전투가 많이 힘이 드시는 모양입니다.”
가인의 말에 가르텐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후우, 숨겨 봐야 무얼 하겠습니까. 사실 얼마간의 전투는 버거울 지경이었습니다. 저들의 주력들이 나온 이후부터 말입니다. 접근할 엄두도 나질 않는 대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그에 대해 아직 뾰족한 묘책이 없는 상태이고, 상부에서도 별다른 지시가 내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로만에는 도움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그것이 다섯 공국이 숨겨 놓았다는 비밀 병기니 뭐니 하는 힘이더라도 말이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서 힘이 되기를 자청했다.
그러기 전에 우선 가인 자작은 켈타스 후작을 살폈고, 그가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입을 뗐다.
“지금부터 저희가 합세한다 해서 전세가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성심껏 도와보겠습니다.”
어찌나 달갑게 들리는 말이었는지 가르텐은 눈을 크게 뜬 것으로도 모자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가인의 화답에 가르텐의 얼굴에 깊게 자리했던 그림자가 서서히 걷혔다.
켈타스가 이 분위기를 이어가며 물었다.
“앞서 접근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는 사람들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주셨으면 하오.”
가르텐이 기꺼워하며 물었다.
“그들을 맡아주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말이 그렇게 되는 건가?”
아리송한 되물음. 가르텐은 그 의도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지?’
본의 아니게 뜸을 들이게 된 가르텐을 향해 켈타스는 재차 물었다.
“대략적인 인상착의 정도만 가르쳐 주셔도 가능하오이다.”
“인상착의요? 그것은 왜?”
“대충만 가르쳐 준다면 우리 음영대를 적진에 투입시키도록 하겠소. 신분이 확인되는 대로 제거하도록 하지요.”
음영대의 주된 임무는 암살이었다. 이를 알 리 없는 가르텐은 예측치도 못한 얘기에 잠시 공황 상태에 빠져 들었다. 그러다 곧 정신을 차리고는 입을 열었다.
“파악된 인원은 총 여덟 명입니다. 이 중에 네 명은 사제이고, 나머지 네 명은 성기사…….”
아레인의 후작 켈타스의 질문에 그의 입은 저들의 인상착의를 세세히 일러주고 있었지만, 반신반의하는 눈빛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