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 하나의 드래곤 (56/67)

또 하나의 드래곤

목소리는 과연 오딘의 것이었다.

“제압해라.”

제라드는 검을 쥔 손을 굽히며 당장에 허리를 숙여 보였다.

“지엄하신 명을 받들겠나이다.”

제라드와 쌍귀가 나서며 그들의 앞을 가로막자 군중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가리온의 무리들은 그 즉시 길을 텄다. 그러자 풀페스의 비대한 몸집이 한눈에 들어왔다. 제라드도 작은 키가 아니었지만, 풀페스의 가슴 부위밖에 가질 않았다.

풀페스는 제라드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무리하시는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라드의 신형이 번쩍였다. 그 움직임은 범인의 눈으로는 감히 따라잡기 힘든 것이었다.

꽤 놀랐는지 풀페스의 눈썹 역시 씰룩거렸다.

제라드의 검집을 빠져나간 검에서 불현듯 광채가 일었다.

황급히 풀페스는 검갑째로 그를 막았다. 어중간한 사람의 키보다 큰 거대한 검이었다.

콰창!

풀페스의 검갑의 일부가 깨어져 파편을 튀겼다.

제라드는 땅에 무사히 착지했고, 쌍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저들의 무리를 휘저어 마르크를 구출해냈다.

절대 평범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제야 풀페스는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달았는지 언성을 높여 물었다.

“웬 놈들이냐?”

답은 제라드에게 들려오지 않았다. 이들의 우두머리로 추측되는, 먼저 통행을 방해했던 검은 머리카락의 젊은 놈이 이죽거렸을 뿐.

“살아남는다면 가르쳐 주지.”

제라드는 오딘의 뜻을 받들었다.

그가 내뱉은 말은 죽일 수 있으면 죽이라는 뜻과 같았다.

제라드의 검에서 뻗어 나온 휘황한 오러 블레이드가 풀페스를 압박했다.

‘크으, 어디서 소드마스터가 튀어나온 거야?’

경각심을 누르지 못하고 풀페스는 손에 쥔 검을 무시무시한 힘으로 휘둘렀다.

오러 블레이드와 거대한 검이 마주치며 커다란 굉음을 냈다.

쾅!

흡사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 같았다.

멀리 상대가 튕겨져 나간 때를 놓치지 않고 풀페스는 땅에 사정없이 검갑을 내려쳤다.

콰작! 콱!

아직 덜 벗겨진 검갑에서 아이보리 빛 검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냈다.

풀페스는 남은 검갑을 뱀 껍질을 벗기듯 우악스럽게 뜯어냈다. 군마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 괴력이었다.

그의 검은 검이 아니라 마치 두꺼운 쇠몽둥이 같았다. 하나, 각 면에는 날이 서 있었고 끝은 검과 마찬가지로 뾰족했다.

제라드는 그 힘과 무기에 굴하지 않고 다시 빠르게 거리를 좁혀 들었다.

오러 블레이드와 아이보리 빛 검이 정확히 마주쳤다.

파앙!

그 여파로 인해 주변으로 거센 바람이 불었다.

더 이상 지근거리에서 구경을 할 간 큰 사람은 없었다.

당사자들을 빼고 구경꾼들은 저 멀리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작금의 상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제라드에게 하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특이한 철이로군.”

“오리하르콘을 눌러 만든 거다. 제아무리 오러 블레이드라 한들 이걸 자를 순 없지. 그러나저러나 네 녀석들은 간도 크군. 감히 가리온의 북부 지부에서 이런 일을 벌이다니…….”

그랬다. 풀페스는 가리온의 북부 지부장이었다.

말썽을 피우는 녀석들을 처리하는 건 그의 소관이었고, 힘에 부칠 때는 상부에 보고를 올린다.

그러나 피라미 한 마리가 이런 강직한 동료들을 가졌을 것이란 생각은 못했다.

주변을 휘젓는 두 녀석들도 보통은 아닌 듯했다.

풀페스는 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도 물러서지 않는 놈들이 대략 10명 남짓이었다.

‘저 녀석들도 보통은 아니라는 얘기로군. 좀 덜떨어진 녀석들도 보이는데 동료라서 그냥 있는 건가?’

호위 무사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풀페스에게 우선 과제는 앞의 중년 남자를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마음을 다잡은 그의 목소리엔 아까보다 더한 힘이 실렸다.

“소드마스터라고 우쭐대지 마라. 세 명 정도는 저세상으로 보내봤으니까.”

경고를 마친 후 풀페스는 상체를 숙이고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쿵쿵쿵!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지진이라도 난 듯이 땅이 흔들렸다.

목표에 다다라 풀페스가 검을 휘둘렀을 때, 태풍이라도 분 것처럼 바람이 일었다.

후웅-!

그러나 상대는 검과 함께 사라져 있었다.

제라드는 어느새 그의 뒤를 점하고 있었다.

뜨겁게 달궈진 검이 예외 없이 그의 등을 쑤셨다. 등을 돌려 볼 것까지도 없었다. 가슴을 관통한 오러 블레이드의 끝이 눈에 보일 정도였으므로.

풀페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어째서…….”

쿠웅-!

덩치만큼 많은 피가 바닥을 하염없이 적셨다.

제라드는 검을 검갑에 집어넣고서 그의 어리석음을 나무랐다.

“그렇게 큰 동작을 내 보이니 빈틈이 보일 수밖에…….”

마르크의 엉덩이를 걷어찼던 청년과 베스는 지부장이 쓰러진 것을 보며 지레 겁을 먹었다.

가리온의 남은 패거리들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투지가 꺾인 무리들을 정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이스론의 호위 무사들까지 나와 날뛰었다.

이를 보며 아그리스는 짜증이 났다.

여태 해오던 바에 의하면 가장 강한 녀석이 오딘의 손속에 희생양이 되었다. 그 녀석이 저리 쓰러져 버렸으니 누굴 고문한단 말인가.

아그리스는 슬금슬금 옆으로 이동하더니 오딘의 곁으로 가 중얼거렸다.

“저런 녀석들의 버릇은 확실히 고쳐 두는 게 옳다.”

오딘은 심드렁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욕심이 과했다. 속내를 들킨 것만 같은 무안함에 아그리스는 애써 딴청을 피웠다. 그 모습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오딘은 웃고 있었다.

“원하면 해주지. 보고를 올릴 녀석을 제외하고 이 녀석들 모두…….”

* * *

사실 오딘이 그때 귀찮음을 마다 않고 아그리스의 부탁을 들어준 것은 새로 가져온 선물 때문이었다.

드워프 아이스메이드 버블.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버블의 재능도 살탄 못지않다고 했다. 특히나 도자기에 양각해 색을 입히는 그림은 보는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라고 입에 침이 마르게들 칭찬했다.

아레인으로 돌아가기 전, 오딘은 그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마르크와 헤르미온, 그리고 틴과 그 외의 호위 무사들까지 드넓게 진열된 도자기들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도자기들은 쿤과 쉬바인을 포함한 나머지들에게도 동일한 감흥을 주었다.

오딘의 입에서도 경탄성이 터져 나왔을 정도였다.

“정말 훌륭하군.”

그들이 본 도자기는 그야말로 환상 궁합이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살탄과 다론, 그리고 버블도 흡족해하는 모습이었다. 장인들에게 가장 큰 즐거움은 그 물건의 값어치를 인정받는 것이었으므로.

안을 빙 둘러보고는 오딘은 다른 지시 사항을 내렸다.

“전에 잘 구워진 녀석들에게도 똑같이 해줬으면 좋겠군. 단, 서두를 필요는 없다.”

세 사람, 아니 한 사람과 두 드워프는 넙죽 허리를 숙였다.

“그리하겠사옵니다.”

마르크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물건의 가치를 칭찬했다.

“정말 최고로군요. 저도 하나 사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에 헤르미온이 조심스레 옆구리를 찔렀다.

“비싸게 팔아먹으려고?”

“팔아먹다니? 많다면야 팔아먹겠지만 하나 정도는 가지고 싶어. 정말이야.”

“하하하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던지 오딘이 인정을 썼다.

“마음에 드는 것은 가져도 좋다. 여기 있는 모두.”

호위 무사 하나가 믿지 못하고 반문을 했다.

“정, 정말이세요?”

그러자 다른 호위 무사가 그를 탓했다.

“오딘 님이 언제 헛말하시는 것 봤냐?”

그의 되물음대로 오딘은 한번 뱉은 말은 기필코 지키는 사람이었다.

저마다가 도자기에 대한 욕심을 내고 있는데 아그리스가 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아그리스 또한 도자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서로 더 나은 것을 점찍고 있으니 심통이 날 만도 했다.

돌연 오딘에게서 전음이 들렸다.

-네 것은 안에 있다.

그를 따라간 곳에는 과연 방금 봤던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빛깔이 고운 도자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단, 몇 점 되지는 않았지만.

아그리스는 여태 받고 빼앗은 어떤 보석들보다도 저것들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기왕이면 버블한테 부탁해서 가져가지 그래? 네 덕택에 얻은 것들이니 양껏 가져가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아그리스는 분명 만족하는 얼굴이었다.

* * *

파르티잔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눈살이 푸들푸들 떨렸다. 예전의 공포가 되살아났음이다.

이 자리에는 오딘과 파르티잔뿐이었다. 오딘은 파르티잔만을 데리고 무리들과 동떨어진 산 어귀에서 시간을 가졌다.

다행스러운 건 아그리스가 자신을 하인으로 쓰기로 했다는 것을 잊기나 했는지 아무 소리 않는 것이었다.

게티롱은 약속한 돈을 주겠다며 아래서 기다리고 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이 시간이 끝나면 또다시 파르티잔에겐 자유 같지도 않은 자유가 주어지리라.

“자, 약속했던 시간이 왔다. 깔끔하게 끝내고 보내주지.”

오딘이 거론하고 나오는 부분은 쇠침을 맞을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부작용 가득한 쇠침. 그로 인해 얼마나 더 인생이 꼬여 버렸던가. 그럼에도 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딘은 긴 쇠침을 찔러갔다.

푹!

“윽.”

그러다 잽싸게 뺐다.

“이런, 모르고 소독을 안 했군.”

느닷없이 쇠침을 잡은 오딘의 엄지와 검지가 붉게 달아올랐다. 삼매진화(三昧眞火)였다.

쇠침 역시 벌겋게 달아올랐다가 서서히 원래의 색을 되찾았고, 오딘은 그제야 다시 쇠침을 깊숙이 찔렀다.

‘크윽… 마음 같아서는 이걸로 다섯 번을 다 채웠다고 말하고 싶다…….’

찔렀다 뺀 것도 이유야 어찌 되었건 찌른 것 아닌가.

의외로 일은 금방 끝났다. 파르티잔이 엉덩이를 움켜쥐고 일어났을 때 오딘은 말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네 번째의 실패였다.

* * *

마르크 일행은 이스론으로 돌아갔다.

정말 길고도 먼 여정이었다. 대륙 전체를 돌아다니다시피 했으니 걸린 시간만 햇수로 몇 년이 되었고, 돌아다닌 거리만 해도 평생 움직일 거리를 움직인 것과 같았다.

헤르미온은 갈 때까지 오딘에게서 마음을 접지 못했더랬다.

‘아직 나한테 기회는 있어. 기회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지만, 그녀는 이미 실격이었다. 너무 떨려 말도 못하는 바람에 둘이 가까워질 계기가 없었던 것이다. 오딘 또한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더라도 대놓고 거머쥐는 성격은 아니었다.

이 여정으로 인해 이스론은 아레인을 더 신임하게 될 것이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그들은 헤어졌다.

이때까지도 본성에 없던 자들이 동행했으니 바로 쿤과 아그리스였다. 아그리스는 아예 평생을 붙어 다닐 생각인지 레어로 돌아갈 생각도 않았다.

* * *

병풍처럼 둘러 쳐진 초목들이 인상적인 마을이었다.

통나무들로 이루어진 가옥들은 대게 허름했으나 아기자기한 멋을 뽐내고 있었다.

쿵!

뛰놀던 아이가 딱딱한 무엇인가에 이마를 부딪쳤다.

아이는 이마를 매만지며 눈앞의 물체가 무엇인지 확인하려 고개를 들었다.

무심한 검은 동공이 아이의 눈과 마주쳤다.

한 여인이 부리나케 달려오는 중이었다.

그녀는 제 자식에게만 눈이 팔려 있었지, 아이와 부딪친 사람을 확인할 새가 없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즉시 그녀는 아이를 껴안고 앞쪽의 사람에게 허리를 숙이며 자비를 구했다.

“아이를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오랜만이구나, 샬로트.”

여인의 귓가에 파고든 목소리.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였다.

‘서, 설마…….’

그녀의 앞에 있는 남자, 그는 분명 오딘이었다.

감히 마주하기도 힘든 분. 그녀는 당장 아이를 땅에 내려놓고 바닥에 납작 웅크렸다.

“미천한 여인이 오딘 님을 뵈옵니다.”

오딘이 미소를 지으며 눈짓을 하자 무귀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오딘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타일렀다. 그렇다고는 해도 적잖은 정이 듬뿍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흙이 다 묻었질 않느냐.”

샬로트는 고개를 길게 빼고 사과를 거듭했다.

“죄송하옵니다.”

그녀 또한 분명 기뻐하는 얼굴이기는 했다. 그러나 오딘은 그녀의 표정에서 중요한 무엇인가가 빠져 있는 것을 읽었다.

“그 아이는 마타하리의 아이냐?”

“그렇사옵니다.”

정확히 짚은 셈이었다. 떨리는 동공이 그것을 증명했으므로.

오딘은 다그치듯 물었다.

“왕성에서 왜 나왔지?”

“…….”

그 질문에 샬로트는 차마 답할 수 없었다.

아이를 위해서였다. 아이가 광인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라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문에 호화스럽게 살 수 있는 것도 마다하고 외진 숲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두말하진 않겠다. 지금 돌아와라.”

명령조의 말이었다, 샬로트가 차마 거부할 수 없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타인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따라야만 하는 것.

그것이 오딘의 명령이었다.

참았던 눈물이 눈물샘을 자극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손등으로 뺨을 훔치며 서글픈 목소리로 답했다.

“따르겠습니다.”

아이는 뭣도 모르고 제 어미의 손을 잡고 오딘을 따랐다.

가는 길 내내 오딘은 추앙받았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거리나 들, 밭 할 것 없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뛰쳐나와 바닥에 몸을 바짝 웅크렸다.

옷이 더렵혀진다고 불평하는 얼굴들은 없었다. 이렇게 잘 살게 해준 성군에게 고마움을 표할 뿐.

아그리스가 대놓고 그를 비꼬았다.

“무슨 광신도 집단 같군.”

이죽거림에도 오딘은 슬그머니 미소를 걸칠 뿐, 대꾸는 않았다.

솔직히는 아그리스도 부러웠다. 이런 생이라면 살아볼 만하다는 생각을 가졌을 정도니까.

자신에게 엎드린 자들은 공포에 겁을 먹어서였지, 진정 존경을 표한 이는 드물었다. 아니, 없다고 봐야 할지도 몰랐다.

그 점이 아그리스에게 시샘을 하게 만들었다.

* * *

아레인 왕성은 수군거림으로 들끓었다.

“그래도 너무하셨어. 어떻게 몇 년이나 성을 비우실 수 있으실까.”

“예끼, 이 사람. 오딘 님을 나무랄 거면 차라리 날 나무라게.”

따지고 보면 먼저 얘기를 꺼낸 사람도 오딘이 없어 서운하다는 투로 한 말이었다.

왕성 안의 사람들도 왕성 밖의 사람들처럼 한결같았다.

그러나 이 행사에 빠진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사람, 여왕이 자리하질 않은 것이다.

엘레느는 침대에 누워 가녀린 팔뚝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얼굴 옆의 시트가 흠뻑 젖어 있었다.

아마 울고 있었음이라.

서글픔에 목이 메고, 그의 무정에 가슴이 콱 막혔다.

그냥 바라보는 것만이라도 허락해달라고 밤하늘의 별을 보고 얼마나 간절하게 바랐던가.

그게 수년이 흘렀다. 수년 동안의 설움이 눈물이 되어 흐르는 것이다.

그런 그녀를 타이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가보지 않을 생각이냐?”

괴짜 노인이었다.

엘레느는 입을 열 생각도 없는지 누운 얼굴 그대로 고개만 끄덕였다.

급기야 오딘이 모습을 드러냈는지 환호 소리가 들렸다.

“엉, 엉엉…….”

그제야 엘레느는 목청껏 울음을 터뜨렸다. 환호 소리에 울음소리가 묻히길 바랐던 것이다.

괴짜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문을 나섰다.

‘미안하다. 이 할아비도 도통 방법이 없구나.’

성안의 환호는 정말 대단했다. 땅이 울리고 그 소리가 퍼져 하늘에까지 닿을 정도였으니까.

이스론에 종종 파견을 나갔던 보탄도, 나랏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발데르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오딘 님을 뵈옵니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묵직한 목소리들이 그를 반기자 환호는 더욱 커졌다.

“저것 봐, 보탄 백작님이야.”

“발데르 공작님이네. 정말 몰라보게 젊어지셨군. 새 장가를 들어도 되시겠어.”

“하하하! 저분들의 부인들께서 들으셨다면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군.”

오딘이 탄 말을 호위하며 보탄과 발데르는 옆쪽에서 걸었다.

성으로 돌아온 사람들도 제각기 감회가 남달랐다. 다만, 쌍귀는 그들의 성격답게 좋은 감정을 무표정으로 드러냈다.

오딘이 돌아온 아레인에는 말로는 형언하지 못할 힘이 느껴졌다.

오로지 그가 존재함으로써 가지는 힘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군중들의 함성은 배가 되었고, 경비들과 각 단체의 무사들, 그리고 그들의 단주와 대주들 또한 더욱 늠름해졌다.

하다못해 망루 위의 경비들도 이 환영 행사에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환송식은 막을 내렸다.

“신 발데르, 오딘 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채 물러가기도 전에 발데르가 조심스레 꺼낸 말이었다.

왕성엔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발데르와 보탄과는 만남을 가졌던 오딘이었다.

그럼에도 반가움은 줄어들지 않았다.

샬로트에게 거처를 내달라는 명을 내려놓고 오딘은 마땅히 술자리를 준비하고자 했지만, 발데르는 단둘의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는 아그리스와 쿤을 보며 오딘은 근방의 수하를 불러 그들의 대접에 각별히 신경을 쓰라는 명을 내렸다.

“귀한 손님들이니 따로 거처를 마련해주어라.”

“지엄하신 명을 받들겠나이다.”

굳이 발데르는 먼 곳으로 이동을 원치 않았다.

인적이 드물어지자 그는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인 채로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신 발데르, 오딘 님께 한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말해보라.”

하문을 하는데도 발데르는 쉽게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럼에도 오딘은 표정을 구기지 않고 너그러운 어조로 재촉했다.

“평소의 공작답지 않군.”

“이는 꺼내기 어려운…….”

정말 공작답지 않았다.

발데르가 누구인가. 박력이 넘치고, 무게가 있으며 매사에 진중한 맛이 있는 위인이었다. 그런 그가 무슨 일로 이렇게 뜸을 들일까 하는 생각이 오딘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때서야 발데르의 입에서 침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 무례인 줄 아옵니다. 하오나 꼭 드려야 할 말씀인지라 부득이하게 청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여왕 전하께옵서…….”

뒷말이 나오자 오딘의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되었다!”

발데르는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오딘은 매정하게도 그를 두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발데르가 하려던 말은 오딘 또한 짐작 가능한 것이었다.

‘천하에 둘도 없을 바보 같으니라고…….’

오딘이 오래도록 성을 비운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비단 무역의 성황을 누리려는 것만은 아니었다. 아직도 자신을 잊지 못하는 엘레느도 원인이었다.

사내를 품지 못하여 처녀성을 떨치지 못할 시에는 더더욱 힘들게 된다. 그것이 엘레느가 소녀였을 때 오딘이 손을 썼던 부분이었다. 보는 사람들이 감당이 안 될 만큼 엘레느가 육감적으로 변한 것은 모두 그 때문이었다.

그녀 또한 애간장이 타고 가슴이 활활 타오르다 못해 시퍼렇게 멍이 들었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그녀를 거론하다니.

‘차라리 그 녀석이랑 맺어줄 것을…….’

그나마 괜찮았던 대상이 바리톤의 2왕자 유프라였다.

그러나 이는 뒤늦은 후회였다. 추측하는바, 지금에 와서는 그에게 별로 이끌리지도 않을 것이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어린 시절에 콩깍지가 쓰이는 경우가 많지, 나이가 들면 무엇이든 시들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제 엘레느도 스물을 바라볼 나이였다. 이때까지도 처녀성을 버리지 못했다면, 이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수많은 사내들이 그녀의 치마폭을 바라고 눈이 뒤집힐 것이다.

‘괜한 후회가 되는군.’

어쩌면 이제는 자신조차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오딘은 엘레느의 침실 앞에 있었다.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그의 발길을 이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자신이 저질러 놓은 일이다.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거짓말이리라.

오딘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이조차 통하지 않는다면 방법이 없겠지만…….’

오딘은 문을 벌컥 열었다.

향긋한 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그럼에도 오딘은 굴하지 않고 나아갔다.

소리에 놀라 엘레느 역시 얼굴을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토록 바라던 대상이 안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메말랐던 그녀의 가슴에 불씨가 살아났다.

그러나 그녀보다도 더 심각한 건 오딘이었다.

여태 엘레느는 침실에 있을 때만 빼고는 얼굴을 가리는 면사포를 쓰고 국정에 임했다. 옷 또한 굴곡이 드러나는 것을 못 입을 정도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점점 정도가 심해져 근래에 이르러서는 신하들이 참는 것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대전 회의에서 신하들이 어렵게 올린 사안이었다.

그러나 지금 오딘이 마주 보고 있는 엘레느는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고, 한 손에 안길 정도로 잘록한 허리가 드러나는 순백의 드레스 차림이었다.

게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누워 있던 바람에 드레스 사이로 드러난 매끄럽고 뽀얀 허벅지는 냉혈한이나 다름없던 오딘의 가슴이라 할지라도 요동치게 만들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정신이 혼미해지도록 만드는 엘레느의 얼굴이었다. 그 아름다움은 세상 어떤 것에도 비교할 것이 못 되었다.

막 일어서는 고혹적인 자태는 오딘의 가슴을 더욱 강하게 충동질했다.

오딘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사내대장부가 어찌 여자에게 질쏘냐.’

마음을 그렇게 다져 보려 했지만 무리였다. 보고 있으면 혼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자신이 손댈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신이라 할지라도 무리일지 몰랐다.

모든 걸 체념한 듯 오딘은 몸을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허리를 껴안는 보드라운 손. 엘레느의 것이었다.

그녀는 오딘의 등에 얼굴을 깊게 파묻고 서럽게도 울었다.

“차라리, 차라리 그때 절 살려 주시지 않으셨다면 되었잖아요. 왜 절 살려 주셨나요?”

한 맺힌 목소리. 심금을 자극하는 그 목소리가 오딘의 가슴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오딘은 아무런 대꾸도,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채신머리도 모르는지 아랫배가 거북해지며 그의 남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당신께서 얼마나 많은 여자를 거느리시는지 전 상관 않겠어요. 다만,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절 안아주세요. 이 엘레느는 그것을 평생의 추억으로…….”

엘레느는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오딘이 돌아서며 허리를 껴안고 오랜 여정으로 부르튼 입술을 포개었기 때문이다.

엘레느의 눈은 급격히 커졌다. 실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더 긴 행복을 위해 그녀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문밖까지 남녀의 격정 어린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오늘은 사고가 터졌던 그날이 아니었다.

문과는 멀찌감치 떨어진 사람들이 여왕의 침실만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벌써 며칠째야?”

“삼 일째요.”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은 대전 회의에 소집된 신하들이었다.

아레인의 여왕은 정사(政事)를 내팽개치고 정사(情事)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지체 높으신 두 분은 도무지 문밖으로 나올 생각을 안 했다. 그 점이 신하들에게는 불만이었다.

“허허, 이러다 우리는 왕성에 눌러 살게 되겠소.”

“잘된 일 아니오?”

“성에 있는 마누라는 어쩌고?”

“에휴, 우리 마누라는 요새 밤일에 영 흥미가 없는 듯하오.”

은밀한 얘기, 저마다의 불평들이 터져 나왔다.

발데르가 그 광경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그는 정말 흡족해하는 얼굴이었다.

바로 그 옆에서 괴짜 노인이 투덜거렸다.

“나는 이제 더 왕성에 머무를 필요가 없을 듯하군. 나 없어도 손녀딸은 충분히 행복할 테니…….”

“저번에도 다녀오셨지 않습니까.”

보탄의 주절거림이었다.

“그때는 그때고, 이제는 내가 필요 없을…….”

차마 말을 마치기 전에 누군가의 손이 괴짜 노인의 어깨를 짚었다.

이 성에서 누가 그럴 수 있을까. 그럴 만한 오딘과 엘레느는 저 안에 있다.

의아하여 괴짜 노인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고개를 돌렸다. 그 즉시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버렸다.

오딘과 마찬가지로 검은 머리카락에 흑안.

둘은 잘 아는 사이인 듯했다.

아그리스가 잇몸을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고르다노스, 네놈도 여기 있었구나.”

고르다노스. 몇 번이나 괴짜 노인이 엘레느에게 들려주었던 얘기 중에 섞여 있던 이름이었다.

괴짜 노인의 목소리는 당혹감에 떨리고 있었다.

“다, 당신이 여기 왜…….”

발데르와 보탄이 이를 눈여겨보았다.

그는 얼마 전 오딘과 함께 입궁했던 사람이질 않은가. 그렇다는 말은 커다란 위협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괴짜 노인의 동공은 여전히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착각 마라. 여기를 어쩌려고 온 건 아니니까.”

아그리스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보탄이 다급히 물었다.

“누구입니까? 어르신.”

괴짜 노인에게서 떨리는 목소리가 겨우나마 흘러나왔다.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

듣는 사람들은 다행히 발데르와 보탄뿐이어서 파장은 커지지 않았다.

“어르신께서는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괴짜 노인의 입술을 비집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또한 드래곤이니까.”

8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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