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리온 상단 (55/67)

가리온 상단

그건 분명 아그리스의 책임이었다. 데려와 놓고 신경조차 쓰질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쉬바인은 구명의 은혜에 감사하다며 읊조려 댔다. 죽다 살게 되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정말 이분은 뒤끝이 강하시구나.’

칭찬도 험담도 아닌 애매모호한 생각. 쉬바인은 아그리스 대하기를 살얼음판 걷듯 하게 되었다.

그렇게나 신봉했던 드래곤에 대한 마음은 다 어디로 가고 이제는 두려움만이 남아 있었다. 그 결과 아그리스와 눈만 마주쳐도 흠칫 놀라게 되었으니, 아그리스는 얼떨결에 길을 제대로 들인 셈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있는 4개의 봉우리.

사방으로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의 안개가 끼어 있었다.

쉬바인은 행여 아그리스와 멀어질까 두려워 잰걸음으로 바짝 거리를 좁혔다.

아그리스는 그 안으로 걸음을 옮겨 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 서서히 시야가 맑아졌다. 마찬가지로 눈밭이었다.

그 눈밭 위에 거대한 순백의 생명체가 잠들어 있었다.

저도 모르게 쉬바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보는 대상의 자태가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정수리 위로 길게 뻗은 뿔은 천하의 명검을 연상시켰고, 몸을 감싼 날개는 흐드러지게 핀 꽃들보다 아름다웠다. 게다가 수줍은 듯 몸을 감싼 매끈한 꼬리……. 전체적으로 책에서 본 것보다도 마른 체형이었다.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홀려 쉬바인은 당장 달려가 손만이라도 대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성은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 대신 경각심만 곤두세웠다.

‘드래곤이다. 드래곤이란 말이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주로 극지방에만 서식한다는 화이트 드래곤이었다.

다른 드래곤들에 비해 비교적 온순하다고는 하지만, 드래곤인 건 마찬가지.

쉬바인은 한 걸음도 더 떼질 못했다.

좀 더 다가오는 아그리스의 발소리를 눈치 챘는지 그것은 감겼던 눈을 서서히 떴다. 그러자 두 갈래의 혓바닥이 날름거렸다.

그것은 검은 머리카락의 한 남자를 주시하며 긴 목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들어올리나 싶더니 이내 빠르게 하강시켰다.

대상을 살피는 것이다.

용케도 그것은 아그리스를 알아봤다.

[오라버니?]

“오랜만이구나.”

그 한마디에 화이트 드래곤은 쓰다듬어주기를 바라는지 조심스레 머리를 들이밀었고, 아그리스는 성의 없이 그 하얀 머리통을 몇 번 쓱쓱 문지르나 싶더니 이내 관뒀다.

그에 그녀 또한 들이밀었던 머리를 내빼며 구시렁거렸다.

[여전하시군요.]

“…….”

문득 그녀의 시선이 아그리스 어깨 너머의 인간에게 향했다.

[애완인가요?]

“그런 건 아냐.”

모호한 대답이었다.

[그럼 얼려 먹으려고 가져온 거라는 얘기예요?]

그녀의 말. 그 말은 쉬바인도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는 얘기로 봐서는 종종 그런 경우가 있었던 듯하다.

아그리스의 포악성은 진즉부터 알았지만, 잡아먹으려고 데려온 거라니… 이제는 오딘을 안 보기라도 할 참인가?

아예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오딘이 궁정 마법사 하나를 위해 일평생을 바쳐 아그리스를 쫓아다닌다는 보장도 없질 않은가.

자비를 바라는 쉬바인의 애처로운 눈초리는 아그리스의 등에 꽂혀 있었다.

다행히 아그리스에게 그럴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내가 인간을 잡아먹는 것 봤냐?”

[그러고 보니 아직 제 눈앞에서 인간을 드신 적은 없는 것 같군요.]

별생각 없이 던진 말에 아그리스는 눈알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쳤다.

“안 봤을 때도 안 먹었어!”

[깔깔깔, 알았다고요.]

그녀는 의도하지 않게 이렇듯 아그리스를 몰아세우곤 했다. 이것도 어쩌면 천성이었다.

이번엔 아그리스가 그녀를 나무랐다.

“오면서 보니 아직도 가디언 하나 세워두질 않았더구나.”

[호호, 귀찮아서 말이에요. 잘 아시면서.]

그녀의 귀차니즘은 극에 달해 있었다. 아그리스가 지척에 다가올 때까지 잠을 잔 이유도 이와 동일했다.

둘을 보자니 쉬바인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블랙 드래곤과 화이트 드래곤이 어떻게 오빠, 동생이 될 수 있을까. 족보가 꼬여도 이상하게 꼬였다고 생각했다.

그 부분을 그녀가 거론하고 나왔다.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를 만난 지도 6,757년이나 흘렀군요.]

보통 드래곤은 8천 년에서 많게는 1만 년을 산다고 전해진다. 말인즉슨, 둘 다 고룡이라는 얘기다.

그녀의 눈빛처럼 아그리스의 눈빛도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길을 헤매다 여기에 왔었죠. 그때는 참 방향 감각이 없으셨는데 말이에요. 그 뒤로도 집을 못 찾아가셨잖아요.]

그녀의 아그리스 바보 만들기는 은연중에 계속되고 있었다. 보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녀의 눈에 쉬바인은 손님으로 비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그리스에게는 쉬바인 또한 신경 써야 할 대상이었다.

하다못해 아그리스가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듣는 귀도 있으니 작작하자고.”

그녀는 의아해했다. 아그리스가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게 그러했다.

[아… 꽤 중요한 분이셨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미안해요.]

“중요한 놈은 아니야.”

[그럼 왜 데리고 다니시는 거예요? 그다지 멋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데…….]

액세서리처럼 달고 다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하는 말이었다.

아그리스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전에는 대화가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간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때에 따라 감탄사도 터뜨리고 흥분도 하면서 그의 얘기에 빠졌다.

다 듣고 난 후에야 그녀는 모든 걸 이해할 수 있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제야 알겠어요. 그런 대단한 인간이 있었다니……. 저도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

“그놈은 정말 수수께끼야. 지금의 유희에는 후회가 없다. 멋모르고 까부는 녀석들을 빼면.”

[대들어요? 누가요?]

아그리스는 버럭 성을 냈다.

“누구긴 누구야! 인간 놈들이지!”

인간으로 폴리모프를 해 유희를 하고 있다면 능히 추측 가능한 일이었다.

여전히 그녀는 자신의 어투가 문제가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럼 하시던 대로 다 죽이시지 그러셨어요.]

아그리스 스스로가 포악하다 자부할 정도였지만, 자랑할 것은 못 되었다. 특히나 인과관계가 얽혀 있는 인간이 듣기에는 부적절한 얘기였다.

‘나 원, 화를 식히러 왔다가 더 쌓여 버리겠어.’

가장 평온함을 주는 곳은 고향이다. 엄밀히 보면 이곳은 아그리스의 고향은 아니었지만, 많은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더더군다나 시원함은 불같이 달궈진 가슴을 가라앉혀 준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아그리스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고향땅보다야 이곳이 화기를 다스리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다.

속으로는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사실 마음이 진정되는 느낌은 확실했다.

화이트 드래곤 샤브리오스. 이 녀석은 아그리스가 가장 아끼고 귀여워하는 녀석이었다.

다소 엉뚱한 측면이 있어 지금처럼 자신을 곤란하게 만든다 뿐이지, 이 순간만 지나고 나면 다 기억으로 남고 웃음을 안겨 준다.

여전히 샤브리오스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참, 오라버니, 드릴 게 있어요.]

말과 함께 그녀의 거대한 육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니 금세 무엇을 들고 나타났다. 그것은 성성한 수염과 머리카락에 옷을 잔뜩 껴입고 있는 드워프였다.

[보금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안 그래도 찾아뵐까 했는데 깜빡 잠이 들어서…….]

그랬다. 둘은 아그리스가 라테우스 검은 산맥에 둥지를 튼 이래 만나지 못했었다.

그녀가 드워프를 선물이랍시고 주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사 선물인 것이다.

[보시다시피 아이스메이드예요. 철을 잘 다루고 조각에 능하죠.]

로마노스 대륙에서 드워프는 크게 두 종족으로 나뉜다.

파이어해머와 아이스메이드.

파이어해머가 불을 상징한다면, 아이스메이드는 얼음을 상징하는 드워프였다.

주거하는 지역이 달랐기에 두 드워프들은 어지간해서는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너는?”

[한 녀석만 있어도 돼요. 집에 두 녀석이 있는데 서로 잘 안 맞는지 매일 투덕거려요. 이참에 갈라놓아야겠어요.]

이 녀석은 얼마 전에 데리고 온 놈이었다.

산사태를 만났는지 조난당해 있던 것을 데려와 먹여 주고 재워주고 했더니 보답을 하겠답시고 스스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원래 있던 녀석과 시끄럽게 다투곤 하는 바람에 샤브리오스도 난감했던 것이다.

드워프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굳힌 모양이었다. 그는 아그리스를 향해 오체투지를 하며 인사를 올렸다.

“위대하신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미천한 놈의 이름은 버블이라고 합니다.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보통의 종족들이 드래곤을 대하기를 이러했다.

아그리스는 녀석을 받기로 했지만, 어디에 써야 좋을지 난감해했다.

전과 마찬가지로 레어를 수리하고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레어는 후에 유희를 끝내고 터를 알아본 후에나 작업할 테니까.

그 전에 녀석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 * *

“그래서 이 녀석을 데려왔다고?”

오딘의 말에 아그리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 데려온 것, 레어를 물색하기 전까지는 책임져 줘야 한다.

아그리스는 마치 드워프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는 척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오딘에게 빌려 주면 분명 좋아할 테지만, 과한 선심은 사이를 벌려 놓는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오딘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둘 데가 없다는데 어찌하랴.

“그럼 살탄에게 보내지.”

이로써 로만과 신성 제국의 국경 지대에 있는 도자기소에 2명의 드워프가 배치되었다.

귀한 인력들이 있으니 오딘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그곳으로의 군사 보충을 지시했다. 이는 로만의 공왕 레오노가 바라는 일이기도 하였는데, 신성 제국의 로만에 대한 압박과 시기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 * *

가리온. 그 이름은 상단사에서 오래도록 회자되어왔다.

최초의 상단주는 무일푼으로 시작해 불굴의 의지로 상단을 일궜으며, 형편이 어려운 여러 사람들에게 이익을 나눠주었다.

가리온이 돈을 버는 것은 가난한 집안이 줄어드는 것에 비례했다. 그리고 이는 가리온이 최고의 상단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가리온에 돈을 쓰는 것은 일종의 자선 행위였고, 선행이었기에 전혀 아까워하질 않았다.

하지만 가리온의 이런 상단 정신은 그 상단주가 의문사를 하며 뒤틀려졌다.

단시간에 급속히 성장한 가리온은 타 상단들과 연계했으며, 귀족들을 등에 업었다.

약한 이들에게 가던 돈들은 강한 이들에게 갔으며, 이를 바탕으로 창출된 막대한 자금력과 군사력은 가리온이 최고의 상단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들은 유통망의 장악을 꾀했고, 갖은 불법을 저지르며 이익을 극대화했다.

불행히도 가리온을 돕던 상단들은 이들에 의해 토사구팽당했다.

타 상단들은 종종 순위 바뀜이 있었지만, 가리온의 순위는 요지부동이었다. 누구도 이들의 질주를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상단들 간에 가리온을 표적으로 삼는 일은 최고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말까지 나돌았겠는가.

하여, 마르크 또한 평소에 이들을 표적으로 삼는 것은 자제했었다.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한 노인의 얼굴을 짓밟고 있었다.

그 노인은 전에 이스론에 들러 외상으로 물건을 해가게 되었다면서 기뻐하던 노인이었다.

그 물건들은 부서지고 깨어진 상태였다. 노인의 심정을 마르크는 십분 헤아릴 수 있었다.

청년은 자신의 행동에 반성하기는커녕 잇몸까지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할아범, 내가 여기서 물건 팔면 안 된다고 했어, 안 했어?”

“하, 하셨습니다.”

청년은 지그시 무릎을 굽혀 그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았다. 그러자 노인이 받는 고통은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크, 크윽.”

“그럼 하지 말았어야지. 왜 말을 안 들어?”

노인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있는 처지도 못 되어 보였다. 마르크는 발만 동동 굴렀다.

‘근방에 계시긴 할 텐데… 이럴 때 뭐 하고 계신담? 혼자 있으니 확 쓰러뜨리고 도망칠까?’

별생각이 다 들었다. 다 볼일을 보고 있는데 혼자 시장을 둘러보겠다고 했던 것이 그만 못 볼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노인의 코가 깨졌는지 피가 터졌다. 그 모습에 마르크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야!”

마르크의 외침에 제 세상인 양 행패를 부리던 청년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

“그래, 인마!”

사내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까딱거려 마르크에게 오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 마르크는 더 강하게 나왔다.

“네가 와, 인마! 어디서 오라 가라야!”

“너 내가 누군지는 알고 하는 얘기냐?”

“누구긴 누구야? 잘해봐야 가리온의 똘마니겠지.”

말은 그렇게 거리낌 없이 내뱉었지만, 속으로는 막연한 걱정이 앞섰다.

‘내가 과연 잘하는 짓일까?’

폴칸으로부터 들었던 가리온의 보복은 무시무시했다. 자칫 잘못하면 이스론 상단은 역사에서 지워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청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얘들아.”

곧 우렁찬 대답이 들려왔다.

“네, 형님!”

황당한 일이었다. 건장한 체구의 남자 2명은 청년보다 예닐곱 살은 많아 보였으므로. 그런데 서슴없이 형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피떡을 만들어줘라.”

두 남자는 너무 우락부락한 체구라 겉으로는 둔해 보였지만, 눈치 하나는 빠른 듯했다. 청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둘은 손마디를 꺾으며 앞으로 나섰다.

마르크는 뼛속까지 상인이었다. 이런 장정들을 무슨 수로 당해내겠는가.

“너, 너 비겁하게…….”

뒷걸음질을 치는 마르크를 보며 청년은 코웃음을 쳤다.

막 두 거한이 마르크에게 다다를 무렵이었다.

화르륵! 펑!

급작스럽게 날아든 불덩이도 놀라웠지만, 그를 간파하고 회피한 거한 또한 대단했다.

불덩이는 대상을 놓치고 애꿎은 땅만 태우다 사그라졌다.

마르크가 눈을 돌린 곳에 쿤이 서 있었다.

“제가 상대할게요. 피하세요.”

마르크는 눈물 나도록 쿤이 고마웠다.

그러나 걱정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쿤이 마법을 할 줄 안다고는 했지만, 직접 실력을 보인 적이 없어 못미더웠던 탓이다.

“쿤, 두 명은 무리 아니야?”

“보통 사람들은 아닌 것 같지만, 해보는 데까지 해봐야죠. 맡겨 주세요.”

거한들도 당장에 마르크를 쫓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보다야 마법을 사용하는 녀석이 훨씬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거한들의 움직임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빨랐다.

그러나 쿤의 몸은 더 날래게 움직였다. 헤이스트를 사용한 결과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이 광경을 보겠다는 사람들이 들끓었던 관계로 쿤은 마법을 난발할 수 없었기에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쿤이 하도 재빨리 달아나서 거한들은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기회는 찾아왔다. 마법의 지속 시간이 다 되었는지 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더뎌졌던 것이다.

거한들은 이때다 싶어 양 방향에서 쿤을 깔아뭉갤 듯 다가왔다.

그때였다.

“크로스 파이어(Cross Fire)!”

쿤의 양 손바닥에서 발출된 2개의 불덩이가 파고드는 거한들의 몸뚱이로 날아들었다.

불덩이들이 제각기 목표들로 파고들자 거한들은 차마 몸을 내빼지 못하고 불덩어리와 맞닿았고, 그 순간 폭발했다.

화악! 콰쾅!

각기 배와 가슴 부위에 불덩이를 얻어맞은 거한들은 아픈 부위를 손으로 누르며 통증을 호소했다.

“끄으~”

주춤거리던 두 사람은 더 서 있을 힘이 없었던지 이내 땅에 무릎을 꿇었다. 그나마 몸이 단단했기에 이 정도였다.

어쨌건 쿤은 대상을 쓰러뜨렸다는 안도감에 이마의 땀을 훔치며 한 시름 덜 수 있었다.

“휴우~”

마르크는 쿤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청년의 태가 제법 나지만, 아직은 어리다. 그런데도 저런 녀석들을 단번에 쓰러뜨렸으니 어찌 놀랍지 않은가.

마르크는 쿤을 칭찬해주는 것을 뒤로 미루고는 고개를 돌려 문제를 일으킨 청년을 쏘아보았다.

기왕 벌어진 일,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었다.

청년을 잡아 두들겨 패고 반드시 사과를 받아낼 작정으로 마르크는 대뜸 그를 향해 달려갔다.

청년 역시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잡히면 몸이 성하지 못하겠다는 판단에 그는 대뜸 줄행랑을 쳤다.

아까와는 또 다른 추격전이 재개되었다.

지금의 일들은 가리온의 상단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부두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광경들이었다.

“넌 잡히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헉헉…….”

마르크보다도 청년의 숨이 먼저 가빠왔다. 하여, 청년의 옷자락은 마르크의 손에 잡힐 듯 말 듯했다.

그러나 마르크는 청년을 붙잡기도 전에 누군가의 배에 부딪혀 뒤로 나동그라졌다.

쿵!

고개를 들어 보니 아까보다 훨씬 큰 키에 비대한 몸집을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청년은 잘되었다는 듯 그에게 모든 것을 일러바치려 했다.

“풀페스 님, 이 녀석이, 이 녀석이…….”

풀페스라는 거한이 물었다.

“어쨌다는 얘기냐?”

황급히 청년은 숨을 돌리며 이실직고했다.

“제 동생들을 쓰러뜨리고, 절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마르크는 아차 싶었다.

눈알이 뒤집혀 가리온의 패거리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었던 탓이었다.

한 행렬이 정박해 있는 배로 향하고 있었다.

그 중간으로 마르크가 오랏줄에 두 손이 묶여 끌려가는 중이었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져 있어 소리를 칠 수도 없는 형국이었다.

가는 내내 청년은 마르크의 엉덩이를 계속 걷어차 댔다.

그 와중에 한 남자가 더 끼어들었다. 그는 놀랍게도 베스였다.

베스는 마르크가 잡혀 가는 것을 보며 재빨리 다가와 주변인들에게 인사부터 했다. 마르크와 추격전을 벌이던 청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주위에 양해를 구한 뒤 그는 마르크의 귀에 입을 바싹 갖다댔다.

‘크윽.’

마르크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베스가 저번의 분풀이로 귀를 물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의 귀에서 입을 뗀 베스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몰랐구나. 나도 가리온의 일원이라는걸.”

행동을 매우 조심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말단인 듯했다.

그래도 의외였다. 상단들을 전전했다지만, 그가 가리온에 들어와 있으리라고는 마르크도 전혀 짐작치 못한 일이었다.

베스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마르크의 귀에 대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가면 넌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끽이야, 끽.”

듣는 마르크도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가리온은 종종 눈에 걸리던 사람들을 배에 태워 바다에 빠뜨린 후 사고사로 처리하고는 했다. 하물며 타지에서 온 사람 하나 없애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나 마르크는 자신이 그리되더라도 누굴 탓할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된 것은 자신이 경솔했기 때문이며, 여태 여러 상단들을 혼내준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했기에 지금 죽는다 해도 운명으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새삼스레 옛일들이 떠올랐다. 특히나 아레인 왕성에서 오딘을 마주쳤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은 너무 강렬해 머릿속에서 떠날 줄 몰랐다. 그러다 보니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까지 지어졌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이에 쏠려 있었다. 그중에는 아그리스도 섞여 있었다.

또 아그리스는 혼자였다. 드래곤의 습성상 누구와 잘 어울리질 않았던 탓이다.

아그리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패거리들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나선다면 전에처럼 또 감정이 격해질 테고, 주변은 쑥대밭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점혈이나 분근착골수를 구경하는 것은 이번에도 물 건너가는 것이다.

그때 마르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아그리스를 보게 되었다. 그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마르크는 발버둥을 쳤다.

“읍, 읍!”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청년이 그런 마르크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왜 똥 못 싼 강아지처럼 안달이냐?”

마르크는 눈을 치뜬 채 그를 노려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사이 베스가 청년에게 조심스레 말을 올렸다.

“형님, 제가 손보면 안 될까요? 이 녀석과 안면이 있어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년에게서 호통이 터졌다.

“이 새끼가 주제넘게 어디서 나서!”

마르크보다도 어려 보이는 청년에게 베스는 고개를 숙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 꼴이 우습기도 할 테지만, 마르크는 거기에 신경을 기울일 수 없었다.

‘제발… 아그리스 님이 이쪽을 봐주셔야 할 텐데… 뭘 저렇게 찾으시는 거야?’

마르크의 간절한 바람은 아그리스에게 닿지 않는 듯했다.

쿤마저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고, 사람들이 아그리스의 모습을 가리며 희망도 꺼져 갔다.

‘배에 타는 순간 모든 게 끝이다.’

그를 알고 있음에도 마르크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차라리 아그리스를 못 보았다면 아까처럼 털털하게 배에 올랐을 것을…….

선착장과는 무려 백 보의 거리만 남겨 두고 있었다.

바로 그때, 얼핏 헤르미온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조차도 삽시간에 사람들 틈에 가려졌다.

일이 묘하게 꼬이는 것 같아 마르크는 짜증이 났다.

‘차라리 눈을 두지 말자.’

오죽하면 그런 생각까지 들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배에 타기 전까지는, 아니 배에 오른 후부터 물에 빠지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이쪽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 이스론의 호위 무사들과 눈이 마주쳤다. 너무 감격스러워 마르크는 눈꼴에 이슬이 맺혔다.

아니나 다를까 옆쪽으로 무귀가 보였다. 그리고 악귀도 보였다. 곧 제라드 장로가 눈에 들어왔을 무렵, 예상했던 목소리가 무리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멈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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