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그리스의 분노 (54/67)

아그리스의 분노

대륙에는 크고 작은 수백, 수천의 상단들이 존재한다.

그들 누구나가 꿀 수 있는 꿈이었다.

최고의 상단으로 거듭나는 것!

그들은 돈을 최고로 여겼다. 허상밖에 없는 신보다도 더욱…….

일각에서는 신이 곧 돈이고, 돈이 곧 신이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었다.

돈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없었다. 부귀와 영화 모두가 그러했다.

돈의 힘이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상단주, 그리고 주요 요직에 앉은 상단인들은 자신의 상단이 대륙에서 몇 번째라는 데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운과 노력, 그리고 재능이야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갈 수 있다지만, 같은 노력과 같은 운, 재능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부터 이를 신경 쓰고 두려워한 이들은 임의로 질서를 만들었다.

설혹 대단한 존재가 나온다 하더라도 뒤집을 수 없을 만한 절대 질서!

절대 질서에 유통망을 장악하고 권력을 등에 업는 것은 빠질 수 없는 필수 요건이었다. 이렇게 해서 자리를 잡게 된 순위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절대 질서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떠오르는 2개의 상단에 의해서.

이스론과 레인 상단이 바로 그들이었다.

서열 5위라 일컬어지던 레아넌은 단시간에 한도 끝도 없이 몰락했다.

“카하하하, 고소해 죽겠다고요. 레아넌은 벌써 12위로까지 밀렸답니다.”

마르크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너르고 완만한 경사의 산처럼 봉긋이 변한 눈꼴에는 물기마저 맺혔다.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틴도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후련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딘은 상단 후리기에만 주력했다.

누가 좋은 상단이고 나쁜 상단인지는 따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팔을 뻗었을 때 바로 잡았던 이스론과 아레인의 레인 상단에 걸림돌이 될 만한 것들을 우선적으로 쓸어버렸다.

다행인 것은 이스론이 정도를 걸어온 상단이었다는 점이다. 하여, 윤리를 저버리지 않은 상단들은 그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마르크가 채 웃음을 그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오딘은 한 가지 염려를 드러냈다.

“그래도 상단이 너무 많이 꼬이는군.”

기댈 곳 없는 상단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부상하는 이스론 상단이 조만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거라 판단한 눈치 빠른 상단들은 재빨리 이들에게 줄을 섰다.

줄을 대기 위해 굽실거리는 이들도 있었고, 뇌물을 준비해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는 한사코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악덕을 일삼아 평소에 소문이 안 좋게 나 있던 상인들은 되도록 멀리했다.

“전부 다 받지는 않으니 괜찮을 거예요.”

“좀 더 심사숙고하는 게 좋을 거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마르크는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순간부터 마르크는 오딘의 말을 맹신하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없었을뿐더러, 그의 말을 듣고 잘못된 적이 없었다.

특히 방금 거론한 부분은 마르크도 걸리는 부분이었다.

오는 족족 받는다면야 이스론은 지금보다 더 성장의 속도를 내게 될 것이지만, 불만의 목소리도 들려올 것이었다.

‘서류들은 받았지만, 따로 심사를 거쳐야겠어.’

본디 장사꾼들은 이익에 눈이 먼 경우가 많았다. 상거래의 윤리 따위는 내팽개친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다.

이윤을 더 남기기 위해 물건을 속여 팔기도 했고, 심지어 입으로 들어갈 먹을거리에 장난을 치는 자들까지 있었다.

이렇다 보니 상당수의 상인들과 상단들은 종종 구설수에 오르곤 했다.

문득 마르크는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커다란 상단들은 대게 욕을 먹어요. 그것도 다 욕심과 오만이 부른 거겠죠?”

“초심을 잃는다면 언젠간 망가질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의 대화가 오가고 있는 도중에도 아그리스는 얼마 전에 또 보았던 분근착골수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그것참 난해하군. 그냥 아무 곳이나 잡아 꺾고 분지르는 게 아니었다니…….’

분근착골수란 원래 관절을 꺾는 금나술에서 진일보한 것이었다.

아무 곳이나 꺾고 분지른다면 누구나 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난관은 또 있었다. 그 신체를 원상태로 돌려놔야 후에도 마주쳤을 때 겁을 먹을 게 아닌가.

다행히 이는 아그리스의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리송한 부분을 풀지 못하고, 아그리스는 부러 마르크에게 말을 걸어왔다.

“오늘은 어떤 곳을 급습할 거지?”

“라울로입니다. 상단 서열 11위였는데 지금은 더 올랐을 거예요. 근래부터 저희가 눈치를 봐야 했거든요.”

그딴 것은 아그리스의 관심 밖이었다. 그는 오늘 오딘이 분근착골수를 선보일지 선보이지 않을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는 인간들의 돈놀이에 흥미도 못 느꼈고, 별로 부럽지도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아그리스는 최단 시간 안에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될 수도 있는 존재였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이 레어에 숨겨 둔 보석들을 돈으로 맞바꾼다고만 해도 천문학적인 액수를 기록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저 그 잔인한 손속을 다시 보길 원할 뿐이었다.

일행들이 다섯 발자국을 더 걷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옆쪽에서 거들먹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이게 누구야? 마르크, 마르크 맞지?”

지목을 당한 마르크가 고개를 돌려 보자 과연 아는 자가 서 있었다. 그다지 반갑지는 않은 베스라는 이름의 사람이었다.

예전부터 마르크는 일에 남다른 의욕을 보였다. 그는 보다 많은 인맥을 가지고 싶었던지 여러 사람들과 어울렸다.

이스론뿐이 아닌 타 상단의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냈는데, 그 관계에 먹물을 끼얹은 것이 바로 이 베스였다.

마르크는 또래들에게 제법 인기가 있었다. 베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항상 분위기를 주도하고 이끌어가던 마르크였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덩치 큰 베스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런 마르크의 초라함에 실망한 또래의 아이들은 하나 둘씩 곁을 떠나갔다.

베스는 강압적으로 마르크의 호주머니를 털어가고는 했는데, 수금을 받은 돈에까지 손을 댔다. 그러자 그것을 빌미로 상단원들이 나서 그가 속한 상단에 항의를 하는 바람에 베스는 더 마르크를 볼 수 없었다.

그는 대뜸 다가오더니 하는 말이 이러했다.

“야아, 그러고 보니 한 육 년은 지난 것 같네. 그때는 코흘리개였는데 말이야, 응?”

“…….”

찌그러진 마르크의 표정에는 아랑곳 않고 베스는 과거의 버릇을 못 버리고 계속 치근댔다.

“카하하하, 네가 장사를 한다고 나왔을 때가 어제 같은데 이제 좀 컸네. 키는 그대로지만 말이야.”

여전히 깔아보는 말투였다.

이 순간, 그는 마르크를 막 대하는 것 빼고도 잘못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마르크의 일행 모두를 무시한 것은 그야말로 치명적인 실수였다.

“여어, 이 엘프 아가씨는 그때 그 아가씨로군. 몰라보게 예뻐졌는데?”

헤르미온은 눈을 흘길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머쓱한 기분이 들었던지 그는 어깨로 마르크를 툭툭 밀며 무리한 요구를 했다.

“나한테 저 아가씨 소개 좀 시켜 줘라. 응?”

“…….”

기어코 마르크는 짜증스런 기색을 떠올렸다. 덩달아 베스의 인상도 험해졌다.

“아쭈? 이제 컸다 이거냐? 그 태도는 뭐야?”

기분이 상한 베스는 성인이 된 마르크의 코를 쥐고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겁도 없이 말이다.

그것도 오딘이 옆에 바짝 붙어 있는데 하는 행동이니 이를 보는 일행들은 더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과연 그 행동이 오딘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아그리스는 어쩌면 이 남자가 분근착골수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여태처럼 전혀 관여하지 않고 몰입해 지켜보았다.

탁탁탁.

번개 같은 손놀림이었다.

오딘의 손가락과 손등은 몇 차례 베스의 몸에 닿았다 떨어졌을 뿐 어떤 흉상도 내지 않았다. 그 점이 아그리스를 더 의아하게 만들었다.

‘녀석, 뭘 한 거야?’

의문은 곧 밝혀졌다. 베스는 기겁하며 당혹스러움을 떨치지 못했다.

“…뭐, 뭐야? 내 몸, 내 몸이 왜 이러지?”

흡사 석상처럼 베스의 몸은 일체의 미동도 없었다.

마르크는 대들 생각으로 주먹을 불끈 쥔 상태였다. 그러나 그럴 필요성이 없어져 버렸다. 오딘이 손을 써주었으므로.

“움직이지 못할 테니 당한 만큼 실컷 흔들어줘라.”

마르크는 영문을 알지 못했다. 그가 왜 못 움직이게 되었는지. 하지만 일행들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경우가 아닌 듯싶어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감정이 섞여 손에 힘이 들어가자 금세 베스의 코는 발개졌다.

“너, 너 이 손 못 놔? 야, 얀마!”

종잇장처럼 인상을 구겨 가며 갖은 협박을 했지만, 마르크는 쉽게 놓아줄 수 없었다. 몇 번 흔들다 말고, 말고 한 것을 오딘이 책동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되겠어? 좀 더하지?”

베스의 코는 이제 빨갛다 못해 껍질이 벗겨졌으며 지저분하게 콧물까지 흘러내렸다.

가해자인 마르크도 고역이었다. 더러운 콧물이 손을 더럽혀 인상을 잔뜩 찌푸리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렇다 보니 복수의 즐거움은 전연 없었다.

오죽하면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핑계 삼아 날 괴롭히시려는 게 아닐까?’

베스의 코가 퉁퉁 불어서야 오딘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제 제법 볼 만한데?”

제라드가 웃음을 머금고 건네준 손수건으로 마르크는 콧물이 묻은 손을 박박 닦았다.

불행하게도 베스의 굴욕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마르크와 함께 있는 놈들이 미련을 접고 앞을 향해 나아가나 싶더니, 그놈들 중 제일 후미에 가던 호위 무사 하나가 베스의 뒤로 몰래 접근해 바지를 내려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그냥 바지만 내리고자 했다. 하지만 거칠게 잡아 내린 바람에 속옷까지 덩달아 내려가 버렸다.

미안해서 속옷은 올려 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이미 집중되어버렸으니…….

남자들은 그렇다 쳐도 지나치던 여인들은 흉측한 물건이 대롱거리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몇몇 중년의 여인들은 대담하게도 그를 대놓고 보거나 얼굴을 가리는 척하고 손가락을 벌려 그를 감상하며 킥킥거렸다.

근방에 바지를 추슬러줄 너그러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시점에서 베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저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뿐이었다.

‘마르크, 이놈! 가만두지 않겠다.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다!’

베스가 이를 갈건 말건 마르크는 조금도 겁나지 않았다. 해묵은 감정이 해소되어 고소해할 뿐이었다.

그 외의 이스론의 구성원들은 방금 전 일어났던 일에 대해 그러려니 했다. 방금 오딘이 혈도를 짚어 몸을 굳게 만들었던 것 말이다.

‘하도 놀랄 일들을 많이 하시니까.’

이치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데 반해, 아그리스는 또 한 번의 놀라움을 경험했다.

‘아까 그건 또 뭐야?’

분명 색다른 것이었다. 대상의 몸에 손을 몇 번 가져다대는 것만으로 미동도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분근착골수에 이어 또 하나의 호기심이 아그리스를 자극했다.

그것 역시 매력적인 기술이었다. 겁에 질려 있는 두 눈을 생생히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다시 말해 대상을 가지고 놀기 좋은 그런 기술이었다.

“그건 뭐였지?”

궁금한 것을 못 참고 묻는 아그리스가 오딘은 성가셨다.

“근래 들어 묻는 것이 많아지는군. 다 아는 존재 아니었나?”

그렇다. 드래곤은 다 아는 존재였다. 아니,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보여야 했다. 그래야만 더한 위엄을 뽐낼 수 있으므로.

하지만 왕성한 드래곤들의 호기심이란 별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나 아그리스는 드래곤의 유아기라고 말할 수 있는 헤츨링 시절부터 궁금한 것은 꼭 알아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 이유로 아그리스는 발끈했으나 꾹 참았다.

이제는 이렇게 이죽거려 대는 오딘에게 적응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넌 다른 차원에서 왔으니 내가 그곳의 지식을 알 턱이 없잖아. 그냥 묻기만 하는 거다.”

차마 가르쳐 달라는 말을 더하진 않았다. 그것은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 될 테니까. 대신 몇 차례 보고 연구는 할 생각이었다.

역시나 오딘은 까칠하게 굴기는 했지만 대답은 들려주었다.

“점혈을 해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일 뿐, 별거 아니다.”

“점혈?”

“그렇다. 인간을 포함해 생물들의 몸에는 무수히 많은 혈이 있다. 알려진 것,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쉽게 셈을 할 수 없을 정도지. 이 혈은 피가 흐르는 통로이며 기가 흐르는 통로이기도 하다. 어느 곳을 어느 강도로 누르느냐에 따라 일시적으로 몸을 마비시킬 수도 있으며 죽일 수도 있다.”

매우 친절한 설명이었다. 여태 건성건성 대답해오던 것에 비하면.

이는 드래곤들의 지식에는 없을 것이었다. 그 점에서 아그리스는 단연 뿌듯했다.

연구할 것은 2개로 늘어났다. 점혈이라는 것과 분근착골수.

그래도 혈이라는 것은 설명을 들어 개념을 찾게 되었지만, 아직 분근착골수에 대해서는 어떤 정의도 안 내려진 상태였다.

‘앞서도 물었다면 가르쳐 주었을까?’

이제 와서 묻는다는 것도 그랬다. 분근착골수는 하는 수 없이 눈으로 보고 분석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마침 한 상인의 짐수레를 뒤접어엎는 놈이 나왔다. 아그리스의 눈도 동시에 반짝였다.

‘시작이구나.’

당한 상인은 이스론에 가입되어 있는 사람이었지만, 역시나 떨거지들 처리는 이스론 상단원들의 몫이었다.

아그리스는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다.

‘나머지는 싹 다 없애버릴까? 그럼 이 녀석이 손을 쓰는 횟수가 많아질 거 같은데…….’

아그리스는 정말 그러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갑자기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오딘의 의심을 받게 될 것.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그만두는 게 옳았다.

‘칫, 뭐 이리 쓸모없는 녀석들이 많아가지고…….’

* * *

빨갛게 달아오른 해가 서산 너머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낮에 뿌렸던 씨가 싹을 틔울 무렵이 지났음에도 찾아오는 이들이 없었다.

날을 넘기게 될까 생각한 이들은 저마다 볼일을 보거나 일찌감치 휴식에 들어갔다.

그래도 아그리스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수천 년을 살아온 그에게는 하루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기다리는 것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지루했다.

탁탁탁!

먼 곳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더니 급기야 아그리스 앞에 몸을 드러냈다.

마르크였다.

“여기 계셨네요. 날도 추운데 들어가셔야죠.”

인적이 드물어지며 상인들은 부랴부랴 물품들을 정리하여 짐수레에 싣고 저마다의 보금자리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는 중이었다.

인간이 보여 온 관심. 그것은 아그리스에게 아무런 감흥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졌다는 걸 깨달은 아그리스는 마르크의 염려에 한마디 대꾸도 해주질 않은 채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렇게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문득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다.

“어딜 가려고?”

분명 시비조의 말투였다.

눈을 돌리자 예외 없이 조금 근사한 옷을 걸친 무리들이 보였다. 그것도 낮에 혼쭐이 났던 녀석과 함께.

반가움에 아그리스의 얼굴이 잠시 화색에 물들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자리엔 오딘이 없었다. 아니, 일행들도 없었다. 있다면 마르크 혼자였다.

아그리스는 오딘을 당장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마르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눈짓을 주었다.

“다녀와라.”

“괘, 괜찮으시겠어요?”

마르크가 걱정할 만도 했다. 그의 눈에 비친 아그리스는 치료에 일가견이 있을지언정 한 번도 힘을 과시한 적이 없었으므로.

아그리스는 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팔을 휘휘 저었다.

그러나 마르크는 차마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무리들이 가는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 행동을 비웃으며 조금 전에 말을 꺼냈던 거만한 목소리가 재차 입을 열었다.

“어딜 가냐고 물었다.”

“하하, 어딜 가기는. 당사자를 불러와야지.”

웃으며 하는 아그리스의 말이 이 무리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잔대가리를 굴릴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잔대가리라 한다. 드래곤의 머리를 두고 말이다.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아그리스의 웃음이 걷혀지는 것은 삽시간이었다.

마르크는 사태가 긴박하게 흘러감을 느끼고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가로막은 남자를 빠져나가려 했다.

“그, 금방 모셔 올게요.”

“그럴 필요 없어.”

쿠쾅!

드드드드-

흡사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들썩거렸다. 창문들이 깨어지고 건물이 흔들렸다.

오딘 일행이 묵고 있는 여관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식당 내부에서도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꺄악~”

여럿의 발소리들이 바닥을 쿵쿵 울렸다. 아마도 대피를 하려는 것이리라.

침대에 누워 있던 이스론의 일행들도 벌떡 일어섰다.

“무, 무슨 일이야?”

더러는 자신의 방에서 창문을 내다보았고, 또 더러는 자신의 방에서 문을 열어보았다.

일부는 원인을 목격할 수 있었다. 거대한 구덩이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모처럼 오딘은 쉬바인과 제라드와 함께 술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작금의 사태를 알고나 있다는 듯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결국 사고를 치고 마는군.”

벌컥!

틴은 사납게 문을 밀어젖히고는 오딘의 테이블로 급박하게 달려왔다. 불안함이 앞서 이유도 모르고 냅다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이 소란에도 그들이 앉은 테이블은 망가지기는커녕 위쪽에 놓인 안주거리와 술병조차 흩어지거나 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는 여파가 미치지 않은 건가?’

아니었다. 부근의 나무 바닥이 주저앉아 있었으므로.

그때, 쉬바인이 잔에 담긴 술을 입 안에 털어 넣는 오딘을 대신해서 물었다.

“무슨 일이오?”

“그, 그게…….”

말하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너무도 태평해 보였으므로.

자신이 괜히 난리를 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다행히 다른 문이 열리며 이스론의 호위 무사 하나가 뛰어와 틴의 입을 대신해주었다.

“바, 밖에 난리가 난 모양입니다.”

제라드는 넉넉한 미소로 그를 마주 보았다.

호위 무사는 이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만 같아 호들갑을 떨었다.

“거대한 구덩이가 파여 있습니다. 하늘에서 운석이라도 떨어진 게 아닐까 합니다.”

“알고 있네. 별일 아니니 돌아가서 쉬게.”

이 무렵 파르티잔은 조심스레 문을 열어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주절거리는 호위 무사를 두고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휴우~”

먼젓번 오딘이 언급하기를, 아레인에 돌아갈 무렵 놓아주겠다고 했었다.

자유를 준다니 당장엔 좋기만 했다. 오딘과 함께 있음으로써 파르티잔은 항상 눈치를 보아야 했고, 숨을 쉬는 것조차도 조심해야 했으므로.

여정 중 자신을 구타하는 일은 없었지만, 과거의 기억으로 비추어볼 때 눈 밖에 난다면 장소를 불문하고 호되게 당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단세포적인 발상이었다. 헤어질 때 밟는 코스, 그를 묵과한 것이다.

그 망할 쇠침이 아직 그에게 2개나 남아 있었다.

또한 오딘의 손을 떠나게 된다면 아그리스가 어떻게 나올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미리 레어로 보내놓겠지. 가디언들이 날 가두고…….’

떠오르는 미래는 암울 그 자체였다.

수심이 가득한 파르티잔을 보며 게티롱이 물었다.

“고민이라도 있소?”

정신세계가 4차원에 가 있는 놈한테 고민을 털어놓는다 해도 무엇 하랴. 파르티잔은 굳게 입을 닫아버렸다.

한편으로는 그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참 편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겠지.’

게티롱의 사고관은 보통의 사람들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것이니 미련은 일찌감치 접는 게 나았다.

“말하기 싫으면 그만두시구려.”

대범한 태도를 보이며 게티롱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으로는 아그리스가 다 죽고 남은 한 사내를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은 채 핍박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하하, 내 이웃이 또 큰일을 저질렀소이다.”

이미 파르티잔도 목격했었다.

블랙 드래곤을 이웃으로 생각하는, 아니 착각하는 게티롱의 모습이 기가 찼지만 파르티잔은 이제는 더 따지고픈 마음도 없었다.

‘속 편한 녀석, 저러다 죽으면 그만이겠지. 그것도 복이구나, 복이야.’

파르티잔이 생각하기로 내다놓는다면 비명횡사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순서를 꼽으라면 게티롱이 단연 으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꿋꿋이 살고 있다.

‘같은 사람이라도 하늘은 바보를 더 챙겨 준다더니 그 말이 맞는가 보군. 처량한 내 신세, 차라리 저놈처럼 바보가 된다면 좋았을 텐데…….’

돌연 바닥의 구석에 떨어진 망치 하나가 눈에 밟혔다. 아까의 흔들림으로 인해 서랍장이 덜컥거리며 열렸고 바로 그때 떨어진 것이었다.

그 망치가 파르티잔을 유혹했다.

파르티잔은 망치 앞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그리고 주워들었다.

망설임과 두려움, 기대가 뒤범벅되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해서 바보가 된다면 좋겠지만 가능성이 희박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차마 망치로 자신의 머리를 후려칠 순 없었다.

좌절.

파르티잔은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하늘을 보았다.

‘신이시여, 저의 시련은 언제 끝나나이까?’

* * *

아그리스는 잔뜩 부아가 치밀어 있었다.

마르크는 혼란에 휩싸였다.

‘바… 방금 뭘 하신 거야?’

아그리스의 손이 번쩍이더니 눈부신 빛이 앞을 가로막은 무리들을 덮쳐 버리며 무서운 폭발이 야기되었다.

그 폭발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는 마르크와 그를 못 가게 앞을 막아섰던 기사가 전부였다.

어쩌면 죽은 이들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산 자는 영문도 모르고 죽은 원혼들이 떠돌고 있을 구덩이 아래로 떨어져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으므로.

지옥의 불덩이, 헬 파이어. 그것이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이었다.

기사는 저라도 살아보려고 구덩이를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쳤지만, 떨어질 때 다리를 접질렸는지 쉽질 않았다.

게다가 구덩이 위쪽으로만 시꺼먼 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톡, 톡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 하나가 기사의 손등에 닿았다.

치익.

그러자 부위의 살이 뜨거워졌다.

‘사, 산성비……?’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기어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쏴아아아아.

펄펄 끓는 가마솥에 들어간 고통이 이러할까.

기사의 몸이 녹아내리며 고통에 저린 비명 소리가 메아리쳤다.

“끄아아아아!”

끔찍한 광경이었다.

마르크는 아그리스가 마지막 남은 녀석의 죽임의 도구로써 선보인 것이 에시드 레인(Acid Rain)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조화를 부린 것은 분명했고, 그 참혹함에 덜컥 겁이 났다.

아그리스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마르크는 대하기 힘든 무서운 동공과 마주쳤다.

아그리스의 입술이 슬며시 열렸다. 마르크는 그 입에서 뭐라도 튀어나올까 무서워서 몸을 바싹 쭈그렸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것은 다행히도 호통이었다.

“눈치도 없는 녀석, 당장 뛰어갔어야 할 것 아니냐.”

자신이 조금만 참았으면 될 것을 마르크 탓을 하고 있다.

단 한마디에 성질을 누르지 못해 죄다 몰살시킨 것은 아그리스 본인인데 말이다.

경황이 없어 앞뒤 잴 겨를 없이 마르크는 허리까지 숙여 가며 무조건 잘못했다고 소리쳤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아그리스의 속은 풀리지 않는 듯했다.

무려 보름이나 기다렸다. 오딘의 손속은 매일 볼 수 있는 게 아니란 얘기다.

또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확 치솟았던지 아그리스는 몸을 돌려 마르크를 혼자 두고 가버렸다.

마르크는 그가 사라진 후에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심스럽게 뒤를 따랐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니 앞으로는 언행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힌 것은 이즈음이었다.

분풀이를 했음에도 아그리스의 기분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 화를 마저 식히려 눈 덮인 산으로 향했다. 물론 쉬바인도 함께였다.

쉬바인은 이제 더는 주군인 오딘의 그림자에 기댈 수 없었다. 오딘은 아그리스가 사고를 쳤음에도 눈을 감아주었고, 쉬바인을 데려가는 것에도 제지하지 않았다.

일전에 아그리스가 주었던 선물이 생각보다 더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선물이란 바로 파이어해머 드워프 살탄이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아그리스가 급작스레 공간 이동을 감행한 탓에 쉬바인은 온도차에 적응하지 못해 사시나무처럼 떨며 이빨을 따닥따닥 부닥쳤다.

추위는 쉬바인의 살을 에다 못해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벌려진 입으로는 서린 김발이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추워도 너무 추운 곳이었다.

반면에 아그리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최강의 생명체이니만큼 드래곤은 어지간한 환경에는 가볍게 적응할 수 있는 것이다.

“으다다다… 이, 이곳은 왜……?”

마저 말을 하려 했지만 너무 추워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게 아그리스의 눈총을 샀다.

“말이 짧아졌구나.”

겁이 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너, 너무 추워서…….”

기필코 존대를 하겠다는 의지는 있었지만, 추위를 못 이겨 이번에도 끝말은 무색해져 버렸다.

잠시 후, 아그리스의 손에서 불길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쉬바인의 몸에 들러붙었다.

화르륵.

“아! 뜨, 뜨…….”

고통을 참지 못하고 쉬바인은 펄쩍펄쩍 뛰었다.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였다. 바로 바닥을 구르는 것.

고맙게도 바닥에 깔린 눈은 오래지 않아 불길을 식혀 주었다. 살면서 눈이 이렇게 고맙기는 처음이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그는 재깍 일어서 마나를 재배열하며 마법을 캐스팅했다.

“콜드 리플렉션(Cold Reflection)!”

콜드 리플렉션.

추위에 내성을 가지는 마법이다.

쉬바인은 정말이지 아까는 말도 안 나올 정도로 얼어 있었고, 마나도 동결된 느낌이어서 아는 마법도 캐스팅할 여건이 못 되었다.

아그리스가 멀쩡한 옷을 태우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쉬바인에게 도움이 되긴 했다.

“그래도 영 쓸모없는 놈은 아니군.”

아그리스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러자 행여 늦을세라 쉬바인은 재빨리 그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멀리 눈처럼 흰 짐승들이 돌아다녔다. 그 녀석들은 아그리스가 위험한 존재라는 걸 아는지 반경 1백 미터 안으로는 아예 접근조차 하질 않았다.

‘어쩌면 가장 어리석은 것은 인간일지도…….’

불현듯 드는 생각이었다.

인간들의 오만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무분별하게 땅을 파헤치고 숲을 훼손해 자연재해를 입기도 했으며, 하늘에 닿아보겠다고 축대를 쌓다가 재앙을 맞이하기도 했다.

또 자기 스스로를 최고로 생각하는, 혹은 최고가 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은 넘어서는 안 될 금단의 영역에 도전하고는 했다.

물론 드래곤 슬레이어를 꿈꾸는 이들도 있었다.

하나, 그 대가는 가혹하고 처참했다.

간혹 헤츨링 같은 경우, 사냥이야 성공했다지만 그들의 미래는 오래가지 못했다. 십중팔구 그 어미의 잔인한 복수가 따랐으니까.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 누군가 그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고 질서를 정립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 대상이 드래곤들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드래곤들은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을 뿐,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언젠가 드래곤들이 나선다면 그때는 인류가 멸종되는 날이겠지.’

이쯤에서 쉬바인은 생각을 접었다. 쌓인 눈이 많아져 발이 폭폭 빠졌기 때문이다.

급기야 허벅지가 잠길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도 아그리스는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쉬바인과는 달리 몸을 가볍게 해 눈 위를 걷고 있었다.

쉬바인 또한 몸을 가볍게 하는 마법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캐스팅한다고 해서 아그리스처럼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문득 드는 의문.

‘서, 설마 날 죽이려는 참이야……?’

정말 그러려는지 아그리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계속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와는 반대로 쉬바인은 가슴에까지 눈이 차는 바람에 이동속도에 제한이 따랐다.

사력을 다해 눈발을 헤치고 나아갔지만, 이에도 한계가 있었다.

“저, 아그리스 님…….”

이렇게 쉬바인이 애먼 목소리를 내었을 때, 아그리스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쉬바인은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여기서 멈춰 기다리느냐, 아니면 죽을힘을 다해 나아가느냐가 그것이었다.

여기는 어딘지도 모를 곳. 아그리스의 성격상 자신을 놓고 갈 가능성도 배제해선 안 된다.

결정은 곧 섰다.

쉬바인은 마법까지 사용해가며 앞쪽의 눈을 치우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물론 그 탓에 움직이는 속도는 현저하게 느려졌다.

끝도 없을 눈을 치우고 전진하고 치우고 전진하다 보니 비 오듯 땀이 흘렀다.

그 정성 덕분일까? 눈의 높이는 허리에 오더니 허벅지, 이내 정강이까지 낮아졌다.

이제는 좀 거리를 좁힐 수 있겠다 싶어 쉬바인은 두 다리에 헤이스트까지 걸고 혼신의 힘을 다해 앞만 보며 뛰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창!

쉬바인이 발을 디뎠던 곳이 꺼지는 소리였다.

얇디얇은 얼음들이 쉬바인의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그와 함께 땅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기겁하며 시선을 돌렸을 때, 쉬바인은 아래가 천 길 낭떠러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이런……?’

눈앞이 캄캄했다.

이렇게 죽는다는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누군가가 손을 낚아챘다.

아그리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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