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센의 음모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레오노는 문이 활짝 열린 대전 안을 서성거렸다. 그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로만 공국에 비상이 걸린 것은 전날 새벽이었다.
“아직이냐?”
“그렇습니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쉬지 않고 돌아다녔으며, 서로서로 머리를 맞대가며 침입자의 행방을 찾기에 고심했다.
성녀가 납치된 것이다.
공국에서 보호를 하겠답시고 데려온 것이 화근이었다.
레오노는 자신의 경솔함이 큰일로 번졌다는 데에서 자책감을 지울 수 없었다.
이는 공국의 존망이 걸린 일과도 같았다.
각 지역의 귀족들도 이 비상령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서로 하나가 되어 도와야 할 때였다.
야밤의 침입자는 대담하게도 성벽을 넘어 성안으로 잠입해 세실리를 데리고 사라졌다. 범인(凡人)들이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레오노가 절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문밖에서 궁내부대신의 기별이 들려왔다.
“공왕 전하, 가인 자작과 헤르 남작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시라 전하시오.”
어두웠던 레오노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그렇다고는 하나 아주 잠시였을 뿐, 무거운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로만의 공왕 전하를 뵙습니다.”
읍을 하는 두 사람은 공국 내에 있는 어떤 사람들보다도 믿음직스러웠다. 지금 레오노가 기댈 곳은 그들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제가 생각이 짧아 큰일을 내고 말았습니다.”
사실 성녀가 없어진 것은 아레인에는 별문제가 되지 않을 사안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납치된 장소는 이곳이 아닌가.
가인과 헤르는 일말의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공왕의 어려움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염려했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일이 어쩌다가…….”
“모두 제 불찰입니다. 두 분께서 그분을 보호해주셨다면 지금 같은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책임을 통감하며 레오노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선왕을 대할 낯이 없었다.
그 모습이 측은해 보여 가인이 위로하고자 했다.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저희 또한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사옵니다.”
한마디 말이 가져다준 감동은 적지 않았다. 레오노는 가인의 손을 붙들고 격정 어린 목소리를 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혹 짐작 가는 데라도…….”
헤르의 질문에 레오노의 이마에 골이 깊게 패었다.
“신성 제국이 아니라면 이런 짓을 벌일 자들이 없습니다. 필경 그놈들 짓일 겁니다.”
가인과 헤르도 그렇게 생각했던지 쉽게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저들의 행동에 두 사람은 속으로나마 혀를 차며 나무랐다.
‘스스로를 신성 제국이라 자처하는 놈들이 하는 짓은 치졸하기 짝이 없구나.’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신관이 성기사와 사제를 끌고 카반에 발을 디딜 때부터.
이후로도 템플 나이트를 이끌고 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았던가.
당장에 더 많은 무리를 이끌고 오리라던 예상을 깨고 공백이 지속되었었기에, 레오노는 긴장의 끈을 늦췄었다.
그 때문에 이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레오노의 경솔함을 나무랄 것도 아니었다. 가인과 헤르 역시 마음을 놓았으니 그녀를 넘겨준 것이었다.
레오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으므로 딱히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헤르가 답했다.
“우선은 저들의 소행임을 파헤치고 신성 제국에 마땅히 경고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가인이 이에 살을 덧붙였다.
“옳습니다. 저들 역시 성녀님을 중히 여기고 있을 터이니 신변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셔도 될 듯합니다. 뜻을 굽히지 않고 공왕 전하께서 강하게 나가셔야 합니다.”
“두 분의 말씀이 틀린 부분이 없습니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습니다. 당장 다섯 공국들의 회동을 제안해야겠습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두 분께서도 같이 참석해주시면…….”
“마땅히 그리할 것이옵니다.”
허락에 기뻐하는 것도 잠시, 굳게 다문 레오노의 입술이 강한 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 * *
비센 추기경은 매우 반가운 희소식을 접했다.
학수고대하던 성녀가 막 이곳에 발을 디뎠다는 소식이었다. 그래서인지 성녀를 모셔 둔 방으로 향하는 비센의 발걸음은 힘차고 가벼웠다.
얼굴의 군데군데에는 욕심이 묻어났다.
‘내 세상이 올 날도 머지않았구나.’
기쁜 마음으로 향하다 보니 어느덧 그녀의 방 앞에 다다랐다.
안에 기별을 고하는 절차도 무시한 채 비센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머무는 방은 호화찬란했다. 그런데도 그가 보는 세실리는 불안한 기색이었다.
성녀의 기분에는 아랑곳 않고 비센은 넙죽 엎드리며 인사를 올렸다.
“귀하신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센에게는 주신보다도, 그리고 성녀보다도 자신의 일이 우선이었다.
“절 이리로 데려오신 분인가요?”
가녀린 목소리 속에 두려움이 녹아 있었다. 비센은 계속 낮은 자세로 대화에 임했다.
“불안하셨다면 이 자리를 빌려서 사죄드리겠습니다. 하오나 성녀님이 계실 곳은 바로 이 신성 제국이옵니다. 굳이 주신님의 말씀을 전해주지 않으신다 하여도 말입니다.”
세실리는 그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전 성녀가 아니에요.”
갑자기 비센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사람을 잘못 데려온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던지 치든 고개로 세실리의 얼굴을 훑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안도와 번들거리는 미소였다.
‘맞아, 바로 저 얼굴이었어.’
오랫동안 비센은 성녀의 행방 찾기에 주력했다. 그녀가 아니라면 성황을 꺾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공을 들이고 확인한 결과니 착오가 있을 리 없었다.
“귀하신 분께서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계신 것뿐이옵니다. 때가 되면 알게 되실 터. 이 미천한 자가 거룩하신 주신 아스카론 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던가.
당장에라도 비센은 그녀를 대동한 채 성황을 찾아가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성황이 자신의 발아래 엎드리는 때가 금방이라도 눈앞에 닿을 것처럼 가까워진 것만 같았다.
* * *
“그럼 그자가 아레인의 왕이라는 말이더냐?”
황자 타츠만의 물음에 알베른은 숙연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될 것이옵니다.”
“그리되다니? 그건 무슨 소리냐?”
“정확히 아레인은 여왕이 즉위한 상태라고 합니다. 하지만 배후에서 그녀를 조종하는 것은 바로 오딘 그자라고 하였습니다.”
알베른은 모든 것을 들은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행여나 자신의 과거지사가 드러날까 봐 표정 관리에도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자 타츠만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그런 자가 소국의 왕 따위나 하고 있다는 말이냐?”
미운 건 미운 거지만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야 했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것도 다 그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던가.
게다가 타츠만의 아비인 황제는 아직 분명한 뜻을 천명하지 않고 있었다. 일을 만든 것은 타츠만이니 그가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만을 표명한 것이다.
모든 건 타츠만이 짊어질 짐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애가 타는 것이고 불안한 것이다.
지금의 얘기들은 하나도 흘려들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알베른은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확실한 것은 저도 모르옵니다. 다만, 그자의 행적은 불분명하다고 하였습니다.”
“불분명하다니?”
“그자가 대륙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십 년도 채 되질 않는다고 합니다. 하여, 저는 그가 이계(異界)에서 온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계?”
“그렇습니다.”
타츠만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이계.
다른 세상을 일컫는다.
용케도 알베른은 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간의 사정으로 종합해보았을 때, 알베른은 그가 대륙의 사람들과는 다른 특징들을 지녔다는 것을 깨우쳤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기까지는 순전히 추측일 뿐이었다.
이를 확인하게 된 것은 제르딘의 도움을 받아서였다. 때와 장소만 안다면 그에게 사정을 뒤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 같은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알베른은 두 번 놀랐다.
오딘에 대해 놀랐고, 제르딘에 대해 놀랐다. 그동안 그는 제르딘을 과소평가해왔던 것이다.
문득 타츠만이 침음을 흘렸다.
“크음, 그 이계라는 곳은 어떤 곳이기에……?”
“송구하오나 거기까지는 신도 알 방도가 없습니다. 그가 이곳에 오게 된 동기는 차원의 균열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럼 그자를 그곳으로 돌려보낼 방도는 없는가?”
타츠만은 복수를 해야겠다는 일념 따윈 없었다. 그저 그를 안 보는 것이면 족했다.
그조차 너무 큰 기대였을까. 알베른은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그것까지는 신도 모르겠사옵니다.”
타츠만과 달리 알베른은 가능하다면 오딘을 무력화시키고 싶어 했다. 물론 가능하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제국의 황제가 나서준다면 충분히 가능할 일이었다. 알베른은 그렇게 믿었다. 또한 자신에게는 수수께끼의 조력자까지 있질 않은가.
두 사람 모두 헤아릴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잠시 대화가 멈춰 있던 찰나,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먼저 알베른은 타츠만에게 양해를 구했다.
“소개해드리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느 때보다도 타츠만은 알베른에게 매우 고마워하는 기색이었다.
누군가를 소개해주겠다는 데 싫을 리 없었다. 오히려 평소에 알베른과 가까이 지내는 이들이 궁금할 정도였다.
“그래? 보여 주게.”
허락이 떨어져 알베른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자들은?”
“앞으로 황자 전하를 도울 자들입니다.”
“오오, 듣던 중 반가운 말이로다.”
기뻐하는 타츠만을 보며 알베른은 일어서서 두 사람을 차례로 소개했다.
“이자는 슐트라 하옵니다. 예상하신 바와 같이 마법사입니다.”
“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또 이자는 엘룬이라는 자입니다. 전하의 기사들보다는 미숙하겠지만 검술에 재능이 있습니다.”
“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미리 입을 맞췄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에 엘룬은 고개를 숙인 채 미간을 찌푸렸다.
타츠만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내 현자의 마음만 받겠노라. 그 두 사람을 내게 주면 현자는 누가 보필한다는 말이냐?”
알베른은 로테노아를 모실 때와 마찬가지로 타츠만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했다.
“전하, 저 역시 전하의 도구일 뿐입니다. 제 목숨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것이니 부디 청을 뿌리치지 말아주옵소서.”
기분이 좋아진 타츠만은 알베른의 어깨를 두드렸다.
“되었다. 정 그대의 마음이 그러하다면 내 이 두 사람을 현자에게 주겠노라.”
“망극하옵니다.”
알베른에게 있어 두 사람은 누구에게 가도 상관없었다. 자신에게는 제르딘이 있으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선심이나 쓰고 말이라도 올려 보는 것이 더한 점수를 얻을 것이라는 계산이 앞서 행한 행동이었다.
점점 더 자신의 마음에 드는 행동만을 하는 알베른. 그를 보는 타츠만의 시선에는 더한 신뢰가 박히는 중이었다.
* * *
카르만은 꿈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글서글한 눈매와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 귀여운 콧날에 희고 보드라운 피부와 잔잔한 물결처럼 너울거리는 머리카락…….
모든 게 똑같았다.
심지어 그녀가 걸치고 있는 연분홍빛 드레스까지도.
죽었다고, 아니 죽었던 그녀가 눈앞에 서 있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왜 당신이…….”
카나리엔, 그녀일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는 듯했다.
오래전의 연인, 그녀와 세상에서 함께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카르만은 행복했었다.
세상과 그녀를 바꾸자 해도 감히 그럴 수 있었다.
모든 게 사라진다 해도 그녀만 곁에 있다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짓궂은 운명은 자신에게서 그녀를 떼어놓았다.
카라니엔의 죽음에 카르만의 슬픔은 땅을 갈랐고 하늘을 찢어놓았다.
당시 그녀를 사랑했던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카르만에게는 한 명의 경쟁자가 있었는데, 카나리엔은 그의 끊임없는 구애에도 카르만만을 사랑했다.
이것이 비극을 불렀다.
기어이 카나리엔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경쟁자는 가녀린 그녀의 육신을 피로 붉게 물들였다.
오직 주신의 뜻을 따르고 한 여인만을 사랑했던, 순수했던 카르만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다.
탁한 마음과 생각이 싹튼 것은 그즈음이었다.
한 방울의 먹물은 맑은 호수와 같던 카르만의 마음을 검게 만들었다.
복수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날이 갈수록 혼탁해지는 영혼은 더 많은 살심을 불러들였다.
오직 살인에서만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살인을 할 때마다 그녀를 죽인 자의 얼굴이 떠올라 세상 어떤 것과도 바꾸지 못할 쾌락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카르만이 광인이 된 데에는 이런 연유가 있었다.
막스마라가 어렵게 구해 가져온 펜던트가 아니었다면, 카르만은 지금보다 더한 악인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 펜던트에는 마성을 잠재울 힘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펜던트조차 마성을 봉인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카르만이 때때로 무차별한 살육을 일삼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카르만은 지하의 석실에서 회한과 아쉬움, 슬픔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녀만 있었다면, 아니 그녀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음을 맞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그녀가 눈앞에 있다.
평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심장이 벌떡벌떡 뛰고 있질 않은가.
그러나 카르만과는 달리 세실리는 겁을 먹은 눈초리였다.
그녀 딴에는 그럴 만도 했다.
미천한 자신이 신성 제국의 황성에 발을 디딘 것만도 두려운데, 그 꼭짓점인 성황을 마주 보고 있으니 말이다.
돌연 그녀의 등 뒤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듯 오랜만에 재회하시는 두 분의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비센 추기경, 당신이었군.”
카르만이 비센을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일전에 메이가 그 같은 얘기를 꺼내놓기 훨씬 전부터 카르만은 그가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었다.
그런데도 그를 놔둔 것은 일종의 오만이었다. 어디까지 기어오르는지를 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카르만의 생각이라기보다 마성이 깃든 다른 자아의 생각이었다.
카르만이 인상을 찌푸린 채 물었다.
“어쩔 생각이지?”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비센은 거들먹거렸다.
“뭐, 대단한 것은 없습니다. 성황께서 그 자리에 너무 오래 계셔서 말입니다. 항상 제가 뒤치다꺼리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한두 해도 아니고, 벌써 수십 해나 지났으니 저 또한…….”
“그만.”
애초에 카르만에게 성황의 자리는 의미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자리에 대한 욕심도 없었다. 추대가 되었으니 앉아있을 뿐이었고, 해야 할 일들을 하였을 뿐이다.
물려주면 그만인 자리.
안 그래도 염증을 느끼던 차였다.
‘어차피 누가 해도 같겠지. 비센의 야망도 문제겠지만, 나 역시 성황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죄도 없는 양민들을 학살했던 것은 바로 자신이다.
씻을 수 없는 죄책감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번뇌에 젖곤 했다.
차라리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자리에 올라 있지 않았다면 자신은 그나마 짐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뿐인가?”
마치 들어주기라도 할 것 같은 물음에도 비센은 어쩐지 만족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또 있습니다.”
“…….”
“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기왕 마련한 자리니 이 자리를 빌려서 당신이 제 발아래 엎드리는 것을 보고 싶군요.”
카르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핏빛으로 눈이 붉어지려 하고 있었다. 펜던트를 착용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카르만은 필사적으로 이를 억눌렀다.
‘크윽, 제발… 너에게도 좋은 일이지 않느냐. 이제 구속에서 벗어나 홀가분히 즐길 수 있을 터이니…….’
그간 성황이라는 자리는 마성이 깃든 다른 자아에게 있어서도 족쇄와 같았다. 최악의 사태만은 면해보고자 카르만은 이렇게라도 그를 타이를 필요성이 있었다.
이상한 증세를 보이는 카르만에게 비센은 못한 말을 곁들였다.
“한 가지 빠트린 얘기가 있군요. 이분은 주신님의 성녀십니다. 성황님께서 절대적으로 보호해야 할 성녀님 말입니다.”
카르만의 표정이 굳었다.
천만다행으로 카르만은 제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비센을 위시한 그의 추종자들이 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비센 추기경에게 이 비밀을 들키게 될 시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은 지당한 일. 십중팔구 타깃이 되어 공공의 적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는 일은 두 자아 모두 원치 않을 것이었다.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템플 기사들이 비센의 눈짓을 받고 카르만의 어깨를 짓눌렀다. 굴욕을 참지 못해 카르만의 안에 숨은 악마가 다시금 꿈틀거렸다.
카르만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번만… 제발 이번만 참아다오…….’
그 모습을 보며 비센은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하! 이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비센의 눈은 걷잡을 수 없는 야망으로 번들거렸다.
이제는 바야흐로 대륙으로 눈을 돌릴 때였다.
그로부터 나흘 후.
카르만은 자신을 믿고 따라주었던 막스마라 대신관과 신관들, 그리고 템플 기사들과 함께 오후의 만찬을 가졌다.
이들과 헤어지는 즉시 카르만은 타지에 위치해 있는 어둑한 지하 석실에 감금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태연함을 가장해 그들을 달래었다.
“짐은 이제 곧 떠날 생각이오. 그대들이 새로운 성황인 비센을 잘 따라주길 바랄 뿐이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 덕분에 카르만을 옹호하는 세력과 비센의 세력은 부딪치질 않았다.
그 자리에 수십 년을 서 있었던 성황이 물러난다는 것은 그의 추종자들에게도 납득이 안 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를 의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믿음이 깨지는 순간 불충스러운 신하로 기억될 것이므로.
카르만은 떠나기 전 비센에게 마지막 부탁을 했다. 시녀 메이를 성녀님에게 보내달라고…….
그리 어렵지 않은 부탁이어서 비센은 이를 허락해주었다.
카르만이 떠난 후, 그의 오른팔과도 같았던 막스마라 대신관도 종적을 감추었다.
비센이 성황으로 자리하며 신성 제국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비센은 차근차근 성황이 가졌던 권력을 흡수하며 황권의 강화를 꾀했다.
자신에게 협조했던 이들은 영화를 누릴 수 있었으며, 그의 비리를 알고 적개심을 품었던 자들에게는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다.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졌고, 있는 자들의 재산은 더 불려졌다. 그럼에도 대놓고 불만을 드러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이맘때쯤, 비센은 아레인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 * *
“그렇게는 못하겠소.”
인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바리톤에 신성 제국의 사신이 들른 것은 로테노아가 왕으로 추대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니, 그전에도 없었을지 몰랐다. 신성 제국이 바리톤이라는 왕국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던 탓이다.
사신이라는 자는 무거운 사안을 들고 왔다. 아레인을 치기 위한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예측하지 못한 바리톤 왕의 반대에 부딪힌 사신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협조를 얻어내지 못하고 돌아갈 경우, 성황 비센으로부터 힐책을 들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리석음을 내비치는 바리톤의 왕을 재차 타일러봐야 했다.
“바리톤의 군사력을 모아달라는 얘기는 않겠습니다. 우리 신성 제국이 아레인에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교두보만 마련해달라는 겁니다.”
로테노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신을 따르는 분들이 어째서 타국을 침공하시려는지 모르겠소. 아레인이 신성 제국에 밉보인 것이라도 있소이까?”
하마터면 사신은 인상을 구길 뻔했다. 침공이라는 단어가 귀에 거슬렸던 탓이다. 신성 제국을 가벼이 보지 않고서야 이렇듯 함부로 지껄일 수는 없는 것이다.
상대가 주눅 들지 않으니 사신은 일단 그가 원하는 답변을 들려주었다.
“아레인이 우리 기사들을 죽였습니다.”
듣는 로테노아도 의아했던지 눈이 동그래졌다.
“아레인이 말이오?”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레인의 여왕은 우리 신성 제국을 모독하고 협박하기까지 했습니다. 그에 항의하러 갔던 신관들의 귀를 통해서 말입니다.”
금시초문인 얘기에 로테노아는 기가 찼다. 그러나 못 믿을 얘기도 아니었다.
‘오딘 님께서 나서셨다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의외로군. 왜 신성 제국에 칼을 겨누셨을까…….’
신성 제국이 오만하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원래 힘을 가진 자들이 그러하듯 그들도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최초에 신성 제국을 세웠을 때에만 해도 그 구성원들은 주신의 자비로움을 널리 알리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다.
그러나 오래가진 않았다.
가진 것이 많아지고, 더 많은 욕심이 순수한 마음을 짓이기며 본래의 취지를 퇴색시켰다.
최초의 한 명이 저지른 불미스러웠던 일은, 이제 신성 제국의 중요 요직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는 다반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누구도 그 오만함을 나무라거나 벌할 이가 없었다.
기왕 거절한 것, 로테노아는 의문이나 풀고자 했다.
“왜 아레인이 그랬소?”
“자세한 사항은 저도 모릅니다. 하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아레인이 저희 신성 제국에 도전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를 들으며 로테노아는 속으로나마 안하무인인 사신의 태도를 나무랐다.
‘설마했는데 역시나 오만하군.’
사신은 그 나라의 대표와 마찬가지다. 그의 오만함은 곧 신성 제국의 오만함, 그를 보낸 자의 오만함이다.
사신은 여전히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는 로테노아를 설득코자 했다.
“바리톤의 왕이시여,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 일로 바리톤이 해를 입게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로테노아는 당당하게 일관성을 내비췄다.
“백번을 말해도 내 결정엔 변함이 없소.”
완고한 태도를 굽히지 않으니 더 얘기해봐야 서로 입만 아플 것이었다.
힐책을 들을지언정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였다.
체념하고 돌아서는 사신의 등에 대고 로테노아가 근엄한 목소리를 냈다.
“먼 길을 오신 수고를 생각해 내 한 가지 충고하겠소. 아레인은 무서운 나라요. 신성 제국이 쉽게 아레인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은 지금이라도 접어두는 게 좋을 것이오. 잘못된 결정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올 테니…….”
사신은 먼 길을 달려와 짧은 대화만을 마치고 곧바로 저녁나절에 돌아갔다.
로테노아는 망루에서 성문을 빠져나가는 신성 제국의 무리들을 내려다보았다.
촘촘하게 박힌 별들이 그의 머리 위에서 반짝였다. 저절로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순백색으로 반짝이는 별들 사이에 유독 검은빛을 발하는 별이 있었다. 이상하게 주위의 별들이 기가 죽어 보였다.
‘…아레인의 하늘엔 무서운 별이 떠 있습니다.’
언젠가 현자 클라베르가 했던 말이었다.
로테노아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작이로구나…….”
두근거리는 마음은 이상하게 설레기까지 했다.
* * *
원탁의 테이블에 모인 사람은 총 일곱이었다.
이들 중 5명은 공국의 공왕이라는 막대한 신분이었고, 다른 2명은 왕국의 자작과 남작의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공왕들은 불만스러움을 표출했다. 아니, 레오노를 제외하고는 저마다가 가인과 헤르를 홀대하는 눈빛이었다.
“아레인의 귀족들이라고 하시었소?”
“그렇습니다.”
“실례지만 작위를 물어도 되겠소?”
아레인은 그리 큰 나라가 아니었다. 아니, 자신들의 공국들보다도 볼품없고 초라하다고 보는 시선이 과반수였다.
국왕이 자리했다면 모를까, 귀족이라고 하니 그리 달갑게 보이질 않는 것이다. 최소한 재상 정도라야 봐줄 태세였다.
그러나 저들의 입에서는 지극히도 실망스러운 작위가 거론되었다.
“여러 공왕님들께 인사 올리겠습니다. 아레인의 가인 자작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레인의 헤르 남작입니다.”
백작도 아니고 자작과 남작이라 한다.
기가 찼는지 아트록스 공국 공왕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
다른 공왕들도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레오노 공왕께서는 왜 이런 자리를 마련하신 겝니까?”
레오노조차 공왕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관계로 아직 자질을 인정받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레오노는 가인과 헤르 두 사람이 부끄럽지 않은지 떳떳하게 대꾸했다.
“저희에게 힘을 실어주실 분들입니다.”
“힘을 실어줄 거라면 국왕을 모셔 왔어야지요.”
레오노는 기가 찼다. 아무리 사정을 모른다지만 도움을 줄 이들에게 도리어 무례한 요구를 하는 판국이니 말이다.
가인 자작과 헤르 남작의 기분이 상한 건 아닐까 하여 레오노는 조심스레 둘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두 사람의 표정엔 약간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급작스레 솟아난 진땀을 훔치며 레오노는 말을 이었다.
“아직 자세한 얘기를 듣지 못하셨으니 그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아레인은 약소국이 아닙니다.”
모두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아니, 아예 믿질 않으려 하는 눈치였다.
이에 레오노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그 일례로 여기 계신 두 귀족께서는 강력한 무력 집단을 거느리고 계십니다. 또한 아레인의 재력은 저도 감히 추정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걸 저희에게 믿으라는 겝니까?”
의외로 침착한 목소리. 데오란트 공국의 공왕이었다.
공왕은 뭐라 답변을 하려는 레오노의 말문을 막고 앞서 말했다.
“짐 또한 몇 해 전까지 아레인의 사정을 들어와 대충은 알고 있소이다. 왜 과장하시는 게요? 설마 그 십 년도 지나지 않은 기간 동안 아레인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바로 보셨습니다.”
목소리는 레오노 공왕의 것이 아닌 헤르 남작의 것이었다.
안 그래도 한자리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데 불쾌해하고 있던 차에 발언권도 주어지지 않았는데 끼어든다.
데오란트 공왕의 이마에 심줄이 돋았다.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데 이리도 찬밥 취급을 해대니 헤르도 그의 기분은 더 개의치 않고서 해야 할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아레인은 그 십 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국력은 비약적으로 신장했습니다. 작금의 아레인의 소문이 대륙에 퍼지지 않았던 것은 몸을 낮추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듣기 싫은 것인지 아니면 믿지 않겠다는 것인지 공왕들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중 데오란트 공왕은 치미는 짜증을 억제 못해 급한 성미를 못 이겨 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 그의 움직임을 붙든 것은 레오노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이 두 분은 소드마스터입니다.”
누구랄 것도 없이 공왕들의 눈이 하나같이 치떠졌다.
소드마스터란 그리 쉽게 접할 존재가 아니었다. 대륙을 통틀어 여전히 그들의 수는 희박했으며, 가치는 상당했다.
오죽하면 제국들의 무력의 크기를 가늠할 때, 몇 명의 소드마스터와 대마법사를 보유했는지로 파악하겠는가.
엉겁결에 라프 공국의 공왕은 아레인의 두 귀족에게 묻고 말았다.
“그, 그게 정말이오?”
단 한 명의 소드마스터라도 영입해보려 노력했던 돈과 시간, 정성이 얼마였던가. 그런데도 아직까지 라프 공국에는 소드마스터가 없다. 있었다면 소드마스터를 빙자한 사기꾼들뿐이었다.
라프의 공왕이 말했다.
“로만의 공왕이 왜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가인과 헤르를 보는 시각이 확 달라졌다.
하지만 메르소의 공왕은 아직도 못마땅함을 들추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예의상 아레인의 국왕께서 오셨어야 합니다.”
레오노는 듣기 좋은 말로 그를 타일렀다.
“뭔가 착오가 있으신 듯합니다. 아레인은 우리를 돕겠다고 했습니다.”
이해관계가 관여되어 있지 않다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아직도 불신의 싹은 죽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아레인이 얻는 것이 무엇이오?”
가인이 이에 답했다.
“아레인은 로만과 우정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 이하도 이상도 없습니다.”
아트록스, 로만, 데오란트, 라프, 메르소. 이 다섯 공국은 원래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러나 아레인은 다르지 않은가.
위치상으로도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고, 같은 신을 섬기고 있지도 않다. 이러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들만 수두룩했던 것이다.
가장 먼저 평정을 찾은 건 라프의 공왕이었다.
그는 얼굴에 화색까지 드리운 채 만연히 웃었다.
“믿어주기로 합시다.”
라프의 공왕은 로만의 선왕과 절친한 사이였다. 그 자식 되는 레오노가 공왕에 올랐으니 이제는 마땅히 그와 친분을 유지할 때였다.
다른 공왕들도 더 이를 문제 삼기로 하지 않았으니, 자연히 고마움이 커졌다.
“아레인이 우리의 일을 제 일처럼 도와준다면 우리 다섯 공국도 잊지 않을 게요. 비록 형제는 아닐지라도…….”
가인과 헤르의 표정도 밝아졌다.
‘오딘 님께서는 정말 혜안을 가지셨구나…….’
그랬다. 가인과 헤르가 돕겠다고 나선 것은 오딘의 뜻이었다.
그 먼 곳에 있었어도 오딘은 연락망을 통해 아레인과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훤히 꿰뚫어 보고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모든 준비가 마쳐졌으니 이제는 사안을 들고 나와야 한다. 레오노의 안색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 오해를 한 것에 대해 미안한 것도 있고 해서 아트록스의 공왕이 걱정 담긴 목소리로 의문을 제기했다.
“좋은 자리에서 왜 그리 표정이 무거워 보이시는지…….”
레오노는 어렵사리 입을 뗐다.
“여러 공왕님께 우선 이 자리를 빌려서 사죄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성녀님께서 저희 로만에 머무르셨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가움에 격한 탄성들이 튀어나왔다.
“오오!”
“성녀님께서 말입니까?”
그들의 반기는 표정을 보노라니 레오노의 마음은 추를 달아놓은 것처럼 한층 더 무거워졌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기쁨에 들뜬 얼굴들. 이처럼 성녀는 이들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였다. 이 상황에서 그녀가 사라졌다는 얘기를 하면 어떻게 될까? 레오노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해야만 했다.
“그분께서는 납치되셨습니다.”
“허.”
“허어.”
그 한마디에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소리들이 연달아 들려왔다. 한 공왕은 거품이라도 물 것 같았다.
아트록스의 공왕이 테이블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누구요? 누가 그분을 납치해갔다는 말이오?”
쉬이 레오노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말했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간의 정황에 비추어볼 때 그분께서는 신성 제국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극한 노성이 터져 나왔다.
“용서받지 못할 자들!”
“천벌을 받을 놈들 같으니라고!”
“신을 섬긴다는 자들이 어찌 그런 행위를 저지른다는 말이오?”
레오노는 한풀 더 고개를 숙였다.
“모두 제 탓입니다.”
책임을 추궁할 수도 있었다. 왜 그녀가 납치되었는지 사연이 궁금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공왕들은 그 부분들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입을 닫았다.
이제 와서 그를 탓해본들 무엇 할 것이며, 욕한들 무엇 하리. 그렇다고 해서 없어졌다는 성녀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질 않는가.
공왕들은 그 책임 모두를 신성 제국에 전가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신성 제국과 다섯 공국은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다.
마찰 역시 비일비재했다.
이로써 쌓이는 것은 미움이요, 악감정이었다.
오죽하면 공국들의 신민들조차도 신성 제국을 내리깎는 얘기에는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였겠는가.
“전쟁을 벌여서라도 성녀님을 모셔 와야 하오!”
“옳소. 부정한 자들의 땅에 성녀님이 계실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하나같이 전쟁 쪽으로 의견을 기울였다.
레오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 때문에 공왕들을 이 자리에 불렀으니까.
메르소의 공왕이 모두를 대신해 결의 섞인 말을 내뱉었다.
“제 아무리 부정한 방법으로 힘을 갖췄다 한들, 짐은 저들이 두렵지 않소. 신께서 저들에게 정의의 철퇴를 내리실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