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상단 후리기 (52/67)

상단 후리기

이톨 무역항.

상단 간의 마찰은 이미 벌어진 상태였다.

시정잡배들이 장사치들의 광주리를 뒤엎은 것이 발단이었다.

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장사치들은 눈물을 꾹 참고 콩알만 해진 간을 추스르며 얼마의 물건이라도 회수하려 했다. 저들의 발에 밟혀 터지고 깨지면서도…….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혼자의 힘으로 이런 굴욕과 설움을 헤쳐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힘없는 자들의 비애였다.

그러나 오늘만은 무법자와도 같은 시정잡배들을 제지하는 이가 있었다.

“그만!”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마르크였다.

“이건 어디서 굴러먹다온 뼉다구야?”

마르크의 멱살을 낚아채려던 손이 이스론의 호위 무사의 손에 의해 반대 방향으로 꺾였다.

시정잡배는 급히 고통을 호소하면서 협박을 가했다.

“아… 아! 이것 못 놔?”

과연 그의 동료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5명의 시정잡배가 이를 드러내며 동료의 손을 잡은 호위 무사를 죽일 듯 달려들었다.

퍽팍퍽! 빡- 퍽!

동시라도 좋을 만큼 구타 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그를 대신해 다른 호위 무사가 나서더니, 주먹과 발로 시정잡배들의 얼굴이며 배 등을 가격한 것이다.

정확히 한 놈당 한 대씩이었다.

더러는 벌러덩 뒤로 넘어졌고, 더러는 뭉개진 안면을 감싸 쥐고 고통을 호소했다.

짐작한 대로 그들은 몸을 추스른 후 정신 못 차리는 동료들을 챙겨 줄행랑을 쳤다.

한마디 경고와 함께…….

“두, 두고 보자!”

우선 마르크는 상심해 있던 상인들부터 챙겼다.

“다들 괜찮으세요?”

고생한 흔적이 얼굴에 역력히 드러날 정도로 안쓰러운 중년 여인과 연세 지긋한 노인은 마르크를 보며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괘, 괜찮아요.”

“근데 뉘슈?”

마르크는 빙긋이 웃었다.

“우린 이스론 상단에서 나왔습니다.”

이스론이라는 말에 상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이 바로 이스론 상단으로부터 물건을 받아 장사하는 이들이었으므로.

대게 한 상단과 계약을 하게 되면 다른 상단의 물건을 취급할 수 없는 게 관례였다. 그러니 독과점 형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상단의 가입은 상인들에게 필수 조건이었다. 바로 물건의 운송에 관한 부분이 걸렸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해적들이 들끓는 바다를 통해 물건을 나르기도 하였고, 육로로는 도적들과 도처에 널린 몬스터들까지 감내해야 했다.

자본금이 충분한 사람들은 대부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단을 등에 업었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이스론과 같은 비교적 영향력이 작은 상단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기왕 장사를 벌이게 된 것, 누구라도 안전한 장사를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거대 상단들의 요구는 없는 사람들이 들어줄 만한 것들이 못 되었다. 상단에 달마다 내는 금액이 이익금을 웃돌았던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위험을 안고 장사하는 길밖에 없었다.

이러니 자신들이 속한 상단이 힘이 없다는 걸 나무라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지금 역시 그들은 이스론이 나서준 것을 고마워하기는커녕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어쩌자고 이러셨습니까?”

아무리 마르크가 강단이 있고 배짱이 있기로서니 평소였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이들 시정잡배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 뒤를 봐주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였던 것이다.

노인은 바로 그 점을 따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재빨리 물건을 회수해 당장 도망갈 준비를 마친 중년 상인이 다른 이들을 채근했다.

“곧 그 녀석들이 올 겁니다. 서두릅시다.”

마치 앞에 벌어질 일을 예상이나 하고 있단 말투였다.

마르크는 팔을 벌려 그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못 갑니다.”

전에 없이 장난스러운 표정이었다.

그와 다르게 중년 상인의 표정은 심각해졌으며 진지해졌다.

“왜 이러는 거요?”

“앞으로는 저치들이 이스론의 상인들을 괴롭힐 수 없게 하겠습니다.”

마르크는 진심을 얘기하고 있었지만, 중년 상인은 이를 믿지 않았다. 이스론의 사정을 뻔히 알아서였다.

“누굴 바보로 아는 거요?”

“아하하하하!”

마르크는 실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중년 상인을 비롯해 다른 상인은 그런 그가 미쳤다고까지 생각했다.

뚝 웃음을 그치고 마르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고 보면 아실 겁니다.”

마르크는 든든한 백을 믿고 일을 벌였다. 굳이 꼬리를 내릴 필요가 없질 않은가.

호위 무사들 또한 목에 힘을 주고 우쭐대고 있으니 상인들은 작금의 상황이 의아하게만 받아들여질 뿐이었다.

잠시 뒤, 일단의 무리들이 들이닥쳤다.

“이스론이 우리 레아넌에 선전포고라도 하려는 작정인가?”

이톨 무역항에서 가장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단은 레아넌이었다. 또한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상단이기도 했다.

가시 돋친 경고에 마르크는 잔뜩 움츠러든 상인들을 둘러보며 보란 듯이 말했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이스론이라는 상단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게 될 겁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 한마디에 이 자리의 레아넌 상단을 대표하는 듯 보이는 사내의 인상이 굳어졌다.

“애송이, 네가 한 말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알고 지껄이는 거냐?”

“음… 좋은 파장?”

조롱당한 느낌이 들었던지 레아넌의 사내는 안면을 씰룩거리며 똑똑히 경고를 내뱉었다.

“네 잘못이다.”

그가 직각으로 팔을 세우더니 손목을 까딱이자 뒤쪽에 있던 우람한 덩치의 장정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도 마르크는 겁을 먹기는커녕 도리어 비아냥거렸다.

“그 아저씨들로 되겠어? 다른 사람들을 불러와야지.”

마르크와 말을 섞던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참지 못한 장정들은 각자의 무기를 빼어들고 마르크 일행을 그림자로 덮어버릴 듯이 다가왔다.

그리고 틴과 호위 무사들이 그들을 맞으며 난데없이 칼부림이 일어났다.

캉! 카캉! 깡!

쇠붙이들이 소리를 쳤지만 마르크는 개의치 않았다.

“그쪽은 볼 필요 없잖아. 당신이 응원한다고 해서 이기는 것도 아닌데. 우린, 마저 얘기나 해야지.”

마르크는 쌓인 게 많았다. 여태 갖은 수모를 참아왔으니 말이다.

“레아넌은 우리 이스론에 미안한 마음을 잊었나 봐? 이스론의 도움이 없었다면 레아넌은 지금과 같이 크지 못했을 텐데,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잖아. 그게 아니면 지금 상단원들은 상단의 역사는 배우질 않나 보지?”

“뭐, 뭐라고?”

상대가 열이 받건 말건 마르크는 계속 독설을 퍼부었다.

“에이, 역사를 무시하면 안 되지. 역사를 거울삼았다면 오늘과 같은 시행착오는 면할 수 있을 텐데. 언젠가 레아넌은 무너진 적이 있지? 주위를 잘 살피지 못해서 말이야. 최고가 된 줄 알고 정말 최고였던 가리온에 안하무인으로 굴었으니 무사할 리가 있었겠어? 뭐, 지금은 그에 굽실거리며 비굴하게 살고 있지만 말이야. 하하하!”

“…꼬마, 뭘 믿는 거냐?”

“뭘 믿긴, 힘을 믿지.”

“힘? 이스론이 힘을 등에 업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레아넌은 제국과 연계되어 있었다. 바로 그들의 뒤를 봐주는 인간이 인근의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크리스토 백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스론은 제국에 줄을 대려고도 안 했고, 댈 수도 없었다. 상위의 상단들이 자신들과 내통하는 대륙의 패자 격인 각 제국의 귀족들에게 돈을 바쳐 암묵적으로 배척한 까닭이었다. 언제든 자신들의 밥그릇에 위협이 될 만한 상단들의 기세를 꺾어놓고자 함이었다.

돈을 싸 짊어지고 오지 않는 한, 이스론을 비롯한 중견 상단들은 저들의 보호를 받기 힘들었다.

이를 버티지 못하고 큰 상단에 흡수되는 경우가 많았고,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상단주가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설마하는 기분이 들어 사내가 다급히 되물었다.

“신성 제국이나 신흥 제국과 손이라도 잡은 거냐?”

마르크는 넌지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이렇게 막 나가는 이유는 뒤쪽에 있는 오딘의 힘을 맹신하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는 제라드와 쌍귀를 비롯해 쉬바인과 아그리스까지 있었다.

들러붙어 있는 파르티잔과 게티롱, 쿤은 덤이었다.

“바람 같아서는 레아넌같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며 사람들의 등이나 쳐 먹는 질 나쁜 상단은 영원히 사라졌으면 좋겠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위를 울리던 쇠붙이 소리도 멎었다.

툭툭!

여럿의 손바닥 터는 소리에 이어 누군가가 빈정거렸다.

“마르크, 이쪽은 다 정리했다. 이제 그 녀석을 털까?”

“무, 무슨…….”

마르크와 말을 섞던 사내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이스론과 연관된 인원 전부를 깔아뭉갤 것처럼 무게를 잡고 나섰던 장정들은 떡이 되어 실신해 있었다.

그래도 살수는 펴지 않았던지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피치 못하게 검은 섞었지만, 대부분 검 등으로 내려찍거나 신체 부위를 강타해 기절시킨 것이다.

확실히 이스론의 호위 무사들의 실력이 한 수 위였다.

이들은 이스론에서도 추려 온 이들이었고, 레아넌의 호위 무사들은 평상시 거드름이나 피우던 녀석들을 데려왔으니 상대가 안 되는 것이다.

여기에 미리 쉬바인이 헤이스트까지 걸어주었으니 레아넌에는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고소한지 조소를 머금고 있는 마르크를 보며 사내가 소리쳤다.

“기고만장해하지 마라! 네놈들은 지금 어떤 짓을 벌였는지 똑똑히 알아두어야 할 게다. 설마 이걸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레아넌에는 이들보다 훨씬 뛰어난 이들이 많았다. 제법 명망 있는 기사들과 유능한 마법사들까지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보다도 그가 믿고 있는 것은 제국이었다.

대륙의 패자인 제국을 등에 업은 한 두려울 것은 없다고 믿었으니 이스론을 벌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때, 비탈길 아래로 한 명의 기사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도 떡 실신이 되어 있는 장정들을 보고 묻는 말이었다. 레아넌의 상단원은 당장에 이와 같은 상황을 일러바쳤다.

“체르 경님, 잘 오셨습니다. 이자들이 이톨에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체르가 말 위에서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위화감?”

“그렇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시장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저희 레아넌의 호위 무사들이 저 지경이 되었습니다.”

“저들은 누구인가?”

“이스론의 상단원을 자칭하는데 시장을 휩쓸기라도 할 모양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체르가 이 상황을 정리해줄 것이라 믿었다. 저치는 그리 높진 않은 신분이어도 제국법의 옹호를 받고 있다.

이톨은 누가 뭐래도 제국의 관할이었다. 때문에 그는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 사항에 변동은 없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너희들을 상단법 위반으로 크리스토 백작님의 성으로 압송하겠다.”

자초지종은 묻지도 않고 레아넌 상단원의 말만 듣고 일방적으로 하는 말이어서 마르크는 발끈했다.

“거 같은 편만 감싸고도는데, 남 얘기도 들어봐야 하지 않아요?”

“그건 가서 얘기하도록.”

매몰찬 대답에 급기야 마르크는 부아가 치밀었다.

“해도 해도 너무하네.”

기사의 날카로운 시선이 마르크에게 꽂혔다.

“뭐라 그랬나?”

“너무한다고 했다. 왜, 떫으냐?”

대놓고 엉기는 새파란 젊은 놈을 보며 기사는 급기야 말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서슬 퍼런 검을 꺼내들었다.

“지금 벌인 일만으로도 감옥행인데도 전혀 뉘우치는 기색이 없구나. 마지막 경고다. 순순히 따라올 테냐?”

말을 안 들으면 이 자리에서 피라도 보겠다는 뜻 같았다.

조금은 수그러들 줄 알았건만, 이스론 상단원으로 추정되는 작달막한 젊은 녀석은 불난 가슴에 불을 지폈다.

“닥쳐!”

마르크도 원래는 이렇게까지 막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오딘이 전음을 넣는 대로 대답을 하라고 하고 있으니…….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도 잠시, 기사의 검은 그 즉시 마르크의 목이라도 떼어낼 것처럼 궤적을 그렸다.

마르크는 깜짝 놀라 몸을 숙였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느새 무귀가 다가와 기사의 검을 손가락으로 잡고 있었으므로.

체르 경, 그라고 해서 레아넌의 호위 무사들과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아니, 더했다.

파랑, 노랑, 검정… 각양각색의 멍들이 얼굴을 울긋불긋하게 만들었다.

좌우대칭이 다른 것이 인간의 얼굴이라지만 그의 경우는 극심했다.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서 그는 어기적어기적 복도를 걸었다.

각 문마다 기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자신의 선임인지 후임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풍선처럼 부푼 눈두덩 때문에 눈도 잘 떠지지 않았으므로.

방향을 정해 걷는 것이 용했다.

더러는 원인을 물어왔다.

“체르 경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엊그제 막 들어온 기사였다.

그는 제 일인 양 나서려 했다. 하지만 어서 보고를 하고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눈치도 없이 떡하니 길을 막고 있으니 기분이 유쾌할 리가 없었다. 체르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둘러 앞을 막는 그를 밀어냈다.

신입을 따돌리고 백 보쯤 더 걸었을 때, 커다란 문 앞에 다다랐다.

문 앞에 서 있는 2명의 기사를 향해 그는 엉망이 된 얼굴만큼이나 침울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체… 루입니… 돠. 뱃… 좟님께 귄히 드… 릴 말쑴이 있… 숩니다. (체르입니다. 백작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언어 전달이 명확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상태 심각한 몸으로 온 것만 봐도 보통 일이 아닌 듯싶어 기사들은 급히 안에 기별을 넣었다.

“체르 경이 백작님을 뵙고자 하옵니다.”

당장은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이 지나서야 헛기침 소리와 함께 백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 험, 들라 하라.”

허락이 떨어져서야 문이 열렸고, 체르는 아픈 몸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크리스토 백작은 옷을 급히 추스른 기색이 역력했다.

백작의 뒤쪽, 카펫 위에는 다소곳이 앉은 아리따운 시녀가 가운만 두른 채 볼을 붉히고 있었다.

크리스토는 뭐라 한마디라도 쏘아붙이려 했다. 달콤한 정사에 훼방을 놓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차마 흉물스럽기까지 한 체르의 얼굴을 보고 그럴 순 없었다.

“어찌 된 일이냐?”

체르의 입이 기괴하게 움직였다.

“뱃좟님.”

재깍 답을 못하는 기사가 답답해 크리스토는 노성을 내질렀다.

“어찌 된 일이냐고 묻질 않느냐!”

“눠… 여워하지… 뫄… 라주십씨오. 봐… 로 말쑴… 두리겠쑵니다(노여워하지 말아주십시오.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거지보다 못한 꼬락서니와 답답한 말투에 크리스토는 짜증이 치밀어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마법사를 불러라!”

“알겠사옵니다.”

대답에 이어 떠나는 발소리가 들렸다.

오래지 않아 마법사가 들어왔고, 지시에 따라 환자의 급한 부분부터 손봤다.

“휴우, 어떻게 당했기에 마나가 이리도 많이 소진됐는지 모르겠습니다.”

흥건한 땀이 마법사의 이마를 훔친 팔뚝을 적셨다.

체르의 안면은 원상 복구가 되지는 않았으나 그나마 양호해진 뒤였다.

크리스토 백작이 그를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체르는 억울해하는 표정이었다.

자기라고 맞고 싶어 맞았겠는가. 어쩔 도리가 없었으니 당했을 뿐인데…….

그는 사정을 몰라주는 백작이 야속하기만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다그치는 듯한 백작의 질문에 체르는 풀이 죽은 눈빛으로 아침나절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다행히 이제 말소리는 제대로 나왔다.

“이톨 항에서 변고가 일어났습니다.”

“변고라니?”

“웬 자들이 행패를 부리고 있다는 소리에 가보았사옵니다. 아니나 다를까, 레아넌의 호위 무사들이 한 패거리들에 의해 실신해 있었습니다. 가벼이 처리할 사안이 아니어서 신은 그들을 본성으로 압송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자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도리어 법을 집행해야 할 저를 말에서 끌어내려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거짓말은 섞여 있지 않았다.

흰 눈썹의 남자가 맨손으로 자신의 검을 잡은 걸 보고 체르는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길로 검을 버리고 당장에 말 위로 올라탔다.

하지만 여러 손이 그를 끄집어 내렸다.

그를 말 아래로 끌어내리고 짓밟은 것은 이스론의 호위 무사들이었다. 그간 그들 역시도 불공정한 대우에 쌓였던 울분이 많았던 것이다.

떼거리로 사정없이 짓밟힌 것에 자존심도 상하고 원통해서 오는 동안엔 가슴이 먹먹했었다.

크리스토 백작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이 누구더냐?”

“저들의 말에 따르자면 이스론 상단원들이라고 합니다. 레아넌의 상단원이 그들에게 인질로 붙잡혀 있사옵니다. 그는 지금 백작님께 구조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레아넌과 크리스토 백작은 공생 관계였다.

뒤를 봐주는 대신 많은 돈을 지불해준다. 크리스토 백작이 시녀들을 늘리고 그녀들과 대낮의 정사를 즐길 수 있는 것도 다 그들이 바쳐 온 돈이 있어서였다. 남의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크리스토는 즉각 결정을 내리고는 물었다.

“그놈들은 어디 있느냐?”

“기다리겠다고 하였으니 아직 항에 있을 겁니다.”

* * *

단아한 자태와 수줍음 많은 그녀는 한마디로 요조숙녀였다.

사람들의 시선에는 그렇게만 비춰졌다. 주변을 밝게 할 정도의 미모에 사람들은 넋을 놓고 쳐다보기 일쑤였고, 더러 수작을 걸어오는 놈들도 있었다.

“어이, 엘프 아가씨, 상큼한데? 내가 가진 돈이 좀 많은데, 어때? 나에게 기회를 한번 주지 않겠어?”

콱!

“아악!”

사내는 아픈 발을 부여 쥐고 토끼인 양 껑충껑충 뛰었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힐의 굽으로 발을 사정없이 밟는데 안 아프고 베기겠는가. 발에 구멍이 안 뚫린 게 다행이었다.

옆의 일행들은 뭐가 그리 웃긴지 계속 키득거렸다.

아픈 것은 둘째 치고 졸지에 웃음거리로 전락해버리니 사내의 기분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당장에 손을 들어 헤르미온에게 협박을 가했다.

“확, 이게!”

굳이 그녀가 도끼눈을 뜨고 째려볼 필요가 없었다.

한편에서 이를 지켜본 건장한 남자가 손찌검을 하려던 그 손목을 잡아주었으므로.

“뭐요? 아가씨에게 왜 행패를 부리는 거요?”

“이 여자가 내 발을 밟았단 말이오.”

남자의 시선이 헤르미온을 보았다. 항변을 바라는 눈치였다. 치근대서 밟았다고 하면 그만일 것이다. 하지만 헤르미온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연히 남자들 간에 지루한 말싸움만 이어졌다.

“그렇다고 여자에게 손찌검을 해도 되오?”

“열이 받아 무의식중에 손이 올라간 것이지, 때리려던 것은 아니오.”

앞에서 떠들어대는 소리에 헤르미온의 고운 눈썹 사이에 주름살이 생겼다. 이 남자 역시 귀찮기는 마찬가지였다.

근래 와서 그녀에게 세상의 남자는 두 가지로 분류되었다.

오딘, 그리고 오딘이 아닌 남자.

위해를 가하려던 남자를 제지한 이는 제법 멋을 부렸다.

“굳이 싸우고 싶지 않구려. 그냥 돌아가시오.”

워낙 덩치가 차이 났다. 또한 힘깨나 쓰는 사람 같아 보여서 친구들을 합친다 해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억울한 마음이 들었던지 헤르미온에게 시비를 걸었던 남자는 다섯 발자국쯤 앞에서 등을 돌려 초를 쳤다.

“헹, 보아하니 점수깨나 따고 싶은 모양인데, 실수한 거요. 그녀는 당신한테 관심을 가지지 않을 테니.”

“뭐, 뭐요?”

그 말이 맞는 듯했다. 남자의 얼굴이 붉어졌으니까.

또한 그 말대로 헤르미온도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녀는 단 한마디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저런 놈들은 조심해야 하오. 다친 덴 없소?”

여전히 그녀는 말상대를 해주고 있지 않았다.

“에흠, 그럼 몸조심하시구려.”

남자는 무안한지 그 말만 남기고는 얼른 자리를 떴다.

그마저 가고 나자 심술궂어졌던 표정은 사라지고 청순한 이미지가 살아났다.

그녀의 뇌리에 같은 말이 맴돌고 있었다.

‘여자가 갈 만한 곳은 아니야.’

그들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도박장이었다.

이 하나만 놓고 보아도 여자를 대하는 오딘의 성격이 상당히 보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헤르미온은 오딘에게만은 한없이 관대했다.

‘아이 참, 나만 놓고 가면 어떻게 해.’

대놓고 왕따를 시켜 버려도 그냥 이 정도였다. 속으로 가볍게 불평만 하는…….

오딘의 앞이라 그녀는 아침나절의 사건에도 입을 굳게 닫았더랬다. 항상 조신하고 나긋나긋한 모습만을 보여 온 것이다.

원래 헤르미온은 근처의 여관에 머물렀어야 했다.

그곳에서 음료를 마시고 있었어도 될 일인데 굳이 밖에 나온 이유는 오딘이 향한 도박장이라도 쳐다보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같이 갔어도 난 그냥 조용히 있었을 텐데…….’

미녀는 혼자 두지 말라고 했던가. 오래지 않아 또 하나의 패거리들이 꼬여 버렸다.

“여어, 이거 보물인데? 어디서 이런 보석이 굴러들어왔나?”

아까의 이들보다 훨씬 더 거칠어 보이는 패거리들이었다.

허리춤에 찬 검갑들은 둘째 치고, 특히나 바로 앞에서 헤르미온의 턱을 치켜드는 남자는 옆머리를 밀고 빳빳이 세운 머리카락에 입술과 눈썹, 심지어는 관자놀이 옆에까지 고리를 단 모습이 보는 눈으로 하여금 혐오감을 느낄 정도였다.

헤르미온이 마찬가지로 발을 찍어 누르려 했지만, 그 남자는 용케도 발을 뺐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남자의 패거리들이 하나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히히히, 고년 참 맘에 드네.”

하지만 곧 남자의 품에 껴안길 것 같던 이들의 예측은 어긋나버렸다.

우스꽝스럽지만 웃을 수도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헤르미온이 남자의 얼굴에 주렁주렁 달린 고리를 잡아당긴 것이다.

“아얏, 이거 못 놔?”

얼마나 세게 잡아당겼는지 피까지 흘러 당사자는 매우 아파 보였다.

결국 패거리들이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야! 이 미친년아, 당장 그 손 떼!”

그들이 헤르미온의 머리채라도 휘어잡으려 할 무렵, 또 다른 무리들이 엉켜 들었다.

새로 온 무리들의 용건은 달랐다.

“저 여자도 그때 함께 있었습니다.”

말을 하는 이는 다름 아닌 체르 경이었다.

헤르미온에게 고리를 잡혀 동물처럼 질질 끌려 다니던 남자는 안면 근육의 늘어짐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아직도 애를 쓰는 중이었다.

그를 대신해 패거리 중 하나가 성질을 냈다.

“네 녀석들은 뭐야?”

원체 겁이 없는 이들이었던 듯하다. 옷차림새만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기사들을 두고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겁 없는 한마디의 말이 불러오는 대가는 적지 않았다. 앞쪽에 있던 기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뚜벅뚜벅 다가오더니 발검에 이어 궤적을 그렸다.

피슉!

사내의 뱃가죽이 찢어져 벌건 피가 뚝뚝 흘러내리며 바닥을 적셨다. 배로 가져다댄 손에 묻은 피는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어… 어……?”

충격에 휩싸인 사내의 복수라도 해주려는 것일까. 돌연 옆쪽에 있던 사내가 검을 빼어들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기사를 베어버릴 양 달려들었다.

“이 개자식아!”

기사의 검이 아까보다는 조금 높은 위치로 또 한 번의 궤적을 그렸다.

서걱!

기우뚱거리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후 데굴데굴 굴렀다. 머리통을 잃어버린 모가지에서는 피가 콸콸 흘러내렸다.

“꺄악!”

웬 여인의 비명처럼, 이는 사람들이 운집한 지역에서 쉽게 벌어질 일은 아니었다. 시장 한복판에서 사람의 머리통이 굴러다니는 광경 말이다.

더 이상의 만용은 없었다.

뱃가죽이 찢긴 사내를 포함해 패거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먼발치서 구경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혼비백산하며 달아났다.

불행한 것은 헤르미온에게 잡혀 있던 사내였다.

뜻밖의 사건에 정신이 팔려 헤르미온은 그의 고리를 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사내는 발악하듯 손을 휘저어 결국 그녀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난 후 뒤도 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이 자리에는 크리스토 백작까지 있었다.

고귀한 신분이 굳이 발걸음을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톨에 들른 것은 일을 처리하고 쓸 만한 여색이나 물색해볼 요량에서였다.

미리부터 생각이 그쪽으로 기울어 있었기에 그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삼삼하구나.”

“영주님.”

책사의 성토였다. 기사들과 마법사를 대동한 자리에서 말은 가려야 하질 않겠는가.

무안한 건 아는지 크리스토 백작은 헛기침을 했다.

“험험.”

백작의 음흉한 시선이 헤르미온의 구석구석을 훑었다.

희고 고운 목선과 풍만하다 할 순 없지만 아담하고 예쁜 가슴, 잘록한 허리 등 어디 한 군데 빠지는 데가 없었다.

곧 명이 떨어졌다.

“데려오라.”

기다렸다는 듯 한 기사가 다가섰다.

그는 대뜸 헤르미온의 허리에 손을 걸쳤다.

“같이 가주셔야겠소.”

찡그린 얼굴이 가히 일색이었다.

그녀보다 더 인상을 찌푸린 건 바로 크리스토 백작이었다.

‘저놈이 감히 어디다 손을 대는 거야?’

허리에 있는 손이 더 아래로 미끄러질 것도 같았기에 크리스토는 그 기사를 좋은 말로 타일렀다.

“어허, 말로 하라, 말로. 말로 따라오라고 했으면 되었지 않느냐.”

기사는 눈치도 없이 대꾸했다.

“도망을 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 크리스토 백작의 눈이 치떠지고 언성이 높아졌다.

“도망치면 그때 잡으면 되지, 꼭 내 말에 토를 달아야겠느냐!”

그제야 기사는 잘못한 것을 아는 모양인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신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마치 백작 자신의 계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한 말에 크리스토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네놈이 오늘 잠을 자기 싫은 모양이로구나. 두고 보자, 성으로 돌아가는 즉시…….’

생각은 마쳐질 수 없었다. 누군가의 거들먹거리는 소리가 방해했기 때문이다.

“마침 왔군.”

일단의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훼방꾼이 끼어들었다는 것, 아니 물의를 일으킨 이스론의 무리가 저들일지도 모른다는 것보다 싫은 표정이었던 엘프녀의 얼굴색이 확연히 달라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반기고 있다는 게 크리스토 백작의 신경을 더 거슬렀다.

맞았다. 레아넌의 상단원이 구출을 호소하고 있었다.

“크리스토 백작님, 살려 주십시오.”

따로 맞은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마르크 일행은 그에게 육체적인 고통은 선사하질 않은 모양이다.

기사들과 마법사들도 마땅히 적대적인 시선으로 저들을 쳐다보았다.

대치 국면 속에 헤르미온은 기사의 손을 뿌리치고 저들 틈으로 달려갔다. 그녀를 붙잡았던 기사가 제지하려 했지만, 크리스토 백작이 이를 말렸다. 꽉 끌어안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몇 녀석을 제압하고 성으로 끌고 가면 될 터. 잘되었군. 도리어 저 녀석을 이용해 순순히 따르게 하면 될 것이니…….’

저 녀석이라 일컫는 대상은 오딘이었다.

크리스토가 이런 생각을 품은 것은 그녀가 그를 보는 시선이 애틋해 보여서였다.

주시해서 볼수록 그런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다소곳해진 태도와 볼이 홍조를 띤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와 혹 시선이라도 마주치려 하면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크리스토는 그 두 사람을 관찰하느라 이들의 위험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엄한 데 정신이 팔려 있는 백작을 대신해 그의 책사가 나섰다.

“그대들이 이톨에 무례를 일으켰다고 들었다. 왜 그랬지?”

질문은 마르크가 답했다.

“뒷골목의 시정잡배들이 저희 상인들에게 먼저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럼 시정잡배들에게 따질 것이지, 왜 레아넌의 호위 무사들을 다치게 하고 상단원을 인질로 잡고 있느냐?”

“이들도 한패였습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

“혼찌검이 난 녀석들이 가고 난 후, 이들이 왔습니다. 시정잡배 하나는 뒤에서 눈치만 보고 있었지요. 이자 역시 부인하지는 못할 겁니다.”

마르크에게 뒷덜미를 잡힌 레아넌의 상단원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이냐?”

레아넌의 상단원은 책사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힘으로 해결하면 될 일을 가지고 창피란 창피는 다 당하며 질질 끌고 있질 않은가. 혀를 잘못 놀리면 고생한다더니 그가 딱 그 꼴 같았다.

“그와는 그냥 알던 사이였습니다. 행패를 부린 일은 정말 몰랐습니다. 도움을 요청하기에 그저…….”

“거짓말하기냐?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몰아붙이는 마르크를 보며 백작의 책사는 인상을 구겼다.

“설사 그게 사실이고 너의 말이 맞다 해도 엄연히 이곳은 법의 보호를 받는 구역이다. 폭력을 행사한 사실은 결코 좌시할 수 없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시원한 언변이었다. 레아넌의 상단원이 느끼기에는.

이제는 정당성도 부여가 되었으니 이스론의 치들을 깔아뭉개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상대가 너무 막무가내였다.

마르크부터 막 나왔다.

“법을 내세우실 거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이렇지요? 시정잡배들은 하수인일 뿐이고, 그들을 부리는 레아넌의 뒤를 봐주는 게 뒤에 계신 크리스토 백작님 아니십니까?”

책사의 눈이 부릅떠졌다.

“뭐, 뭣이?”

마르크는 그의 이성에 불을 지피려는지 계속하여 이죽거렸다.

“따지고 보면 다 한통속 아닙니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이때까지도 백작은 아무 소리 안 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욕정이 가득해 오간 얘기가 들리지 않았던 탓이다.

‘강하게 나가야 할까? 아니면 살살 달래야 할까? 저 정도라면 평생 데리고 살아도 될 것 같은데 말이야.’

공포로 지배하는 연애는 금방 질린다.

이성이 목석같아서야 쓰겠는가. 오래 두고 볼 사이라면 때로는 엄하게 하면서 때로는 너그러운 태도를 비춰 고운 정과 미운 정을 동시에 쌓아두는 게 좋을 것이었다.

선이 무엇이냐가 문제였다.

‘일단은 악감정을 가지게 될 테니 겁부터 주는 게 낫겠지.’

벌써부터 책사가 안면을 구기는 중이었다.

백작 역시 급했다. 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성으로 돌아가 즐겨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기어이 해서는 안 될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저들을 압송해라. 반항하는 자는 이 자리에서 처결해도 좋다. 신속히 이행하도록.”

기다렸다는 듯 기사들이 뛰쳐나갔다. 마법사 역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마나를 재배열하고 있었다.

기사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그들을 빙 둘러 포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이들이 우르르 달려 나오는 순간, 무귀와 쌍귀가 그 틈으로 비호같이 파고들었다.

퍼벅퍼퍼벅퍼퍽!

기사들의 동작이 멈춰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무귀와 쌍귀가 멈춰 섰을 때, 달려오던 기사들은 맥없이 꼬꾸라졌다.

그 경악할 상황에 남은 자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무, 무슨 일이……?”

크리스토 백작, 책사, 그리고 마법사. 남은 자들이라고 해봐야 이 셋뿐이었다.

크리스토 백작의 기사들의 실력은 결코 낮은 게 아니었다. 대부분이 소드익스퍼트 상급에 해당했으니 말이다.

백작 자신의 검술이 기사들에 비할 게 아닐 정도로 뛰어나다 하지만, 저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린 두 놈을 감당할 자신은 없었다. 그 뒤에 있는 놈들도 이제 보니 보통이 아닌 듯했다.

이렇듯 당혹감을 금치 못하고 있는데, 인질로 잡아 이용하려던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우선 두 녀석을 더 쓰러뜨리고 대화를 시작해보지.”

기사들은 한밤중에야 일어났다.

그것도 뜻하지 않게 시장 한복판에서 죽은 시체와 동침을 해버렸다.

이렇듯 이들이 늦게 일어난 까닭은 쉬바인의 슬립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얻어맞은 부분의 충격이 가시질 않았지만, 그들은 도리어 멍한 표정인 백작을 걱정했다.

“백작님,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옵니까?”

백작은 말이 없었다.

그는 작금의 사태가 기사들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라는 걸 알았고, 또 저들을 다그치거나 말을 섞을 기력조차 없었다.

뼈마디가 부러지고 근육이 뒤틀리는 극심한 고통은 머리털이 난 이래 처음 느낀 것이었다.

‘그자는 필경 악마였다…….’

두려움에 질려 파리해진 안색은 좀처럼 원상태로 돌아올 기미가 없어 보였다.

* * *

식당 안은 오딘 일행이 전세를 내어 다른 손님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르크는 한편으로는 통쾌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괜한 일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상인들을 해코지라도 한다면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심초사하고 있는 까닭에 모처럼 가진 이스론 일원들과의 술자리가 그리 즐겁지 못했다.

“마르크, 좀 마셔. 잔이 그대로잖아.”

틴이 마르크의 어깨를 짚고 물었다.

“왜 그래? 무슨 걱정 있어?”

“오늘 일, 정말 잘한 걸까요?”

잠시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러다가 한 호위 무사가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지나봐야 알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는 거야.”

다른 무사가 이에 맞장구를 쳤다.

“그래, 난 솔직히 후련하다고!”

모두가 동조를 하진 않았지만, 표정을 볼 땐 대부분이 그런 심정인 듯했다.

분위기를 깨치기 싫었던지 마르크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역시나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나와 틴 님 정도일까? 일이 잘못되면 상단주님한테 뭐라고 해야 하지?’

꽤 파장이 심할 것이었다. 재수가 없다면 이스론에 가입한 상인들이 너도나도 탈퇴를 원할 테고, 자연히 이스론의 영향력은 약화될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는 마르크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부추긴 것은 오딘이었으므로.

“너무 걱정하지 말자. 여태 오딘 님의 말씀을 들어 잘못된 일이 없었으니 이번에도 그렇게 될 거야. 게다가 지속적으로 무사들을 파견 보낸다고까지 하셨으니 큰일은 없을 거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겠죠?”

그렇게 묻고는 마르크 역시 술을 들이켰다.

“캬아, 맛 좋다.”

비워진 잔에는 즉시 술이 채워졌다.

조금 안정되어 보이는 마르크의 표정을 확인하고서 언제 그랬냐는 듯 호위 무사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저들끼리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틴만은 달랐다. 그는 마르크의 염려가 덜어지지 않은 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사실 이제는 필요성을 느껴요. 이스론이 정말 최고의 상단으로 우뚝 서려면 아레인의 힘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요.”

“무슨 얘기냐?”

“아무래도 한길로 나아가는 게 어떨까 해서요.”

단순한 협력 관계가 아닌 병합의 필요성을 거론하는 것이었다.

‘상단주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상단주 폴칸은 누구도 꺾지 못할 만큼의 아집이 있었다.

마르크와 틴이 알고 있는 그는 이스론이 단독으로 일어나길 원하지, 누군가의 힘을 등에 업고 성장하길 원하지 않았다.

문득 틴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상단주님은 둘째 치고 아레인이 뭐가 아쉽다고 우리와 합치겠냐?”

“그렇겠죠? 저들이 해코지나 안 했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마르크의 표정이 씁쓸해 보였다.

돌연 거나하게 취한 파르티잔이 마르크의 테이블로 다가와 칠면조의 뒷다리를 잡아 뜯었다.

워낙에 엉뚱한 인물이라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빙긋이 웃음을 흘릴 뿐 별소리를 하지 않았다.

“니들이 뭘 알아~”

느닷없이 시작된 파르티잔의 술주정을 이스론의 상단원들은 재미난 구경거리로 받아들였다. 한 번도 그가 이렇게 술에 취한 것을 본 적이 없었던 탓이다.

파르티잔이 하는 말은 신세 한탄에 가까웠다.

“니들이 공포를 알기나 해?”

나름 심각한 말에 이스론의 상단원들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더군다나 노인이 아닌가.

파르티잔은 자꾸만 사람들이 흐릿해 보이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눈을 비빈 후 고개를 흔들었다.

“우쒸~”

마르크는 그가 쓰러질 것이 염려되어 붙잡고 의자에 앉혔다.

“여기 앉아서 드세요.”

호의가 싫지 않았던지 파르티잔은 잠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우스꽝스러워 보이긴 매한가지였다.

“그놈이, 꺼억~”

돌연 파르티잔의 입에서 트림이 나오며 갖가지 향신료와 포도향이 섞인 술 냄새가 마르크의 코에 훅 끼쳐 왔다.

역한 냄새에 두 손가락으로 코를 움켜쥐긴 했지만, 마르크는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파르티잔은 잠시 입아귀를 늘어뜨리다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해코~ 지? 흥, 웃기지 말라 그래. 그랬다가는…….”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쿨…….”

그새 곯아떨어진 것이다.

“많이들 먹었나?”

파르티잔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묻는 사람은 제라드였다.

“네.”

동시 다발적인 대답에 이어 한 호위 무사가 예의상 되물었다.

“장로님도 많이 드셨습니까?”

“난 술은 하지 않는다네. 고기는 많이 먹었지.”

“하하하.”

제라드는 파르티잔이 하려는 얘기와 마르크가 가지고 있는 걱정을 알고 있었다.

호위 무사들이 시끄러워진 틈을 타 제라드는 상체를 낮추며 마르크에게만 들릴 정도로 소곤거렸다.

“그 작자가 상인들을 해치지는 못할 걸세.”

마르크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죠?”

“때때로 공포는 이성을 지배한다네. 그것이 오늘과 같은 극심한 경우일 때는 더욱더. 또한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겁이 많지. 만약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시에는 목숨을 거두러 오겠다는 엄포를 놓으셨으니 그럴 엄두도 못 낼 걸세.”

“그럴까요?”

“오딘 님께 분근착골수를 당해본 사람들만이 알 걸세. 자네도 그 고통을 겪어보겠나? 그럼 그자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볼 수도 있으니… 내 자네를 위해 오딘 님께 특별히 부탁드려볼 용의가 있다네.”

마르크는 아연 실색하며 손을 휘저었다.

“저, 절대 하고 싶지 않아요.”

그가 본 크리스토 백작은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었다. 뼈가 어긋나고 근육이 뒤틀려 무슨 연체동물이라도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제라드의 말을 듣고 나니 무겁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 테이블의 화기애애함과는 다르게 그 시각, 위층의 오딘과 아그리스가 앉은 테이블은 조용하기만 했다.

오딘은 흡족한 표정으로 아래층을 내려다보며 잔에 담긴 술을 입 안에 털어놓고는 했다.

아그리스에게 이딴 흔하디흔한 술은 관심 너머였다.

그의 관심은 낮에 오딘이 보인 손속에 있었다.

“그것은 뭐였지?”

“뭘 말하는 거야?”

“백작이라는 놈을 오징어처럼 만든 것.”

표현이 웃겼던지 오딘은 피식 웃었다.

“분근착골수라 한다.”

“분… 근… 착… 골… 수?”

“그렇다.”

아그리스의 눈에 분근착골수라는 것은 아주 매력적으로 비춰졌다.

‘저 기술을 익힐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것이 아그리스는 오딘의 무공 중에 가장 쓸 만한 것이라고 여겼다. 대상을 죽이지 않고 고통을 겪는 것을 즐겨 볼 수 있다는 취지에서였다.

하지만 가르쳐 달라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드래곤이 인간에게 배워서야 쓰겠는가 말이다.

그렇다고 오딘의 기억을 뒤져 기술에 얽힌 내용을 빼낼 수도 없었다. 그의 강인한 정신력에는 정신 마법이 통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켜보고 분석하는 수밖에는 없겠군.’

아그리스의 눈빛이 순간 욕심으로 일렁거렸지만, 다행히도 오딘은 그의 속내를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