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톤의 길
“크아아아아악-!”
찢어질 듯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계속되는 비명 소리를 버티지 못해 단단했던 벽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이내 돌가루가 흘러내렸다.
머리를 누르며 소리를 치는 이는 다름 아닌 신성 제국의 성황, 카르만이었다.
핏발이 서 붉어진 눈에서는 선홍색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난 시절의 회한과 죄책감이 그를 눈물짓게 만들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가 양면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내, 카르만의 경우는 그 정도가 극히도 심했다.
“제발, 이제는 제발 날 놓아다오.”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카르만의 간절함을 담은 말에 놀랍게도 같은 입에서 다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부를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끝내자는 거냐?”
2개의 거울 안에 2명의 카르만이 서 있었다.
왼쪽에 있는 거울의 카르만은 순한 얼굴이었고, 오른쪽에 있는 거울의 카르만은 펜던트를 떼어냈을 때의 무서운 얼굴이었다.
사악해 보이는 카르만이 물었다.
“설마 맹약을 어긴다는 말은 안 하겠지?”
가벼이 여길 사안은 아닌 듯했던지 그 말에 괴로워하던 카르만의 목소리가 잠시 멎었다.
2개의 거울엔 각기 다른 표정이 교차했다.
거듭 생각을 해보았는지 거울 왼쪽의 카르만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부탁이다.”
오른쪽의 얼굴은 일순에 일그러졌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왼쪽의 카르만은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견디지 못해 사지를 오그렸다. 참고 견디어보려 어금니를 악물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 그만…….’
모기만 한 목소리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왼쪽의 카르만은 가혹한 고통 속에 실신해버렸다. 거울 앞에는 흉측한 카르만만이 서 있을 뿐이다.
“네 녀석의 유약함엔 진절머리가 난다.”
쓰러진 카르만을 보면서도 그는 성이 풀리지 않는 듯했다.
“어리석은 놈, 날 끌어들였을 때 이미 포기했어야 했다. 네 녀석의 약한 마음이 아니었다면 그 오딘이란 녀석에게 굴하지도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돌연 작달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내부를 밝히던 벽등들도 훅 꺼졌다.
잠시 뒤 출입문이 열렸다. 너무 어두워 대상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작고 아담한 체구로 보았을 때 메이임이 분명했다.
어둠 속에서 그녀를 보는 카르만의 시선이 어쩐지 차가워 보였다.
지금의 카르만이라 할지라도 메이를 대하는 태도만은 보통의 카르만과 일관되었었다. 그러나 오늘은 분명 달랐다. 독한 살심이 깃든 것이다.
메이가 작금의 상황을 알 리 없었다.
“성황 폐하시죠? 여기에 계신다고 해서 단숨에 달려왔어요. 가만, 벽등이 어디 있더라?”
“켜지 마.”
한파처럼 싸늘한 목소리에도 메이는 두려움을 가지지 않았다. 가끔 성황 폐하는 저런 껄끄러운 목소리를 냈던 걸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건 보셔야 해요. 정말 마음에 드실 거예요.”
카르만은 무정하게도 아무런 대꾸조차 해주질 않았다.
“그럼 그냥 여기 두고 갈게요. 이따가 꼭 보셔야 해요. 아셨죠?”
그길로 메이는 가져왔던 찻잔 세트를 땅에 내려 두고서 도로 문을 닫은 채 툴툴거리며 돌아갔다.
벽등이 켜지며 다시 실내가 환해졌다.
카르만의 시선은 메이가 두고 간 것에 멈춰 있었다.
손으로 매만지자 그녀가 가져온 찻잔들에선 따스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거기에는 먼 길을 다녀온 메이의 정성과 온정이 깃든 듯했다.
카르만은 고개를 돌려 거울 속에 쓰러진 카르만을 직시했다.
그때였다.
파그작!
허무하게 깨어진 찻잔들의 잔해가 바닥을 어지럽혔다.
잠시 무덤덤했던 카르만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가며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말이 튀어나왔다.
“네 앞에서 저 꼬맹이의 껍질을 벗기는 재미도 쏠쏠할 거야. 그러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카르만?”
쓰러진 카르만은 미동도 못하여 일어날 기력도 없는 듯했다.
* * *
바리톤의 공왕 로테노아는 귀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대상은 바로 아레인의 발데르 폰 그라니트 공작이었다.
과거엔 적이었지만 현재는 아니었다.
몇 차례 만남을 가져 보며 로테노아는 그의 인물됨을 높게 평가해왔다.
“일전에 보았던 보탄 백작님과 발데르 공작께서는 해가 갈수록 젊어지시는 듯합니다.”
“과찬이십니다. 공왕께서도 더 건강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허허허, 매번 듣기 좋은 소리만 해주시는군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발데르는 미안한 기색을 떠올렸다.
“이번에도 여왕께서는 발길을 못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허허,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아레인의 여왕이 발길을 안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가 문제였다.
사실 엘레느 여왕이 발걸음을 안 하는 데에 고마운 것은 오히려 로테노아였다.
그는 그녀가 바리톤에 발걸음을 했던 때의 일을 떠올렸다.
당시엔 본인조차도 회춘하는 줄만 알았다.
마주친 신하들의 정신을 하나같이 쏘옥 빼놓았고, 세 왕자들은 넋을 잃었다. 더구나 헥토르가 그 자리에서 구애를 벌이는 바람에 대전 안이 우스운 꼴이 되었던 것이다.
그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녀가 일정을 앞당겨 돌아간 이후에 헥토르와 유프라, 팔테스는 드잡이질을 벌였다. 까닭인즉슨, 일 왕자인 헥토르 때문에 그녀가 빨리 돌아갔다는 것이다.
한때는 세 왕자 중 누군가 그녀와 맺어진다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로테노아가 보았던 그녀는 세 왕자 중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발데르 또한 그 자리에 있었으니 당시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제 발이 저렸던지 로테노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난 고사하고 모자란 신하들과 자식들 때문에 공작을 볼 때마다 부끄럽소이다. 특히나 자식 농사는 영 잘못 지은 듯합니다.”
엘레느를 대면할 때 넋을 놓은 것은 따지고 보면 아레인의 신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데르는 자책감에 사로잡힌 로테노아를 위로해주기로 했다.
“일 왕자는 늠름하고, 이 왕자는 덕이 있으며, 삼 왕자는 사리 판단이 빠르신데 너무 염려하시는 듯합니다. 장점도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두 왕자는 그렇다 쳐도 헥토르 그 녀석 얘기만 나오면 골이 다 지끈거릴 정도입니다.”
로테노아가 생각하는 헥토르는 다 큰 문제아였다.
항상 말썽을 일으키고 성격은 날이 갈수록 삐뚤어져 이제는 아비인 자신의 말조차 들으려 하지 않았다. 오냐오냐 키워낸 게 결국 모난 성격을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이다.
갈수록 정이 떨어져 차라리 헥토르 저놈이 자식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뭐 하나 꼬투리를 잡아 멀리 귀향이라도 보내고 싶을 정도였을까.
못 보내는 이유는 단 하나, 왕비의 눈물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도 헥토르는 대형 사고를 쳤다.
암상인들과 접촉했으며, 몰래 성을 빠져나가 수하를 모두 잃고 돌아왔다.
자초지종을 캐묻는 로테노아에게 헥토르는 힐책을 들으면서도 브란트로 영초를 캐러 갔다는 것을 함구했다.
아니, 거짓말을 했다고 해야 맞았다.
그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말인지 구별 못할 로테노아가 아니었다. 그냥 포기한 것이다.
이제 로테노아는 헥토르가 팥으로 죽을 쒀온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었다.
자연히 헥토르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헥토르는 반성을 하기는커녕 불평만 하는 중이었다. 같은 자식인데 편애한다면서 말이다.
발데르 역시 이에 대한 대충의 사정은 알고 있었다.
꼭 보고 듣지 않았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로테노아가 얼마나 그를 미워하는지만 보아도 대략 짐작이 가능할 정도니까. 이 상황에 그를 편든다면 로테노아의 심기는 도리어 불편해진다. 그와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괜히 편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로테노아는 부러 말을 돌리는 듯했다.
“그놈 얘기는 그만 합시다. 그건 그렇고 여왕께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부분에서 말씀이신지……?”
“우리 바리톤에도 기회를 준 것 말입니다. 덕분에 바리톤이 부유해지고 있습니다.”
무역 얘기였다.
아레인에 직물이 발달했다면 바리톤에는 작물이 발달했다. 이 작물들은 희소가치성을 띠고 있었으며, 대륙에 퍼지며 원래의 20배에 달하는 가격을 받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레인은 여러 방면에서 바리톤에 협조를 구했는데, 그에서는 엄청난 수익이 파생되었다. 따라서 당시 무리한 전쟁으로 허덕이던 백성들은 더 이상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로테노아는 이를 고마워하는 것이다.
반색을 하면서도 발데르는 이를 똑바로 꼬집었다.
“그것은 오딘 님의 결정이십니다. 비단 그 부분만이 아닙니다.”
순간 로테노아의 얼굴색이 사색이 되었다.
“그럼 여태까지의 일은 모두……?”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대륙에 계시지만 항상 아레인의 정사에 관여하고 계십니다.”
그릇된 판단으로 바리톤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는 본인의 욕심에서 비롯되었던 일. 아직도 로테노아는 자신으로 인해 전쟁에서 죽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그들의 넋을 기리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과거의 오만함을 깨우치고 뉘우친 것이다.
한동안 아레인은 굴욕적인 외교를 요구했었다.
그때마다 로테노아는 강단 있는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전대 현자 클라베르가 없었다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로테노아의 변화를 일각에서는 전화위복이라고까지 얘기했다. 또한 칭송하는 자들도 많아졌다.
모든 게 클라베르 덕분이었다.
그의 성토가 아니었다면 어찌 반성을 했겠으며, 그의 직언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날의 바리톤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결정적인 힘이 되어준 클라베르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 점이 허탈함으로 남았고, 미안함으로 남았다.
제대로 그를 보살피지 못해 죽게 한 책임을 느낀 것이다.
그것이 미련으로 남아 그는 꿈에서라도 클라베르를 볼 때면 손을 맞잡으며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했다.
‘내 여태 그분을 따르기는 했지만, 악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은 오래 두고 봐야 한다더니 오딘, 그분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분 같구나. 원망하려거든 주제넘게 덤볐던 날 원망해야겠지.’
진실한 깨달음이었다.
오딘은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일체 시비를 거는 법이 없었다. 비록 오만하다 할지라도 그에겐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 정도의 힘이 있는 자라면 그보다 더한 일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로테노아 자신만 해도 그랬었지 않은가.
힘이 있다고 해서 타인의 자유를 훼손하고 억압하려 했던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 비추어볼 때, 어쩌면 자신보다 더 겸손한 이는 오딘일지도 몰랐다.
‘그가 정말 성군이다.’
그 생각은 오래도록, 아니 어쩌면 죽는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백성들을 지켜 줄 힘을 가졌으며,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할 줄 알고, 그릇된 이를 포용하고 가르칠 줄 안다.
연륜이 없다면 불가능할 일일지도 몰랐다.
불현듯 그런 의문이 들어 로테노아가 물었다.
“오딘 님의 연세는 어찌 되십니까?”
“저도 그건 모릅니다.”
발데르는 말하기를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확실치는 않지만 겉으로 드러난 연세보다는 더 드신 듯합니다. 일전에 오딘 님께서 환골탈태란 것에 대해 거론하셨습니다. 제가 그 경우에 처했을 때 말입니다.”
“화, 환골?”
“환골탈태라 합니다. 묵은 껍질을 벗고 신체가 무공을 익히기 가장 적당한 상태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공작께서도?”
“맞습니다. 저와 보탄 백작이 젊어진 것도 이와 같습니다.”
도통 로테노아는 모를 말이었다.
“검술의 최고 경지는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던 겁니까?”
로테노아는 환골 어쩌구를 검술의 경지로 오해하고 있었다.
“뭐라 딱 잘라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저나 보탄 백작은 아직 그 경지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덧붙여서 환골탈태는 검술의 경지는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오해는 풀렸다. 젊음을 안겨 주었다는 그 변화는 소드마스터일 때 일어났다는 얘기다.
“일부는 일어나고 일부는 안 일어나는 모양이로군요. 제가 알던 소드마스터는 두 분처럼 젊어지지 못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어느 선을 넘을 때 생기는 것입니까?”
“제가 느끼기로는 자신의 신체가 필요성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을 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저와 보탄 백작은 운이 좋아 오딘 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설명을 듣고서야 로테노아는 이해하는가 싶었다. 그리고 소드마스터가 검술을 익힌 자들의 최고 경지라는 애초의 생각이 굳으려는 순간이었다.
발데르의 말이 그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소드마스터가 끝은 아닐 겁니다. 오딘 님은 아마도 그 벽을 넘으신 듯합니다. 저와 보탄 백작은 오딘 님과 비슷한 사례가 있나 궁금증이 치밀어 대륙의 역사를 뒤져 보았습니다. 불행히도 서적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이요?”
“일부에서는 그랜드마스터가 있었다는 설이 나돌더군요.”
“그, 그렇습니까?”
로테노아에게는 가망도 없는 얘기였다.
본인도 검술의 길을 걸어왔으니 그저 자신의 앞에 있는 소드마스터와 검술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는 것으로 만족하던 차였다.
그러던 중 그랜드마스터에 대한 얘기가 흘러나오니 아이들의 화젯거리인 양 들뜨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선망의 대상인 그가 아는 사람이라는 데 대해 일종의 자부심까지 일었다.
스스로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에 대해 알게 되고 상대를 인정하게 되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무거운 마음으로 오랫동안 자리했던 이마의 주름살이 펴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로테노아는 아레인에 더 이상 힘에 굴복해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보다 긴한 친밀을 쌓아가려 하고 있었다.
* * *
유프라는 한결같았다.
그는 헥토르만큼 욕심도 없었을뿐더러 팔테스처럼 흐지부지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도 않았다.
힘이 들 때마다 유프라는 검술에만 매진했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덕(德)으로 대했다.
아레인의 엘레느 여왕을 놓고 벌이는 신경전만 아니라면 팔테스는 유프라와 드잡이질을 벌일 일도 드물었다.
그러나 심신이 고되고 힘이 든다고 해서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떨쳐지는 것은 아니었다.
“후우, 차라리 그녀에게 부군이 있었다면 내 이렇게 마음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그녀의 행복을 바라주고 허심탄회하게 포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혼기가 찼음에도 아레인의 여왕이 혼자라는 사실이 더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벌써 땀을 한 바가지나 쏟아낸 뒤였다.
괜스레 그녀가 떠오르자 다시금 심장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에게 세상의 여자는 오로지 그녀뿐이었다. 다른 여인들은 여자 같지도 않게 보였던 것이다.
이는 비단 유프라에게 일어나는 현상만은 아니었다. 헥토르도, 그리고 팔테스도 그녀를 보고 난 후에 다른 여자들을 볼 때노라면 오크녀라도 본 듯이 욕지거리를 내뱉을 정도였으니까.
더 큰 문제는 순수했던 마음에 욕정이 치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잠시의 상상으로 떠오른 엘레느 여왕의 육감적인 몸매가 눈앞을 가려 유프라답지 않게 입이 벌어지고 침이 고였으며 아랫도리가 부풀었다.
유프라는 이를 불경한 것이라고 믿었다. 불순한 마음이 탁한 생각을 불러온 것이라고…….
허상을 쫓아버리려 유프라는 사정없이 검을 휘둘러댔다.
“에이잇!”
팔테스가 운 좋게 몸을 뒤로 뺐으니 망정이지, 유프라의 검은 하마터면 하나뿐인 동생의 목을 자를 뻔했다.
식겁한 팔테스가 소리쳤다.
“형님, 동생을 죽이려고 작정했습니까?”
그래도 얼결에 팔테스의 목소리를 듣기는 했다. 그러나 사념에서 완전히 헤어나지 못한 상태라 유프라는 자신이 한 잘못을 모르고 있었다.
“어? 너 피가 나잖아.”
아니나 다를까 팔테스의 목엔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틈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다.
당연히 유프라는 그것이 자신이 한 행동이라는 것도 몰랐다.
사실 목이 베어진 것은 팔테스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형의 지적을 듣고 나니 목이 축축한 것도 같았다.
손가락으로 쓸어보니 정말 끈적끈적한 피가 묻어나왔다.
“뭐야? 이게?”
일순 팔테스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반면에 유프라는 도리어 의문을 드러냈다.
“어디서 다친 거야?”
기가 찬 팔테스는 눈을 부릅뜨고 대들었다.
“형이 그랬잖아!”
열이 받을 만도 했다.
아직 몽롱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유프라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며 계속 의문만 던졌다.
“내가? 왜?”
상처를 입혀 놓고도 오리발을 내밀고 있으니 복장이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팔테스의 눈알이 뒤집히는 건 일순간이었다.
“으아아아아~!”
이성을 잃은 팔테스는 괴성을 지르며 유프라의 멱살이라도 쥐려 달려들었다.
바로 그때 일은 또 벌어졌다. 무의식중에 유프라가 검을 휘두른 탓이다. 정신을 쏙 빼놓고 있으니 오랜 세월 검술을 닦은 팔이 위기를 느끼고는 제멋대로 반응한 것이다.
피슉!
이번에는 팔테스의 콧등에서 피가 흘렀다.
흐른 피는 볼썽사납게 코피를 연상시켰다.
멈칫한 팔테스가 인중을 훔치자 아까보다 많은 양의 피가 손을 더럽히고 있었다.
“으, 으어어어!”
더 이상 팔테스는 사태를 묵과할 수 없어, 당장에 허리에 찬 검을 빼어들고서 살기를 담은 눈으로 경고를 내뱉었다.
“죽여 버리겠다!”
이제는 형이고 나발이고 필요 없었다.
팔테스는 칼춤이라도 추는 사람처럼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며 길길이 날뛰었다.
유프라의 뇌리에 의문이 일었다.
‘이 녀석이 왜 이러는 거지?’
의문을 풀 수 없었다. 아니, 풀어지지 않았다.
치매에라도 걸린 것인지 유프라는 조금 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엘레느의 허상이 작금의 일들보다 더 크게 자리했던 까닭이다.
어이없게도 유프라는 팔테스를 나무라고 있었다.
“팔테스, 정신 차려라. 형이다!”
그 소리가 팔테스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저 입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검을 쥔 팔테스의 팔에는 한층 더 힘이 실렸다.
쫓고 쫓기는 형제.
팔테스에게 오로지 죽여야 한다는 일념만이 가득 찰 무렵, 때마침 나오다 그 현장을 목격한 로테노아의 입에서 일갈이 터졌다.
“무슨 짓들이냐!”
확실히 로테노아의 목소리는 효과가 있었다. 쫓던 팔테스도, 쫓기던 유프라도 행동을 멈추고 그를 주시했으므로.
로테노아는 안면을 씰룩거렸다.
다른 날도 아니고, 발데르 공작이 온 날이다.
그 발데르 공작이 자신의 옆에서 저 둘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귀한 손님 앞에서 이 무슨 추태란 말이냐.’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헥토르는 포기했지만, 그래도 나머지 두 왕자는 나아진 것이라던 판단이 무색해져 버렸다.
로테노아는 근위 기사들에게 귀엣말로 그들을 붙잡아둘 것을 명했다. 발데르 공작을 마중한 후에 혼찌검을 낼 작정인 것이다.
“자식 녀석들이 참 뜻대로 안 되는군요.”
한숨을 참아내지 못하고 뱉은 말이었다.
“누군들 안 그렇겠습니까. 언젠가 두 왕자님도 공왕님의 뜻을 헤아리실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렇게만 되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발데르의 말에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는 로테노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