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회주의자의 최후 (49/67)

기회주의자의 최후

엘룬은 피투성이가 되어 힘겹게 이스론 상단을 벗어났다.

이스론을 만만히 본 건 커다란 오판이었다.

그는 일개 상단에서 소드마스터를 보유했으리라고는 전혀 짐작도 못했다.

붉은 눈썹의 남자… 결정적인 패착의 원인은 그였다.

엘룬이 보았던 붉은 눈썹의 남자란 다름 아닌 아레인의 보탄 백작이었다.

보탄의 실력은 엘룬의 실력을 한참 웃돌았다. 하지만 엘룬은 자신이 당황해 경황이 없었기 때문에 졌다고 생각했다.

덴을 찾기는커녕 행방도 파악하지 못한 채 엘룬은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이때 곁에 있는 부하라고는 파핀 하나뿐이었다.

복장이 터지고 울화가 치밀어 엘룬은 애먼 허공에다 악을 질러댔다.

“크아악, 아아아악!”

울분을 토해낸다 해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엘룬은 괴로움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왜 이렇게 일이 어그러진 거냐? 도대체 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냐? 어디서부터……?’

세상은 부단히도 자신을 괴롭혔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 그 뒤틀린 운명을 개척해왔다.

돌아보았을 때 더 이상 걸리는 건 없었다. 세상을 발아래 두게 된 것이다.

이제는 모두 제 것 같았었는데, 어째서 또다시 뒤틀리는 것일까.

엘룬은 누군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꼬여 가는 상황들은,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것들을 이뤄온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에게 해로움을 가한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엘룬의 독사 같은 눈초리가 주위를 훑었다.

모두 정상이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풀들도, 떠돌 듯 흘러가는 구름들도…….

다만, 한 가지 예외가 있는 듯했다.

“그래, 찾았다.”

미친 듯이 주위를 둘러보던 엘룬의 시선이 멈춘 곳은, 슬그머니 눈치만 살피던 파핀에서였다.

술래라도 잡은 것처럼 엘룬의 눈은 반가움에 희번덕거렸다.

“네놈에게서부터 일이 그릇되었다. 정확히 그때부터였어.”

파핀은 지레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것이 더한 확신을 심어주는 줄도 모르고.

“크크큭, 스스로 인정을 하는구나.”

언제 빼어들었는지 모를 엘룬의 뻘건 검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스치며 닿는 풀들을 베어내는 것으로 보아 예기만도 예사롭지 않은 검이었다.

자신을 죽이려 한다. 파핀의 두 눈은 공포로 물들었다.

“오, 오해십니다. 저는…….”

너무 겁을 먹었던 나머지 파핀은 바지에 오줌까지 지렸다. 지린내가 코를 자극하는 것과 동시에 엘룬의 검이 동선을 그렸다.

푸확!

툭!

“아악!”

파핀의 입에서 나온 것은 비명이요, 어깨에서 떨어져 나간 것은 왼팔이었다.

피가 분수처럼 터졌다.

적잖은 피를 쏟은 탓에 금세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 버렸지만, 그럼에도 파핀의 눈은 잘려 나간 팔을 향해 있었다.

무정한 눈길로 그를 보던 엘룬이 떨어진 팔을 발로 걷어찼다.

파핀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자신의 팔만 쫓아다녔다.

“하지 마세요. 제발 하지 마세요!”

파핀은 울며불며 소리쳤다.

그 애틋함 덕분일까? 기어이 파핀은 자신의 팔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걸 주우려는 순간, 엘룬의 검이 또다시 궤적을 그렸다.

스걱!

기우뚱.

급작스레 다리가 잘려서 파핀의 몸뚱이는 땅을 굴렀다.

방금 잘린 부위에서는 뜨거운 피가 콸콸 흘렀다.

엘룬은 파핀의 팔은 왼쪽으로, 다리는 오른쪽으로 차버렸다.

처음으로 파핀의 눈이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카반의 울프’의 단장 엘룬은 그의 인생에 있어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의 부하가 되었을 때에는 뿌듯함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다 틀려 버렸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려 절망의 끝에 다다른 자에게는 더 이상의 공포가 의미 없었다.

증오 섞인 시선이 엘룬을 노려보았다.

“쿨럭! 이, 이유가 무엇입니까?”

엘룬은 잔인하게도 웃으며 되물었다.

“뭐가 말이냐?”

“제 팔다리를 자르신 이유… 말입니다.”

“네 녀석이 온 이후로 재수가 없었어. 딱 그때부터였지.”

파핀이 뭐라 항변하려는 순간, 엘룬의 검이 살짝 들렸던 그 목을 갈랐다.

그리고 엘룬은 그 머리를 공을 차듯 뻥 차버렸다.

신체에서 분리가 된 머리는 경사면을 따라 데굴데굴 굴러갔다.

파핀의 눈은 허탈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믿고 따른 것에 대한 대가가 고작 이것이었는지를,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잘못된 길을 걸었는지에 대한 회한을 느끼는 듯했다.

“퉤!”

엘룬은 흉측하게 자리한 파핀의 몸뚱이에 침을 뱉고는 길을 떠났다.

몸 상태는 여전히 좋지 못했다.

특히나 붉은 눈썹의 남자에게 베였던 옆구리가 조금 전의 행동들로 심하게 아렸다.

독하게 인내하며 버텨 냈다. 그러나 배를 얻어 타려 항만에 다다랐을 땐, 이미 피부의 상당 부분이 부패되어 있었다. 따로 손을 보지 못해서였다.

예전부터 이쪽에 왕래가 있었다면 근방에 치료가 가능한 시설이 있는지를 찾아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왕래가 없었기에 부득이하게 항구를 찾은 것이다.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보호자 없이 공간 이동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엘룬이 탄 배는 순항했다.

가는 길에 파도가 거칠지도 않았으며 폭풍우가 오지도 않았다. 엘룬은 이게 모두 파핀 그 재수 없는 녀석을 죽여서 얻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있었던 일 일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놈으로 인해 파생된 복수심들은 언제고 갚아줘야 할 것이었다.

‘지금으로선 무리다. 좀 더 몸을 추스른 후에… 으윽!’

선장이 급작스레 뱃머리를 돌렸던 탓에 뱃전을 치고 튀어오른 짭짤한 바닷물이 상처 부위들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더는 견뎌 내기 힘든 고통이었다. 엘룬은 극심한 고통 속에 스르르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 누군가의 그림자가 그의 몸을 덮었다.

* * *

탁탁탁탁!

마룻바닥 위를 2개의 신발이 밟아대며 소란을 피웠다.

발소리가 멎었을 땐 그 주인의 손에 의해 한 문이 급히 열린 상태였다.

벌컥!

한 침대에는 파르티잔과 게티롱이 서로를 껴안은 채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당시 게티롱은 무사했다. 그는 사방팔방 수소문을 하고 다니다 자진해서 무리로 합류했다. 이유인즉슨, 빌린 돈을 갚겠다는 것이었다.

다른 한 침대에서는 쉬바인이 누운 자세로 마법 서적을 뒤적이던 중이었다.

놀란 눈으로 쉬바인은 벌떡 몸을 일으켜 거칠게 문을 연 대상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무서운 분은 아니었다.

찾아온 이는 다름 아닌 마르크였던 것이다.

“야, 이 녀석아,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쉬바인 님, 그것 좀 보여 주세요.”

사과도 하지 않고 보채기부터 하는데도 쉬바인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것이라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자세하게 말을 해야지.”

마르크는 뒤에 누가 있는지 두리번거리다가 조심스레 문을 닫고, 쉬바인에게 바짝 다가가 들릴 둥 말 둥 작은 소리로 귀엣말을 했다.

“영초요.”

쉬바인은 눈을 부릅뜨더니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사겠다는 사람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마르크.

쉬바인에게는 맥이 다 빠지는 일이었다.

아그리스가 버린 영초를 주워 품에 넣을 때만 해도 날아갈 듯 좋았었다.

이 영초는 매우 비싼 것이라고 했으니 제값을 받고 판다면 어느 부호 부럽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서 파생된 돈으로 쉬바인은 진귀한 마법 장비를 구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판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싼 물건이니만큼 사겠다는 사람을 만나는 일도 쉽질 않았던 것이다. 혹 있다 한들 그가 이것을 진품이라 믿겠는가 말이다.

때문에 쉬바인은 마르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에 대해 물으며 두 사람의 사이는 이렇게나 가까워졌다.

그러나 이는 허울일지도 몰랐다.

되도록 영초를 꺼내 보여 주지 않는 쉬바인을 마르크는 좀생이처럼 군다고 불평했으며, 쉬바인은 그것을 볼 때면 침을 흘리는 마르크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이러니 어쩌면 두 사람은 필요에 의해 친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역시 쉬바인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으르렁거렸다.

“얼마 전에 보여 줬잖아.”

“잠깐 꺼냈다 넣은 거요?”

“잠깐이라니! 그 시간이라면 뜨거운 차를 한 잔 들이켰을 거야!”

둘의 언성이 커지자 게티롱은 소리를 멀리하기 위해 무의식중에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 바람에 게티롱의 발가락이 파르티잔의 콧구멍을 쑤셨다. 그러나 괴로운 듯 안면을 씰룩거릴 뿐, 파르티잔은 깨어날 생각을 안 했다.

이런 두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지 마르크는 재차 쉬바인을 채근했다.

“선심 쓰는 셈치고 한 번만 더 보여 주시죠. 비슷한 영초가 있어서 아직 구별이 안 간단 말입니다.”

“상인이 물건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서야…….”

쉬바인의 이죽거림에도 마르크는 포기하지 않고 사슴처럼 선한 눈을 하고서 허락을 바랐다. 그 결과 기어이 허락이 떨어지긴 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러는 게 어디 있어요?”

마르크는 항의했지만 쉬바인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지 들은 체도 안 했다.

침대 밑에 자물쇠를 채운 목재 수납장을 열어 쉬바인은 영초가 든 유리관을 조심스레 꺼내들고서 경계하는 눈초리로 마르크에게 내밀어 보여 주었다.

몽롱한 눈으로 유리관 안의 영초를 바라보는 마르크.

그게 부담스러웠다.

“이 유리관 좀 빼서 보면 안 될까요?”

“당연히 안 되지. 시들잖아.”

돌연 마르크는 품에서 마른 천으로 싼 풀을 꺼내 그것과 대조해보다가 신경질적으로 홱 집어던졌다. 저것과는 다른 것이다.

마르크는 못내 아쉬움을 드러냈다.

“에이, 이것도 아니네.”

“이렇게 귀한 게 있을 리가 없지.”

착잡해하는 마르크를 본체만체하고서 쉬바인은 다시 그것을 수납장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그리고 돌아서며 물었다.

“사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일부러 안 판다고 한 건 아니지?”

실쭉한 눈초리로 째려보는 그를 본 마르크는 이마에서 땀이라도 삐질 흐를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럴 리가요. 설마 지금 절 오해하시고 계신 건가요?”

쉬바인은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이걸 팔아버린다면 마르크는 오늘처럼 영초를 대조해볼 수도 없을 것이다. 구매자가 나온다면 하나만 산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영초를 사겠다는 사람은 벌써부터 마르크에게 줄기차게 접촉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마르크는 이를 모르쇠로 일관했다.

저걸 팔아버린다면 어디서 다시 찾겠는가 말이다.

영 못마땅했는지 마르크는 몸을 돌린 쉬바인의 뒤통수에 대고 눈을 흘겼다.

‘가격만 싸게 해준다면 확 사버리는 건데…….’

돌연 둘 사이에 엉뚱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러지 말고 하나 주지 그래?”

쉬바인은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귓속에 박힌 목소리는 그의 인상을 저절로 펴지게 만들었다.

그는 오딘이었던 것이다.

당황해하는 기색의 쉬바인을 두고 오딘은 덧붙여 말했다.

“돈은 내가 지불하마.”

“주, 주군, 그래도 그건…….”

이에 쉬바인은 항의 아닌 항의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주군이 영초를 사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냥 드리는 것이 도리였다.

지금만 해도, 눈초리를 보라. 토를 달았다는 것만으로 불쾌한 기색이시질 않은가.

자신이 뭐라 말씀을 올린다 해도 소용없을 것임을 알고 쉬바인은 애통함을 안은 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신의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군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냥 주도록 하겠습니다.”

수혜자인 마르크도 당혹해하긴 마찬가지였다. 쉬바인이 얼마나 영초를 애지중지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괜히 둘 사이가 멀어지는 느낌이 들어 그는 이를 없던 일로 하고자 했다.

그러나 말하기도 전에 오딘은 미소를 머금은 채 쉬바인에게 두둑한 돈주머니를 내밀고 있었다.

“고생한 대가라고 생각해도 좋다.”

얼떨떨한 나머지 쉬바인은 오딘이 가는데도 습관적으로 허리를 숙일 뿐, 제대로 된 감사의 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말없이 영초를 꺼내와 말없이 건네주었다.

주고받는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너무도 어색한 분위기. 아침과는 딴판이었다.

그러나 속으로 들떠 있기는 둘 다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스론이 아레인의 상권 확장에 더욱 힘을 써주고 제 일처럼 팔을 걷고 나서 도와주기 시작한 것은, 오딘의 조건 없는 여러 베풂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 * *

상점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특히나 각 모퉁이에 위치한 상점들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은 고급스러운 찻잔과 술, 물병을 포함해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갖가지 물건들을 파는 도자기 상점이었다.

특히나 꽃이 양각되어 있는 찻잔 세트는 귀족 부인들에게 있어 인기가 만점이었다.

그것은 보따리 상인들을 통해 거래가 되기도 했지만,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빠진 그녀들이 직접 왕래를 해가며 사기도 했다.

귀족 부인들의 마차가 들어오고 쉴 새도 없이 사람들이 드나드니 따로 길을 낼 정도였다.

파이어해머 드워프인 살탄은 길가로 나와 북슬북슬한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자신이 만든 작품들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그때, 안에서 사람들을 비집고 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살탄과 함께 도자기를 만들던 아레인의 다론이었다.

“물건이 남아나질 않는군. 자네가 만든 것들은 부호들이나 귀족들이 예약까지 걸어놓고 갈 정도네.”

“푸하하하하!”

살탄은 침까지 튀겨 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물건을 만드는 것도 좋아하지만 남들의 칭찬도 기분이 나쁘질 않은 것이다.

도자기를 만드는 데 있어서는 살탄이 대륙을 통틀어 명실상부한 일인자였다. 상점 안팎을 가득 메운 이 많은 사람들이 그 증인이었다.

문득 살탄이 웃음을 그치고 물었다.

“그나저나 오딘 님께서는 언제 왕성으로 돌아가시는가? 오딘 님의 거처에는 정성을 다해 특별한 것들을 만들어드려야겠어.”

정말이지 각오가 대단해 보였다. 그에 다론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고맙네. 하지만 그분께서 언제 돌아오실지는 나도 모른다네.”

도자기 상점과 포목점, 이 둘만으로 아레인은 막대한 거금을 거머쥐고 있었다. 또한 강대한 무력을 등에 업은 레인 상단에서도 의뢰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급기야 아레인의 여왕 엘레느는 해상무역까지 감행했다.

그야말로 무역에 있어서는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었다.

자연히 아레인의 백성들의 일거리는 많아졌고 생활은 풍족해졌으며, 자신이 사는 왕국에 대한 커다란 자부심을 가졌다.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아레인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아레인 내에서는 오딘에 대한 찬양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살탄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드래곤의 하인이지, 오딘의 신하가 아니었으므로.

그래도 평생을 바칠 정도로 즐거운 일을 주었다는 데에 매우 감사하고 있었다.

“미리라도 만들어놔야겠군. 공을 들여서…….”

툭!

누군가가 어깨를 치고 지나간 탓에 살탄은 도끼눈을 뜨고 추정되는 대상을 노려보았다.

칙칙한 은회색의 로브를 걸친 남자와 살탄의 2배에 달하는 훤칠한 키의 남자. 그중 훤칠한 키의 남자가 싸늘한 눈초리로 살탄을 마주 쏘아보았다.

범인은 둘 중 하나였지만, 그들에게서는 범접하기 힘들 정도의 기운이 느껴졌다.

때문에 살탄은 잠깐 노려보는 것만으로 그쳐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에게는 드워프가 슬며시 꼬리를 내린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서야 살탄은 짜증스런 기색을 떠올렸다.

“성질도 더럽게 생겼군.”

이는 드래곤과 동거하며 생긴 학습 결과였다.

어쨌거나 그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살탄을 치고 지나친 남자는 카반의 울프의 단장이었던 엘룬이었기 때문이다.

* * *

이스론 상단에서 마주쳤던 붉은 눈썹의 남자. 그는 감히 무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엘룬은 이 흑마법사 같은 패거리들이 필요했다.

엘룬의 상처는 씻은 듯 나았다. 다행히도 다가왔던 검은 그림자가 엘룬의 상처를 손보아줬던 것이다.

그는 가공할 실력을 지닌 흑마법사였다.

엘룬이 그와 가까워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서로 습성이 비슷하였으므로.

그 흑마법사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서 파이어해머를 다 보는군.”

“방금 마주친 드워프 녀석 말인가?”

“그래.”

“재능이 워낙 뛰어나고 희소가치가 있는 녀석들이거든.”

“그럼 데려다가 일을 시키면 되겠군.”

“크큭, 말이 쉽지 저런 녀석의 뒤에는 어마어마한 녀석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제대로 꿰뚫어 본 것이다.

엘룬도 거기에 미련을 두지는 않았다. 그에게 시급한 것은 복수지, 돈벌이 수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곧 엘룬은 흑마법사를 따라 마법 상점 안으로 들어섰다.

“주문한 것.”

진열대 앞. 손님의 짤막한 요구에 늙수레한 상점 주인은 허리를 굽혀 보이며 인사를 하고는 계단을 따라 허둥지둥 지하로 내려갔다.

이것저것을 내던지는 소리가 들린 것도 잠시, 상점 주인은 은빛 찬란한 지팡이 하나를 들고 왔다.

그 지팡이는 워낙 값이 비싼 관계로 원래 상점에는 구비되어 있지 않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미리 주문을 받았기에 창고에서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물건을 내어 보이고 돈을 받기에 앞서 상점 주인은 손바닥까지 비벼 가며 굽실거렸다.

“헤헤, 오늘은 운이 좋은가 봅니다. 이렇게 비싼 물건을 하루에 두 개나 팔아보긴 처음입니다. 손님이 주문하신 물건은 예전에 경매에 올라왔던 물건입니다. 당시에도 꽤 비싼 돈을 지불했습죠.”

흑마법사는 지팡이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세세히 훑어봤다.

“물건에 하자는 없군. 자, 여기 약속한 돈이다.”

그리 말을 마치고 그는 진열대 위에 두둑한 돈주머니 하나를 내려놓았다.

상점 주인은 셈을 해보더니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애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이것…….”

진열대를 열어 상점 주인이 꺼낸 것은 오색 팔찌였다.

“보기에는 별 볼일 없어 보여도 아티팩트입니다. 단단할 뿐 아니라 헤이스트 마법이 숨겨져 있습니다. 사용 방법도 간단해, 쓰다듬어 온기를 불어넣어주시면 됩니다. 또 자동적으로 외부의 마나를 끌어들여 팔을 보호합니다. 물론 착용자의 신체 조건이 받쳐 줘야겠지만 말입니다요. 필요한 것이 있으실 때 다음에 또 들러주시라는 의미에서 드리는 겁니다.”

설명으로 미루어볼 때 이 팔찌 역시 결코 싼 물건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서슴지 않고 내어주는 것은 흑마법사가 건넨 금액이 너무 커서였다. 즉, 이걸 줘도 남는다는 말이리라.

흑마법사가 물었다.

“쓰겠나?”

엘룬은 팔찌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제 주인임을 인정이라도 하는지 팔찌는 갑자기 광택이 번들거렸다.

“괜찮군.”

즉시 엘룬은 팔찌를 주워들어 팔에 대보았다. 그를 보며 상점 주인은 아부를 떨었다.

“훨씬 늠름해 보이십니다.”

결정이 선 엘룬을 본 흑마법사는 지팡이를 챙겨 돌아섰다. 그리고 엘룬 역시 그를 따라 나갔다.

인사조차 받지 않을 인상이었음에도 상점 주인은 그들의 등에 대고 외쳐 말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다음에도 꼭 들러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과는 다른 생각을 품었다.

‘하여튼 싸가지 없어 보이는 것들이 돈은 많단 말이야. 조금 전에 온 청년과 중년인을 빼고. 비록 조잔하기는 했지만…….’

우연찮게도 엘룬은 문을 나서다 상점 주인이 떠올리고 있던 사람들을 보았다. 그중 구릿빛 피부의 청년은 자신의 기억 속에도 있는 사람이었다.

반사적으로 엘룬은 그가 있는 곳으로 치달렸다.

‘그때 보았던 녀석…….’

라테우스 검은 산맥에서 마주쳤던 꼭 그 청년 같았다.

그의 일행 중 2명이 소중한 자신의 부하들을 고깃덩이로 만들질 않았던가.

고운 감정이 있을 리 없었다. 일단은 족치고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엘룬이 다가서기 전, 청년은 동행과 함께 인파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씩씩거리는 어깨를 흑마법사의 손이 잡았다.

“아는 놈들이냐?”

엘룬은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떼어내고 안면을 씰룩거렸다. 그를 보며 흑마법사는 사이한 미소를 짓다가 나지막이 경고했다.

“나한테는 상관없다만, 그분께는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할 거야. 네가 소드마스터건 아니건 간에… 그분은 아주 무서운 분이시거든.”

* * *

확실히 엘룬이 보았던 이는 마르크였다.

마르크는 쉬바인과 함께 마법 상점에 들러 그의 지팡이를 구입했던 것이다.

그래도 마르크는 특유의 장사 기질을 발휘해 쉬바인의 지팡이 값을 무려 10퍼센트나 낮춰주었다.

쉬바인은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지만, 한편으로는 찜찜했다. 돈을 너무 많이 받은 것 같아서였다.

물론 그가 아는 주군, 오딘이 그런 것에 연연해할 인간은 아니었다.

마르크는 쉬바인의 속내 깊은 곳까지는 살피지 못하고 계속 떠들어댔다.

“와, 마법 무구를 다 갖추시면 지금보다 더 대단한 마법사가 되시겠군요?”

그래도 쉬바인은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제 육 서클에 진입했으니 어지간한 대마법사와 맞상대할 정도는 되겠지.”

주군의 깊은 뜻을 헤아려서라기보다는 마르크와 말상대를 하는 게 습관이 되어버려 얼떨결에 답한 것이었다.

마법사들에게는 서클만큼이나 마법 장비 역시 중요했다. 좋고 나쁜 것에 따라 위력이 배가 되니까 말이다.

대마법사와 맞상대할 실력… 그 정도면 제국에 출사표를 던져도 될 것이었다.

과거였다면 확실히 그런 생각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쉬바인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었지, 아레인의 명예를 생각하고 살아온 인물은 아니었으므로.

그쪽으로 보면 조르바가 나았다.

분명한 점은 이제 쉬바인은 절대 그런 생각을 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레인이 제국보다 못하지 않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힌 탓이다.

사람들과의 친분도 그에 일조했다.

게다가 허락도 없이 그곳으로 간다면 아그리스가 가만두겠는가.

오늘 상점가에 들른 것 역시도 오딘과 아그리스의 허락을 맡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인을 2명이나 섬기게 된 것에 가끔은 숨이 막혀 왔지만,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걷다 보니 쉬바인은 마르크와 도자기 상점에 다다랐다.

마르크는 곧 경탄성을 터뜨렸다.

“와! 아레인의 도자기 상점이군요. 엄청나네요.”

다론이 쉬바인을 알아보고 부리나케 다가왔다.

“궁정 마법사님, 오랜만입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나야 잘 있었지. 장사는 잘되나?”

“보시다시피 사람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입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서 이번 달은 매출액이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고 하더군요. 도자기공들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저도 근 한 달 만에 들렀지만, 들여오는 즉시 불티나게 팔려 나가는 모양입니다. 게다가 예약을 하는 손님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주군께서 아주 좋아하시겠어.”

“듣기로는 포목점도 더 생긴다고 들었습니다. 이스론 상단에서 많이 도와주었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사람들이 들끓는 내부를 둘러보기 바빠 쉬바인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불현듯 무언가 뿌듯한 자부심이 생겨 코끝이 찡해졌다.

확실히 예전의 아레인이 아닌 듯했다.

대륙에 발을 넓히고 나날이 성장하는 아레인. 날 때부터 없던 애국심이 똬리를 틀고 일어났다.

‘그래, 난 아레인의 궁정 마법사다. 마땅히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모두 오딘 님이 오시고부터 생긴 일이다. 지척에서 그분을 모시는 것만으로 난 하늘에 감사해야 한다.’

눈의 가장자리에 살포시 눈물이 맺혔다.

마르크가 그걸 용케도 간파하고는 꼬집어 물었다.

“울어요?”

창피함을 덮으려 쉬바인은 감정을 접고서 화를 벌컥 냈다.

“무슨 소리!”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던가. 마르크가 그랬다.

그는 문전성시를 이루는 도자기 상점을 보고 애먼 느낌이 들었던지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큰일이군. 이러다간 이스론이 아레인과 경쟁하게 될 텐데…….”

“그럼 너희도 도자기를 팔든가.”

쉬바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마르크를 째려보았던 데 반해, 다론은 그를 매우 살갑게 맞았다.

“이스론 상단에서 오신 분입니까?”

“네, 마르크라고 합니다.”

“전 다론이라고 합니다.”

통성명과 더불어 악수를 하는 두 사람. 처음 본 사이임에도 둘은 금방 친숙해진 듯했다.

그 무렵, 쿤은 도자기 상점의 내부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원래 쿤은 마법 도구를 애용하지 않았고, 그다지 관심도 없었다. 쉬바인이 새로운 마법 도구들을 갖출 때 쓰던 것을 준다 하기에 받겠다고만 했다. 선물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 그다지 기대도 없었다.

쿤은 그저 이곳에 들른 사람들처럼 상점 안에 진열된 도자기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있었다.

혼자만 보기 아까웠을까. 입구로 가 손짓을 하며 잔뜩 구겨진 인상의 쉬바인을 불렀다.

“아저씨, 들어와 보세요. 구경할 게 아주 많아요.”

그 즉시 쉬바인은 온화한 표정으로 탈바꿈되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그곳에는 갖가지 도자기들이 고유의 색을 간직한 채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정말 근사하구나.”

“그렇죠?”

둘은 묵묵히 감상에 잠겼다.

그때, 모자를 깊이 눌러쓴 소녀가 긴 행렬에 서 있다가 앞줄이 빠지며 도자기 상점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소녀는 다급히 소리쳤다.

“밀지 마세요. 꺄아~”

쿵!

꽤 큰 소음이 났다.

하지만 도자기에 대한 저마다의 감상평들로 안이 제법 시끌시끌해서 소녀가 쓰러진 소리는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허둥대다 엎어진 꼴이라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많이 다친 게 아닐까 걱정이 들었던 나머지 쿤은 다가가 보았다.

“괜찮아?”

의식을 잃었던지 소녀는 답이 없었다. 쿤은 우선 그녀의 상체부터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때, 소녀에게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다쳤어요. 쪽팔려서 그래요. 저 좀 가려 주실래요?”

시선이 몰리지 않았으니 뒤만 가리면 될 것이다.

쿤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소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됐어, 일어나. 보는 사람 없다.”

그제야 소녀는 옷에 묻은 먼지들을 툭툭 털어내고 일어섰다.

몸이 제법 튼튼한 모양이었다. 얼굴부터 땅에 박고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정작 놀라움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 넌 그때?”

보았던 소녀였다.

언젠가 오딘을 따라 대신관의 저택을 급습했을 때, 자신과 같은 적안에 귀가 매우 뾰족한 블러드 엘프 소녀.

바로 메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신성 제국 성황의 시녀였다.

물론 쿤이 그 이름과 세부 사항까지 알지는 못했다.

친절을 베풀어준 소년에게 고마움을 표하려다 메이는 짧은 감탄사만 터뜨리고 말았다.

“아…….”

그녀도 본 기억이 있었다. 이 소년과 흑발의 남자.

나무에서 떨어지는 자신을 받아준 것은 흑발의 남자였다. 그리고 그의 반대편 옆구리에 껴 있던 것이 바로 저 소년이었다.

성황과 대신관은 당연히 그녀에게 이 둘의 존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니 메이가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던 것이다.

“너도 도자기를 사러 왔니?”

메이의 물음에 쿤은 빙긋이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여기 왜 온 거야?”

“구경. 너는?”

“난 도자기를 사러 왔지.”

말 속에 뿌듯함이 숨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런 안목이 있다고 성황 카르만에게 자랑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많은 돈을 가지고 오진 못했고, 그녀는 그것이 걱정이었다.

‘서른다섯, 서른여섯…….’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손가락들은 주머니 안에서 쉬지 않고 꼼지락거리며 셈을 하고 있었다. 혹시 엎어질 때 돈이 떨어지진 않았을까 초조해하면서.

줄은 점점 줄어들었다. 쿤은 메이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 도자기 얘기를 늘어놓았다.

“쿤, 숨겨 둔 동생이 있었구나.”

뒤늦게 들어오며 내뱉은 마르크의 말처럼 둘은 매우 닮은 구석이 있었다.

꾸밈을 빼고, 쿤이 소년 태가 나고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이는 것과 메이가 소녀 태가 나고 나이가 좀 덜 들어 보이는 것의 차이였다.

쉬바인이 고개를 돌려 볼 때도 그러했다.

아니, 쉬바인은 정말 두 사람이 남매지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품었다.

메이는 낯선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기에 두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손톱을 물어뜯어가며 자신의 차례만 기다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쉬바인의 눈은 진지했다.

“정말 동생이냐?”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요. 제 동생과 전 오래전에 헤어졌으니까요.”

드디어 메이의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택한 뽀얀 찻잔 세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거요.”

그러자 근처에 있던 종업원이 그것을 들고 왔고, 온화한 인상의 중년 여상인이 살갑게 말했다.

“그건 삼 골드 칠십 실버구나.”

그 말에 메이는 눈알을 굴렸다. 턱없이 돈이 부족한 것이다. 그녀가 가져온 돈이라고는 1골드가 채 되질 않았다.

자신이 점찍은 물건이 이리도 비싼지 몰랐다.

진열된 도자기마다 앞쪽의 작은 팻말에 가격이 써져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주시하지 않았었다. 아니, 못했었다.

밖에서 이미 물건을 점찍어놓기는 했어도 그 거리에서는 가격표가 보이질 않았다. 또한 엎어진 후 계속 소년과 말을 섞다가 뒤쪽의 사람들이 초조하게 쳐다보았으니 긴장한 탓에 미처 거기까지는 신경이 쓰이지 않았던 것이다.

창피함에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렇다고 지금 다른 물건을 고를 새도 없었다. 왠지 자신의 뒤에 선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집중된 듯했으니까.

호주머니에서 꺼낸 돈은 37실버가 고작이었다.

그에 사는 것을 포기하려는데 정말 뜻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만 주세요.”

이어 여상인이 고개를 바짝 들이밀며 메이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아가씨가 귀여우니까 특별히 그 가격에 드리는 거예요. 대신 다른 분들한테 소문내시면 안 돼요. 약속해줄 수 있죠?”

“네!”

힘찬 대답에 여상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찻잔 세트를 들고 있던 종업원조차 멍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의 이면엔 쉬바인이 있었다.

쉬바인이 통신 마법으로 자신이 돈을 지불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던 것이다.

다음 사람을 위해 종업원은 메이를 한쪽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제품을 따로 포장하며 물었다.

“어디로 보내드리면 될까요?”

“직접 들고 갈게요.”

“꽤 무거울 텐데…….”

“그럼 문밖까지만 들어주시겠어요? 같이 온 사람이 있거든요.”

말을 나누면서도 종업원은 포장에 금세 리본을 채우고 있었다.

‘어른이 따라왔다는 말이야? 그럼 당사자가 들어와야지, 왜 이런 꼬마 아가씨를 보냈을까?’

종업원은 머릿속에 의문이 들어찼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그리고 물건을 들고 밖에 나가자, 과연 같이 온 어른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한참 어긋났다.

“가시죠.”

분명 존대였다. 그인즉슨, 이 아가씨의 신분이 보통이 아니라는 얘기일 것이다.

“고맙습니다.”

꾸벅 인사까지 하는 메이를 보며 종업원도 허리가 반으로 접혀지도록 인사를 했다. 그리고 돌아서는 그녀를 보다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제자리로 갔다.

대신 그 자리를 쿤과 마르크가 채웠다.

쿤은 머리 위로 올린 손을 흔들었다.

“잘 가! 그리고 다음에 또 와! 아니, 다음에 또 보자!”

인사치레였다. 말을 해놓고 보니 자기 상점이 아니었다. 적을 두는 곳도 이곳이 아니었으니 말을 바꾼 것이다.

메이는 이미 돌아선 뒤였으니 쿤의 인사를 들을 재간이 없었다.

그렇게 멀어지는 그녀를 보다 마르크가 물었다.

“어디에서 온 아이일까?”

의외로 쿤은 이를 알고 있었다.

“나이시스 신성 제국입니다.”

“아는 사이였어?”

“잘 알진 못해요.”

아리송한 대답.

쉬바인은 이때 여상인에게 잔금을 치르고 있었다.

메이의 찻잔 세트 값이었다. 지팡이를 살 때 마르크가 깎아 남은 돈 중 일부를 여기서 쓰게 된 것이다.

거스름돈을 받을 생각도 못하고 쉬바인은 쿤에게 허둥지둥 뛰어갔다.

“동생일지도 모른다며 그냥 보내면 어쩌자는 거냐?”

억울한 빛이 역력했다.

이래서야 그냥 귀여운 소녀를 위해 돈을 쓴 꼴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쿤을 도와준 게 못 된단 얘기다.

“그건 그냥 마르크 형이 해본 말이에요. 또 대충 어디 있는 아이인지 알고 있어요.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도 들거든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 역시 정말 동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쿤의 얼굴엔 화색이 만연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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