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개의 영초의 주인은…
이히히힝!
구슬픈 나귀의 울음소리가 퍼졌다.
친구의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앞쪽의 나무에 묶인 나귀는 허연 이빨을 잇몸째 드러내며 웃는 듯 보였다.
우는 나귀는 틴이 타고 왔던 나귀였으며 건너편의 나귀는 마르크가 타고 왔던 나귀였다.
틴이 타고 왔던 나귀는 눈치가 빨라 사내가 검을 꺼내기도 전에 이리저리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그러자 사내가 중얼거리며 그 반대편 마르크가 타고 왔던 나귀를 보았다.
“흠, 이놈은 좀 영리한 것 같군. 죽이기엔 아까우니 차라리 저 녀석으로 잡을까?”
웃던 녀석은 그 즉시 웃음을 그쳤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사내 역시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파하하하, 저 녀석은 진짜 물건이로군.”
아직 술은 남아 있었다.
안주가 문제였다.
결국 사내는 원래 잡으려던 나귀를 잡기로 마음먹고서 서서히 검을 빼들었다.
그러자 앞의 나귀는 다시 잇몸을 드러내며 웃기 시작했다.
서슬 퍼런 검날을 매만지며 사내가 잔뜩 겁을 먹은 나귀에게 중얼거렸다.
“고통은 없을 게다.”
머리 위로 치켜 올린 검을 휘두르기만 하면 끝날 일이었다.
하필 그때 누군가의 외침이 터졌다.
“잠깐!”
목소리가 흐른 쪽으로 사내의 고개가 돌아갔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을 더해가며 도합 10명이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에게 나귀와 물품을 빼앗겼던 마르크와 틴, 그리고 이스론의 호위 무사들이었다.
잠시 정색하던 사내는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왜 웃는 겁니까?”
마르크의 물음에 사내가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가소롭구나. 어디서 떨거지들을 끌고 와서 협박이라도 해보겠다는 것이냐?”
“부당하게 갈취한 것들만 돌려받을 생각입니다.”
사내는 웃음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불쾌한 낯빛을 그대로 드러냈다.
“아예 날 악당으로 매도하는군.”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마르크의 표정은 그의 말을 긍정하고 있는 듯했다.
사내는 찬찬히 그들을 훑어봤다.
“그냥 갔으면 좋았을 것을… 꼬마, 실수했다. 쓸 만한 녀석들은 한 명도 안 보이는 걸 보니.”
마르크가 꼬마라고 불릴 나이는 아니었다. 외모만 보아도 어엿한 청년 태가 났으니까. 그럼에도 그를 꼬마라고 매도한 것은 남들보다 작은 키를 비꼬아 기분을 깔아뭉개는 것이었다.
수치심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마르크를 주시하며 사내는 계속해서 이죽거렸다.
“이런 떨거지들은 열이 아니라 백이라도 상관없다. 덤빌 놈은 덤벼라.”
도발에 한 발자국도 떼어놓는 이가 없었다.
사내가 또 한 번 그들을 싸잡아 비웃어주려는 찰나에 차분하고 근엄한 남자의 목소리가 무리의 뒤쪽에서 새어나왔다.
“내가 덤비지.”
목소리로만 추정해볼 때 적어도 중년인은 된 듯하다.
역시나 무리들 틈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훤칠하게 뻗은 백미(白眉)가 매우 인상적인 중년인이었다.
언뜻 비친 나이는 자신보다 약간 더 들어 보였다.
분명한 것은 겉모습보다 더 연륜이 묻어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그를 살피는 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얕잡아보는 중이었다.
“보아하니 나이깨나 잡수신 듯한데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얀 눈썹의 중년인, 아니 제라드 장로가 몸을 움직였다.
가히 눈으로 따라잡기 어려울 속도. 사내는 놀라 눈을 치떴다.
동시에 굉음이 일었다.
콰창!
검술이라면 타인에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자신했던 사내의 검은 손을 떠나 허무하게 날아갔다.
당장에 검을 쫓아가려 했지만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검끝이 자신의 가슴 언저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사내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위협을 거두지 않은 채 제라드가 무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구태여 자넬 죽일 필요가 있는가?”
급작스러운 사태에 사내는 말을 잃었다. 그의 고개가 닫혀 버린 입을 대신해 좌우로 흔들렸다.
제라드가 눈짓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틴과 마르크가 앞으로 나서 나귀들을 향해 걸어갔다.
각자의 나귀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달랐다.
틴은 탈것을 되찾아 다행스러워하는 모습이었지만 마르크는 나귀의 목을 끌어안고 좋아라 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니 제라드는 왠지 모르게 흡족해졌다. 뭐 하나 뚜렷하게 나서 일을 해결해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였다.
돌연 틴에게서 경고가 터졌다.
“위험해!”
제라드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사내가 재빠르게 몸을 날려 자신의 검을 회수하고 뒤쪽의 호위 무사들에게 짓쳐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노기를 담은 눈이 사내의 모습을 좇았다.
목표를 포착했을 때 제라드는 비호같이 신형을 날렸다.
바짝 움츠러든 호위 무사들과 여섯 보를 앞두고 거리를 좁혀 오는 사내냐, 사내와 열다섯 보의 거리를 둔 제라드냐. 누가 먼저냐의 문제였다.
오러를 담아 검을 휘두를 순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호위 무사들한테까지 피해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막 다다라가며 검을 휘두르고 있는 사내.
그런 사내의 등을 제라드의 어깨가 먼저 들이받았다.
우지끈!
촤아아아악.
극심한 고통을 떠안고 사내는 거친 땅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쓸려 갔다.
벌건 피가 바닥을 적셨다.
몸을 일으킬 여력도 없는지 사내는 움찔움찔 떨 뿐이었다.
“어리석은 자.”
사내를 향해 모질게 쏘아붙이는 제라드를 보며 이스론 상단의 인원들은 얼어붙었다.
그들은 여태 제라드 장로를 대단하다고 생각지 않았었고 자연히 그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었다. 그러니 그저 대하기 편한 이웃 아저씨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헤르미온의 구출 그 한가운데 제라드가 있었다고는 했지만 마르크는 당시 눈도 뜨지 못한 상태였고, 제라드 역시 익명의 사내가 그녀를 구했다고만 했을 뿐 일체 말을 아꼈었다.
단 한 번의 부딪힘으로 사람, 아니 저런 실력자가 몸을 옴짝달싹도 못하니 자신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행여나 눈 밖에 났다가는 경을 치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깃들었던지 다시 그를 보는 시선들에는 조심성이 엿보였다.
불현듯 그들의 뇌리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것이 있었으니, 저런 무서운 사람인 줄도 모르고 겁도 없이 나불거린 헤르미온의 입이 그것이었다.
꾸두두둥!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땅으로부터 검은 달 모양의 구름이 솟았다.
간헐적으로 있던 폭발과는 차원이 다른 폭발이었다.
꽤 먼 곳에서 일어난 폭발이었음에도 그 여파는 이곳에까지 미쳐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지축을 뒤흔들어놓았다.
그에 호위 무사들이 휘청거렸고, 일부는 맥없이 쓰러졌다.
마르크는 다행히 나귀의 고삐를 부여잡고 있었기에 쓰러지진 않았다.
“무… 무슨 일이죠?”
두려움은 비단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호위 무사들은 물론 이들의 부대장인 틴까지도 두려운 기색이었으므로.
필시 저 폭발은 그곳에서 일어난 것일 터.
제라드는 폭발이 일어난 쪽에 시선을 두고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서두름세. 재수가 없으면 이곳에까지 화가 미칠지 모르니 빨리 돌아가야겠네. 아주 화가 나신 모양이야.”
* * *
빛바래진 무구, 깨어진 보검. 제국의 황자 타츠만은 상처투성이였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어서 수하에게 부축을 받아 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는 귀신에라도 홀린 듯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자의 검에서 흘러나온 13마리의 뱀, 아니 그보다 훨씬 포악하고 무서워 보이는 정체불명의 형상.
그것들이 삽시에 사람들을 집어삼키며 똬리를 튼다 싶더니 이내 주위의 모든 것을 감싸고 대폭발을 일으켰다.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은 그에 있었다.
후발로 도착한 전도유망한 기사들과 마법사들, 그리고 3명의 소드마스터와 6서클의 마법사가 그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아비규환 속에서 살아나온 것만으로 감사해야 했다.
“신성 제국도 다를 바 없겠지?”
“신성 제국의 피해는 저희보다 더할 것이옵니다.”
부축을 하던 옆의 기사가 위로삼아 건넨 말이었지만 그조차도 침통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역시나 타츠만에게 그 말은 아무런 위안도 되어주지 못했다.
덜컥 내려 버린 결정이 이토록 큰 파장을 일으킬 줄 알았다면 성황의 제안에 절대로 동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성 제국과 힘을 합치면 제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은 치명적인 오산이었다.
“후우~”
긴 한숨이 타츠만의 앞을 가렸다.
‘무슨 낯으로 황제 폐하를 뵐 수 있을까.’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사태가 진행형이라는 점이었다.
타츠만은 오딘의 모습에서 극한(極限), 아니 무한(無限)을 보았다. 그를 상대하려면 1천, 아니 1만 명이 모여야 할지 모른다. 그런 자의 눈 밖에 났으니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언젠가 그 사내는 우리 제국에게 환란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문득 성황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력이 있을 수도 있다고?”
의문, 그것은 무시무시한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소름이 끼치고 오한이 돌았으며 머리털이 쭈뼛쭈뼛 곤두섰다.
그러나 누구 하나 타츠만의 걱정을 덜어줄 이가 없었다. 불안함은 황자만이 아닌 모두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곤혹스러움을 떨치지 못하고 걸음도 멈춘 채 있는 그가 걱정이 되었던지 옆의 기사가 재촉했다.
“황자 전하,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차후의 일은 옥체를 보중하신 후에 걱정하시는 게 옳을 듯합니다.”
그의 말마따나 이곳은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여럿의 기사, 그리고 마법사들이 타츠만의 퇴각을 도우려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이 정도라도 도망을 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모양, 이 꼬락서니로 돌아가면 어떤 사태에 직면하게 될지는 짐작하는바, 타츠만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는 했으나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무엇보다 제국에 떠안기는 감당 못할 짐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데에 두려움이 일었다.
다그닥다그닥.
2명의 사내가 말을 타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들도 익히 아는 이들로, 바로 영초 채집에 보냈던 기사들 중 일부였다.
타츠만과 마주치기 무섭게 그들은 말을 세우고 곧장 말 위에서 뛰어내려 한쪽 무릎을 굽혀 아뢰었다.
“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황자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인사를 올리는 즉시 그들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초췌해진 황자의 안색을 살폈다.
대놓고 묻는 것은 무례였다. 그, 혹은 현장에 있던 다른 이가 답을 내어주기 전까지는 그럴 수가 없었다.
타츠만은 기사의 목에 걸었던 팔을 풀고 용맹함을 과시했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에 잠시나마 인상이 찌그러지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어금니를 악물어 억지로 고통을 짓누르고서 타츠만은 태연함을 내보이며 물었다.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저희 쪽의 영초는 빠짐없이 모두 채취했습니다.”
말을 마친 기사가 솜으로 고이 감싼 것을 내밀자 타츠만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솜의 윗부분을 개봉하자 유독 작은 넝쿨들이 엉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타츠만의 시선은 아래를 훑었다.
아니나 다를까 뿌리 쪽에 손톱만 한 원형의 열매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흙에서 떼어낸 지 조금 되었을 텐데도 그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흘러넘쳤다. 그러나 타츠만은 회의에 물들어 있었다.
‘고작 이것과 바꾼 것인가?’
한 손에 꼭 들어갈 정도로 작은 양. 이것을 구하기 위해 죽어간 이들은 제국에 없어서는 안 될 너무도 아까운 인재들이었다. 다시 그 같은 인재들을 키우려면 수십 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물론 마찰을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다.
‘그곳의 영초들만 가졌더라도 이렇게 씁쓸한 기분은 아니었겠지…….’
제국과 신성 제국, 그리고 신흥 제국이 그 자리에 모인 이유는 그곳이 여타 다른 곳보다도 훨씬 많은 수의 영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땅이 폐허가 되어버렸으니 그곳에 있던 영초들 또한 소실되어버렸을 터.
이렇게 되면 황제에게 그곳으로의 파병을 강력히 주장하고 주도했던 타츠만은 힐난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 어찌할 수 없었다.
행여나 전투가 끝나는 대로 눈치를 봐서 오딘과 격전을 벌였던 쪽에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영초를 찾아보겠다 하는 욕심 따위는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오딘이라는 잠재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내릴 결정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인원을 모아라. 황성으로 돌아간다.”
* * *
바로 직전의 참상을 말해주기라도 하듯 시체는 사방에 깔려 있었다.
지표면을 데우던 후텁지근한 열기도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산 사람 하나 없어 주위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어디선가 불어온 미풍만이 유일한 소리였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돌연 한 구의 시체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죽어 있는 것이었음에도 말이다.
살며시 들린 시체 아래서 2개의 눈이 껌뻑였다.
눈은 사방을 살피더니 어느 순간 멈췄다.
그러다 시체 사이에서 불쑥 손이 나오더니 자신을 깔고 있는 대상을 뒤엎으며 형체를 드러냈다.
헥토르였다.
그는 땀으로 이마가 흥건했으며 소금에라도 푹 절여진 것처럼 창백한 얼굴이었다.
옷은 지저분하기 그지없어 흙과 피가 뒤엉켜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반나절이나 시체 아래 깔려 있었던 까닭에 헥토르에게선 퀴퀴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는 오딘이 자리에 당도하기 훨씬 전부터 이 시체 아래 깔려 있었다.
물론 이 아래 깔려 있느라 오딘이 왔다 갔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밖으로 나서면 죽게 된다는 강박관념에 미동도 않고 있었던 것이다.
몸을 일으키려니 다리에 짜르르 쥐가 났다.
저린 다리를 움켜쥐며 헥토르는 어렵게도 일어났다.
그는 입을 열자마자 불평부터 내뱉었다.
“재수도 더럽게 없군. 하필 그때…….”
데려온 기사들과 마법사를 죽인 것은 제국의 기사였다.
손에 들린 2개의 영초가 원인이었다.
동귀어진을 한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헥토르의 명도 거기서 끝났을 터였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죽고 난 후 헥토르는 부러 멀리 있던 바리톤 기사의 시체 아래로 숨어들었다. 여럿의 말발굽 소리가 이쪽을 향하며 곧 다른 이들이 들이닥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헥토르는 앞쪽의 시체들이 널려진 장소에서 많은 영초를 보았었다.
반나절 전만 해도 욕심으로 희번덕거렸던 눈은 폐허로 변해버린 대지를 목격하며 절망으로 뒤바뀌었다.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개자식들.”
시커멓게 죽은 땅에서는 더 캐낼 것이 없었다. 왼손에 있는, 땀에 젖어 시들해진 영초 2개를 제외하고는.
다른 이들 같았다면 영초 2개를 건진 것만으로 크게 기뻐했을 것이다. 그것도 개인이 말이다.
사실 헥토르는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처지였다. 이 자리에 모였던 인간들은 이스론 상단원들을 제외하고는 그보다 약한 자들이 한 명도 없었으므로.
제 화를 못 이기고 씩씩거리는 헥토르.
그는 이 자리에 자신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저놈이 왜?”
공중에서 아그리스에게 뒷덜미를 잡힌 쉬바인이 던진 질문이었다.
아그리스는 의아한 눈길로 헥토르를 내려다보았다.
“저놈은 뭐냐?”
“바리톤의 왕자입니다. 참, 바리톤은 저희 왕국과 인접하고 있는 공국입니다.”
아그리스가 하는 질문에 의문을 남겨 두어서는 안 되었다. 이처럼 사소한 일이라도 그에게 미움을 샀다가는 신변에 어떤 재앙이 닥쳐올지 모르니까.
그를 살피다가 아그리스는 쉬바인을 잡은 채 땅으로 천천히 내려섰다.
헥토르가 서 있는 바로 앞이었다.
헥토르의 시선은 앞에만 고정되어 있었기에 사람의 두 다리가 먼저 보였다. 그리고 한 사람의 얼굴이 코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눈에 들어왔다.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깜짝 놀라 헥토르는 바닥에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뭐, 뭐야?”
어색하게 땅에 발을 디디고 허리를 펴는 쉬바인.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꼴이 우습다고 생각했는지 쉬바인은 억지웃음을 곁들여 물었다.
“잘 지냈소?”
헥토르는 그 자세 그대로 눈동자를 올렸다.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당신이 왜 여기에?”
곱지 않은 말투였지만 쉬바인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바리톤은 아레인과 이웃하고 있던 왕국이라는 인식이 박혀서이다. 비록 아레인에 패하고 공국으로 위상이 추락했다고 한들 그곳의 왕자를 자신이 무시할 위치는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조르바에게 혹독한 수련을 받는 바리톤의 왕자들을 은근히 무시하고는 했지만 여태껏 쉬바인은 그렇게 대해오질 않았었다.
하지만 본인조차도 헥토르가 다른 왕자들에 비해 밉상으로 비치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하는 기색이라고는 보이질 않았으므로.
쉬바인 정도의 눈썰미라면 그를 능히 알아볼 수 있었다.
‘오히려 야망이 엿보였지. 지금도 그 눈빛을 떨치지 못하고 있어. 어리석은 자 같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아레인과 바리톤 간에는 빗댈 수 없을 정도로 현격한 군사력의 차이가 있었으므로.
‘위험한 꿈은 포기하는 게 좋을 걸세.’
쉬바인은 속으로나마 헥토르를 그렇게 타일렀다. 가볍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후 상황을 종합해볼 때 헥토르가 왜 이곳에 왔는지도 알 것 같았다.
영초, 그것일 것이다.
힘을 얻겠다는 미련.
쉬바인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아그리스와 헥토르는 서로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헥토르는 자신을 깔아보는 그 시선이 못마땅했으며 아그리스는 헥토르의 손에 들린 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뭐냐, 그건?”
대뜸 반말을 늘어놓는 아그리스를 향해 헥토르가 성을 낼 찰나 쉬바인이 재빠르게 그의 뇌리에 통신 마법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입을 조심하시오.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오.]
그제야 헥토르는 경계심이 섰다.
좀 전은 경황이 없어 깊이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반증이질 않은가.
아그리스는 이조차 못마땅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명령조로 툭 쏘아붙인 말이 달갑게 들려오질 않았던지 헥토르는 종잇장처럼 잔뜩 인상을 구겼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곱지 않은 어투의 말이 튀어나오자 쉬바인은 재빠르게 헥토르의 입을 막고서 비굴한 웃음을 머금고 실실거리며 설명을 대신했다.
“앞서 말씀드린 영초일 겁니다.”
“영초?”
“그렇습니다.”
헥토르의 눈이 부릅떠지건 말건 쉬바인은 아그리스의 질문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다.
이대로만은 안 되겠다 싶었던지 헥토르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쉬바인의 손바닥 살집을 꽉 깨물었다.
자연히 쉬바인의 입에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아픈 손바닥을 누르며 방방 뛰는 쉬바인을 두고 헥토르는 땅바닥을 향해 거침없이 침을 뱉었다.
“펫.”
그리곤 사나운 눈초리로 쉬바인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
“아레인의 궁정 마법사 따위가 감히 내 얼굴에 손을 대?”
그 말로 인해 쉬바인의 안면이 경직되었다.
좋게 좋게 끝내려고 했었다.
입을 틀어막은 것은 그의 생명을 보존해주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화가 치밀어 더 이상 그의 체면을 존중해고자 하는 마음도 사그라졌다.
여차하면 손을 쓰겠다는 심보로 그에게 얼굴을 들이밀려는데 시커먼 손바닥이 면상을 밀었다.
“어푸.”
얼굴을 한차례 털고 보니 방금 그것이 누구의 손바닥인지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헥토르를 쳐다보며 아그리스가 입아귀를 늘어뜨리는 것을 보며 쉬바인은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흥, 제 버릇 개 못 주고 결국 명을 재촉하는구나. 네놈이 여기서 죽는다 해도 바리톤은 아레인에 항의도 못할 것이다. 어디 도와주나 봐라.’
과연 아그리스는 헥토르를 좋게 보고 있지 않았다.
“다오.”
다짜고짜 영초에 손을 벌리는 상대. 헥토르는 짜증스런 기색을 떠올렸다.
“네까짓 놈이 뭔데 이걸 달라고 하느냐?”
말은 당차게 나갔지만 무의식중에 위협을 느꼈는지 영초를 쥔 손은 허리 뒤로 숨어버렸다.
까탈진 태도에 아그리스의 미소가 더욱 스산해졌다.
“크큭, 입이 참 걸걸한 녀석이로구나. 마음에 쏙 들어.”
태도와는 다르게 느닷없이 칭찬을 늘어놓는 아그리스 때문에 쉬바인은 어리둥절해했다.
하나, 이는 괜한 의문이었다.
아그리스가 매몰차게 손을 뻗자 헥토르는 숨을 멈추고 허공으로 서서히 떠올랐다.
“케… 케엑.”
손이 닿는 거리가 아니었다.
헥토르의 눈에 경악이 들어찼다.
염력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으니 기겁을 할 만도 했다.
목이 죄어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자신의 목을 쥐고 있는 무언가를 떨쳐 내야 했다.
왼손으로 목 앞을 휘저어보지만 걸리는 것이 없었다.
경악심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크… 윽, 무… 무슨 해괴한 짓을?’
아그리스에게 자비란 없었다. 그는 헥토르의 괴로운 표정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역시 대드는 맛이 있는 녀석들의 죽어가는 모습이 재미있단 말씀이야.”
쉬바인은 헥토르를 보며 고소해하고 있다가 그 말에 소름이 다 돋았다. 마치 자신을 비꼬아 하는 말 같지 않은가.
헥토르는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다 못해 입에선 거품을 물었으며 눈알이 뒤집어져 흰자위가 보이고 있었다. 샛노래진 얼굴색은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쉬바인은 마음을 독하게 먹으려 애를 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참자.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은 혼쭐이 나봐야 해. 조금 불쌍하긴 하다만 안 보면 그만이다.’
헥토르를 포함해 바리톤의 왕자들은 하나같이 비운의 운명이었다.
아비를 잘못 만나 애먼 전쟁터에 휩쓸렸고 그로 인해 불운을 맞았다. 그 점이 쉬바인의 마음을 충동질하고 흔들어놓았다.
‘저 녀석이 못된 녀석이긴 하다만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후에 난처해질 것이다.’
그렇게 쉬바인은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당장에 입을 뗐다.
“아그리스 님, 죽이지는 말아주시옵소서.”
눈을 가늘게 뜨고 아그리스가 쉬바인을 쏘아봤다.
“왜냐?”
그 눈초리에 쉬바인은 지레 놀라 주춤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오, 오딘 님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오딘과?”
“그렇사옵니다. 아그리스 님께서 기필코 죽이시겠다면 저도 침묵하겠사오나 그를 죽이시면 오딘 님께서 이유를 물으실 것이옵니다. 그럼 제 딴에는 이유를 만들어야 하옵고, 또 그리하면 거짓을 말하는 절 이상히 보시게 될 것입니다. 후에 아그리스 님이 거론된다면 그때가 난처하니 자비를 베풀어주셔야 합니다.”
아그리스를 마주 보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리니 당황해서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쉬바인은 횡설수설하면서도 장황하게 떠들어댔다.
고맙게도 아그리스는 생각이 바뀐 모양이었다.
뻗은 팔을 내리자 헥토르 또한 땅으로 풀썩 쓰러졌다.
이미 의식은 멀어진 뒤였다.
아그리스는 터덜터덜 걸어가 헥토르가 그때까지 손에 쥐고 있던 영초를 빼앗아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의식의 끈을 놓아가면서까지 놓지 않았던 영초. 그에서 쉬바인은 헥토르가 불쌍하다 생각되었으며 아그리스가 야속하고 매정하다고 생각했다.
돌연 아그리스는 별 볼일 없다는 듯 손에 쥐고 있던 영초를 땅바닥에 홱 집어던졌다.
“내게는 필요 없을 것 같군. 이런 것에 목을 매다니, 모자란 녀석들.”
돌아선 아그리스와 땅에 떨어진 영초를 번갈아 바라보다 쉬바인은 그가 땅에 버린 영초를 냉큼 주워들었다. 방금 전 아그리스가 야속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 * *
뿌연 먼지로 뒤덮인 허름한 가옥들, 온갖 쓰레기들로 더럽혀진 골목, 누더기와 다를 바 없는 찢어진 천 쪼가리나 기워 입고 다니는 노인과 어린아이들.
영락없는 빈민가였다.
이 중 한 건물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내놔! 내가 먼저 집었다고!”
“내 거야!”
대문 옆 바구니에 가져다놓은 빵 부스러기를 놓고 아이들 간에 벌어진 실랑이였다.
언젠가부터 아이들은 이 자리에 먹을 것이 놓인다는 것을 알았다. 주린 배를 달래보기 위해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 있는 아이도 있을 정도였다.
오늘 같은 마찰은 근래 들어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바로 그 건물의 위, 창으로 내민 시선은 이 독특한 광경에 매료되어 있었다.
인영이 음산한 목소리로 툭 내뱉은 말이 이러했다.
“인심도 좋군.”
“저런 것쯤은 공짜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 않소.”
안쪽에서 들린 대답. 그와 말상대를 하고 있는 사람은 바리톤의 현자였던 알베른이었다.
불과 몇 해 전, 알베른은 스승 클라베르를 살해하고 정처 없이 대륙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정착한 곳이 바로 이 빈민가였다.
몸은 이곳에 두었을지언정 그는 계속해서 인간관계를 넓히고 세상에 발을 뻗어나갔다. 눈앞의 인영은 바로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인영은 부츠와 로브, 눌러쓴 후드까지 온통 검은색 일색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3년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지만 알베른은 아직까지 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지 못했다. 알베른이 보기에 그는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듯했다.
후드 사이로 사납게 보이는 적안만이 알베른이 타인과 그를 구별하는 방법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자신의 일에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존재라는 점이다. 때문에 알베른은 결코 그를 소홀히 대하는 법이 없었다.
알베른의 말에 인영은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조롱했다.
“너는 개한테 먹이를 주면 물까지 달라고 떼를 쓰는 걸 모르나 보군.”
그에 알베른은 입가에 모호한 웃음을 걸쳤다.
“나라고 좋아서 하는 줄 아시오?”
느닷없이 아래층에 소음이 일었다.
인영이 알베른에게 눈을 돌려 말을 섞던 사이, 일단의 무리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누가 왔나 보군.”
말과 동시에 인영은 알베른의 그림자로 스며들었다.
‘오늘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자의 기이한 능력을 볼 때마다 정말 소름이 끼치는군.’
채 놀람이 가시지도 않았을 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알베른은 정색을 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시지요.”
문이 열리고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긴 망토를 두른 4명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도통 이런 곳과는 어울리지 않을, 차림새만으로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인물들이었다.
알베른은 그중 단아한 외모의 젊은이에게 부복을 하며 경의를 표했다.
“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그랬다. 그는 크레노스 제국의 황자 타츠만이었다.
타츠만은 침묵한 채 걸어가 삐거덕거리는 흔들의자에 몸을 앉혔다.
사뭇 의아하여 알베른은 그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확실히 예와는 달랐다.
저 고장이 난 의자에 앉을 때마다 타츠만은 앞뒤로 몸을 흔들며 웃어보고는 했었다.
한데, 오늘 타츠만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도 유독 무거워 보였다.
“전하의 안색이 편치 않아 보이십니다.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신지?”
“그대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가?”
알베른은 고개를 깊이 숙인 채 나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꽤나 진지한 표정의 알베른을 보고서 타츠만은 웃음을 곁들이며 고개를 저었다.
“현자가 덜어줄 수 있는 짐이 아니네.”
그럴수록 알베른의 얼굴엔 욕심이 피어났다. 그는 황자가 자신을 지금보다 더더욱 신임하게끔 만들어야 했다.
그와 알게 된 이래 알베른은 곧잘 타츠만의 근심을 덜어주고는 했었다.
그것은 비단 세 치 혀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그림자에 숨은 인영의 힘이 개입한 것도 있었으므로.
알베른은 재촉하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타츠만의 말을 기다렸다.
타츠만은 그 얘기를 꺼내놓고 싶지 않았던지 부러 말을 돌렸다.
“현자는 마음 씀씀이도 나쁘지 않더군.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는 표정이었어.”
그에 알베른은 겸손함을 내보였다.
“제 것이 남았기에 주었을 뿐입니다.”
대문 앞에 빵 조각을 놓은 일. 그것은 미리 제국의 황자가 이곳에 들른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곁에 부리던 사람을 시켜 행한 일이었다.
타츠만은 알베른이 위선의 탈을 쓰고 있다는 것을 몰랐기에 그에 대한 평가를 점점 더 좋게만 내렸다.
“그대가 황도에서 머물러준다면 좋을 것을…….”
이미 오간 얘기였다.
타츠만은 알베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황도에서 머무를 것을 종용했었다. 알베른은 그때마다 갖가지 이유를 들어 번번이 거절했었다.
그라고 왜 황자의 곁에 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거절한 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이고자 함이었다.
“소신, 이곳의 일이 끝나는 대로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예기치 못한 반응에 타츠만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정말인가? 그때가 언제인가?”
“조만간 그리될 것이옵니다.”
“하하핫! 듣던 중 반가운 말이로구나.”
호탕한 웃음소리. 지금 이 순간만은 타츠만의 표정에 시름이 걷히고 화색이 만연해 있었다.
알베른은 바로 이것을 기다렸던 것이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알베른은 말로 형언하기 힘들 정도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바리톤을 떠나온 이래 괄목할 만의 성취를 이루게 되었으니 말이다.
좁아터진 왕국의 현자보다야 제국 황자의 책사가 훨씬 낫질 않겠는가.
막강한 권력과 부가 당장에라도 손에 잡힐 듯 아른거렸다.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지만 알베른은 표정 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속내를 들켜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소신, 기왕 마음을 굳혔으니 미천하나마 황자 전하께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기꺼워하며 타츠만은 두 팔로 알베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고마워, 고맙네.”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타츠만은 창가로 걸음을 옮겨가 뒷짐을 진 채 의연하게 밖을 내다보았다.
빵 부스러기가 동이 나서인지 왁자지껄 떠들어대던 아이들도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한 아이가 가랑이 사이에 고개를 묻고 있는 처량한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아이가 빵을 못 먹었기 때문에 저러고 있을 것이란 추리는 하지 못했다. 그 광경을 보며 묵혀 두었던 근심이 싹터서였다.
아이의 분위기에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표정도 침울해졌다.
타츠만의 입이 열리는 것과 더불어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 아이나 나나 마음이 편치 못하기는 마찬가지로구나.”
그에 알베른은 얼굴을 붉혔다. 이렇게 좋은 날, 황자의 기분을 해치는 방해물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전하의 근심이 어떤 것이신지 신이 감히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
답이 없었다.
말을 아끼는 것이다.
때문에 알베른은 그의 등에 대고 허리를 숙여 보이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주제넘은 질문이었사오니 크게 마음 두지 말아주옵소서. 신이 경솔하였사옵니다.”
이는 일종의 처세술이었다.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을 심어서 품어두었던 말을 억지로 꺼내게 만드는 것. 타츠만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던지 작심하고 입을 열었다.
“말 못할 것도 없겠지. 그대도 알고 있을 것이네. 우리 제국이 브란트에 갔던 일을.”
“일전에 들어 알고 있사옵니다.”
“갔던 일이 묘하게 되었어. 타 세력의 개입을 예상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 그 때문에 우리 역시 상당한 전력을 낸 것이고.”
수를 말함이 아니었다.
질을 말함이었다.
알베른은 이를 어렵잖게 알아듣고서 논지에 어긋나지 않게 되물었다.
“그 두 세력이 힘을 합치기라도 했다는 말씀이신지요?”
“그렇지는 않아. 오히려 전혀 예상 못한 일이 일어났지.”
짧게 마친 말 때문에 잔뜩 궁금한 표정을 짓는 알베른.
하나, 타츠만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크게 숨을 마시며 마음을 다독일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하필 영초가 몰려 있는 곳에 의심을 살 만한 자들이 있었던 거야. 그들을 처리하고 우리 세 진영이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봐도 될 일이었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느닷없이 한 사람이 나타났었지.”
제국의 황자답지 않게 타츠만은 격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나며 심장이 폭발할 듯 뛰었던 것이다.
타츠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 한숨에는 오늘의 무거움이 배어났다.
이제야 본론이 나온다는 생각에 알베른은 바짝 귀를 기울였다.
“그가 모든 것을 망쳐 놓았네. 그 일 이후, 황제 폐하께서는 말을 아끼고 계시지만 내 무능함을 힐책하시는 눈치라네.”
그가 거론한 뒷말은 차후에 생각해볼 일이었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망쳐 놓았다는 알 수 없는 소리에 알베른은 말끝을 흐리며 의문을 드러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황자 본인의 무력만도 가늠할 수 없다. 그에 더해 대륙 최강이라는 제국의 기사단과 마법사들을 대동했으니 천하에 무서운 것이 없을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타츠만이 했던 말로 비추어볼 때 그 자리에는 신흥 제국과 신성 제국 또한 함께 있는 자리인 듯했다.
대륙이 아무리 넓다지만 세 제국의 실력자들이 모인 상태에서 그에 비견될 존재가 있기는 할까.
당장 할 수 있는 추리는 사기꾼 하나가 굴러들어와 교묘한 말로 속임수를 쓴 것이 아닐까란 것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황자의 대답은 알베른의 상상을 깨뜨려 무색케 했다.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겠지. 우린 그 남자와 싸워야만 했다네. 우리를 포함해 그곳에서 삼십, 아니 그보다 더 죽었을지 모르지. 막판에 가서는 우린 달아나기 바빴으니까.”
그제야 알베른은 황자의 속에 담긴 근심을 읽었다.
‘황자 전하께서는 그날의 마찰이 후의 마찰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고 계시는구나.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듯하다. 그날 전하가 데려간 이들은 제국에서 극히 일부. 그가 제국에 패악을 끼칠 우려는 없다.’
달리 제국이겠는가. 그만한 영향력과 힘이 있으니 제국이다. 개인이 아무리 날고뛴다 할지언정 광대한 영토와 군사력을 지닌 제국을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결론짓고 알베른은 황자의 걱정을 덜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그자가 제국을 넘보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너무 괘념치 마시옵소서.”
그 말을 타츠만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와 두 번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네.”
“그는 드래곤이었습니까?”
황자가 저렇게나 두려워하고 있으니 이해가 가지 않기에 던진 질문이었다.
그런 질문을 던질 줄 예상이나 했다는 듯 타츠만은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나도 그 생각은 해보았다네. 하지만 그자는 검술을 사용했어. 검술을 익힌 드래곤의 얘기는 금시초문이니 그렇진 않을 걸세.”
타츠만의 말처럼 통상 드래곤은 검술을 익히지 않는다는 것이 인간세계에서는 정설이었고, 또 드래곤의 세계에서도 그랬다.
드래곤들의 유구한 역사, 그 긴 시간 동안 자신을 낳은 어미들로부터 전수받은 지식들은 대부분 마법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알베른 역시 이를 쉽사리 수긍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대륙엔 검술에 미친 엘프나 어지간해서는 속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기인들 정도가 있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언젠가 그는 스승 클라베르로부터 그 기인들 중 일부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르메르, 키아르진, 롬멜.’
이 세 사람이 그가 들었던 이름의 전부였다.
알베른은 혹시 황자 타츠만이 거론하고 있는 그 남자가 그 이름 중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여 물었다.
“그 남자의 이름을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곧 대답이 들려왔다.
“오딘이라고 하더군.”
그 즉시 알베른의 안색이 굳어버렸다.
잊고 있었던 존재, 억지로 머리에서 지워버린 존재. 저주받을 그 이름이 황자의 입에서 튀어나옴과 동시에 알베른은 아무런 사고도 할 수 없었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삽시에 온몸을 휘감았다.
‘그가 왜… 그가 왜?’
왜 또 자신의 인생에 나타났느냐는 탓만을 할 뿐, 그의 머리는 스스로에게 무의미한 질문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평시와 다르게 얼빠진 표정이 되어버린 알베른을 보며 타츠만은 의문을 드러냈다.
“왜 그러나? 자네도 아는 자인가?”
충격이 가시지 않았던 탓에 알베른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답답함에 급기야 타츠만은 성을 내고 말았다.
“자네!”
알베른은 타츠만의 찡그린 인상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저, 전하, 신의 무례를 용서하시오소서.”
사과는 했지만 타츠만의 노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여태 오간 얘기들이 일순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알베른은 식은땀까지 흘려 가며 상황을 수습코자 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무언가 질문을 던진 것 같기는 했다. 그것에 대답해야 그의 노기가 가라앉을 것이다.
하지만 내용이 기억이 안 났던지라 하는 수 없이 알베른은 욕을 들을 것을 각오하고 질문을 던졌다.
“신이 잠시 넋이 나갔었나 봅니다. 송구하오나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오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그치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는 자냐고 물었네.”
즉시 대답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솔직함과 거짓, 어느 쪽이 유리한지를 판가름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 경험을 털어놓자면 황자의 궁금증은 털어줄 수 있을지언정 별 볼일 없던 자라는 일말의 실망감을 사게 될 터이고, 이를 부인한다면 대화 도중 딴생각을 했다는 책망은 들을지언정 지금까지 쌓인 기대감에 손상이 가지는 않을 것이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사연을 털어놔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앞서 알베른은 일체의 경험과 기억을 부정했다.
“처음 듣는 이름이옵니다.”
황자의 표정은 무거워졌지만 다행히 뒤는 어렵지 않게 술술 풀렸다.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선이 닿아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 그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부로부터 나온 해결책이었다.
타츠만은 화색이 엿보일 정도로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그 역시 백방으로 수소문해봤지만 오딘의 출신이나 행방을 추적하지는 못했었다. 언젠가 다가올 위협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다는 것, 그게 그에게는 더 큰 짐으로 안겼던 것이다.
한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알베른이었다. 워낙에 솔깃한 말이라 이상한 반응을 보였던 것에 타츠만은 일체의 의심도 품지 않고 물었다.
“그래줄 수 있나?”
“힘닿는 데까지 노력해보겠사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지만 그렇게만 되어도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타츠만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하하하하!”
그가 웃음을 그치고 알베른을 보았을 땐 다그치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본래의 시원한 성격으로 돌아가 타츠만은 그에 한 가지의 약조를 내걸었다.
“내 그리만 된다면 그대에게 섭섭지 않을 만큼의 보수를 주지.”
“전하, 소인은 결코 보상을 바라고 하는 행동이 아니옵니다.”
당황하는 알베른을 두고 타츠만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안 그래도 골치 아프던 일을 현자가 자진해 나서주겠다는 말만으로 고맙구나. 단, 헛된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말미에 가서는 목소리가 커지고 표정이 엄해졌다.
부러 알베른은 기죽은 행세를 했다.
“하하, 그대 앞에서는 농담도 못하겠구나. 짐을 덜어주겠다는 것만으로 족하다. 그에 대해 왈가불가 따지지는 않겠다.”
말은 그러했지만 두고 볼 일이었다. 타츠만은 자신의 기분에 행동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알베른도 꼭 할 수 있을 법한 것들만 자진하고 나섰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불현듯 타츠만과 함께 와 뒤쪽에 목석처럼 시립해 있던 남자가 입을 열어 아뢰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셨습니다.”
타츠만은 알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이고는 알베른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할 일이 산적해 있는 와중에 시간을 쪼개 왔다네. 그대를 만나니 십년 묵은 체증이 다 가라앉은 듯하군. 오늘은 이만 가야 할 것 같으니 다음을 기약하지. 일을 마치는 즉시 황자궁을 찾아주게.”
“신은 그저 전하께옵서 발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황자는 흡족히 웃고 돌아서 그길로 함께 온 자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이윽고 적안의 로브가 알베른의 그림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계산이 있었군.”
“뭐가 말이오?”
“대문 앞에 빵 부스러기를 놓았던 것 말이야.”
“부인하진 않겠소.”
아까 같은 기분이었다면 미소라도 드리웠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알베른은 심신이 온전치 못했다. 엄밀히 따지면 오딘이라는 이름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적안의 인영은 그것 역시 물었다.
“그 일도 나에게 부탁할 참인가?”
“그럴 필요 없소.”
붉은 눈은 의문을 담은 채 알베른을 주시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전하께서 아시고자 하는 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얘기해줄 수 있소.”
“당장에라도? 그렇다면 오딘이라는 남자는 원래 알고 있던 자였군.”
알베른은 그에 대해 더 말하기가 꺼리는지 창문 너머로 시선을 두었다가 무거운 어투로 어렵게 입을 뗐다.
“그를 제거하는 것은 언젠가 당신이 해주어야 할 일일지도 모르오.”
“크큭, 그런 거야 어렵지 않지. 복잡하지 않은 일이니까.”
오딘이나 이자, 둘 다 곁에 있을 때 소름이 끼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누가 우위에 있다 명확하게 구별할 순 없었다. 적안의 인영은 이제껏 자신을 적대시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래도 알베른은 미리 경고해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제르딘, 아무리 당신이 대단하다고 해도 결코 그를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될 것이오.”
제르딘은 사악하게 입아귀를 늘어뜨리며 알베른을 쏘아봤다.
그러나 그뿐, 불평이나 위협은 없었다.
알베른 역시 그의 시선은 별로 개의치 않고서 창가에 바짝 붙어 먼 곳을 쳐다보았다.
‘그때 내 지휘는 잘못되지 않았다. 바리톤의 무능한 군사력이 일을 그르쳤던 것뿐이다. 그때 내가 움직였던 것이 제국의 군대였다면 오딘, 그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녀석은 지금쯤 세상에 없을 것이다.’
예고된 황자의 방문. 브란트에서 그 일이 있은 후로 4개월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