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권-용서할 수 없는 무력을 가진 자 (47/67)

용서할 수 없는 무력을 가진 자

한 인영의 난입에 군중들은 실색을 금치 못했다.

제국과 신흥 제국의 치들은 소드마스터 하멜의 공격을 무위로 돌린 인물에 대한 놀라움을 드러냈으며, 신성 제국의 무리들은 그에 난색을 표했다.

반면에 이 일의 희생양이 될 뻔했던 이스론 상단원들로서는 참으로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중 상당수가 그의 존재를 몰랐지만 마르크는 그가 누구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오… 오딘 님.”

절망으로 물들었던 마르크의 얼굴은 금세 화색이 되었다.

오딘은 마르크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한껏 구겨진 하멜의 면상을 재미있다는 눈초리로 응시할 뿐이었다.

하멜이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이를 바드득 갈며 의문을 드러냈다.

“누구냐? 네놈은?”

이미 거론한 오딘이라는 이름 따위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출신과 명성을 듣고자 함이었다.

대륙은 넓고 실력자는 많다지만 하멜은 검은 머리카락의 능력자에 대해 일체 들은 기억이 없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대상이 주제도 모르고 나댄다고밖에 생각되질 않았는지, 자연히 경계심보다는 자만심이 앞서 상대를 깔아뭉개려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로 인해 오딘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급작스레 뻗은 오딘의 손이 하멜의 턱을 움켜쥐었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하멜은 미처 대비를 할 새도 없었다. 놀람을 담은 눈이 치떠졌으나, 이윽고 제어할 수 없는 힘이 턱을 옥죄며 잔인한 소음을 유발시켰다.

꾸두둑, 두둑.

이빨이 깨지는 것은 고사하고 턱뼈까지 바스러지고 있다.

끔찍한 고통에 하멜은 오만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소드마스터의 무위를 지닌 템플 기사였다. 이런 고통에 쉽게 넋을 놓아버릴 존재는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지금의 고통은 살이 찢어지는 고통보다도 갑절은 지독한 것이었다.

평온이 흩어진 자리에 경악심이 들어찼다.

‘무… 무슨 손아귀 힘이…….’

오딘의 손을 타고 하멜의 시뻘건 피가 뚝뚝 흘렀다.

그리고 팔이 서서히 올라감으로써 육중한 덩치의 하멜도 더 이상 땅에 발을 디딜 수가 없게 되었다.

모멸감과 수치심이 극심한 고통보다 우위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하멜의 두 다리는 허우적거리고 두 팔은 발악을 하듯 휘적거렸다.

순간 오딘은 하멜의 턱을 옥죄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는 하멜이 바닥으로 쓰러지기 전 그의 복부를 걷어찼다.

퍽!

그다지 힘이 실리지 않은 발길질이었지만 하멜은 성황 카르만의 인근에까지 날아가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그래도 성황의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일 수는 없었던지 하멜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무리였다.

벌어진 입 사이에서 피가 한 모금이나 쏟아졌다.

“푸헉.”

하멜은 매우 위독해 보였다.

그런데도 차마 카르만은 눈앞의 수하를 살피지 못했다. 쓴웃음을 머금고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흑발의 사내에게서 감당치 못할 위협을 느꼈기에 눈 돌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카르만의 눈은 경악의 빛을 띠고 있었다.

“…왜?”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인간이었다.

난폭하기로 소문난 블랙 드래곤의 둥지에 발을 디디고도 무사한 인간이 있었던가? 분명 없었을 것이다. 그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은 그곳에서 그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성황 카르만이 충격에 휩싸여 있는 동안에 오딘은 차갑게 웃으며 그와의 거리를 좁혀 들었다.

신성 제국의 무리들은 행동을 서둘렀다.

육중한 덩치의 하멜을 당장에 뒤로 끌어다 치유 마법을 캐스팅했으며 다가오는 적을 맞을 태세를 갖췄다.

이를 본 오딘의 입에서 엄중한 경고가 터졌다.

“앞을 막아서는 자는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템플 기사들이 다급히 성황의 앞으로 나선 것으로 보아 그들이 오딘을 상대할 모양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의 일은 그들에게 경계심을 심어주었어도 공포를 심어주지는 못했다. 그런 관계로 템플 기사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하멜의 상태는 그리 좋지 못해 사제들은 애를 먹는 중이었다.

일그러진 얼굴은 그나마 원래의 형태로 돌아왔지만 배가 문제였다. 단 한 번의 발길질이 하멜의 단전을 깨어버린 것이다.

다행히 의식은 남아 있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지 사제 하나가 급박하게 말했다.

“마나가 흩어지고 있습니다. 상태가 제법 위중합니다. 아무래도 신전으로 후송을 해야 할 듯합니다.”

신성력, 그것은 장소에 따라 비례했다. 적어도 신성 제국의 사제들이나 신관들, 신성력을 사용하는 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믿음이 커질수록 신성력 또한 강해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 말이 하멜에게 좋게 들릴 리가 없었다.

이 자리에는 신성 제국의 성황이 자리하고 있다.

무훈을 세워 공을 치하받을 수도 있을 것이며, 귀한 영초를 하사받을 수도 있다.

모처럼 오지 않을 기회에서 빠져야 한다는 얘기에 그는 눈을 치뜨고 격렬하게 항의를 하려 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목소리가 크게 나오질 않았다.

“무, 무슨 소리?”

당황해하는 사제들을 대신해 곁에 있던 신관이 재차 그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칫하다가는 평생 검을 쥘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멜에게는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그 역시 몸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는 것은 알았다. 그러면서도 이를 일시적인 현상이라고만 치부했다.

어쩌면 그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더 억울한 일은 가물가물해져 가는 시야로 동료들이 흑발 사내의 검에 의해 피를 튀기며 상처를 입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딘이라는 이름의 저 사내, 그의 무력은 가히 경천동지할 만했다.

그의 검에서 발출된 오러는 나무는 물론이요 바위를 가루로 만들어버렸고, 땅에 부딪힐 때면 지축이 흔들리며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들썩거렸다.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오러에 템플 나이트들은 줄행랑을 치기 바빴다.

제국, 그리고 신흥 제국의 치들은 이 사태에 휘말리지 않으려 벌써 먼 거리로 떨어진 후였다.

신성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최고의 템플 나이트들이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뼈도 추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멜은 이 상황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후일이라도 도모해야 한다. 살아야 이 수모를 갚아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의식의 끈은 거기까지였다.

신관의 눈짓을 받은 사제들이 더 안전한 곳으로 그를 피신시키는 동안에도 사투는 계속되었다.

‘저 사내는 대체 누구란 말이냐?’

전투를 바라보는 신관의 솔직한 감상평이었다. 명성이 자자한 템플 나이트들 중에서 그를 감당해낼 사람은 없는 듯했다.

혼전이 거듭되는 중이라 신관이나 사제들이 신성 마법으로 도울 수도 없는 형국. 이대로라면 참패를 면치 못한다.

그것은 비단 그만의 생각이 아닌, 초조한 마음으로 전투를 지켜보는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처절한 비명 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끄아아악!”

템플 기사들의 부주의에 근방에 있던 사제 하나가 오딘의 오러 블레이드를 피하지 못하고 한쪽 다리를 잘리고 만 것이다.

잘린 다리에서는 생피가 흘러나왔다.

오딘을 상대하고 있는 템플 기사는 모두 넷이었다. 그들은 억울하게 당한 사제의 안위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 된 게 놈의 옷자락도 건드리지 못하다니…….’

템플 기사들의 실력이 모자란 게 아니었다. 그들의 날렵함은 비호같았으며 오러 블레이드의 예기는 날카롭기 그지없어 보는 이들도 혀를 찰 정도였다.

전후좌우, 무려 네 방향의 공격로를 확보했지만 오딘이라는 흑발의 사내는 뒤에도 눈이 달려 있는지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치 않았다.

앞과 옆, 두 방향의 공격이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무위로 돌아갈 때 뒤쪽의 템플 기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번개처럼 파고들었다.

내리긋는 검은 오딘의 몸뚱이를 두 동강이라도 낼 기세였다.

예상이라도 했던 것일까? 오딘의 허리가 크게 비틀려 뒤쪽의 검을 올려쳤다.

쩌쩡!

회심의 일격을 노리려던 기사는 차마 검을 버릴 수 없어 검과 함께 허공으로 붕 떴다. 가공할 힘에 팔목은 물론 팔 전체가 떨어질 듯 아팠다.

기사는 신음성을 내뱉었다.

“크윽… 무슨 놈의 힘이…….”

탁!

몸을 돌린 상태 그대로 오딘은 시선을 허공에 뜬 기사에게 둔 채 땅을 박차고 펄쩍 뛰었다.

검신합일(劍身合一).

오딘과 흑룡검이 그러했다.

주인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흑룡검은 무시무시한 기운을 머금고 오딘의 머리 위에 머물렀다.

그것도 잠시, 흑룡검이 반원을 그렸을 땐 잔인한 소음이 일었다.

서걱!

기사의 눈은 허망한 빛을 띠었다. 이렇게 죽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음이라.

몸이 양분되어 떨어지는 것을 보며 동료 기사가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안 돼-!”

동료의 죽음이 적의를 심어주었다면 살기를 머금은 오딘의 눈은 소름 끼치는 공포를 심어주었다.

상대가 몇이건 오딘은 관계없었다.

감히 자신에게 물을 먹인 성황이라는 놈과 그 부하 놈들에게 공포를 안겨 줄 작정이었다.

이에는 다른 이유 또한 있었다.

대륙의 기둥인 제국들. 그 제국들은 언젠가 아레인과 맞서야 할지 모른다. 잔인한 손속을 펼쳐서라도 아레인을 깔보지 못하게 이 자리에서 확실히 해둘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템플 기사들은 마냥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성황에게 마수를 뻗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먼발치에서 이를 보다 못한 남자 하나가 앞으로 발을 디뎠다.

“나도 나서야겠군.”

신성 제국의 템플 기사단장인 오르골이었다.

대내외적으로 신성 제국 최강의 실력자라고 일컬어지는 그가 표면에 나선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오르골은 어지간한 일로는 손을 쓰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가 움직이는 때는 성황의 안위가 걸린 일이거나 신성 제국의 흥망이 걸린 일 뿐일 것이라는 말까지 오갔었다.

템플 기사들과 신관들, 사제들이 그를 안도하는 빛으로 보았던 것에 반해 성황 카르만은 불안한 빛을 지울 수 없었다.

‘확실히 오르골은 강하다. 하나, 저자와 대적한다는 것은 무리. 그를 무너뜨리려면 내가 마성을 깨우고 합류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걸리는 부분이 너무 많구나.’

세간의 눈을 의식함이었다.

이 자리엔 제국뿐 아니라 신흥 제국의 사람들까지 있다.

물론 저들이 아니라도 이 자리에 있는 신성 제국의 이들도 걸림돌이었다. 자신의 비밀을 아는 자는 신성 제국 내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으므로.

카르만은 목에 걸린 펜던트를 손으로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가 갈등하는 동안에 또 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대로라면 전열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고 오르골은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될 것이다.

타인들의 시선이 얽힌 상황에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어 본성으로 귀환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즉시 신성 제국의 명성은 땅으로 추락할 것이므로.

카르만이 이렇게 갈등하는 동안에도 사단은 벌어졌다. 두 템플 기사의 공백, 그 틈을 노리고 고위 사제들이 신성 마법을 발현한 것이다.

휘황찬란한 빛이 전장을 가득 메웠다.

이윽고 폭음이 터졌다.

신성 제국의 무리들은 내심 기대했다. 폭음이 터진 것은 신성 마법이 목표물에 명중했기에 들렸다고 믿었다.

제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고위 사제의 공격 마법에 직격으로 맞는다면 멀쩡할 리가 없다.

그들은 이것으로 소동이 그쳐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폭음이 터지고 빛 무리가 걷힌 곳에 드러난 것은 까맣게 타 처연하게 늘어진 템플 기사의 육신이었다.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카르만을 포함해 이 자리에 있는 몇 사람은 그 원인을 알고 있었다. 오딘이 그를 밀쳤다는 것을.

제 한 몸 피하기도 어려울진대, 그 순간을 노리고 인근의 템플 기사의 뒷다리를 잡고 빛의 한가운데로 집어던져 버렸다.

이는 그들로서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허무한 죽음을 맞게 된 템플 기사의 앞쪽에서 오딘은 조소를 퍼부었다.

“크큭, 아둔한 녀석들 같으니. 본 좌가 그따위 공격에 쓰러지기라도 바랐더냐?”

모멸감에, 그리고 억울함과 분함에 그의 말을 맞받아칠 대상은 이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오르골은 입을 열어 새로운 전투를 예견했다.

“지금부터는 각오를 달리하는 게 좋을 것이외다.”

그는 길이 5자는 됨 직한, 너비만도 8치에 해당할 정도로 길고 커다란 검을 지니고 있었다.

검이 검갑을 빠져나오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통 물건이 아니었는지 검신은 사물이 훤히 비칠 정도로 투명했다.

오딘에게는 다소 생소한 부분이었다.

‘투명한 철이라. 뭐, 문제 될 것은 없겠지. 아직 대륙에는 모르는 것이 많으니까.’

오딘이 그에 시선이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며 오르골이 입을 열었다.

“환영검이라 하오. 귀하의 검도 예사롭지 않소만, 이름을 물어도 되겠소?”

“흑룡검이라 한다.”

“검신에 새겨진 동물의 이름이 흑룡인가 보오?”

“그렇다.”

신성 제국을 적으로 돌린 자.

그럼에도 오르골이 그와 말을 섞는 이유는 무인으로서 인정을 해주겠다는 뜻과 같았다. 주신 이외에 오르골이 섬기는 것이 있다면 바로 무(武)였다.

[조심하시오. 그자는 단장이 생각하는 정도로 만만치 않소. 내 말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성황이 통신 마법으로 전해온 음성이었다.

그 한마디에 오르골의 낯빛이 바뀌었다.

카르만이 누구인가. 지위를 떠나 자신과 대등한 검술 실력을 지닌 사람,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 우위에 있을지 모른다고까지 생각했던 사람이다.

따라서 경각심이 곤두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자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성황께서 이리도 걱정을 하신다는 말이냐?’

오르골은 행동에 사뭇 조심을 기했다.

그것이 오딘의 비웃음을 샀다.

“말은 거창하게 하더니 허세인가 보군.”

오르골의 자존심에 상처가 가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더더군다나 휘하 기사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순간이다.

그러나 함부로 할 것이 못 되었다. 일정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르골은 진땀이 다 흘렀다.

‘성황께서 하신 말씀이 틀리지 않았구나. 빈틈이 보이질 않는다. 섣불리 다가설 게 아니다.’

승부는 한순간에 갈릴 수 있다.

이 경우는 고수들의 대결일수록 더하다.

마나의 흐름, 바람 소리, 풀이 흔들리는 소리까지 주시하며 오르골이 꼼짝 않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며 오딘은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바람이 인 것도 아닌데 한바탕 터진 웃음소리에 풀은 물론 나뭇잎사귀들이 사방으로 흔들렸다.

그런가 하면 높게 뜬 구름까지 넘실대는 것 같았다. 귀청을 찢을 정도의 큰 소리가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기이한 일에 주위가 죽은 듯 고요해졌다.

감히 움직일 생각도 못하고 있는 오르골을 보며 오딘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먼저 손을 쓸 생각은 없나 보군. 그럼 본 좌가 직접 가지.”

성큼성큼 다가오는 오딘을 보며 오르골은 등골이 오싹해지고 몸이 굳는 느낌마저 들었다. 너무 많이 긴장했던 탓이었다.

오딘은 무려 오르골의 세 보 앞까지 다가서서 중얼거렸다.

“이쯤이면 적당하겠군.”

잔혹한 마기가 풀풀 흘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보통의 오르골이었다면 감내해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오르골은 목석과도 같았다.

흑룡검이 칠흑보다 진한 예기를 발한다 싶더니 기어이 오러가 검끝으로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그 빛을 보고서야 오르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시라고 봐도 좋을 순간에 흑룡검이 그의 목을 향해 그어졌다. 오르골은 혼신의 힘을 다해 뒤로 몸을 날렸다.

휘익!

간발의 차이였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그의 목은 땅을 구르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안도할 새도 없었다. 자신이 뒤로 뛴 순간 오딘이라는 자 역시 빠르게 앞으로 치달리며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으므로.

강대한 마나를 머금은 오러 블레이드들이 맞부딪쳤다.

파캉!

제법 힘을 실어 막았다고 해도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휘두른 검을 오르골이 버텨 낼 재간은 없었다.

치이이익!

그 자세 그대로 오르골이 뒤로 밀리며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켰다.

공격은 끊이지 않았다.

패도적인 기운을 담고 사방으로 휘두르는 오딘의 검을 막아내기엔 버거움이 따랐다.

쩌렁쩌렁한 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불현듯 오르골의 뇌리에 의문이 일었다.

‘내가 도대체 누구와 싸우고 있단 말인가?’

도저히 눈앞의 대상이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응당 인간이라면 한계가 있는 법. 오르골은 자신이 그 한계에 다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한계를 넘어섰다면 답은 한 가지였다.

‘그, 그랜드마스터?’

그랜드마스터.

검술을 갈고닦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전설이 전해졌다.

오래전 세상을 등지고 은둔한 검사가 그랜드마스터라고 했었다.

강성했던 세빌라이 왕국을 단신으로 무너뜨린 자!

그가 그랜드마스터라고 했다.

벌써 수십 년은 지난 일.

까마득히 먼 옛날의 얘기였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그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질 않으며 어떠한 증거도 남아 있질 않다.

세인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오르골 역시 같은 이유로 그 얘기를 신빙하지 않았었다.

어려서부터 특출 난 재능과 뼈를 깎는 노력, 그 둘을 겸비하고 지금 또한 검술 연마를 게을리 하고 있지 않지만 오르골은 한계를 깰 순 없었다. 그리고 넓은 대륙에 그 같은 사람을 목격하지도 못했었다.

이자는 그에 대한 반증이었다.

‘그럴 리는 없다. 아닐 것이다.’

소문의 그랜드마스터, 그는 푸른 머리카락에 푸른 동공의 소유자랬다.

그것만 비교해보아도 이자가 그가 아니라는 증명이 되었다.

자신이 모르는 경지, 그에 대한 이질감이 오르골을 더욱 힘들게 했다.

쩌엉!

참으로 바보 같은 실수였다.

사념에 빠져 그만 검을 놓쳐 버린 것이다. 환영검은 몇 바퀴나 허공을 돌더니 땅에 콱 박혔다.

순간 오르골은 죽음을 직감했다.

오딘의 흑룡검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그의 허리를 양단 낼 심산으로 궤적을 그렸다.

오르골이 질끈 두 눈을 감았을 때 우레 같은 마찰음이 흘렀다.

콰창!

“어서 검을 주우시오.”

성황의 목소리였다.

최악의 상황을 면키 위해 그가 개입한 것이다.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오르골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떨어진 검 쪽으로 가려는데 오딘과 눈이 마주쳤다.

그 차가운 눈은 마주치는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들 것만 같았다. 쉬이 검을 회수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러나 해야만 했다. 성황을 믿고, 혹 잘못되어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야만 했다.

죽을 각오로 오르골은 환영검이 박힌 곳을 향해 뛰었다. 그의 눈에는 오로지 자신의 검만이 보였다.

어느 순간 오르골은 펄쩍 뛰어 몸을 굴렸다. 환영검이 박힌, 딱 그 자리가 목표였다.

먼지를 듬뿍 안고 일어서는 그를 보며 오딘은 낮게 웃었다. 애초에 건드릴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오러 블레이드만 휘둘러도 닿을 지근거리에 있었음에도 오딘은 손을 쓰지 않았다. 그 점이 오르골의 꼴을 우습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창피해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생사가 걸린 전투에서 부끄러움을 타서야 쓰겠는가.

오르골은 진지해 보였다.

지금 통신 마법으로 의사를 전해오는 성황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우리 둘만으론 힘들 것이오. 가능하다면…….]

카칵!

급작스레 달려든 오딘이 휘두른 검을 막기 급급해 성황 카르만은 마저 의사를 전달하지 못하고 짤막한 신음성을 토했다.

“윽.”

카르만은 오딘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마성과 신성력을 빌려서도 이기지 못했던 존재인데 펜던트를 걸어 힘이 제어당하고 있는 상태에서의 싸움은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오르골은 성황이 응시했던 쪽을 보았다.

그곳엔 제국의 황자가 서 있었다.

어렵지 않게 그는 성황의 의사를 유추해볼 수 있었다.

‘성황께서는 저들의 힘이라도 빌리실 모양이로구나.’

검과 검이 뒤엉키며 뱉는 마찰음 속에서 또 한 번의 통신어가 들려왔다.

[우… 우선 이자를 같이…….]

길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오르골은 당장에 몸을 날려 성황을 압박하고 있는 오딘에게 대들었다.

하나와 하나의 싸움은 둘과 하나의 싸움으로 변모했다.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춰본 적이 없어 합공이 서툴긴 했지만 이도 시간이 흐르며 적응이 되어갔다.

그러나 의아한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오딘의 표정이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지 아까보다 밝게 웃는 것 같았다.

캉! 카캉! 차창! 파캉!

수합, 아니 수십 합을 섞었어도 오딘은 도무지 빈틈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도, 도대체 어떻게 된 인간이?’

이대로라면 승패를 가름 짓기가 힘들었다. 성황과 힘을 합치면 능히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던 아까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카르만은 불안을 떨칠 수 없어 오르골에게 재차 주의를 주었다.

[그는 실력을 전부 내고 있지 않는 듯하오. 부디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지 말길…….]

바로 그때였다.

오딘이 카르만의 검을 쳐내려 등을 보였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오르골은 오딘을 단칼에 요절이라도 내려는 작정으로 환영검을 사력을 다해 휘둘렀다.

“차합!”

오러 블레이드의 끝부분이 오딘을 길게 갈랐다.

오르골의 얼굴에 한순간 환희의 미소가 스쳐 갔다.

반면에 그의 양손은 그 사실을 부정하는 듯했다. 잘려진 감촉이 느껴지질 않았던 것이다.

놀랄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둘로 갈렸던 오딘의 형체가 잔상처럼 사라지고 있다.

믿기지 않는 사실로 인해 오르골의 몸은 경직되었다.

“부, 분명 베었는데?”

경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자신을 죽이기라도 하려는지 성황이 신성력을 발현, 무시무시한 공격 마법을 캐스팅했기 때문이다.

“라이트 오브 갓(Light of God).”

수십 발의 광선이 빛을 뿜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오르골은 잽싸게 몸을 날렸다.

그가 서 있던 자리, 그곳에서 가공할 만한 폭발이 일었다.

쿠콰콰콰쾅!

성황은 오딘의 검에서 뱀처럼 쏘아져 나오는 강기들을 방어하려 신성 마법을 발현한 것이었다.

사방으로 잔해들이 튀었다.

그 잔해 하나가 오르골의 뺨을 때리고 지나갔다.

상처 부분에 가느다란 선이 생기며 선혈이 흘러내렸다.

욱신거리는 볼을 어루만질 시간도 없었다.

성황이 압박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너무 당황했다. 이러다간 모두의 목숨이 위태롭게 될지도……. 여기서 저 미친 인간을 막지 못하면 신성 제국도 저물어갈 것이다.’

오르골은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는 각오를 달리했다.

너무 놀란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 때문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제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오르골은 전투에 임했다.

그럼에도 오딘의 기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방이 초토화가 되어갔다.

‘이길 가망이 없다. 놈은 우릴 가지고 놀고 있다.’

오르골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어갈 무렵, 오딘을 중심으로 다섯 방향을 점하고 선 고위 사제들에게서 신성력이 발현되었다.

피하고 말 것도 없었다.

즉시 오딘은 커다란 반원형의 막에 둘러싸였다.

세상으로부터 고립을 시킬 목적으로 임의로 결계를 쳐둔 것이다.

카르만은 시간이 필요했고, 그 때문에 고위 사제들로 하여금 이 같은 지시를 통신어로 전했다.

조만간 깨어질 막.

여전히 불안한 빛을 지우지 못하는 오르골을 두고 카르만은 호흡을 크게 들이켜고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중후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들도 보셨을 것입니다, 저자의 가공할 힘을. 이는 비단 우리 신성 제국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제국의 무리들도, 신흥 제국의 무리들도 감히 자신감을 드러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제국의 황자는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성황께서는 왜 저자와 우리를 엮으려고 하시는 것이오?”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만한 상대였다면 던지지 않을 물음이었다.

이는 그조차 오딘의 힘이 두렵다는 뜻이었다.

카르만은 뜻을 굽히지 않고 재차 입을 열었다.

“언젠간 여러분들도 적이 될 수 있기에 하는 말이었습니다. 귀하들께서는 저자를 감당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지금 대륙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힘의 균형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 균형이 저 한 사람에 의해 무너질 수 있습니다. 하나만도 감당하기 힘든 판국에 저자가 세력이 있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신성 제국이 첫 번째의 목표라면? 앞으로 더 이런 자리가 마련되리란 보장이 없지 않겠습니까?”

말수가 적기로 유명한 카르만이 타 제국에 이렇게 협조를 요청하는 것은 금시초문인 일이었다. 그만큼이나 카르만은 조급했던 것이다.

제국의 황자도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카르만이 그를 간파하고 못을 박아 말했다.

“다시 이런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황자는 성황의 뒤쪽을 건너다보았다.

고위 사제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결계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 결계 안에 있는 오딘이란 사내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언젠가 부딪힐지 모른다? 언젠가?’

황자의 뇌리 속에 같은 말이 맴도는 중이었다.

미지의 두려움에 그는 사태를 더 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힘을 합치도록 하지요. 제어할 수 없는 적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처단을 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니.”

신성 제국은 이를 크게 반겼다.

이제는 남은 사람들의 의사에 대한 확인이 필요했다. 바로 로이센 대제를 포함한 신흥 제국의 무리들이다.

로이센은 무거운 표정을 짓다가 어렵게 용단을 내렸다.

그러나 제국의 황자와는 사뭇 다른 결정이었다.

“난 이 일에서 빠지도록 하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이내 황자의 눈이 치떠졌다.

“대제께서는 우리와 길을 달리하실 참이오?”

입을 굳게 다문 로이센을 보며 카르만이 따가운 눈총을 던졌다.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는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오해는 말아주었으면 하오. 여럿이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을 뿐이니까.”

이에 카르만은 모호한 질문을 던졌다.

“상대가 우리가 부딪힌 벽을 넘어섰다 해도 그렇습니까?”

로이센은 그 말을 용케도 알아들었다.

“마찬가지요.”

그 말을 확답으로 알아들었는지 카르만은 돌아서는 로이센을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단, 황자는 불쾌한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며 로이센에게 협박조의 말을 내뱉었다.

“귀하는 이 일로 우리 제국과 신성 제국 사이에 거리가 멀어졌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오. 또한 이곳에서의 소기의 목적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외다. 이 전투가 끝나는 즉시 우리는 대제를 적으로 간주할 테니.”

영초를 말함이었다.

그에 로이센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지금이라도 부지런히 캐야겠군.”

그길로 로이센은 자신의 수하들을 데리고 발길을 돌렸다.

로이센이 자리를 비울 딱 그 무렵이었다.

갑자기 오딘의 왼손바닥이 금빛을 띠기 시작하더니 이내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광채를 머금었다.

뇌력장(雷力掌).

마교의 교주들에게만 전수되는 비전이었다.

손에서 뻗어 나온 강력한 뇌전의 줄기가 결계를 관통했다.

파지지직!

구멍이 뚫린 결계는 삽시간에 녹아내렸다.

그 여파는 적지 않았다.

한 줄기의 뇌전은 황자가 서 있던 옆쪽의 거목을 통째로 쓰러뜨리며 곁에 있던 마법사를 깔고 넘어졌다.

나무를 밀어낼 것도 없었다. 깔린 마법사는 십중팔구 즉사했을 것이므로.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에 황자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 어떻게 된 게…….”

무의식중에 두려움이 솟구치며 황자는 이 자릴 떠난 로이센 대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차.’

조금 전의 말, 그것은 잘못된 선택일지도 몰랐다.

‘감당 못할 존재를 적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황자가 당혹감에 물들어 있을 동안에도 오딘은 얼굴에 잔인한 미소를 드리운 채 거리낌 없이 거리를 좁혀 들었다.

멀리 숨어서 전투를 지켜보던 로이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휘유, 저렇게 무서운 사람이었다니. 큰일 날 뻔했군.”

“대제께서는 너무 겸손하신 듯합니다.”

웃으며 말을 건네는 이는 신흥 제국의 테르나트 폰 가리투스 대공이었다. 말을 하는 투로 보아선 그는 이미 로이센의 본 힘을 알고 있는 듯했다.

“대제께서 합류하셨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겁니다.”

확신을 담고 있는 말투. 로이센의 기분을 추켜 세워주려는 듯 보이지는 않았다.

로이센은 그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겪어봐야 아는 일이지.”

천지가 개벽할 것 같은 전투를 지켜보면서 로이센은 착잡한 듯 입맛을 다셨다.

“개인 대 개인이라면 모르겠지만, 저런 식이라면 내가 나설 이유가 없지 않겠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는 뜻 같았다.

조금 전과는 너무 다른 태도 변화였다.

여전히 테르나트는 미소로 일관했다. 그러면서도 충심을 실어 기탄없이 말했다.

“어쨌거나 위험하긴 한 자입니다.”

“괜히 적을 만들어서 좋을 것은 없겠지.”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 바로 이곳 브란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제국의 황자와 신성 제국의 성황을 비롯한 대륙의 기둥들이 한자리에 모여 오딘이라는 한 남자를 상대하는 것이 그러했으며, 블랙 드래곤 아그리스가 근방에 와 있다는 것이 그러했다.

그리고 또 한 명, 전설의 그랜드마스터 로이센이 여기 있었다.

* * *

잔뜩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오크들에게 줘 터져 피멍이 들었던 부위들은 말끔해졌지만 쉬바인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아니, 편할 수가 없었다.

너무도 두려운 대상과 함께하고 있어서다.

아그리스는 오딘의 전투에 눈이 팔려 있었다. 감탄사를 난발하면서…….

“검이라는 게 저 정도의 파괴력을 지니는군.”

본디 쉬바인은 드래곤 신봉자였다.

꿈에서라도 드래곤을 마주칠 때면 경의를 표했었고, 드래곤에 대한 경외심을 잊지 않고 살았었다. 그가 읽었던 드래곤에 관련된 서적만 해도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그러나 쉬바인은 지금 회의에 물들어 있었다.

‘드래곤은 원래 이런 존재였다. 날 잡아 죽이지 않는 것만도 고마워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이 일었다.

‘날 죽이지 못하는 이유는 오딘 님 때문이겠지. 달리 둘러댈 말이 없을 테니까.’

후자가 옳았음에도 그는 생명을 보전해준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려 했다. 그래야만 반감을 줄일 수 있을 테니까.

앞으로 그와 지내게 될 날들, 그 기간 동안 편하려면 가식 없이 우러나는 마음으로 대해야 했다.

‘언제까지?’

기간이 또 문제였다.

같이 있는 지금, 숨을 쉬는 것조차 불편한 지경인데 그와 언제까지 함께해야 하느냐다. 한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 넘겼다.

쉬바인 자신의 앞길엔 먹구름만 잔뜩 끼인 듯했다.

이는 분명 오딘과는 다른 문제였다.

과거 하인리히 국왕이 죽고 오딘을 따를 때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엄밀히 따지면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다.

오딘은 인간이고 여기 있는 아그리스는 드래곤이 아닌가.

드래곤에게 인간과 같은 정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비위를 맞춰주며 굽실거린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말이다.

여태의 상황을 돌이켜 볼 때 아그리스는 오딘 이외의 인간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듯했다.

숨이 죄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간 속병이라도 생기겠어. 좋게 생각하자. 가까이에서 드래곤을 모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이 아닌가. 드래곤을 모신다는 자부심. 그래, 그걸로 버티면 될 거야.’

발상의 전환으로 인해 쉬바인은 겨우나마 얼굴색이 밝아졌다.

그러나 지금 아그리스의 옆에 선 자신의 모습이 주군인 오딘에게 핍박을 받던 파르티잔과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

쉬바인은 마음을 모질게 먹고 억지로 생각을 떨쳐 버렸다.

‘난 쉬바인이다. 아레인의 궁정 마법사 쉬바인. 그와는 다르다.’

하지만 굳이 빗대자면 그리 다를 건 없어 보였다. 오딘이 아레인의 국왕이라면 아그리스는 드래곤 중에서도 유별나게 포악한 블랙 드래곤이었으니.

수시로 표정이 변화하는 쉬바인을 보며 아그리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똥이라도 마려운 거냐?”

“아, 아닙니다.”

황급히 양손을 소리가 나도록 저으며 강력히 부정하는 쉬바인을 아그리스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실쭉이 째려봤다.

“그럼 나랑 있는 것이 불편하기라도 한 모양이구나.”

“저얼~ 대 아닙니다!”

단호한 거절.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쉬바인은 침이 튀겨라 떠들어댔다.

“여기 오기 전 말씀드렸듯이 제가 세상에서 가~ 장 존경하는 분들이 드래곤님들이십니다. 그중에서도 최고로 늠름하고 강하신 블랙 드래곤은 어릴 적부터 제 우상과도 같았습니다. 전 정말 이 자리에 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듣기 나쁜 소리가 아니었던지 아그리스는 쉬바인의 안면을 쓱 훑어보고는 의심을 지워버렸다.

“믿어주기로 하지.”

문득 드는 의문. 어색해진 분위기를 달래보려 쉬바인은 그걸 물었다.

“저~ 아그리스 님, 하나 여쭤보아도 되겠는지요?”

“뭐냐?”

“아그리스 님이 오딘 님을 도와주신다면 저들을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을 텐데 왜 도와주지 않으시는지?”

이는 쉬바인의 직무와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신하 된 자로서 주군의 전투를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도움이 못 되더라도 거들어야 정상이었다.

아그리스가 허락이라도 해야 이 언덕에서 내려가 도울 텐데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않으니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에 뚱딴지같은 대답이 들려왔다.

“내가 왜 저 녀석을 위해서 싸워야 하냐?”

아그리스가 온 이유를 알았다면 쉽게 이해 가능할 일이었다.

그러나 쉬바인은 그를 몰랐으니 그가 이웃집 불구경하듯 지켜만 보는 까닭도 알 리 없었다.

직무유기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던지 쉬바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저라도 내려가면 안 되겠는지요?”

하지만… 아그리스의 곱지 않은 눈초리를 느끼고서 쉬바인은 황급히 말을 바꿨다.

“하하, 못 들으신 걸로 해주십시오. 아그리스 님께서 내키지 않으신다면 없던 얘기로 하겠습니다.”

그제야 고개를 돌리는 아그리스를 보며 쉬바인은 이마의 식은땀을 훔치며 안도할 수 있었다.

말로는 못할 불평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젠장,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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