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바인의 굴욕
식당 내에서 마르크는 영약에 대한 욕심을 떨치지 못한 채 입 안의 침이 마르도록 오딘을 종용하는 중이었다.
“…그 영약을 먹게 되면 경지를 달리하게 된다고까지 합니다.”
오딘은 그 말을 귓등으로 듣는지 계속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그에게서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자 마르크는 초조해졌다.
영약은 둘째 치고 두고 온 호위 무사들이 걱정이 되어서다. 병세가 악화되어 이 마을로 오게 되면서도 마르크는 욕심을 부렸었다.
본래 마을에 남아 있었던 샥과 정크를 제외하고 헤르미온과 틴, 그리고 단 한 명의 호위 무사만 데려왔을 뿐, 나머지의 호위 무사들에게는 영초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해놓았던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제라드나 쌍귀, 파르티잔을 움직일 권한이 없었다.
좀 더 많은 사람을 놓고 오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었는데 이제는 안에 있을 사람들이 걱정되었다.
여태 오지 않은 것을 보면 영초를 못 구했을 것이었다.
안에서 변고를 당했을 수도 있다.
오늘만 해도 족히 1백은 넘을 것 같은 사람들이 안으로 향했다.
특히 조금 전에 지나친 사람들 중 한 명에게서 나온 말은 이런 마르크의 불안함에 부채질을 했다.
“많이도 죽었다는군.”
이러니 그들에 대한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마르크는 그들을 그저 호위 무사가 아닌 한솥밥을 먹던 식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딘이 가준다면 그들의 안위를 확인할 수 있음은 물론 영초까지 구할 것 같았다. 그러나 끝내 오딘은 별다른 태도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마르크의 초조함은 극에 달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지 무거운 엉덩이를 떼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희라도 다녀오겠습니다.”
마침 틴이 채비를 마치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가요.”
마르크는 나귀에 올라서면서도 오딘을 살핀 후 제라드 장로와 쌍귀, 그리고 쉬바인이라는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예상대로였다.
쌍귀와 쉬바인이라는 마법사는 둘째 치고 제라드 장로조차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을 않고 있었다.
야속한 마음이 드는 것도 잠시, 마르크는 샥에게 각별히 주의를 주었다.
“헤르미온이 도착하면 여기 있으라고 해. 금방 다녀올 테니까.”
이 와중에 그녀는 쇼핑을 나갔더랬다.
오딘에게 잘 보이기 위한 수작일 것은 뻔한 일.
원인 모를 한숨을 안고 마르크는 길을 떠났다.
기다렸다는 듯 오딘이 웃음을 머금고 일어섰다. 같이 갈 생각이었음에도 치기가 발동해 침묵을 유지했던 것이다.
돌연 아그리스가 계단에서 내려와 입을 열었다.
“난 잠시 집에 좀 다녀오겠다.”
“좋을 대로.”
“마법사를 한 명 데려갔으면 좋겠군.”
아그리스의 뜬금없는 요구에 오딘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대수롭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파르티잔을 데리고 가면 되겠군.”
“그 녀석은 안 돼.”
“그럼 쉬바인이겠군.”
고개를 끄덕이는 아그리스를 보며 오딘은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 역시 별일이야 있겠냐 싶어 허락했다.
아그리스와 함께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음을 옮겨가며 쉬바인은 짜증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집이 어딥니까?”
아그리스가 입에 사악한 웃음이 걸치며 물었다.
“그건 왜 묻는 거냐?”
“왜 묻다니요? 어딘지 알아야 근방의 마법진을 타고 이동하든 직접 마법진을 그리든 할 게 아닙니까!”
“그럴 필요 없다.”
아그리스의 손이 쉬바인의 어깨에 얹어졌을 때 눈부신 빛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그 빛이 사라졌을 때 두 사람의 모습 또한 온데간데없었다.
쉬바인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허공이었다.
발밑이 허전한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쉬바인의 몸은 무서운 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쉬바인이 비행 마법은 시전할 수 없었다고 해도 몸을 가볍게 하는 디크리스 웨이트 정도는 펼칠 수 있는 실력이었음에도 불안한 자세에서 마법을 캐스팅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가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고는 허공에서 팔을 휘저으며 가속도를 줄이는 것뿐이었다.
“으아아아아아~”
곧 쉬바인의 몸뚱이는 바닥과 조우했다.
풍덩!
다행히 아래는 물이었다.
수영엔 그리 재주도 없었을뿐더러 당황한 상태였고, 로브를 입고 있어 쉬바인은 적잖은 물을 들이켜며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푸, 어푸~”
더군다나 무슨 조화가 일어났는지 잔잔히 흐르던 물이 급류로 변하며 쉬바인은 사면초가에 처했다.
“사, 살려…….”
물에 잠겼다가 떠오르기를 반복하니 구조를 요청하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 생각을 할 여유조차 잃어버렸다.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을 뿐이다.
흐르는 물이 자꾸 콧구멍과 목구멍으로 들어와 배가 불룩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급류에 휩쓸리던 물고기가 산 채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버렸다.
“캐엑, 캑, 컥컥!”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야말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물고기는 배 속에서 또 왜 이리 꿈틀대는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눈이 뒤집히고 비린 생선 냄새에 헛구역질이 절로 나오며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고통을 더 견디질 못해 쉬바인은 꽥 하고 비명을 지르고선 정신 줄을 놓아버렸다.
아그리스가 하늘에서 그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물 위쪽으로 천천히 내려섰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물살은 다시 잔잔해졌다.
흐르던 물이 급류로 변한 것은 아그리스가 조화를 부린 탓이었던 것이다.
아그리스는 물 위로 둥둥 떠오른 쉬바인을 건져 육지에 내려놓았다.
물을 얼마나 들이켰는지 쉬바인의 불룩해 있는 배는 만삭에 이른 임산부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측은해 보였을 법도 하건만 아그리스는 더욱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이때 느닷없이 오크 한 마리가 숲 속에서 걸어 나왔다.
[네가 인공호흡이라도 해줘야겠다.]
아그리스의 말이 떨어지자 오크는 대뜸 쉬바인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췄다.
오크가 인공호흡을 하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이 오크는 그저 아그리스에 의해 뇌를 조종당하는 것이다.
무의식중에서도 쉬바인은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오크가 배를 누르고 입술을 마주치기를 수차례.
쉬바인의 배 속에 들어찬 물줄기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두어 번 정도 물을 뿜어냈을 때는 목구멍으로 들어갔던 물고기 또한 튀어나와 땅에서 팔딱팔딱 뛰었다.
참으로 질긴 생명력이었다.
게슴츠레 쉬바인이 눈을 떴을 땐 재차 오크가 키스를 하려던 참이었다.
‘뭐, 뭐야?’
쉬바인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하여 오크의 입술을 다시 마주치고 말았다.
“웁, 웁.”
발버둥을 치던 쉬바인은 뒤늦게나마 손을 이용해서 오크의 얼굴을 밀쳐냈다. 그 와중에 오크의 젖가슴이 손에 닿았다.
그래도 이 오크는 여성이었던 것이다.
발악하듯 일어나 쉬바인은 입술을 박박 닦고 계속 침을 뱉었던 데 반해서 오크는 뭐가 그리 좋은지 웃는 낯이었다.
그러고도 양에 차지 않았던지 오크는 재차 입술 박치기를 시도하려 했다.
“저리 가, 저리 가라고…….”
아그리스가 그를 보고 있다가 혀를 찼다.
“쯔쯧, 생명의 은인에게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쉬바인은 당황했었다.
그랬으니 바로 뒤에 아그리스가 있다는 것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이 이곳에 온 것, 그리고 물에 빠진 기억이 차츰 떠올랐던지 쉬바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가장 큰 충격은 이곳으로 이동했을 시의 기억이다.
마법진도 없이 공간을 이동한다는 것은 그가 보통 마법사가 아니라는 반증이므로.
쉬바인이 알고 있는 사람 중 그런 사람이 딱 하나 있기는 했다.
바로 아레인 왕성의 괴짜 노인. 그만이 그런 마법을 행할 수 있었다.
아그리스라는 이자 역시 무시 못할 마법사라는 생각에 절로 경각심이 곤두섰다.
물론 전혀 예상 못했던 바는 아니었다. 오딘과 말을 놓는다는 자체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냄새를 풍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수준이 아니었었다. 쉬바인 또한 그를 유심히 보았었다. 그동안 아그리스가 자신의 앞에서 대단한 마법을 펼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점이 쉬바인으로 하여금 방심을 하게 했으며 줄기차게 기어오르도록 만들었다.
아그리스는 바로 그 점을 노렸다.
반항하지도 않는 인간을 괴롭혀 봐야 어디 흥미를 느끼겠는가.
따지고 보면 쉬바인이 아그리스 자신의 머리 꼭대기까지 오르려고 했던 것도 본인 탓이 더 컸다.
이러는 동안에도 오크는 쉬바인의 입술에 계속하여 키스를 시도했다.
참다못한 쉬바인이 오브를 꺼내들고 소리쳤다.
“썩 꺼지지 못하겠느냐? 한 번 더 귀찮게 한다면 통구이로 만들어주겠다.”
순식간에 오브의 위쪽에 달린 수정구에 불의 기운이 응집되었다.
오크는 그제야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거머리 같은 오크를 쫓아내자 쉬바인은 더욱 용기를 얻은 모양이었다.
나아가 그는 이 기세로 저 아그리스라는 놈의 코까지 납작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댁이 얼마나 뛰어난 마법 실력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나 또한 만만치 않소. 쉽게 생각했다가는 큰코다칠 거요.”
아그리스는 그에 일체의 대응을 않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모호한 웃음을 떠올렸다.
이러니 쉬바인의 태도도 어정쩡해질 수밖에 없었다.
“날 이리로 끌고 와 험한 꼴을 당하게 해놓고 이제 와서 발뺌을 하려는 것이오?”
“험한 꼴을 당했다? 어떤 험한 꼴을 당했다는 거냐?”
“무, 물에 빠뜨렸잖소.”
아그리스는 틀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지. 물에서 건져 줬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그리스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쉬바인은 지금쯤 저세상을 구경하고 있을 것이었다.
“사람을 농락하는 것도 유분수지, 댁이 간계를 부렸다는 것을 내 모를 줄 아오?”
“생사람을 잡는군.”
“그럼 왜 댁은 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소?”
“네놈도 옆으로 팔을 휘적거리지 않았다면 땅으로 착지했을 거다.”
쉬바인은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사람의 팔이 새의 날개도 아닌데 허공에서 몇 번 젓는다고 옆으로 이동이 되겠는가. 열이 뻗쳐 쉬바인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떽,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억지도 정도껏 부리시오!”
그에 아그리스는 한쪽 귀를 후벼 파며 투덜거렸다.
“거 되게 시끄럽구나.”
이상한 일이었다. 쉬바인은 자신이 아그리스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계속 소리를 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귀로 돌아오는 소리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그리스는 아까 여자 오크가 사라진 숲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순간 무서운 생각이 쉬바인의 뇌리에 스쳐 갔다.
‘사일런스?’
그 또한 사일런스(Silence:침묵 마법)를 알고는 있지만 이를 캐스팅할 실력이 못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신 마법으로 분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놀랄 일은 또 있었다.
아그리스는 사일런스를 행했을 때 일체 시동어를 내뱉지 않았다는 점이다. 쉬바인이 천재 중의 천재라고 인정하는 쿤에 빗댈 게 못 된다는 얘기다.
‘드… 드래곤?’
쉬바인의 다리가 후들거리고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떨림이 더해지며 이가 다닥다닥 부딪쳤지만 아그리스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숲을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이제야 오는군. 굼뜬 녀석들 같으니.”
그가 기다리는 것이란 다름 아닌 오크들이었다.
가죽 옷으로 대충 아랫도리만 가린 여성 오크들.
그들은 곧바로 쉬바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엉겁결에 쉬바인은 자신의 몸을 방어하기 위해 공격 마법을 캐스팅하려 했으나 멍청한 생각이었다.
입이 떨어져야 마법을 사용할 것 아닌가.
쉬바인은 오크들에 의해 땅으로 눕혀지고 강제로 옷이 벗겨졌다.
속옷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들은 쉬바인의 속옷을 거칠게 찢어발겼다.
이 무슨 개 같은 경우란 말인가.
오크들에게 겁탈을 당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자연히 그는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대상이 누구였는지를 생각할 여유조차 잃어버렸다.
더러운 꼴을 보지 않기 위해 그는 필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차… 차라리 죽여 다오…….’
그러는 동안에도 쉬바인의 육신을 오크들의 기분 나쁜 손길이 더듬었다.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었다.
그때 아그리스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크큭, 고맙게 여기거라. 마음껏 즐기게 되었으니.”
계속하여 아그리스는 이죽거렸다.
“혹 이상한 종자가 튀어나올지도 모르겠군.”
이놈들이 차라리 이스론 상단의 오크 정크처럼 씻기나 했으면 말을 말 일이었다.
몇 달을 씻지도 않은 그녀들의 역한 살 냄새가 쉬바인의 코를 자극했다.
쉬바인의 사타구니는 이런 상황에 눈치도 없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었다.
마침 잘되었다며 한 오크가 쉬바인에게 몸을 포개려 했다.
아그리스가 후에 한 말, 그 일만은 기필코 막아야 한다는 일념에 쉬바인은 사력을 다해 몸을 뒤집었다.
뒤집히고 다시 뒤집기를 수차례.
오크들의 주먹과 발길질이 말을 듣지 않는 쉬바인을 짓눌렀다.
눈이 멍들고 코피가 터지는 것으로 모자라 입술이 퉁퉁 부르텄지만 쉬바인은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아그리스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쉬바인은 처량한 눈빛으로 자비를 구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 눈빛이 부담이 되어서일까? 아그리스가 불쾌한 표정으로 오크들에게 명했다.
“보기 흉하구나. 저리 가서 놀도록.”
오크들은 아그리스의 말을 철석같이 알아듣고서 쉬바인의 양다리를 나누어 잡고 질질 끌고 갔다.
순간 쉬바인은 땅에 떨어진 오브를 쥐고서 바닥을 찍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안 끌려가는 것은 아니었다.
사일런스가 아직도 풀리지 않았으니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다.
아그리스는 혼잣말로 그의 어리석음을 나무랐다.
“오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녀석이로구나.”
쉬바인은 점차 멀어져 갔다.
그러나 아그리스는 그가 지나친 곳으로 인간이 사용하는 글자가 남겨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제발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아그리스가 생각을 고쳐먹었는지 쉬바인을 질질 끌고 갔던 오크 여인네들이 여전히 그의 다리를 잡은 채 돌아오고 있었다.
다행히 거사는 치러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그리스는 오크들을 숲 속으로 돌려보낸 후 쉬바인을 보았다.
“또 기억을 지우면 다시 대들겠지?”
말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쉬바인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 의사가 불분명했기에 아그리스는 그에게 걸었던 제약을 풀었다.
“대답해라.”
“제가 진작 위대하신 분이란 걸 알았더라면 절대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옵니다. 부디 너그러운 아량으로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평소의 쉬바인답지 않게 울먹거리는 목소리였다.
오늘 벌어진 일의 충격과 공포가 적잖았던 탓이다.
“괘씸한 네 녀석의 행동을 보아서는 용서하여 주고 싶지 않다만,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 같으니 기회를 주도록 하지. 그 전에 한 가지 약속을 받아야겠다.”
“약속이라 하시오면?”
“이 일을 네가 아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쉬바인은 더 생각해볼 것도 없이 굳은 각오를 내보이며 오체투지를 했다.
“믿어주소서.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 * *
마르크는 물론이고 틴까지도 참혹한 현장에 치를 떨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둘을 제외하고 땅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존재는 없었다.
산 사람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얘기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영초를 얻기 위한 다툼일 겁니다.”
틴은 마르크의 추측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다 많은 영초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 그것 말고는 이 현상이 설명되지 않았다.
마르크는 작금의 상황에 덜컥 겁이 났지만 죄의식이 치밀어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내가 욕심을 부렸어. 내 욕심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된 거야. 그들이 죽었으면 난 어쩌지? 어떻게 하면 좋은 거야?’
그들이 있는 곳은 아직 거리가 남았지만 불안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입구부터 사람들이 죽어 있는데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멀쩡하겠는가.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떠안고 마르크는 무거운 마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틴은 마르크의 그런 심정을 헤아리는 듯 보였다.
“너무 자책하지 마라. 상단을 위해서였잖아. 내가 너였더라도 아마 같은 결정을 내렸을 거다.”
위안을 주고 있음에도 마르크는 묵묵부답이었다.
틴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언젠가 네가 얘기했었지? 우울함은 더 큰 우울함을 불러온다고. 내가 항상 이렇게 웃게 된 것은 네 그 말에 영향을 받아서였다.”
“제가 그랬었나요? 기억이 가물가물한대요.”
빙그레 웃는 얼굴로 틴은 딱 잘라 말했다.
“분명 그랬다.”
마르크가 상단 안팎에서 인정을 받는 것은 여러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마르크를 높게 사는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지금처럼 의기소침한 모습은 너와는 어울리지 않아.”
그래도 짐이 덜어지지 않았는지 마르크는 자조 섞인 말을 내뱉었다.
“요새는 주위 사람들에게 왜 이렇게 민폐를 끼치나 모르겠어요. 헤르미온을 살피지 못하고, 또 칠칠치 못하게 독에 중독되어서 마을까지 가서 여러 사람들을 성가시게 했잖아요.”
“그 일이 없었다면…….”
시선을 제법 먼 곳에 두고 틴은 뒷말을 이었다.
“우리 또한 저 안에 있었겠지. 분명한 것은 나와 헤르미온, 그리고 샥과 정크는 네 덕에 살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네 상처 덕에 살았다고 봐야 할 테지. 마르크, 그러니 인상을 펴라.”
정말 마르크는 어렵게 미소를 지었다.
“구하면요.”
그의 마음에 이제 더 이상 영초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호위 무사들이 안전하기만 하다면, 그들을 무사히만 데리고 나온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은 계속 가시지를 않았다.
어디선가 그들을 조롱하는 듯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끌끌, 이거 또 피라미 두 마리가 들어오시는군.”
목소리가 들린 쪽은 위쪽이었다.
제법 두꺼운 나뭇가지에 앉아 나무에 등을 기댄 한 남자가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틴이 재빨리 나귀에서 내려서며 검을 뽑아들었다.
남자는 은으로 된 휴대용 술통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팔뚝으로 젖은 입술을 닦은 후 틴을 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여어, 할 생각이로군. 실력이 조금 있는 모양이지?”
눈빛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틴은 그에게 압도되는 기분이 들었다.
‘강자다.’
돌연 사내는 일어서더니 발을 헛디딘 것처럼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 상태라면 머리부터 땅으로 처박게 될 텐데도 그는 이상하게 두려움에 질린 눈빛이 아니었다. 잔인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틴의 불안함은 사내가 검갑에 손을 들이대면서 극도로 증폭되었다.
틴이 그를 간파하고 황급히 외쳤다.
“마르크, 물러서!”
놀란 마르크는 다급히 고삐를 당겨 나귀의 머리를 틀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큰일이 났을 것이다.
언제 뽑았는지 모를 사내의 검은 목표를 잃은 채 애꿎은 땅을 찔렀다.
그러나 또 한 번 놀라운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땅을 찌른 검이 살짝 구부러지나 싶더니 곧게 펴지며 사내의 몸을 허공으로 솟구치게 만들었다.
사내는 허공에서 한 차례 공중제비를 돈 후에 땅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검을 길게 늘어뜨린 채 사내는 다시 입에 술을 한 모금 털어놓고서 싸늘한 눈초리로 틴을 노려보았다.
“이건 반칙인데.”
“쟤는 검술을 모른다.”
사내는 그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틴의 어리석음을 꾸짖었다.
“모르는 게 어디 있어? 들어오면 죽는 거지.”
틴은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싸우면 분명 내가 죽게 될 것이다. 우선은 이곳에서 빠져나가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
그 방법 말고는 없었다.
마르크도 그것은 반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린 돌아가겠소.”
마르크에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하는 말이었다. 마르크 역시 틴의 생각을 눈치 챘는지 이를 걸고넘어지진 않았다.
문제는 길을 막아선 사내였다.
“그런 게 어디 있어? 기왕 왔으면 죽어줘야지. 키키킥.”
“그냥 돌아가는 것도 문제가 됩니까?”
“내가 나무에서 내려왔잖아. 다시 올라가는 수고를 해야 하거든.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지 않겠어?”
틴은 자존심도 팽개친 채 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냈다.
“수고비로 대신하면 되겠소?”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군. 나귀 한 마리도 놓고 간다면 생각해보지. 안 그래도 안주거리가 떨어져 고민하던 차였거든.”
달리 선택의 길이 없었다.
틴은 나귀와 돈을 포기하기로 했다.
“돈은 바닥에 두고 돌아가. 술값이나 충당해야겠군.”
의외로 떨어진 허락에 틴이 돈을 바닥에 두고 마르크와 함께 돌아가려는데 사내에게서 다시 경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충고하는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다른 길로 가봤자 똑같아. 여긴 우리 영역이고, 저기는 쟤들 영역이고, 또 저기는 다른 놈들 영역이야.”
틴과 마르크는 그 말에 움찔했다.
그러나 방법은 나중에 생각하더라도 지금은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게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른바 영역 다툼이었다.
며칠 사이에 이곳은 많이도 변해버렸다.
마르크는 그 사내와 멀어진 후에 탄식을 내뱉었다.
“내가 멍청했어요. 그렇게 진귀한 거니 당연히 이렇게 될 거라는 생각도 해야 했는데…….”
이제는 틴마저 위로해줄 말이 없었다.
여기서 위로를 한다 한들 무엇 하랴.
또한 틴은 자신을 철석같이 믿던 마르크 앞에서 보인 굴욕을 감내하기가 힘들었다.
나아가 마르크는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다.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마르크가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고 물었다.
“오딘 님이 오셨다면 아까 저런 사람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겠죠?”
그 말이 화근이었다.
시비를 건 사내와는 무려 스무 보는 차이가 난다. 게다가 마르크는 큰 목소리로 한 얘기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조금 전의 사내가 언제 나무에서 내려왔는지 그 말을 빌미로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말 상당히 귀에 거슬리는군.”
하도 당황해 마르크는 말까지 더듬으며 자신이 내뱉은 말을 부정하려 했다.
“무, 무슨 말을요?”
“나 같은 사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내 귀가 잘못되었나?”
위세에 짓눌려 틴까지 말을 더듬었다.
“자, 잘못 들으신 모양이오.”
이번에도 사내는 수긍하겠다는 태도를 내보였다.
“믿어주기로 하지. 단, 이번에는 네 녀석들이 오해를 사게끔 만들었다. 이번엔 무엇으로 보상을 해줄 생각이냐?”
파렴치한 인간이었다.
그는 돈을 원하는 것이다.
‘일부러 모른 척을 했군.’
틴은 난감했다. 돈은 싹싹 털어 내주었고 나귀마저 빼앗겼다. 마르크 또한 장시간 누워 있다가 일어나는 즉시 이곳으로 향했으니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런 틴을 대신해 마르크가 나귀에서 내려섰다. 그에게 나귀를 줄 생각이었다.
그에 앞서 작별인사라도 해야만 했다. 꽤나 정이 든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마르크는 나귀의 갈기털을 쓰다듬고 또 얼굴을 부비며 못내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미안.”
그 꼴이 사내에게는 우습게만 비춰졌다. 코웃음을 치는 그에게 마르크가 말했다.
“애교가 많은 녀석이에요. 잡아먹지 않으신다면 며칠 뒤에 돈을 가지고 올게요. 이 녀석 몸값보다 더요.”
“난 나귀를 받는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저 녀석을 먹으면 나귀고기는 질릴 것 같아서 말이야.”
뜻밖의 말에 반색을 하면서도 마르크는 초조함을 달랠 수 없었다.
“그럼 뭘 드리면 되죠?”
“옷은 봐주지. 대신 장신구를 내놔라. 두 놈 모두.”
날강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틴의 팔에 찬 팔찌였다.
그 팔찌는 틴의 죽은 부인이 살아생전 큰마음을 먹고 장만해준 것이라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마르크가 그 팔찌만은 봐달라고 말하려 했는데 어느새 틴은 팔찌를 빼어 사내에게 내어주고 있었다. 그 행동에 마르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중요한 거잖아요.”
틴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이젠 상관없어. 그녀는 이미 하늘나라에 있는데, 이제는 잊을 때도 되었잖아.”
인정이 있다면 안 받아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그럴 아량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했다.
“크큭, 틀린 말이 아니군. 떠난 사람 물건을 가지고 있어봐야 마음만 복잡하지.”
얄미운 말에 마르크는 울화통이 터지는 줄 알았다.
다시금 사내에게서 멀어지면서 마르크는 같은 실수를 피하려 아예 입을 열지 않았다. 이번에도 붙잡힌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판국이었으니까.
분을 삭이지 못하니 괜한 대상까지 미워졌다.
‘오딘 님이 그럴 줄은 몰랐어. 언제는 다 들어줄 것처럼 말씀하셨으면서…….’
아레인과 협약을 맺을 때부터 오딘은 내내 그런 태도로 일관해왔다.
직접 카반에 발을 디뎌 마적단을 청소해줄 때만 해도 마르크는 오딘이 영원한 자신의 편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그것은 마르크 자신의 과욕임이 분명했다.
이스론이 아레인에 해준 것은 아레인이 이스론에 해준 것보다도 월등히 작다.
애초에 협약 자체가 그리되었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는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했다.
더군다나 죽어가던, 아니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죽었었던 자신을 아그리스라는 사람을 데려와 회생시켜 준 것 역시 오딘이다.
‘내가 어리광을 부리는 걸까?’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음이었다.
‘이번만은, 아니 이번만이라도 도움을 요청하지 말아야 해.’
뒤늦은 깨우침에 그렇게 다짐을 했지만 답답함에 어찌할 수 없는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마을로 갈 생각이냐?”
틴의 물음, 벌써 세 번째의 같은 질문이었다.
마르크가 사념에 너무 깊이 빠져 듣질 못했던 까닭이다.
분명 이번은 들었음에도 마르크는 이렇다 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틴은 보채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르크는 애초의 결정을 뒤집을 수 없었다. 미안함에 고개를 푹 떨어뜨린 채 마르크는 굳게 다물어 있던 입술을 열었다.
“죄송해요. 저도 제 자신이 너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이 녀석을 데리고 먼저 돌아가 주세요.”
함께하게 된다면 틴까지 위험해진다는 것을 알아차려서이다.
마르크가 땅으로 내려서려 하자 그가 탄 나귀가 늘어지는 입술을 벌리며 투레질을 했다.
싫은 것을 아는 녀석이었다.
아직 주인을 자신의 등에 더 태우고 싶은 모양이다.
틴이 그를 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이 불쌍해서라도 그렇게는 못하겠다. 죽어도 같이 죽자.”
마르크는 내심 감격을 금치 못했다. 되도록이면 말리고 싶었지만, 말린다고 들을 틴도 아니었다.
“기왕에 가는 것, 이곳이 위험해진 것을 알았으니 좀 떨어져서 그나마 허술한 쪽을 찾아봐야겠어요.”
따지고 보면 호위 무사들이 있는 곳은 그렇게 먼 곳이 아니었다.
나무 위에서 붙잡은 사내만 아니었다면 헤어졌던 장소와 상당히 인접한 거리까지 다가갔을지도 모른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마르크와 틴은 멀리 거리를 두어 살피기 시작했다.
“저곳에도 한 사람이 있다.”
“어디요?”
“나무 앞에 서 있다. 나무와 옷 색깔이 잘 구별이 가지 않아서 네 눈엔 안 보이나 보다.”
정말이었다. 남자가 서성거리자 곧 마르크의 눈에도 대상이 판별되었다.
이런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는 땅 위에 잔 나뭇가지들을 깔아 주위를 살피는 눈도 있었다.
틴은 그에도 만족할 수 없었다.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아. 내가 못 보는 사람도 있을 거야. 이래서야 방법이 없겠어.”
그러나 이 말부터 마르크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손짓을 하며 틴을 불렀다.
“이쪽으로 와보세요.”
그곳은 평지보다 지반이 더 낮았다. 틴이 그곳으로 걸음을 옮겨 갔을 때 마르크는 땅에서 주워든 허리끈을 유심히 살피는 중이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요?”
마르크의 눈은 정확했다.
이 허리끈은 틴이 데리고 있던 호위 무사들 중 한 명의 것과 동일했다.
대답도 않고 틴은 미친 듯이 쌓여 있는 지푸라기와 풀, 나뭇가지 등을 치워가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더 발견되는 것이 없어 낙심을 하고 있는데 손바닥만 한 검은 점이 시야를 휘어잡았다.
방금 전 틴이 닥치는 대로 나뭇가지를 치워대던 바로 그곳이었다.
틴은 눈썹을 모으고 안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나뭇가지들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도중에 마르크에게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르크, 누가 오는지 잘 봐.”
마르크가 주변을 살피고 틴은 계속 한 가지 일에만 몰두했다.
불현듯 틴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굴이다.”
마르크가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리고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어디로 통하는 걸까요?”
“굴이 직선상으로 뻗어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진 않겠지. 가봐야 알 듯하다.”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치다 입술을 굳게 다물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볼 심산인 것이다. 이에는 이스론 호위 무사의 것으로 보이는 허리띠가 근방에서 발견되었다는 게 크게 작용했다.
마르크가 먼저 안으로 들어서고 틴은 대충 나뭇가지들로 뒤를 막아놓고는 바짝 그를 뒤쫓았다.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네요.”
“내가 앞장서지. 벽을 짚고 전진하자.”
벽면에 습기가 가득 차고 이끼가 끼어 있을 뿐, 다행히 굴의 바닥은 험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이 안 보인다는 장애에 둘의 걸음은 더디게만 진행되었다.
그렇게 얼마를 나아갔을까.
통로로 보이는 곳에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두 사람은 말도 없이 무작정 그곳을 향했다.
어두운 곳에만 있다 밝은 곳으로 나오니 눈이 부셨다.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리고 보니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대장님.”
“마르크!”
이 목소리는 호위 무사들의 것들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마르크는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는데 미처 웃을 수가 없었다. 호위 무사들의 근처에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검을 빼든 채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호랑이 굴로 들어온 것과 다름없질 않은가. 틴은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아뿔싸.’
우선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시선은 차츰 넓어졌다.
앞에 있는 이들과 간격을 두고 뒤쪽으로도 여러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로브를 걸치고 마법 지팡이를 든 이들 또한 섞여 있었다.
옷차림새나 지팡이의 고급스러움으로 보아서도 하나같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자들이었다.
그중 한 남자로부터 투덜거림이 이어졌다.
“이런, 불청객이 찾아들었군.”
자연스레 마르크는 말을 하는 이를 보게 되었다.
휘황찬란한 무구, 얼마나 잘 벼려졌는지 번들번들한 검. 대지를 딛고 서 있는 남자의 모습에서는 끊임없는 위용이 느껴졌다.
그 위압감에 마르크는 숨이 다 콱 막히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나이 또래, 아니 조금 더 들어 보였다.
그를 중심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시립하고 있었다.
마르크의 뒤편에서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자께서는 법칙을 어기셨소.”
호기심이 발동해 마르크는 참지 못하고 뒤를 바라보았다.
뒤쪽에도 일련의 무리들이 서 있었다.
엄포를 늘어놓는 대상은 황당하게도 마르크와 식당에서 마주쳤던 바로 그 남자, 대머리 하멜이었다. 그는 신성 제국의 명실상부한 템플 기사였던 것이다.
그 옆으로 삐쩍 마른 청년이 서 있었는데, 마르크의 옆쪽에서 그 마른 청년을 향해 나무라는 소리가 이어졌다.
“왜 성황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시오?”
그쪽에도 위엄을 갖춘 일련의 무리가 있었는데, 우습게도 그쪽엔 유독 딴청을 부리는 사람이 있었다.
이 일은 관심에도 없는지 아니면 얼굴을 보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그는 돌아서 쭈그리고 앉은 채로 나뭇가지로 바닥을 후비적거리고 있었다.
구분을 두자면 정확히 이렇게 세 패거리였다.
이미 마르크와 틴은 충분히 경악하고 있는 중이었다.
황자라고 했다. 또 성황이라고 했다. 이와 대립할 정도의 패거리라면 그에 못지않은 세력일 테니 신흥 제국의 개입을 뜻했다.
어디를 가나 최상류층인 황족이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것도 그냥 왕국도 아닌 대륙을 평정하는 제국들이 아닌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담감이 작용할 정도였는데, 마르크와 틴, 호위 무사들은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다.
마르크는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 말씀 도중 죄송한데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무서운 사람들의 시선이 마르크에 꽂혔다.
겁은 났지만 마르크는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굴하지 않고 뒷말을 늘어놓았다.
“저희는 이와 상관없는 사람들이니 돌아가게 허락해주시면…….”
마르크가 시선을 두고 있지 않은 엉뚱한 곳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흥, 웃기는 소리. 안 그래도 네 녀석들을 찾아 헤매던 참이었는데 잘되었구나. 네 녀석들을 보내줄 생각은 없다.”
하멜이었다.
마르크는 죽을상을 지었다.
운명이 기구하여 이런 자리에서 대머리와 마주쳤으니 꼼짝 없이 죽게 된 것이다.
이스론의 호위 무사들 역시 어쩔 수 없음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의외의 곳에서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초라하게 쭈그리고 앉아 나뭇가지로 땅을 후비적거리던 사내에게서였다.
“그들은 그냥 보내줬으면 좋겠군.”
그러자 제국의 황자가 있는 쪽에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로이센 대제께서는 영초를 포기하시겠습니까?”
로이센 대제는 말이 없었다.
대제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마르크와 틴은 또 한 번 놀라야만 했다.
신성 제국의 성황과 신흥 제국의 대제, 그리고 제국의 황자가 있는 자리.
죽기 전에 이런 자리가 마련이 되기나 할까?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멜이 잘되었다는 듯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로이센 대제께서 저들의 목숨과 이 지역을 양보할 뜻이 계시다면 저 또한 사사로운 원한 따위는 접어드릴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말을 하지 않으시니 저들의 생명권은 주장하실 수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일단 하나씩 죽이면서 논의를 거듭하는 수밖에요.”
정말 그럴 기세였다.
하멜의 얼굴에 잔인한 살기가 스쳤다.
앞서 식당에서 하멜의 동료들이 그를 크게 불러 제지코자 했던 것은 비단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해서만이 아니었다.
하멜, 아니 템플 기사라는 자의 잔인성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신성 제국은 비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성 제국이 하멜을 템플 기사로 임명했던 것은 그의 신앙심 때문이 아니라 힘을 높이 샀던 것이다.
하멜은 처음부터 틴이나 마르크를 제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되도록 로이센 대제를 자극해서 평정이라도 흩으려는 생각이었다.
하멜이 첫 번째의 대상을 고르려 눈알을 굴릴 때 그와 눈을 마주친 이스론의 호위 무사들은 하나같이 질겁해야만 했다.
저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목은 순식간에 몸뚱이에서 분리가 될 것이므로.
드디어 하멜은 제일 겁 많아 보이는 호위 무사를 첫 번째 희생양으로 선택했다.
“제가 로이센 대제님만큼은 못하지만 쓸모없는 실력이 아니라는 것은 증명해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속으로 셋을 세시기 전에 한 명의 목을 떨어뜨리지요. 이미 차례는 다 정해두었으니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아 보입니다. 혹시 마음이 돌아선다면 그 전에 귀띔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크크.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하멜의 신형이 번쩍이며 가장 인근에 있던 호위 무사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러나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검은 호위 무사의 목을 지나치지 못했다. 중간에 못 보던 사람 하나가 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검을 막은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는 하멜을 보며 얄궂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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