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센 대제
쿠쾅!
앞쪽에서 일어난 폭발에 마르크를 포함한 이스론의 호위 무사들은 흠칫 놀랐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길을 막고 있는 인영들 역시도 전투를 멈춘 채 등을 돌려 폭발이 일어났을 곳으로 추정되는 곳을 응시했다.
먼저 그쪽을 향해 달려간 이들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인영들이었다.
이스론의 호위 무사들과 마르크 역시 헤르미온이 걱정되어 서둘러서 달려 나갔다.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쇠의 마찰음, 힘없이 꼬꾸라지는 거목들, 사방으로 튀기는 돌 부스러기들.
하나같이 편히 다가갈 수 없는 요인들이었다.
근처에 다다를수록 전투는 더욱 격렬해졌다.
“더… 더 다가가는 것은 무리겠어.”
그 심정은 누구나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러나 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발을 내디디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마르크였다.
그는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씻을 수 없는 죄책감에 얽매여 죽을 각오를 하고 억지로 걸음을 떼는 것이었다.
앞쪽에서 날아온 파편이 마르크의 옆구리에 깊숙이 박혔다.
빠각!
“크흑!”
극심한 통증에 죽을상을 지으면서도 마르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뒤쪽에서 그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소리가 터졌다.
“바보야, 네가 간다고 상황이 달라지진 않아!”
“그렇다고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 설사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 녀석은 구할…….”
먼지와 잔해, 파편들을 떠안은 돌풍 속으로 발을 내디디며 마르크의 모습이 희미해져 뒷말은 무색해져 버렸다.
틴이 그 뒤를 따르고자 했지만 돌풍은 더욱 거세져 접근이 불가할 정도였다.
‘도대체 저 앞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검들이 일으킨 풍압에 땅이 다 들썩거렸다.
삽시간에 10여 미터는 멀어졌다가 격돌하기를 수차례. 청년과 제라드, 이 두 사람이 조우할 때마다 주위는 황폐해졌다.
헤르미온의 모습은 그들이 서 있는 곳과는 동떨어진 깊은 구덩이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낙석으로부터 그녀의 몸을 보호해주는 것은 잔나뭇가지들이었다.
이미 그녀는 깨어난 상태였다.
눈을 뜨고 보니 이런 상황이었고, 너무 겁이 나는 나머지 그 자리에서 꼼짝달싹 못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입이 열리질 않아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마르크는? 틴은? 다 어디로 간 거야? 무서워. 너무 무서워…….’
두려움에 바들바들 떠는 그녀의 위로 흙먼지가 수북이 쌓였다.
후두둑-!
숨이 막혀 죽는 일만은 방지하고 싶었던지 헤르미온은 찡그린 표정을 하고 얼굴을 덮은 흙먼지를 아주 조심스럽게 걷어냈다.
그녀가 깨어난 것을 알았다면 모르겠지만 청년과 제라드의 관심사에서 그녀는 이미 멀어져 있었다.
둘은 오직 눈앞의 상대에게만 치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야, 당신 대단한걸. 이런 실력을 가졌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가히 경탄할 지경이야.”
제라드를 두고 하는 청년의 칭찬이었다.
제라드 역시 적개심을 거두지 않은 채로 고르지 못한 호흡을 하며 그에 화답했다.
“자넨 아직 날 칭찬할 여유라도 있군. 그럴 여유가 있으면 이 공격이나 막아보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라드의 검이 땅바닥을 훑었다. 그러자 바닥에 깔려 있던 돌덩이들이 부유하듯 허공으로 떠올랐다.
제라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검 면으로 돌덩이들을 쳐냈다. 그러자 잘게 부서진 돌의 파편들이 무서운 속도로 청년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날아가는 속도로 봐서는 사람의 살을 관통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파편들은 하나같이 청년의 몸 근처에 다다르기도 전에 박살이 나고 말았다.
“잔재주는 통하지 않…….”
청년은 불평을 하다 말았다. 눈앞에서 대상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는 곁눈질로 우측을 보았다.
과연 그곳에서 상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체중이 실린 묵직한 오러 블레이드가 급습하는 중이었다.
‘방심하다가는 일 나겠군.’
그 공격은 체외로 발출한 오러 막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는지 청년은 그를 피하는 쪽을 택했다.
때문에 제라드의 검은 애꿎은 허공만 가르는 꼴이 되었다.
하지만 청년은 그를 얕게 보지 않았던지 정색을 한 얼굴로 물었다.
“방금 그건 뭐지?”
“이형환위라 한다네.”
“이형환위? 꽤 놀랍군. 실력도 나쁘지 않은데 그런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다니 말이야.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다면 다칠 뻔했어.”
“자네가 봐준 거겠지. 이 늙은이가 그 정도로 눈치가 나쁘진 않네. 내 아직 그것을 완벽히 구사할 수가 없어 얕은 수를 쓴 것이니 너무 비웃지는 말아주게.”
“완벽히 구사할 수 없는 것이라? 그럼 당신은 누군가에게 이것을 배웠다는 말인가? 그는 누구지? 그 정도라면 내가 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청년은 대륙의 최강자라는 사람들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자연히 경천동지할 무공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이 알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물은 것인데, 상대는 그것을 말하기를 꺼려했다.
“이해하게. 나 같은 것이 감히 존함을 입에 올리는 것이 그분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 같아 말일세.”
청년은 저자가 스스로를 내리깎음으로써 그를 높이려 한다고 생각이 들었던지 쓴웃음을 머금었다.
“겸손이 지나치군.”
“겸손이 아니라네.”
사소한 대화로 인해 잠시 고요해졌던 전장은 다시금 긴장감이 팽배해졌다.
꽤 먼 거리를 떨어져 있었지만 땅에 두어 번 발을 딛는 것만으로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쳤다.
그로 인해 흡사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소리가 일었다.
이 순간 제라드는 십중팔구 이곳에서 유명을 달리하게 될 것이라 여겼다.
‘세상은 넓고도 넓구나. 진정한 강자를 만나 싸웠고, 이 일은 그분께서 지시하신 일이니 내 목숨을 잃는다 해도 후회는 없다.’
전투의 양상은 조금 전과 비교해봤을 때 크게 달라졌다. 조금 전이 치고 빠지던 원거리 전투였다면 지금은 근접전이었다.
치고 빠지는 것이 아닌 생사를 가름 짓는 피 튀기는 육박전이었다. 돌연 제라드는 눈을 번쩍 떴다.
‘물러나면 죽는다.’
이미 제라드는 뒤로 물러설 여력이 없었다.
청년 역시 이 자리에서 승부를 지으려는 결심을 품었던지 단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땅을 박차고 전진하는 발은 있었어도 물러서는 발은 없었다. 둘의 몸이 마주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은 그들의 검이었다.
찰나의 시간에 두 사람의 검은 다섯 번을 부딪치며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주위의 지면이 온통 터져 나가는 듯 보였다.
그 무렵 누군가의 악에 받친 외침 소리가 들렸다.
“헤르미온… 헤르미온……!”
제라드는 분명 그 소리를 들었지만 고개를 돌릴 여유를 가지지 못했던 데 반해, 청년은 상대와 검을 섞으면서도 그를 눈여겨볼 수 있었다.
식당에서 보았던 구릿빛 피부의 청년이었다.
전신이 피범벅이 되어 눈도 뜨지 못한 채 그는 목청을 높이는 것만으로 한 대상만을 줄기차게 찾고 있었다.
“헤르미온, 이 바보야, 어디 있어? 대답해!”
그의 명줄은 그리 길지 않아 보였다. 날카롭게 쪼개진 돌조각이 그의 가슴팍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당사자는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위기일발이었다.
뒤늦게 제라드가 이를 간파했지만 헤르미온을 찾아 이곳에 온 마르크를 구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바로 그때 청년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희뿌연 그림자가 마르크의 앞에 나타났다 싶은 순간 작은 소음이 흘렀다.
파삭.
제라드는 침음을 흘렸다.
“음…….”
파편보다 빨리 움직여 그 조그마한 물체를 박살낸 실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는 분명 자신보다 월등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은 탐색전을 벌였다고 해도, 이후에도 그는 방금처럼 본격적으로 살수를 펼치지 않았다. 그녀를 음해하려 했다면, 그러했다면 이렇게 장시간 버텨 내진 못했을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이른바 같은 목적일 것이라는 얘기다.
그가 지금 마르크를 구해준 것처럼 말이다.
“내 오해를 한 듯하네. 자네도 그녀가 걱정이 되었었군.”
그 말에 우뚝 멈춰선 청년이 뒤를 돌아보았고 눈을 감고 봉사처럼 서 있던 마르크가 입을 열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 제라드 장로님?”
“이 사람, 몸이 엉망이로군. 다 내 불찰일세.”
그를 증명이라도 시켜 주듯 제라드는 피투성이가 된 마르크를 살폈다. 반면에 마르크는 조급함을 달래지 못하고 걱정을 호소했다.
“저보다 헤르미온이 큰일입니다. 빨리 그 녀석을 찾아야 합니다. 그 녀석이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했다고 합니다.”
간절함을 듬뿍 담은 목소리에 제라드는 청년을 보았다. 그의 의사를 확인코자 한 것이다.
“오해를 한 것은 내 쪽도 마찬가지니 서로 문제 삼지는 않기로 하지.”
그 말을 남기고 청년은 자리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한 시름 놓았다는 듯 제라드는 마르크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위안을 주었다.
“그녀라면 별 탈 없을 걸세. 그보다는 자네 몸이 성치 못한 게 계속 마음에 걸리는군.”
“별 탈이 없다니요? 분명 끌려갔다고…….”
“안전한 곳에 있다네. 고마우이, 자네 덕에 내 목숨을 건진 듯하네.”
극렬한 대치 속에서 청년이 몸을 빼어주지 않았다면 마나의 고갈로 제라드는 명을 달리했을 것이라 판단했다.
마르크가 때마침 등장해준 것은 그에게 천운으로 작용한 셈이었는데, 사정을 모르는 마르크에게는 그저 아리송한 말이었다.
말을 마치고 제라드는 임시방편으로 헤르미온을 땅에 묻었던 곳으로 다가갔다.
헤르미온은 바깥의 소동이 사그라졌음은 알았지만 아직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구덩이 위로 달빛에 비친 그림자가 짙게 깔리더니 달가운 얼굴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깨어 있었군. 이제 나와도 좋네. 미안하게 됐구먼.”
이런 소동이 일어났는데에도 파르티잔은 자리만 지켰던 데 반해, 그래도 게티롱은 용맹하게 그들을 쫓았다.
그러나 사위를 분간하기 힘든 오밤중이었던 탓에 길을 잘못 들어 졸지에 미아 신세가 되어버렸다.
파르티잔의 마음속에는 게티롱이라고는 없었다. 그는 마르크와 함께 돌아온 제라드, 쌍귀를 보며 회의에 빠져 있었다.
‘그냥 도망칠 걸 그랬나?’
그들이 있는 한 도망치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던 탓이다. 제국으로 온 이래 저들과 지내며 파르티잔은 적지 않은 경각심이 곤두선 상태였다.
바로 보통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
그렇다고 오딘에 미칠 바는 아니었다.
‘아서라. 아직 얼마든지 기회는 있다. 오딘에게서도 빠져나왔는데 저들의 눈이라고 못 피할까.’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으니 편해졌다.
편해지다 보니 방금 전 마르크의 상처에 힐링을 시전하느라 몸 밖을 빠져나간 마나로 인해 피곤해졌다.
앉은 자세에서 그는 눈을 감고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분명히 파르티잔이 마르크의 상처 회복을 위해 힐링을 시전해주었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이는 파르티잔의 마법 실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뜻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아레인을 벗어난 이후 파르티잔은 마법을 갈고닦을 시간도 없었을뿐더러 연이은 악운으로 몸이 많이 지쳐 있었던 것이다.
그 옆으로 헤르미온이 마르크의 상처를 손보고 있는 제라드를 보채는 중이었다.
안타깝게도 제라드는 헤르미온이 원하는 소식을 전부 들고 오지는 못했다.
“얼마 전 국경 지대에 오셨다는 말은 들었다네. 그분께서 어디로 가셨는지는 모르겠어.”
전부 만족할 수 없었지만 헤르미온은 그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능수능란하게 제라드가 상처를 봐주고 있었지만 마르크는 눈을 치켜뜨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극심한 고통을 이길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럼에도 작은 신음만이 배어나오는 것은 입에 재갈이 물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의 몸은 성한 데라고는 없는지 그야말로 여기저기가 피투성이였는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상처를 손본 후 제라드는 마르크의 입에 물린 재갈을 빼내고, 상처에 효험이 있는 포션을 적신 붕대로 온몸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마르크의 입에서는 고통에 젖은 비명 소리가 가늘고 길게 새어나왔다.
“끄으으으으~”
비록 먼지를 잔뜩 뒤집어썼다지만 마르크에 비하면 헤르미온은 지극히도 말짱한 모습이었다.
원하는 대답을 듣고 나자 헤르미온은 마르크를 몰아세웠다.
“바보야, 그러니까 누가 오래? 누가 너더러 내 걱정해달라던?”
붕대 사이로 히죽 웃는 마르크의 시커먼 입매가 엿보였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그녀 딴에도 친구가 저리되었다는 데에 속이 상한 모양이었다. 오랜 동안 함께해서인지 마르크는 헤르미온이 툴툴거리는 이유가 다 자신을 걱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몸에 박힌 파편들을 빼내고 힐링을 시전해 상처를 손봐주었다고는 하지만 통증이 가실 리는 없었다. 때문에 마르크는 얼마 웃지도 못하고 극심한 고통에 휩싸였다.
대충 마무리를 지은 제라드는 심각한 얼굴을 거두지 못하고서 말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독일세.”
“도… 독이오?”
틴의 물음에 제라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렇다네. 지금도 몸이 검게 변하고 있질 않은가. 나로서는 독기를 제거한다고 했지만 이미 퍼진 모양일세. 후우, 괜찮은 마법사만 있었더라도 독기를 더 빨아낼 수 있었을 텐데…….”
파르티잔이 들었다면 울컥할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꿈나라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 중이었다.
이를 마르크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귀의 신경이 마비되어 타인의 목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던 탓이다.
마르크는 그것이 착각이라고만 생각하는지 연방 귀를 후볐다.
돌연 헤르미온이 목청을 높여 물었다.
“가만, 헥토르 그 작자가 마법사를 대동했었잖아요. 그는 어디 있죠? 그의 마법사에게 부탁을 하면 될 일을…….”
무거운 표정으로 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볼일이 있다며 황급히 갔다. 우린 마르크가 이런 부상을 입은 줄도 모르고 그냥 보내줬어. 뭐, 잡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말을 들을 사람도 아니고 말이지. 근방에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한밤중이라 찾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듣던 제라드가 의구심을 드러냈다.
“헥토르? 바리톤의 일 왕자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가 왔었는가?”
“우연찮게 만나 오늘 하루 동행을 했었습니다.”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만, 제라드는 헥토르가 이 먼 곳까지 발을 디뎠다는 점이 우스울 뿐이었다.
‘영초를 탐내 여기까지 온 게로군. 내 눈이 틀리지 않았음이야. 헛된 야망만 좇고 있다니…….’
아레인에 있을 당시 제라드도 헥토르가 훈련을 받는 것을 종종 지켜보았었다. 어느 때부터인지 헥토르는 다른 두 왕자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아레인에 체류했다.
이는 바리톤의 공왕인 로테노아의 뜻이 담긴 것이라고 들었다.
해서 제라드는 헥토르가 그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지켜본 동안 그가 헛된 망상을 좇고 있다는 것 또한 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을 접고 제라드는 마르크에 대한 걱정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제 와서 그를 찾는다고 달라질 건 없네. 벌써 독은 퍼질 대로 퍼진 상태야. 헥토르가 데려왔다는 마법사의 능력이 여기 있는 파르티잔보다 월등하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네. 바리톤의 공왕조차도 그를 탐탁찮게 여기고 있으니 그리 대단한 마법사를 데리고 다니지는 못할 걸세. 초기에 잡았다면 모르겠지만…….”
온몸에 독 기운이 퍼져서인지 마르크는 지금 무슨 말이 오가는지도 몰랐다.
정신이 혼미해져 깔아놓은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헤르미온은 벌떡 일어서 외진 곳으로 향했다. 금세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속도 모른 채 샥이 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또 어딜 가려고? 너 때문에 이렇게…….”
샥은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헤르미온이 표독스런 눈초리로 응시했기 때문이다.
기가 죽은 샥을 두고 틴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멀리는 가지 마라.”
대답도 않고 헤르미온은 멀어졌다.
이에 제라드의 눈짓을 받은 쌍귀가 소리 없이 그녀를 뒤쫓았다.
틴의 시선이 독 기운에 지쳐 쓰러져 잠이 든 마르크를 향했다.
“괜찮을까요?”
“저 상태라면 앞으로 며칠이 고비일 걸세. 일단은 만사를 제쳐 두고라도 그의 상태를 호전시켜 줄 사람을 찾아나서야겠네.”
이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적어도 여기 있는 이스론 상단 일원들에게는 눈앞의 일보다도 마르크가 우선이었기에.
* * *
상점가에서의 불운, 그 이후에도 쉬바인에게 이상한 일은 계속되었다.
취침 장소를 불문하고 그는 잠을 자기에는 부적합한 장소에서 자주 발견되었다.
쉬바인 자신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오늘도 동떨어진 곳에서 발견이 되었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로구나. 내가 몽유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크윽.’
모두가 잠이 든 야심한 시각까지도 쉬바인은 뒤척거리기를 반복하며 좀처럼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오늘을 포함, 요 며칠은 별수 없이 야영을 하게 되었는데 누운 자리가 편치 않아 몸을 돌리려는데 허리가 쑤셨다.
“지푸라기를 더 가져와야겠군.”
땅바닥이 거칠다기보다는 몸이 지나치게 예민해진 탓이었는데, 쉬바인은 그 연유를 알지 못했다.
외형상 다친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으므로.
주변의 지푸라기들은 죄다 끌어 모았던 탓에 쉬바인은 보다 멀리 가야 했다. 그렇다고 이미 잠이 든 일꾼들을 깨워 부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잰걸음으로 50여 보를 가서야 드문드문 널린 지푸라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보다 편한 잠자리를 위해 쉬바인은 그것들을 부지런히 끌어 모았다.
지푸라기를 가슴에 한 아름을 안아서야 쉬바인은 만족스런 얼굴로 돌아섰다. 취침 장소와는 대략 70보가 떨어진 거리였다.
쉬바인은 깜짝 놀랐다. 아그리스가 길을 가로막고 스산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래 들어 쉬바인은 아그리스에 대한 악감정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는데, 이 역시 특별한 연유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싫은 얼굴이 눈앞에 있으니 쉬바인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그러자 느닷없이 아그리스가 모호한 말을 내뱉었다.
“오늘은 따로 불러낼 필요가 없었군.”
그 말에 쉬바인은 멈춰서 고개를 돌리며 의문을 드러냈다.
“따… 로 불러내다니요?”
대답 대신 아그리스는 이제는 스산하다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서 손을 추켜올렸다.
쉬바인은 자동적으로 몸을 바짝 웅크렸다.
“또… 또 때리시는 겁니까?”
전혀 의도하지 않은 말이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오자 당사자인 쉬바인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또?’
이는 쉬바인이 맞았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이었다.
아그리스가 그를 보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크큭, 네놈의 하잘것없는 육신은 그래도 용케 기억하는 모양이로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그리스가 들어올린 손바닥을 거무튀튀한 기운이 감싸기 시작했다.
동시에 쉬바인은 혼란에 휩싸였다.
자신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맞은 것을 기억하지 못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것도 나쁜 기억이다. 그의 아량은 그 나쁜 기억을 쉽사리 떨쳐 줄 만큼 넓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 일을 근방에 있는 오딘에게 알려 막아야 한다는 것이 우선순위이기 때문이다.
“오… 오딘 님! 오딘 님!”
70보의 거리.
야밤에 이 정도로 목청이 터져라 외치면 당연히 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쉬바인의 목소리는 힘을 잃고 사방으로 분산되어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더욱 고음으로 소리를 질러 봐도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단세포 같은 놈, 맞을 때마다 똑같은 행동을 하는구나.”
“또… 똑같은 행동이라니?”
“그것까지 똑같구나. 일주일이 넘게 그랬지. 오딘 놈에게 도움을 요청한 후 이렇게 내 말을 곱씹었단 말이야.”
“네 이놈! 오딘 님께서 아무리 대우를 해준다고 해도…….”
“인간 된 도리로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말미는 분명 쉬바인이 늘어놓을 것이었다. 그게 아그리스의 목소리로 나오니 쉬바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꽤 놀란 모양이었지만 이를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해버렸다.
‘예상쯤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아그리스의 손바닥에 응집된 칠흑의 마나는 땅을 향해 폭사되었다.
그러자 지표면이 들썩거리기 시작하더니 흙으로 이루어진 네다섯의 병사들이 차례로 몸을 일으켰다. 체격, 외형, 하다못해 얼굴까지 쉬바인과 흡사한 모양이었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바닥에서 일어난 인영들은 하나같이 검은색이라는 것이었다.
순간 두려움이 일었던지 쉬바인은 뒷걸음질을 쳤다.
“무… 무슨 해괴한 짓거리를…….”
그를 보며 아그리스는 만면에 냉소를 머금었다.
“크큭, 네 녀석의 판에 박힌 듯한 말투는 여전하구나. 그래도 이 몸은 네 녀석을 괴롭힐 때마다 다른 수를 쓴단 말이다.”
쉬바인은 아그리스를 흑마법사로 규정하는 오류를 범했다.
흑마법이라면 자신이 모를 마법이 산재해 있었으니 그가 내릴 수 있는 판단이란 고작 그 정도였던 것이다.
아그리스와 그가 일으킨 병사들을 두리번거리다가 쉬바인은 똑똑히 경고했다.
“위해를 가할 생각이라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소. 오딘 님께 둘러대는 한이 있더라도 실력을 행사하겠소.”
“경고를 하는 것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군.”
아그리스가 손가락으로 쉬바인을 가리키자 기다렸다는 듯 땅에서 몸을 일으킨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들과 쉬바인의 거리는 그리 멀지 못했다.
더더군다나 쉬바인은 땅에서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었다.
‘루트(Root:몸을 고정시키는 마법)?’
아닌 게 아니라 쉬바인의 발목을 어느 틈엔가 자라난 검은색의 나무뿌리들이 휘감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마나가 제대로 응집되질 않았다. 누군가의 사념이 계속 머릿속을 침범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황도 잠시, 아그리스가 불러낸 쉬바인을 닮은 병사들의 구타가 쉬바인에게 무차별적으로 자행되었다.
투다다다닥!
“크아아아악!”
두드림 소리와 비명 소리가 마치 장단을 맞추는 것 같았다.
체력이 그다지 받쳐 주질 못해서인지 쉬바인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쌍코피를 쏟으며 길게 늘어졌다.
“끄으으으으~ 도…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이마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아그리스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엔 내 정체를 듣고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지. 하지만 이제는 내 정체를 말하기도 질리는군.”
곧 쉬바인은 의식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흙에서 일어난 병사들이 흙으로 변해 폭삭 주저앉았다.
이후엔 아그리스의 치유 마법과 정신 마법이 행해졌다.
아그리스는 여느 때처럼 쉬바인을 버려둔 채 근방에 쳤던 결계를 걷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갔다.
이후에도 아그리스의 응징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쉬바인의 몸은 자연히 밤만 되면 오한을 느끼는지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아그리스가 쉬바인을 때리고 치유하고 기억을 없애는 일이 반복되며 쉬바인의 아그리스에 대한 원인 모를 악감정은 날로 커져만 갔다.
그리고 싫은 내색이 커질수록 구타의 강도도 더해져 갔다.
마법을 이용한 장장 보름의 구타가 자행되었음에도 구타를 당한 당사자를 포함해 누구도 이를 눈치 채는 사람은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오딘과 아그리스에게 딸린 2명의 일꾼은 새벽같이 일어나 자기들의 짐부터 정리하고 주변에 매두었던 말을 꺼내왔다.
이들은 꼼꼼하고 매사에 능동적이었으며 빠릿빠릿했다.
그에는 오딘이 그들의 손에 적지 않은 돈을 쥐어준 것이 크게 기여했다.
자그마치 1년간의 몸값을 주었으니 의욕적일 수밖에.
마침 먼동이 터오며 쿤이 눈을 비비고 깨어나 자기분의 짐을 정리하려 했다.
일꾼들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쉬십시오. 저희가 정리하겠습니다.”
매번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누운 자리는 스스로 정리하던 쿤이었지만, 그 역시 이제는 더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득달같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일을 해치우는 사람들.
대충 정리를 마친 일꾼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그분은 또 사라지셨군.”
“내가 찾아보지. 자넨 저분들 자리를 정리해드리고 아침이나 준비해주게.”
“알았네.”
사라진 대상은 다름 아닌 쉬바인이었다.
오딘과 아그리스는 마땅히 자리에 없었다. 일꾼들이 깨어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자리를 비운 것이다.
이 역시 매번 그랬는데, 식사 때가 되면 두 사람은 어김없이 나타났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쉬바인이었다.
근래 들어서는 더 멀리서 발견이 되곤 하여 일꾼들을 곤혹스럽게 할 때가 많았다.
쉬바인은 여러 번 오딘에게 혼쭐이 났었다.
그로 인해 그는 위기의식을 깨닫고 일꾼들에게 각별히 부탁을 했었다.
혹 자신이 사라지면 그분이 오시기 전에 필히 찾아달라고.
쉬바인이 손에 쥐어준 건 오딘에게 받은 돈에 비하면 푼돈이었지만, 그의 입장을 생각하자니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또 여정 중 불화가 생긴다면 일꾼들도 몸을 두기 불편해질 것이다.
이리하여 그를 찾는다고 나섰지만 소리 내어 부를 순 없는 상황이었다.
‘오늘은 대체 어디까지 가신 거야? 이러다가는 식사 시간에도 늦겠군.’
아무리 둘러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체념하고 돌아서려는데 위쪽에서 신음인지 코골음인지 모를 소리가 들렸다.
“크우울.”
자연히 고개가 소리가 들린 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나무 위, 정확히는 나뭇가지에 쉬바인이 손수건처럼 걸려 있었다.
일꾼은 그 상황을 목격하며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마… 맙소사, 저기는 어떻게 올라가신 거야?”
땅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거리였다.
일꾼 자신의 키가 지금보다 5배쯤 크다면 모를까 지금 상태에서 쉬바인을 끌어내린다는 것을 불가해 보였다.
“쉬바인 님… 쉬바인 님.”
목소리가 멀리 새나가지 않게끔 두 손으로 입 주변을 가리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불러보았지만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그는 다른 방법을 택해야 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잘한 돌멩이들이었다.
그에 깊게 갈등하지 않았다. 기억을 되짚어보아도 쉬바인은 오딘에게 한 소리를 들을 때 정말 괴로워했었지 않은가.
“그렇게 혼이 나시고도 버릇을 못 고치시더니. 돌팔매질이라도 해서 깨워야지, 별수가 있나.”
쉬바인을 맞히기 위한 난데없는 돌팔매질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처음엔 손에 인정을 두었다.
그러나 일꾼은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그래서는 돌멩이가 저 위까지 닿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또한 운 좋게 날아간다 하더라도 힘이 실리지 않은 돌팔매질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시간은 갈수록 촉박해졌다.
이러다간 두 사람 모두가 힐난을 면키 힘들 것이란 판단에 일꾼의 팔에는 힘이 실렸다.
자연히 그의 팔에 의해 날아간 돌멩이는 파공음을 흘릴 정도로 강맹해졌다.
쉭! 쉬욱! 쉬익!
미묘한 소리의 차이를 보이는 돌멩이들은 위협적으로 쉬바인의 머리와 등, 복부 등을 겨냥하고 날아들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목표물에는 근접했지만 아직 명중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일꾼은 오기가 치밀었다.
“돌멩이로 새를 맞혀 떨어뜨리던 왕년의 실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무리 실력이 줄었다 한들 저깟 것도 못 맞힐까 보냐?”
먹이를 좇는 매의 눈처럼 일꾼의 눈이 쉬바인의 머리통을 훑었다.
이윽고 손에 들린 제법 굵직한 돌멩이를 힘껏 던지자 여태까지 날아갔던 돌멩이보다도 빠르게 목표를 향해 쇄도했다.
쐐액!
뻑!
신음인지 코골음인지 모를 소리가 그쳤다.
대신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렸다.
“꽥!”
그 소리는 사람이 숨넘어가는 소리와도 비슷했다.
돌멩이를 너무 세게 던진 탓에 일꾼은 당혹감을 금치 못하면서도 어찌할 바를 몰라서 발만 동동 굴렀다.
깨우려고 던진 돌인데 실신을 시켜 버렸으니 큰일이었다.
그가 어쩌면 죽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일꾼에게 더 커다란 걱정을 떠안겨 주었다.
무수히 많은 생각이 그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툭- 투툭!
급작스런 충격을 못 이겨서일까? 쉬바인이 걸쳐진 나뭇가지가 슬그머니 부러지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저 높이에서 떨어지는 사람을 받았다가 무사하리라는 법은 없다.
그렇다고 방관할 수도 없는 노릇.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십중팔구 죽거나 병신이 될 것이다.
일을 오딘이 알게 되는 날에는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그가 이렇게 혼란에 빠져 있는 때에도 쉬바인은 나뭇가지를 벗어나 눈치도 없이 낙하하기 시작했다.
일꾼은 앞날을 걱정하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탄식을 토했다.
“아악!”
불행 중 불행이었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될 불미스러운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하나, 실신한 채 땅으로 곤두박질치던 쉬바인을 향해 실낱같은 희망이 찾아들었다.
바로 쿤의 목소리가 그것이었다.
“디크리스 웨이트(Decrease Weight:경량화 마법).”
하도 혼란스러워 일꾼은 낯익은 목소리 따위에 귀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떨어지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그 말인즉슨, 땅에 부딪혀 쿵 하는 소리를 내었어야 정상이라는 얘기다.
두려움보다 커져 버린 의구심에 그는 감았던 두 눈을 떴다.
한데, 놀라울 일이었다.
또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곤두박질치려던 쉬바인이 나뭇잎처럼 하늘거리며 내려오고 있질 않은가.
쿤은 쉬바인의 몸을 양손으로 받아들고 말했다.
“큰일 날 뻔했군요.”
눈으로 보고서도 못 믿을 현상을 목격해서인지 일꾼의 입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쿤은 조심스럽게 쉬바인을 땅에 내려 두고 상태를 살펴보았다.
“머리에서 피가 나네요. 오늘은 어떻게 주무셨기에…….”
그뿐이 아니었다. 주먹만 한 혹도 하나 자리했다.
일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다행히 못 보았군. 양심에 찔리긴 한다만 모르는 체하자.’
즉각 쿤은 마나를 재배열하고 치료 마법을 시전했다.
피가 멎고 서서히 부기가 가라앉더니 쉬바인의 머리통은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왔다. 이어 서서히 의식을 회복했다.
쉬바인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한 손으로 머리를 누르며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윽, 머리가 부서질 것 같은 느낌이군.”
이를테면 후유증이었다.
죄지은 게 있는지라 일꾼의 얼굴은 새빨개졌던 반면에 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해맑게 웃었다.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그나저나 식사 때가 다 되어가니 늦으면 오딘 님께서 한 소리를 하실 듯한데 얼른 일어나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지 쉬바인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탄이 절로 나왔다.
“이 망할 정신머리. 이때까지 잠을 자고 있었다니.”
자책에 곁들여 머리를 두드렸는데 하필 아픈 그 부위였다. 고통에 찌든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쉬바인은 주위를 둘러보며 또 한 번 당황했다.
“가만, 여긴 어디야? 내가 또 이런 곳에서 잔 거야?”
“엄밀히 말하자면 여기가 아니고 저 나무 위쪽에서 주무신 것 같아요.”
쉬바인은 쿤이 가리키는 나무를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나무 위?”
“네.”
일꾼이 난색을 표하며 말을 보탰다.
“한 저 정도쯤 높이에서 주무시고 계셨습죠.”
그는 눈대중으로 보았던 높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쉬바인은 그 부근에 꺾어진 나뭇가지를 확인하고 벌벌 떨며 물었다.
“내… 내가 저 정도 높이에서 자고 있었다고?”
“그렇습니다.”
쉬바인은 어려서부터 나무 타기는 젬병이었고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일꾼이 가리키는 높이는 도구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마법을 사용해서도 오르기 힘들 높이였다.
쉬바인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기억을 뒤졌다.
참으로 안타까울 노릇이었다.
어렴풋이도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으므로.
보채는 쿤에게 이끌려 식사 장소로 이동하면서도 쉬바인은 근심을 지우지 못했다.
‘도대체 내 신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쉬바인, 그의 원흉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오딘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하는 중이었다.
여느 때처럼 오딘은 운기조식에 흠뻑 빠져 있었다.
사실 이제는 오딘에게 있어서 운기조식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아그리스와 혈투를 벌일 때 이미 오딘은 하단전, 중단전을 거쳐 상단전까지 개방한 상태였으므로.
운기조식을 하루라도 거르는 날에는 허전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고,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탓이기도 했다.
이를 보며 아그리스는 기가 찬 모양이었다.
‘마나를 머리에 모으다니… 무식한 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그리스는 잠시 뒤 머리를 만졌다.
‘이참에 나도 마나를 머리로 옮겨 봐?’
실로 위험천만한 생각이었다.
드래곤의 마나는 드래곤 하트에 뭉쳐 있다.
더군다나 대륙의 생명체들 중 가장 뛰어난 두뇌를 지닌 드래곤들은 드래곤 하트 못지않게 머리 또한 소중히 여겼다.
자칫하다가는 바보가 되거나 죽을 수도 있는 무모한 행위다.
아그리스도 모르는 바는 아니어서 그 같은 생각을 이성으로 눌렀지만 욕심과 호기심이 계속해서 일었다.
그러나 불안한 느낌이 더욱 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저 녀석을 따라 하다가는 제명에 죽지 못할지도 모른다. 정신력이 저토록 강하니 저놈의 기억을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딘이 운기조식을 마치고 눈을 뜰 무렵 반대로 아그리스는 눈을 감았다.
이윽고 아그리스는 오딘이 일어서는 인기척을 느끼고 애써 태연한 척하며 눈을 떴다.
“명상이란 참 좋은 것이군. 정신이 다 개운해지는 느낌이야.”
오딘은 그에 일체의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그리스가 명상을 핑계로 자신을 근방에서 주시하고 있다는 것쯤은 이미 간파했던 까닭이다.
그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지언정 딱 부러지게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아그리스는 오딘 자신에게도 상당한 도움을 주었고 여러 모로 쓸모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지워버리지 않았다.
둘은 곧 식사 장소로 걸음을 옮겨 갔고 간단한 식사 후 2마리의 말에 각자의 몸을 실었다.
쉬바인 역시 말에 오르려 했는데 급작스레 쑤시고 결리는 허리를 부여잡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크윽, 오늘 또 비가 올 것 같습니다.”
“그럼 비가 오겠군.”
오딘이 웃음까지 머금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상하리만큼 쉬바인의 비에 대한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이는 최근에 들어 생긴 새로운 능력이었다.
“그곳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오딘의 물음에 도보로 그를 뒤따르는 일꾼이 답했다.
“멀지는 않을 겁니다. 대략 오 일 안팎에는 도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빠르게 움직인다면 이삼 일, 아니 오늘 안에라도 마르크가 있는 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느긋한 행보를 보이는 것은 제국을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언젠가 적이 될지도 모르는 곳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아 나쁠 것은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마르크의 몸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 * *
세 남자의 주검을 여러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주검들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눈에서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여기 죽은 자들과 산 자들 간에는 모종의 공통점이 있었다.
목 언저리에 찍힌 Venus(베누스)라는 낙인이 그것이었다.
보통 낙인은 자신의 노예들을 구별하기 위해 찍는다고 알려졌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본인들의 몸에 새겨진 낙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으니 이들이 그런 부류였다.
그들의 몸에 새겨진 낙인, 그것은 대륙 최강의 기사단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신흥 제국의 베누스 기사단에게만 허용되는 낙인이었다.
오로지 신흥 제국의 황실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베누스의 근위 기사들이 어째서 이 땅에서 죽게 된 것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이들 역시 영초를 구하기 위해 브란트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명령을 받지 않았다면 결코 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다시 말해 이 일은 신흥 제국의 황실도 개입했다는 얘기가 된다.
“셋이나 죽었군.”
난데없이 끼어든 말에 주검을 내려다보던 이들은 목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황급히 몸을 돌렸다.
대상을 확인한 베누스 기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재빨리 오른쪽 무릎을 굽히며 경의를 표했다.
“로이센 대제님을 뵈옵니다.”
대제.
신흥 제국의 황제는 자신이 황제라는 호칭보다 대제로 불리기를 원했다.
얼핏 보면 크레노스 제국의 황제의 존심을 추켜세워 주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이는 본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던 것이다.
베누스가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놀랍게도 두 차례나 헤르미온을 구해주었던 청년이었다.
그에게 마르크 일행을 대할 때와 다르게 장난 섞인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끝 모를 여유와 자신감만은 여전해 보였다.
그의 눈은 죽은 자들의 상처를 살폈지만 입은 당연한 것을 묻고 있었다.
“누가 죽였지?”
다수의 침묵 속에 한 사람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소인의 낮은 안목으로 보건대 그는 광인이라고 생각되옵니다. 동공은 안광을 발하였고, 사악한 웃음을 머금던 초승달 모양의 입 사이로는 들짐승의 그것과 비견될 정도로 날카로운 이빨이 보였습니다.”
기사가 가리키는 사람은 신성 제국의 성황 카르만이었다. 그는 성황을 목격한 적이 있었지만, 마성에 빠진 성황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니 정체를 모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로이센은 주검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기사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광인이라…….”
기사들 전부가 자신들에게 있어 태양 같은 존재인 대제만 주시한 채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황명을 기다릴 뿐이었다.
“사람을 시켜 이들을 황성으로 이송해라. 궁정 마법사로 하여금 이들의 시체가 부패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고 전해. 이들의 장례는 차후로 미뤄야겠어. 짐은 되도록 그 광인을 이들의 옆에 놓아주어 원혼을 달래줄 생각이다.”
로이센의 근엄한 목소리에 기사들은 부복하며 주검이 되어버린 이들의 일을 마치 자신들의 일처럼 기뻐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 * *
침상 옆에 앉아 있는 파르티잔은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핼쑥한 것이 마치 병자 같았다.
그의 눈앞의 침상에 누워 있는 마르크가 원인이었다. 마르크의 생명줄이 이어지는 것은 바로 파르티잔의 치유 마법 덕분이었다.
때문에 파르티잔은 마나가 고갈되다시피 했으며 그로 인해 이렇게 안색이 좋지 못한 것이었다.
‘리치가 되는 기분이야.’
파르티잔은 그렇게 생각했다.
먹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몸은 점점 더 비쩍 말라 피골이 상접할 지경이었다.
독기가 마르크의 전신에 퍼지고 살이 썩어 가는지 방 안엔 코가 저릴 정도의 냄새가 풍겼지만 파르티잔은 그 퀴퀴한 냄새마저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멍하니 마르크를 보는 파르티잔.
돌연 문이 열리며 제라드가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인사를 한다고는 했지만 축 처진 모습이다.
제라드는 파르티잔의 어깨를 부여잡아 다시 자리에 앉히고는 정말 어렵게 미소를 떠올렸다.
“자네가 고생이 많네.”
마르크에게 지속적으로 힐링을 시전해주는 것은 이런 격려를 듣고자 함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강요가 있었으니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여전히 힘이 없는 목소리로 파르티잔이 물었다.
“…구해 오신다던 마법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조금 후에 두 사람이 온다더군.”
이미 10명에 가까운 마법사가 다녀갔다. 그러나 그들은 마르크의 상태를 호전시켜 주기는커녕 마나만 허비하고 말았다.
그렇게라도 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못했다면 마르크는 이미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이것 말고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실력이 있는 마법사를 불러 환자를 치료하는 데 드는 돈은 평민들로서는 꿈도 못 꿀 액수의 돈이 소모된다.
하지만 제라드는 가능하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이에 사재를 털어서라도 채울 용의가 있었다.
파르티잔은 간절해 보이는 제라드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몰래 고개를 저었다.
‘쯔쯧, 지금은 상태가 너무 악화되어서 아레인의 궁정 마법사가 온다고 해도 호전되지 않을 겁니다.’
파르티잔이 알고 있는 아레인의 궁정 마법사라면 쉬바인이고, 그는 5서클의 마법사이다.
그와 비슷한 5서클의 마법사를 이곳으로 부른다는 것 역시도 무리한 일이었다.
제라드는 돈을 뿌리다시피 하여 사방팔방으로 움직이며 실력 있는 마법사를 찾아다녔지만 여태 온 마법사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가 고작 3서클이었다.
그러니 파르티잔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레인의 괴짜 노인이라도 온다면 모를까 다른 가망은 없지 않겠습니까?”
파르티잔이 이 말을 꺼낸 까닭은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제라드에게 현실을 깨우쳐 주고자 함이었다.
순간 반색하다가 제라드는 이내 고개를 저어버렸다. 그를 데려온다는 것이 무리한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괴짜 노인에게 허락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었거니와 아레인 왕성까지 가는 데에 드는 시간, 그리고 오는 데에 드는 시간을 합하면 병세가 아무리 더디게 진행된다 하더라도 마르크는 죽어버릴 것이다.
힐링을 지속적으로 시전해준다고는 하지만 마르크의 상태가 조금씩 더 나빠지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므로.
제라드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그러자니 한숨이 앞을 가렸다.
마르크가 죽게 되면 주군을 무슨 낯빛으로 대할 것인가.
‘설령 그런 일을 피해 갈 순 없더라도 최선은 다해볼 것이다. 그래야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더 덜 수 있지 않겠는가.’
딱히 기댈 곳이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은 버리고 싶지 않았던지 제라드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듣지도 못하는 마르크를 향해 중얼거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네 동료들이 자넬 고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다네. 용기를 내게.”
무색해져 버린 말을 뒤로하고 제라드는 파르티잔을 보았다.
어쩐지 고마워하는 눈빛이다.
파르티잔은 제라드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귀찮았기 때문이다.
그의 주머니에 제라드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가 빠졌다.
“얼마 되진 않네. 내 성의라고만 알아주게.”
모처럼 파르티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뭐 이런 걸 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파르티잔의 손은 주머니에 들어찬 돈을 만지작거리며 액수를 추산하는 중이었다.
‘다섯 개다. 가만, 이 느낌은 시… 실버로구나.’
5실버.
파르티잔에게는 거금 중의 거금이었다.
인생이 꼬인 이후 언제 이런 거금을 만져 보았던가.
파르티잔의 어깨를 두드리며 제라드는 부탁조로 말했다.
“자네가 좀 더 수고해주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 파르티잔이 기력이 쇠하여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녀석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제라드가 방문을 나선 직후에 파르티잔은 보다 명확한 확인을 위해 주머니에서 노니는 은화를 꺼내들었다.
헤벌쭉 벌어진 입이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았다.
돈을 받은 것은 비단 이번만이 아니었다. 이스론 상단의 사람들도 격려금조로 얼마씩 쥐어주곤 했었으니까.
‘백작, 아니 이제는 후작님이라고 하셨지. 어쨌건 후작님께 한 번 받은 금액이 그 녀석들이 여태 준 것보다 많군. 에이, 쫀쫀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그들이 돈을 준 것은 뒤편의 서랍장에 고이 보관되어 있었다. 방금 전해 받은 은화마저 옮겨 놓을 생각에 일어서 걸음을 옮기려던 파르티잔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볼썽사납게 엎어지고 말았다.
“어이쿠.”
코를 나무 바닥에 찧어 코피가 줄줄 흘렀지만 그보다 파르티잔은 손을 떠나 굴러다니는 은화들을 애처롭게 바라봤다.
4개의 은화들은 구르다가 땅에 무사히 안착했으나 유독 한 개의 은화는 구석진 곳까지 굴러가 나무틈새에 끼었다.
파르티잔은 몸을 일으킬 기운도 없는지 팔로 몸을 당겨 가며 낮은 자세로 은화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멀진 않은 거리였지만 거기까지 가는 동안 파르티잔은 진이 다 빠졌다.
그에 더해 재수가 없게도 그 은화는 손에 집히기가 싫었던지 틈에 더 깊이 박혔다.
그것을 빼내기 위해 파르티잔은 안간힘을 썼다.
“끄응, 왜… 왜 이렇게 안 빠져?”
정신이 다 혼미해지는 것 같았음에도 파르티잔은 포기하지 않았다.
박힌 은화를 빼내지도 못하고 그는 결국 그 상태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방문이 열리며 틴이 들어섰다.
곧 틴은 평정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바닥이 온통 피범벅이 아닌가.
또한 피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파르티잔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쓰러진 상태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파르티잔이 저 지경이 된 것은 틴에게 다른 더 큰 걱정을 불러왔다.
‘아차, 마르크!’
급한 마음에 틴은 마르크를 덮고 있는 침대보를 확 걷었다.
코를 썩힐 정도의 고약한 악취가 진동했지만, 틴은 물러서기는커녕 한 발을 더 다가서 마르크의 가슴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할 정도로 인사불성인 마르크의 생사를 확인하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둑, 두둑.
미세하게나마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틴은 십년감수했다는 듯 자세를 바로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틴이 마르크를 침대보로 덮어줄 무렵 파르티잔은 손가락을 꿈틀거리나 싶더니 좀비처럼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아무래도 무리하게 힘을 쏟았던지 옆으로 고꾸라지려 했다.
기척을 느낀 틴이 황급히 몸을 돌려 바닥에 부딪히려는 그의 몸을 붙들었다.
“노마법사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파르티잔의 흩어지려던 초점이 틴에게 모였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방금 전의 일이 기억나지 않았던지 파르티잔은 눈알을 굴려가며 조금 전의 상황을 훑었다.
“후작님이 오셨었는데…….”
“제라드 장로님이 말입니까?”
파르티잔은 흐리멍덩해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기억을 더 끄집어냈다.
“그리고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셨지. 난 굴러가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파르티잔은 바닥에 흩어진 은화들을 허겁지겁 주워들었다.
그리고 틈새에 낀 은화를 노려보며 사념에 빠져 들었다.
‘저걸 어떻게 꺼낸다?’
틴은 그걸 용케도 간파하고는 허리를 굽혀 어렵지 않게 은화를 꺼내들었다.
“이걸 찾…….”
탁!
틴의 엄지와 검지에 끼인 은화를 파르티잔이 낚아채가는 소리였다.
“오해하지 말게. 이건 내 돈이 아닐세.”
거짓말이었다. 얘기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제라드가 많은 돈을 준 것을 안다면 이놈들도 격려금을 주는 횟수를 줄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돈을 모두 챙기고 나니 돌연 파르티잔은 코밑이 축축한 것을 느꼈던지 그곳에 손을 가져다댔다.
손바닥에는 묽은 피가 듬뿍 묻어났다.
“아악, 피.”
파르티잔이 호들갑을 떠는 걸 보니 틴은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이럴 기운이라도 있으니 말이다.
틴은 뒷주머니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이걸로 닦으십시오.”
파르티잔은 사양하지 않고 그의 손수건을 받아든 뒤 그걸로 코피를 훔치고 손을 박박 닦은 뒤 다시 돌려주었다.
손수건은 피 냄새와 노인들에게서나 맡아볼 수 있을 법한 쉰내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틴은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고 걱정을 담아 물었다.
“그럼 그 피는 어떻게 되신 겁니까?”
돈 얘기만 쏙 빼놓고 파르티잔은 경과를 털어놓았다.
“내 발에 걸려 쓰러졌네. 기운이 하나도 없지 뭔가. 이러다간 저 녀석보다 내가 먼저 죽을지도 몰라.”
말실수로 인해 그나마 괜찮았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다.
딴청을 피우려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는데 마침 파르티잔의 시야로 피로 더럽혀진 자신의 옷이 들어왔다.
“엇? 내 옷 좀 보게. 피 때문에 얼룩이 졌어. 이거 다 버렸군. 로브가 이거 한 벌인데 돈은 없고…….”
틴은 주머니를 뒤지더니 은화 두 닢을 꺼냈다.
“가능하면 제가 사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언제 여유가 되실 때 이 돈으로 새 로브를 사 입으시지요.”
호의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틴은 여분으로 가져왔던 자신의 평상복을 줄여 파르티잔에게 주었다. 또한 더럽혀진 파르티잔의 로브를 이 여관의 종업원을 시켜 말끔히 빨아오라고 시켰다.
그야말로 오늘 하루 파르티잔은 횡재한 것이다.
게다가 식사를 마친 오후쯤에는 마법사 둘이 왔기에 쉴 시간마저 생겨 버렸다.
파르티잔은 자신의 방에서 여태 모아둔 돈들을 보며 흡족해했다.
“이 돈이면 떠나도 되겠어. 새 인생을 시작하기엔 미흡하지만 모자란 돈은 차근차근 벌어나가면 되겠지.”
분명 그러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욕심이 일었다.
‘가만, 벌 때 벌어야지.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찾아오겠어? 마르크가 죽기 전까지는 같이 있어야겠군. 오늘 같은 기회가 적어도 한 차례는 더 찾아올 것 같은데…….’
몸이 고됨에도 파르티잔은 지금 일에 만족하고 있었다.
단기간에 큰돈을 만졌으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
곧 문밖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파르티잔은 돈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 그대로 누웠다.
아니나 다를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오시오.”
호위 무사 중 한 명이 쟁반에 음식을 받쳐 들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아픈 행세라도 하려는지 파르티잔은 일부러 쇠기침을 했다.
“콜록콜록.”
호위 무사는 파르티잔의 머리맡에 음식을 놓아두며 중얼거렸다.
“헤르미온이 보낸 보양식입니다. 이걸 드시고 기운 좀 차리시라고 하더군요.”
보양식이란 말에 파르티잔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나 눈만 크게 떴을 뿐이었다.
“허… 허허, 뭘 이런 걸 다…….”
장기인 인내심을 발휘해 크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파르티잔은 속으로는 날아갈 듯 기뻤다.
‘이런 대접을 받아본 게 얼마 만이던가.’
그러나 호위 무사는 그에 그치지 않고 품 안에서 번쩍이는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금화였다.
“수고로움에 달리 해드린 것도 없다면서 이거라도 받아달라고 하더군요.”
오딘을 제외한 타인에 대해 감정 표현이 서투른 헤르미온이 고마움을 표현할 길은 이 정도였다.
그러나 파르티잔은 그것에 크게 만족하는지 금화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만 평정을 잃어버렸는지 입을 벌린 채 양손을 내밀고 있었다.
‘어서 다오. 어서!’
호위 무사는 크게 뜸을 들이지 않고 금화를 건네주고 허리를 굽힌 후에 나갔지만 파르티잔은 그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양손으로 고이 받쳐 든 금화를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응시하는 파르티잔.
장밋빛 미래가 눈앞에 펼쳐지기라도 했는지 이 순간 파르티잔의 얼굴엔 세상 모든 번뇌가 사라진 것 같았다.
있는 자에게는 그리 큰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파르티잔에게는 크고도 큰 거금이었다.
‘죽으란 법은 없구나.’
의욕과 기운이 샘솟는 것은 둘째 치고, 그는 커다란 감격에 어쩔 줄 모르고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정말 고마움을 느꼈는지 파르티잔은 저들이 따로 감시하지 않더라도 마르크가 죽기 전까지는 이곳을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