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위기의 헤르미온 (43/67)

위기의 헤르미온

“해질녘까지는 돌아올게요.”

마르크는 그렇게 쌍귀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제라드가 오기 전까지의 시간을 절약하려 함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무력으로 볼 때 청년은 함부로 대할 사람은 아니었다.

제법 눈치가 빠른 마르크는 아까 그 순간부터 되도록 말을 아꼈다.

틴 역시도 청년에게 불쾌했던 감정을 슬그머니 지웠다.

자연히 청년은 기가 살아 헤르미온에게 열심히 집적대는 중이었다.

“히야, 머릿결도 부드럽다 못해 흘러내리는군. 킁킁, 냄새도 좋고.”

비록 일부라지만 자신의 머리카락을 멋대로 매만지고 코를 가져다대는 것에 헤르미온은 소리를 질렀다.

“꺄아아악!”

곧 그녀가 돌아서 입술을 비죽 내밀며 매서운 눈으로 청년을 쏘아보았다.

이를 청년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왜, 뽀뽀라도 해주게?”

바로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철썩!

그에 대한 답례는 따귀였던 것이다.

헤르미온은 그로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신경질을 부렸다.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했지?”

따귀를 맞은 볼을 매만지다가 청년은 그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몸이 아니야, 머리라고. 귀염둥이 아가씨, 설마 날 변태 취급하는 건 아니겠지?”

헤르미온의 목소리는 더욱 날카로워지고 커졌다.

“변태 맞잖아!”

들을 생각은 있는지 청년은 제멋대로 해석했다.

“어쨌건 지금 때린 따귀는 애증의 뜻으로 알아듣겠어.”

헤르미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는 부끄러움을 타는 것이 아닌 화를 주체하지 못해서였다.

그 역시 청년은 멋대로 판단했다.

“거봐, 좋아하면서. 내숭이었군. 하긴 나 정도의 남자를…….”

퍽!

듣다 못한 헤르미온이 청년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소리였다.

그로도 분이 사그라지지 않아 그녀는 나귀를 타고 휘 앞으로 지나가버렸다.

‘뭐 저딴 녀석이 다 있어.’

뒤통수를 얻어맞고도 청년은 뭐가 그리 좋은지 배시시 웃고 있었다.

“이만 헤어져야겠습니다. 저흰 갈 길이 바빠서…….”

마르크가 나귀에 올라 그녀를 쫓으려 했고, 틴도 나귀를 내왔다.

청년이 마르크가 탄 나귀의 고삐를 틀어쥐며 한사코 그를 말렸다.

“어? 양심도 없이 그렇게 가면 안 되지. 난 생명의 은인이라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쌍귀의 무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소드마스터를 상대로 이기리란 법이 없었다.

또한 한 가지 걱정이 있었으니, 식당 내에서 마찰을 일으켰던 대머리 사내와 다시 마주치는 날에는 무사하리라는 확신도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근방을 돌아보겠다는 말을 하고 나온 것이니 두려운 것이 많았다.

그러나 이 청년을 데리고 가자면 헤르미온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틴이 이에 끼어들었다.

“무얼 하면 되겠나? 돈으로 보상이 가능한가?”

“날 너무 치사한 놈으로 몰지 말라고. 적어도 너희들에겐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뭐, 나도 볼일이 있으니 잠시 헤어지자고.”

깍지를 낀 손을 머리 뒤에 올려 두고 돌아서는 청년을 보며 틴이 물었다.

“이름은?”

“곧 알게 될 거야.”

그 말을 남기고 청년은 유유히 사라져 갔다.

틴이 그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놈이로군.”

“그래도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아요.”

마르크의 말을 틴 역시 수긍하는 모양이었다.

뒤늦게 헤르미온을 쫓아가는 마르크를 보며 틴은 호위 무사 일부를 데리고 서둘러 뒤를 쫓았다.

그리 급하게 쫓을 건 없는 듯했다.

어느 순간 헤르미온이 탄 나귀는 그녀 자신에 의해 멈춰서고 말았으므로.

그녀는 스쳐 가는 남자를 보며 경멸하는 눈빛을 던졌다.

“왜? 누군데?”

의아해하며 묻는 마르크의 질문에 헤르미온은 의외로 그 질문에 순순히 대답했다.

“헥토르.”

“바리톤의 일 왕자?”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급작스레 머리카락을 움켜쥐고서 신경질을 부렸다.

“아아악, 짜증나.”

짜증이 날 만도 했다.

오늘 마주친 두 사람은 그녀의 인생에 있어 최악이라고 봐도 좋을 남자들이었다.

막 나귀를 멈춘 틴 역시 그 얘기를 들었는지 헤르미온에게 안쓰러운 시선을 건넸다.

하나라도 피하고 보자는 계산이었을까?

헤르미온이 나귀를 돌리려는 찰나에 공교롭게도 헥토르가 고개를 돌리며 이쪽을 보았다.

그는 매우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반가운 대상을 만나기 위해 말 머리를 돌려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헤르미온은 무작정 달아나려는 생각이었던지 고삐를 힘껏 채었지만, 나귀는 발아래 돌부리에 놀라 앞발을 들며 제자리에서 투레질을 쳤다.

그러는 동안 헥토르가 다가왔다.

“여어,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군. 아름다운 엘프 아가씨, 여긴 어쩐 일이오?”

분명 반가워하는 것인데도 그 목소리가 헤르미온에게는 비아냥대는 소리로 들렸다. 그 자체가 달갑지를 않은 것이다.

그래도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어 헤르미온은 실없이 웃었다.

“흐흐흐.”

헥토르는 상대의 호감을 얻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말하기 곤란한가 보군. 어디 내가 맞혀 볼까? 당신은 상인이라고 했으니 금을 보고 왔겠군.”

간단히 고개를 저어 부정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헤르미온은 그와 말을 섞는 자체를 꺼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헥토르는 일방적으로 헤르미온의 얼굴에 고개를 바짝 가져다댔다.

화들짝 놀라 그녀는 헥토르의 가슴팍을 밀치고 말았다.

주변에 있던 그의 부하들이 다급히 몸을 받쳐 줬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낙마를 할 뻔했다.

잠시 헥토르는 인상을 구겼지만, 미녀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철학에 얼굴에 다시금 미소를 떠올렸다.

“허허, 너무하시는구려. 내가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실례라도 할까 그러셨소?”

이들의 주변엔 금을, 혹은 영초를 얻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헤르미온은 헥토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생김새나 하는 행동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말이다.

급기야 그녀는 억지웃음을 거두고 심히 불쾌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후, 짜증나. 다시는 보지 않기를 바랐는데 이게 뭐람.’

여전히 헥토르는 오해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오해였다지 않소. 나 헥토르는 바리톤의 일 왕자요. 또한 조만간 왕세자의 자리에 책봉될 사람이기도 하지. 그런 내가 숙녀에게 그런 무례를 저지를 것 같으오? 오해요, 오해. 하하하하.”

보는 이들이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쩝, 내가 귀중한 정보를 하나 줄까 했는데.”

헤르미온은 헥토르가 떠들어대는 소리들을 열심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댔다. 말만 번지르르한 놈, 스스로 대단하다는 착각에 빠져 사는 멍청한 놈, 아레인에서는 하인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한심한 놈.

그에 더해 그녀의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한 임인 오딘이 있는 아레인에 무력 침략을 강행한 데 일조한 게 그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녀가 생각하기로 약자 앞에서는 한없이 강할, 또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할 놈이 바로 헥토르 이놈 같았다.

엄밀히 보자면 그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헥토르는 선심이나 쓴다는 양 입을 열었다.

“좋소. 헤르미온 당신이니 내 그냥 털어놓으리다. 난 이곳에 뭣 때문에 온 것 같소?”

짜증스런 표정으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젓는 그녀를 보며 헥토르는 자진해 답을 주었다.

“영초요. 바로 영초를 구하러 온 것이오.”

헤르미온도 아는 사항이었지만 지금 그의 말은 조금 의외이기는 했다. 금을 탐내러 온 것이 아닌 영초를 탐내어 왔다는 것이.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어쩔까? 내 영초를 발견하면 하나 내어줄까?”

그래만 준다면 좋을 것이었다. 영초는 마르크가 원하는 것임과 동시에 상단에도 꼭 필요한 것이라 했다.

또한 이를 보여 준 후 자신이 빼돌려 오딘에게 전해주면 그 역시 기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던 차다.

욕심이 눈을 가려 결국 헤르미온은 입을 떼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구하면 하나 주세요.”

헥토르는 얄궂은 미소를 떠올리며 조건을 달았다.

“맨 입으로?”

헤르미온의 희고 매끄러운 팔에 닭살이 다 돋았다.

‘아후, 짜증나. 재수 없어 죽겠네.’

과연 그가 어떤 요구를 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들어줘가면서까지 영초를 구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그녀는 갈등했다.

하지만 길게 생각할 것도, 고민할 것도 없었다. 그가 영초를 구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럴 거면 필요 없어요.”

나름 모질게 거절하는 모습이 헥토르에게는 귀엽게만 비춰졌을까?

그는 태도를 180도 바꿨다.

“하하하, 알겠소. 내 두 개를 구하면 하나는 그냥 드리지. 당신은 그 새침한 모습이 내 마음에 더 쏙 드오.”

헤르미온에게만은 인자한 헥토르였다.

그는 아직까지도 아레인에서 굴욕을 겪은 자신의 모습을 그녀가 봤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렇게 대범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헤르미온이 잘못 인지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아직까지도 헥토르는 야망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 먼 길을 떠나 그가 이곳에 온 이유 역시도 영초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으로 영약을 만들어 자신이 복용할 생각이었다.

우선은 로테노아의 반대에 부딪히더라도 무리수를 두어 바리톤을 지배할 생각이었으며, 외세의 힘을 빌려 아레인을 칠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귀족들과 접촉하기 쉬운 자신이 가장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얼마나 강해질지에 대해서는 짐작하는 바가 없었다.

소문이란 부풀려지기 마련인지라 암상인들에게 전해 듣기론 그 영약만 있다면 단숨에 소드마스터로의 진입도 가능하다고 했다.

물론 이는 검술 실력이 처지는 헥토르가 보유해서는 절대로 될 수 없는 일이니, 그는 꿈을 좇아 이곳에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보면 매우 딱한 인생이었다.

로테노아는 이미 이 왕자 유프라를 공세자로 지목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여러 귀족들도 이미 줄을 서고 있는 상태이니 그의 꿈은 손을 뻗어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었다.

삼 왕자 팔테스조차 이를 눈치 채고 있었지만, 오직 헥토르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쩌면 인정하기 싫었던 것일 수도…….

“대신 나와 같이 가야 하오.”

“왜 같이 가야 하죠?”

“흠, 그럼 영초를 구하면 내가 모두 꿀꺽해야겠소.”

계속 헥토르를 찬밥 대접하는 헤르미온을 보니 마르크는 한편으로는 그가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으며 하나보단 둘이 나을 것 같아 결국 그의 편을 들고 말았다.

“같이 가자. 이분께서 우릴 도와주시겠다고 하는데.”

도와준 것인데도 마르크는 헥토르의 아니꼬운 시선을 접해야 했다.

“우리 둘 문제에 왜 네놈이 끼어드는 것이냐?”

괜히 편들어주려던 것이 무색해져 버려 마르크는 뒤늦게 후회했다.

‘쯧, 내가 다시는 편들어주나 봐라.’

그 이후로도 헤르미온과 헥토르가 한참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 헥토르 무리와 마르크 일행의 동행이 결정되었다.

이러다 보니 마르크의 일행은 무려 20명 정도가 되었다.

하나의 무리치고는 꽤 많은 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 온 사람들은 셋이나 넷, 혹은 다섯씩 짝을 지어 산발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럴 만한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마르크는 그렇게 생각했던 데 반해 헥토르는 어리석은 생각을 품었다.

“이 정도 인원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겠군. 뭐, 우리 예쁜이 엘프 아가씨의 몫은 이 헥토르가 대신하여 주지.”

자신의 가슴을 탁탁 두드리며 자신 있게 말하는 그를 헤르미온은 못 본 체 외면했다.

헥토르는 헤르미온에게 있어 꼴불견 그 이상이 아니었다.

반면에 당사자인 헥토르는 흑심을 품고 있었다.

‘군침이 다 흐르는군. 흐흐, 저것을 어떻게 구슬린다? 일단은 영초를 구한 후 생각해봐야겠어.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강제로라도 범하는 수밖에. 남은 녀석들은 싹 죽이고 말이야.’

애당초 헥토르는 영초를 몇 개를 구하든 그녀에게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욕정을 이루기 위함이었고,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뭐 하려고 헥토르가 이런 무시를 당해가면서까지 그녀에게 같이 갈 것을 종용했겠는가.

하나보단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나을 것이다. 이들과 합류하면 더 넓은 지역을 관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위험할 때 미끼로 내던질 수 있다.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쓸모는 있겠지.’

브란트는 이들 외에도 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들 중에는 약초 전문가들과 신성 제국에서 온 성기사와 사제들, 신관과 팔라딘들이 있는 반면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사들과 마법사들도 있었으며 신흥 제국에서 나온 이들도 많았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앞쪽에서는 영초를 탐내는 이들 간에 각축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이곳에 보이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일 뿐이었던 것이다.

앞쪽으로 여러 사람들이 얕은 물에 장딴지를 담가 삽이나 얇고 널찍한 쇠판을 이용해 사금을 하고 있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체로 거르기엔 금가루가 너무 가늘었다. 물을 걸러내고 부산물들만 남은 삽이나 쇠판은 모닥불에서 달궈졌다.

그러나 바닥에서 퍼낸 흙에는 그리 많은 양의 금이 걸러지지 않았다.

소문이 떠돌 당시에 이미 상당한 양의 금이 캐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금을 캐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상당한 만족감이 깃들어 있었다.

여기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달려들어 발 디딜 공간조차 없었다.

이스론 상단의 일원이 그를 보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허리도 안 아픈가 봐.”

그 동료가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다 돈이잖아.”

“저 정도면 얼마나 될까?”

“아마 뼈 빠지게 농사짓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다.”

실질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캐내는 금보다 현저히 적은 양의 보수를 받고 있었다. 이곳 역시 엄격한 관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곳 사람 누구도 이 뙤약볕에 농사를 짓는 것보다 이 일을 하는 것이 훨씬 편하며 많은 돈을 거머쥘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들을 뒤로한 채 마르크 일행은 앞으로, 더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사금을 하는 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갈수록 길은 매우 거칠어졌다. 멋대로 뻗은 가시덤불과 날카로운 풀들은 확실히 말이나 나귀에게 장애가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말에서 내려야겠군.”

말에서 내리는 것은 비단 헥토르와 마르크 일행만이 아니었다.

근방의 다른 이들 또한 그랬으므로.

말과 나귀를 나무에 매어두고 이를 지키는 데 두 사람이 남았다.

이스론 상단의 호위 무사 한 명과 헥토르를 따라 바리톤에서 온 기사 한 명이 그들이었다.

나머지는 그들을 두고 걸리는 풀들과 가시덤불을 쳐내며 나아갔다.

자연히 시야는 비좁아졌다.

마르크가 물었다.

“헥토르 님, 그 영초의 생김새는 아시는지요?”

“그림이 있지.”

“저희에게도 보여 주셔야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뭐.”

선심이나 쓴다는 것처럼 헥토르는 그것이 그려진 양피지를 펼쳐 보였다.

아쉽게도 마르크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림만 봐서는 모르겠어. 직접 보는 수밖에 없겠어.’

마르크는 양해를 구하고 이 양피지에 적힌 그림을 이스론 상단에서 온 호위 무사들에게도 보여 주었다.

“이것과 비슷한 걸 찾을 거예요. 물론 여기에는 없을지도 몰라요. 더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겠죠.”

“알았다.”

“그러도록 하지.”

저마다의 대답을 듣고 난 후에 마르크는 양피지를 헥토르에게 돌려주었다.

호위 무사들은 땅을 훑으면서도 마르크와 헤르미온을 보호하기 위해 포진한 상태로 전진했다.

헥토르는 일부러 헤르미온을 지켜 주겠다는 명목으로 그녀의 뒤쪽에서 걸었는데 희고 보드라운 살결이 눈에 밟혔다.

‘이것 참 환장하겠군. 당장에라도 덮치고 싶은데 말이야.’

끓어오르는 욕정이 헥토르의 눈을 가렸지만 무턱대고 저지를 수는 없었다. 아직 근방은 자신들 말고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쯧, 여기서는 곤란하겠어.’

헥토르는 꾀를 부렸다.

“이래서야 언제 찾아? 다 흩어지는 게 낫겠어.”

마르크가 그를 딱 잘라 거절했다.

“흩어지는 건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거지?”

“여기도 충분히 위험하니까요.”

“위험하다고? 그럼 저기 네다섯씩 다니는 사람들은 뭐지?”

“저들은 그럴 만한 자신감이 있을 겁니다. 저희와는 다를 겁니다.”

“이것 봐, 위험하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면 되잖아. 그냥 그것이 있을 부근을 찾는 것뿐이라고. 그게 문제가 되나?”

“그럼 갈라집시다.”

마르크의 고집은 완강했다. 헥토르 역시 더 주장을 밀어붙이기는 힘들 것 같았는지 고개를 휙 돌리며 씨근거렸다.

‘망할 자식 같으니라고. 하는 수 없군. 저녁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그는 근방에서 야영을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이들도 그럴 것이란 착오에 빠져 있었다.

* * *

쉬바인은 아그리스라는 이름의 이방인이 블랙 드래곤이라는 걸 전연 알지 못했다. 자연히 의문만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마나의 흐름을 눈치 챌 정도의 대단한 마법사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하여 오딘이 저런 버르장머리를 가만히 두는가가 의심이 갔다.

일체 존대를 하지 않는 아그리스를 오딘은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대체 저자가 누구이기에 오딘 님께서 저리 너그러이 봐주신다는 말인가. 머리색이 같은 것을 보면 어쩌면 같은 곳에서 온 사람일지도 모르겠어.’

동행을 하게 되며 쉬바인은 숱하게 아그리스를 살폈다.

이에는 위기의식도 따랐다. 아레인 궁정 마법사의 자리를 혹 저자가 대신하게 된다면 좋을 게 없지 않겠는가.

궁정 마법사의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자연히 보수 또한 줄게 될 것이다.

잡화 상점을 둘러보던 아그리스가 느닷없이 손을 벌렸다.

“돈 있는 거 있으면 좀 줘봐.”

아그리스는 몇 차례의 유희를 통해 인간들의 세상사를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이 사는 데 있어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게 돈이라는 것 역시도 잘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 돈이라면 레어에 얼마든지 있었다. 들고 오질 않았으니 손을 벌린 것이다.

이 자리에 오딘은 없었다. 오딘과 쿤은 다른 물건을 둘러보기 위해 다른 상점가로 이동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가 지칭하는 것은 당연히 쉬바인이었다.

대뜸 돈을 달라는 말에 쉬바인은 눈을 흘겼다.

물론 아그리스가 손에 든 귀고리의 값을 지불할 돈은 수중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돈이 어떤 돈인가.

각종 편의와 즐거움을 참아가며 최대한 아끼고 모아둔 돈이 아니던가.

결코 함부로 지출할 돈은 아니었다.

“못 줍니다.”

단호한 거절에 아그리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갔다.

‘어쭈, 이놈 봐라.’

오딘이 몇 가지의 제약을 걸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서 쉬바인은 형체조차 없이 죽어 없어진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포악한 빛을 띠는 아그리스의 동공을 접하고서도 쉬바인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돈이 없으면 눈독을 들이지 말아야지. 욕심하고는…….’

그 눈을 마주치고 있노라니 쉬바인은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끝 모를 두려움이 내면에서 일어나 사지를 옥죄이는 것 같았다.

‘사술이라도 부리는 모양이군. 그런 것에 당할까보냐?’

쉬바인은 단지 그것을 착각이라 치부하고는 몸을 휙 돌렸다. 아그리스의 눈을 보지 않는 한 두려움이 줄어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다.

몸과 마음이 안정되자 쉬바인은 휘파람까지 부는 여유를 부렸다.

불쾌지수가 쌓여 가는 것을 입증해주기라도 하듯 아그리스의 동공이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하나, 아그리스는 그 기분을 간직한 채 더 쉬바인에게 시선을 두지는 않았다. 그는 미리 고른 귀고리를 귀에 착용하며 상점 주인에게 말했다.

“돈은 저놈한테 받아.”

쉬바인이 눈을 부릅뜨고 돌아섰다. 그를 상점 주인이 선심이나 쓴다는 양 반겼다.

“은화 4개에 50페소만 주세요.”

4실버 50페소. 절대 작은 돈이 아니었다.

궁정 마법사인 쉬바인의 한 달 용돈을 아껴야 마련할까 말까 한 돈이었다.

억하심정을 참지 못하고 쉬바인은 스리슬쩍 지나치려는 아그리스의 어깨를 잡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그리스의 목소리가 굵어졌다.

“네 녀석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이로구나. 감히 내 어깨에 손을 얹다니.”

이에 굴하지 않고 쉬바인은 따지고 들었다.

“당신이 황제라도 됩니까? 내가 손을 못 얹을 건 또 뭡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이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어어어어어…….”

쉬바인의 몸이 자의와는 다르게 허공으로 치솟고 있질 않은가. 그에겐 손을 쓸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하염없이 솟구치던 쉬바인의 몸뚱이는 곧바로 추락하며 소음을 유발했다.

털썩!

“끄으~”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는지 쉬바인은 아그리스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 축 처지고 말았다.

정신을 잃은 쉬바인을 뒤로하고 아그리스는 상점 주인에게 똑똑히 일러두었다.

“깨어나면 받아.”

공교롭게도 이때 쿤이 달려오는 중이었다.

“쉬바인 님, 쉬바인 님.”

쿤은 새로 산 로브를 빼입었는데 무척 잘 어울렸다. 아마도 이를 자랑할 요량으로 뛰어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부러워해야 할 대상은 땅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어라? 쉬바인 님.”

의문을 풀기 위해 쿤은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가까운 곳에서 그에 대한 해명이 들려왔다.

“피곤해서 잠이 든 모양이다.”

아직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아그리스의 음성이었다.

이 상황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그의 뻔뻔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본 것이 있는지라 함부로 끼어들 입장은 못 되었다.

상황을 보지 못했어도 쿤은 그 말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피곤했다고 해도 잠을 자? 이 대로 한복판에서?’

무릎을 굽히고 앉아 쿤은 재깍 쉬바인의 상체를 일으켜 세워 그의 눈꺼풀을 열었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만 봐서는 자고 있는 건지 의식을 잃은 건지 분별이 불가했다.

‘잠시 전의 일일 거야. 기억을 뒤져 봐야겠어.’

그런 생각으로 쿤은 정신 마법을 시전하려 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아그리스의 엄포에 의해 불발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꼬마, 허튼 생각은 말아라.”

쿤은 흠칫 놀랐다. 또 한 번 그가 자신이 하려는 것을 간파해서다. 그러나 곧 쿤은 아그리스에게 악감정을 드러냈다.

“다… 당신이 이랬군요.”

“무슨 소리냐? 내가 그러다니.”

“당신이 쉬바인 님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기억을 뒤지는 걸 못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눈을 부릅뜨고 언성을 높이는 쿤.

아그리스는 계속 말을 돌렸다.

“정신 마법은 인체에 해롭다. 시전자는 모르지만 막상 정신 마법을 받는 피시전자는 정신이 피폐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쿤에게는 금시초문인 얘기였다.

이에 대해 쿤이 항변할 시간도 주지 않고 아그리스는 쉬바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쉬바인의 몸이 둥둥 떠서 아그리스에게 다가왔다.

“그게 정 걱정이라면 귀찮기는 해도 이 녀석의 피곤을 달래줄 마법이라도 펼쳐 주어야겠구나.”

아그리스의 입술이 소리를 내지 않고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이내 쉬바인은 눈을 떴다.

그리고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난 졸리지 않아, 난 졸리지 않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상점 주인에게 다가가 아그리스의 귀고리 값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이는 중원에서 최면에 걸린 사람이 보이는 행동과 흡사했다.

이를 보며 쿤은 절로 의문을 쏟아냈다.

“그… 그게 피곤을 달래는 마법입니까?”

“왜? 이상해 보이느냐?”

쿤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솔직히 두려웠다. 자신도 쉬바인 같은 꼴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쉬바인은 제정신으로 돌아왔어도 상점가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일체 기억하지 못했다. 자연히 호주머니에서 4실버 50페소가 비는 줄도 몰랐다.

이 일에 대해서는 쿤 역시도 최대한 말을 아꼈다.

이 모든 것은 피시전자가 피폐해진다는 정신 마법을 아그리스가 부담 없이 행한 결과였다.

불과 보름 전 마르크 일행이 머문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 * *

서서히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 지금쯤이면 제라드가 돌아왔을 것이다. 마르크는 상단 사람들을 모아두고 헥토르에게 알렸다.

“우린 이만 돌아가야겠습니다.”

사실 지금 돌아간다 해도 늦은 감이 있었다. 영초를 구하려고 혈안이 되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탓이다.

급작스런 말에 헥토르는 눈을 부릅뜨며 발끈했다.

“돌아간다고? 어딜?”

“숙소로 돌아갑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근의 사람들은 현저히 줄어 있었다. 헥토르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갈등했다.

‘확 여기서 저질러버려?’

그러다 헥토르는 그를 설득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봐, 어차피 내일 오더라도 이 먼 길을 다시 와야 해. 그럴 바엔 차라리 사람을 보내 그 사람을 이쪽으로 오라고 하는 게 어때? 넌 멍청하지 않잖아?”

뒷말은 거슬렸지만 듣고 보니 맞는 말이어서 마르크는 주변 사람을 보았다.

저마다가 지친 기색이었다. 특히나 헤르미온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기필코 영초를 구해 오딘에게 주겠다는 일념하에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다.

마르크는 헥토르가 계속 눈에 걸리기는 했지만 호위 무사들이 있으니 별일이야 있겠나 싶어 그의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다.

“대신 야영은 근방에서 하는 것으로 하죠.”

“좋을 대로.”

헥토르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쳐졌다.

야영 준비는 헥토르의 부하들을 통해 이뤄졌다. 날씨가 그다지 추운 편은 아니라서 헥토르의 기사들과 이스론의 호위 무사들은 한군데 자리를 잡고 지푸라기들을 깔아 누울 자리를 만들었다.

헤르미온은 잘 자리가 만들어지자마자 그 자리에서 곯아떨어졌다.

마르크는 헥토르의 눈치를 보며 호위 무사들을 모아놓고 신신당부를 했다.

“주무시는 것까지는 뭐라고 할 수 없지만, 각별히 유의해주세요. 저 사람은 둘째 치고, 이곳은 매우 위험한 장소니까요.”

호위 무사들은 알겠다고 철석같이 대답을 했다. 어쩌면 부질없는 걱정일 수도 있었다. 그들은 이런 환경에 매우 잘 적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날 며칠을 꼴딱 새우고 경비를 선 적도 있었으니 하루쯤이야 문제 될 것도 없질 않겠는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던지 되도록 마르크는 잠을 청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피로는 더 쌓여 갔다.

최대한 버티려 했지만 눈이 스르르 잠겨 갔다.

억지로 눈을 치켜뜨길 수차례.

‘자면 안 되는데, 자면 안 되는데…….’

스스로를 채찍질했지만 어느 순간 버티지 못한 눈꺼풀은 깊게 눌리고 있었다.

“마르크, 일어나. 일어나라고!”

누군가 그를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번쩍 눈을 떴을 때 비로소 마르크는 자신을 깨운 것이 이스론의 호위 무사라는 걸 알았다.

“무슨 일이에요?”

질문에 이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들렸다.

카캉!

“쫓아라!”

이스론의 호위 무사들이 먼 점을 뒤쫓고 있었다.

아직 근처에 있던 호위 무사 역시 대답을 줄 생각도 못하고 당장 그를 쫓으려 하고 있었다.

필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답답한 나머지 마르크는 크게 성을 냈다.

“무슨 일이냐니까요!”

호위 무사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헤르미온이 납치됐다.”

순간 마르크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생각 때문인지 가슴이 휑한 것이 채워지지 않았다.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무력하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억지로 정신을 일깨워 호위 무사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어디서요? 언제요? 누가…….”

“우리도 어두워서 잘은 못 봤다. 두 녀석이었어.”

“헤르미온 그 멍청이는 붙들려 갈 때까지 자고 있었단 말입니까?”

호위 무사가 보기에 마르크가 이렇게 크게 성을 낸 적은 없었다. 그러나 헤르미온을 나무랄 게 아니었다.

“슬립(Sleep)이 걸린 모양이다. 그녀는 잠에 취해 있어 아마도 마법의 효과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목이 날아가도 모를 거다.”

마르크는 더욱 다급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헥토르는? 헥토르 그 사람은요?”

“그 역시 그녀를 구하겠답시고 따라갔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도 뒤쫓아야 해.”

호위 무사를 따라 뛰면서도 마르크는 이 소동이 일 때까지 깨어나지 못했다는 사실로 인해 자괴감에 물들었다.

그 자괴감이 너무 커서인지 보라색의 가시넝쿨이 살갗을 찢는 것도 몰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상처 부위가 거무스름하게 변해갔다.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의 어둠 속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들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는 순간에도 헤르미온을 납치해 달아나는 자들의 발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마법사를 대동했기에 헤이스트를 이용,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서넛의 인영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으니, 호위 무사들의 조급함은 극에 달했다.

“썩 비켜라!”

인영들은 길을 비켜 줄 용의라고는 없는 듯했다. 도리어 그들은 검을 빼어들어 호위 무사들을 죽이려 달려들었다.

졸지에 사투가 벌어졌다.

인영들의 수는 호위 무사들보다 적었지만 실력은 월등히 우위에 있었다.

멀어져 가는 헤르미온을 보며 이스론의 호위 무사들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게 섯거라!”

헥토르는 용맹하게 달려 나갔다.

그의 앞쪽으로는 뒤쪽의 인영들처럼 복면을 쓴 남자 한 명이 헤르미온을 안아들고 달아나는 중이었고, 그 뒤를 누더기나 다름없는 로브에 후드를 뒤집어쓴 마법사가 따르고 있었다.

뒤따르는 동안에도 수차례 마법 공격이 날아들었지만, 헥토르는 그에 개의치 않고 저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했던 덕분일까? 헥토르는 정체불명의 인영들에 바짝 접근했다.

그러나 막상 헥토르는 검을 겁갑에 집어넣고서 그녀를 안아든 인영에게 두 팔을 뻗으며 재촉했다.

“이리 내, 이리 내라고.”

그 말에 헤르미온을 안아든 인영이 순순히 헥토르에게 그녀를 건네주었다.

“너희들은 뒤쪽으로 가 그 녀석들이 오는지를 잘 감시해라. 행여 근방에 다가오는 녀석들이 있다면 죽여도 좋다.”

“분부를 따르겠나이다.”

그랬다. 헤르미온을 납치해 달아난 자들은 헥토르의 부하들이었다. 이는 모두 헥토르의 자작극이었던 것이다.

명령을 내리기 바쁘게 헥토르는 그녀를 안고 수풀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워낙에 멀리 거리를 벌려 놔서인지 고함 소리와 병장기 소리도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

헥토르의 두 눈은 이미 욕정에 물들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헤르미온의 치마 밑단을 찢어 그녀의 눈을 가리는 치밀함을 보였다.

“예쁜 눈을 가리기는 아깝지만 별수 없군. 중간에 깨어나면 곤란해질 테니까.”

아직 헤르미온은 잠에 취해 미동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헥토르는 불만을 토로했다.

“이것 참, 반항하는 맛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쩝, 나도 이 방법까지는 원치 않았다고. 하지만 아가씨가 너무 도도해서 이 방법 말고는 없겠어.”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자 기분 좋은 살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헥토르는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우둘투둘한 헥토르의 혓바닥이 그녀의 얼굴을 핥으며 역한 침 냄새를 풍겼다.

그로 인해 헤르미온의 얼굴이 무의식중에 찡그려졌다.

“더는 못 참겠군.”

급한 마음에 헥토르는 헤르미온의 치마 속에 손을 집어넣어 속옷부터 끌어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춤을 장식하고 있던 끈을 풀어 바지를 내렸다.

곧장이라도 그녀를 범할 생각에 쾌락으로 물들었던 얼굴은 거짓말처럼 사색이 되었다.

소리 없이 다가온 인영이 서슬 퍼런 검날을 헥토르의 성기 위쪽에 놓으며 나지막한 경고를 내뱉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앞으로 움직이면 자를 거야.”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경고 전에 이미 헥토르의 성기는 살갗이 베였는지 피가 묻어나왔다.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이는 청년이었다.

“네… 네놈은 누구냐?”

“네깟 녀석은 알 것 없어.”

말을 섞는 것만도 짜증이 나는지 심히 불쾌한 어투의 대답이었다.

‘호위로 심어놨던 두 놈은 어딜 갔는가? 그 녀석들은 보통이 아니다. 한데, 어떻게 녀석들의 눈을 피해 소리 없이 다가올 수 있었을까?’

헥토르에게는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수치심은 둘째 치고 상처 부위가 쓰리고 아렸기 때문이다.

당장에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청년의 검날 아래 있는 성기를 황급히 치우고 바닥의 흙을 한 줌 쥐어 청년의 얼굴로 뿌렸다.

청년이 얼굴에 묻은 흙을 털어냈을 땐 이미 헥토르는 바지춤을 추스를 생각도 못하고 꼴사나운 뜀박질로 멀어지는 중이었다.

“고얀 놈 같으니라고.”

그를 뒤로하고 청년은 위기에 처했던 여인을 바라보았다. 의도하지 않게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아…….”

재깍 청년은 그녀의 눈을 가린 천을 풀어헤쳤다.

확실히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바로 어제부터 알게 된 사이라 해도 말이다. 청년은 어제 낮, 헤르미온을 포함해 곤경에 처한 이스론 상인들을 구해준 이였던 것이다.

청년은 곧 헤르미온의 희고 가녀린 손목에 자신의 손가락을 올려 미동을 느꼈다.

“험험, 맥만 짚어서는 잘 모르겠어.”

분명 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체의 느낌을 부정하고서 헤르미온의 봉긋이 솟은 가슴에 귀를 가져다댔다.

고동 소리가 귀를 통해 생생히 들려왔다.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좋아하다가 청년은 자세를 바로 하고서 헤르미온을 빤히 쳐다보며 아리송한 말을 내뱉었다.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군.”

조금 전의 행동으로 봐서는 그녀가 깨어나길 바라지 않는 듯했지만, 막상 일어나지 않으니 돌변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녀의 발치에 떨어진 속옷을 입혀 주면서도 청년은 고개를 돌려 점잖은 목소리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쩝, 체면이 말이 아니군.”

어제 그가 헤르미온과 이스론 상단의 사람들에게 보인 태도와는 천양지차의 모습이었다.

곧바로 청년은 헤르미온을 왼쪽 어깨에 둘러멘 채 몸을 일으키며 두리번거렸다.

“가만있자, 이 애물단지 아가씨 일행이 어디 근방에 있을 듯한데…….”

주위를 살피던 청년은 도망친 녀석의 발소리로 추정되는 소리를 감지했는지 그가 사라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 아가씨를 범하려던 괘씸한 녀석을 혼내주기 위해 그가 사라진 숲을 향해 달려가려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앞을 가로막았다.

“서툰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걸세.”

날카로운 검으로 청년을 겨누고 있는 대상은 힘차게 뻗은 흰 눈썹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그는 아레인의 제라드 장로였던 것이다.

하지만 청년은 그와 마주친 적이 없었으니 그를 알 리 없었다.

‘이놈은 뭐지? 아까 그놈과 한패? 그게 아니라면……?’

청년은 무시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막돼먹은 녀석은 달아나고 있을 테니까.

해서 그녀를 어깨에 걸친 채 그가 사라진 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그러자 그 역시 무서운 속도로 따라붙었다.

매서운 바람이 그들이 지나간 자리로 휘몰아쳤다.

어렵잖게 자신을 따라붙은 대상이 청년은 흥미진진한 모양이었다.

‘속도를 더 내볼까?’

순간 청년의 몸이 앞을 향해 더 빠르게 쏘아져 나갔는데 발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제라드는 끈덕지게 따라붙었다.

청년은 속도를 더 높여 보려고 생각했는데 그를 간파했는지 제라드가 일검을 내질렀다.

검에서 휘황찬란한 광채가 일어 청년의 앞쪽에 자리한 대지를 급습했다.

쿠왕!

가히 놀라운 파괴력이었다.

폭발로 발생한 구덩이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제야 청년은 달리기를 멈추고 돌아서며 빈정거리는 투로 입을 열었다.

“이거 위험하게 노시는군.”

제라드는 할 말만을 했다.

“그녀를 내려놓게나.”

“그거야 어렵지 않지.”

청년은 순순히 제라드의 말을 따를 생각인지 몸을 숙여 고른 땅 위에 그녀를 단정히 눕혀 두었다.

“말이 통해 다행일세.”

제라드가 적의를 거두고 헤르미온에게 다가가려 할 때, 청년의 입에서 경고 섞인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단, 데려가려는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 정 데려가겠다면 날 쓰러뜨려야 한다. 생각은 있는지 궁금하군.”

여유가 흘러넘치는 목소리에는 좀 전의 폭발을 압도할 정도의 힘이 실려 있는 듯했다.

제라드 역시도 그를 허세라고 치부하지는 않았다.

“나는 항상 마주치는 상대들을 최고로 여기고 전투에 임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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