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워프와 도자기
살탄은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아아아아!”
다론은 상심에 잠겨 쭈그려 앉아 있는 살탄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쯔쯧, 내 그럴 것 같았지.”
분명 조금 전의 도자기는 살탄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줄 정도로 잘 구워졌다.
그러나 그의 오른손에 쥔 망치는 습관을 이기지 못하고 도자기를 내려쳐 버렸다.
저만한 녀석을 만들어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도자기들을 박살냈는가.
그에 허비한 시간은 또 어떠한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는 살탄의 어깨를 짚는 손이 있었다.
살탄은 그 손이 다론의 것이라 생각하고 신경질을 부렸다.
“위로해줄 생각이라면 관둬. 난 지금 기분 더럽다고!”
“네놈 기분 더러운 것을 내가 알아줘야 하느냐?”
익숙한 소리였다.
그가 누구라는 것을 직감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살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상대로 뒤쪽엔 아그리스가 서 있었다.
“오해십니다. 아그리스 님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결코 그런 말을 내뱉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 녀석이 헷갈리게 하는 바람에…….”
“변명 따위는 들어줄 생각이 없다.”
아그리스는 널려진 도자기의 잔해들을 보며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선심을 쓰려고 부른 건데 도리어 욕만 얻어먹게 생겼군.’
살탄에게 아그리스의 노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네놈이 감히 날 물 먹이려고 작정했구나. 분명히 네놈에게 여기서 일을 성실히 하라고 했거늘.”
이를 갈며 아그리스는 살탄의 멱살을 덥석 잡고서 당장에 몸을 돌려 문밖으로 향했다.
살탄은 질질 끌려가면서 두 손바닥을 비비며 애처롭게 하소연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그것은 오해십니다.”
아그리스는 살탄의 변명을 들어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문지방을 넘어가는데 마침 오딘과 마주쳤다.
오딘의 시선이 깨어져 버린 도자기의 잔해들에 고정되었다. 이에 아그리스는 더없이 난감해했다.
빨리 드워프 녀석을 치워버리는 게 능사라 여겼던지 아그리스는 오딘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공간 이동을 하려 했다.
그때 느닷없이 오딘의 입에서 불평이 터졌다.
“줬다 빼앗는 건 뭐야?”
아그리스가 의문을 담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오딘은 깨진 도자기 잔해들을 직접 손으로 만져 가며 흡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의외의 반응에 아그리스는 살탄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살탄은 그 자리에서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욕심이 났습니다. 만들다 보니 자꾸 더 나은 녀석을 만들고 싶어서 그만……. 용서해주십시오. 이제라도 부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오히려 오딘은 고개를 저으며 그를 종용했다.
“아니다. 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부숴라. 마음에 드는 물건이 나올 때까지. 이제 보니 장인 정신까지 투철하군. 드워프라는 종족은 대단히 뛰어난 종족이로구나.”
자신을 알아주는 말에 감동했는지 살탄은 눈물이라도 쏟을 것만 같았다.
아그리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궁금함을 풀기 위해 그는 오딘에게 물었다.
“네가 이것은 돈벌이가 목적이라고 시인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깨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냐?”
“도자기라는 게 원래 그렇다. 정말 뛰어난 물건은 돈으로 가치를 매기기가 어렵지. 희소가치도 있고 말이야.”
은연중에 아그리스는 자신이 지금 연구하려는 대상과 그 대상이 설명하는 도자기라는 것에 모종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오딘은 아직 온기가 가시질 않은 도자기의 잔해를 주워들고서 의문을 드러냈다.
“이게 가장 최근에 부순 것이군. 쩝, 이건 많이 아깝군. 이 정도는 부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다론이 당황해하는 살탄을 대변해주었다.
“살탄 역시 그것은 매우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깨는 게 습관이 되어버려 부지불식간에 망치질을 해버린 모양입니다.”
그 말이 우스웠는지 오딘은 멋쩍은 웃음을 짓고는 다론에게 지시를 내렸다.
“괘념치는 않으마. 다만, 지금 만든 녀석처럼 쓸 만한 녀석들은 내 허락 없이는 장에 내다 팔지 말거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명을 받들겠나이다.”
살탄은 오딘을 보며 아그리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포용감과 주인의 면모를 확인했다. 그로 인해 절로 존경심까지 싹텄으나 목숨을 걸면서까지 오딘에게 기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의 내면에 이 일에 더한 기력과 심력을 기울이겠다는 다짐이 새겨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 *
굉장히 북적거리는 식당이었다.
식당 안의 분위기는 그다지 밝지 못했지만, 이 중 가장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파르티잔이었다.
그는 깊은 시름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둘의 싸움이 끝나면 나는 어떻게 될까? 차라리 오딘 그자가 이긴다면, 그리고 그 전에 몸을 내뺀다면 무사할 수 있다. 하지만 드래곤이 이긴다면 필연코 날 찾아올 것이다. 드래곤에게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적합하지 않으니까.’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심정이 다르듯 지금 파르티잔의 속내가 그러했다.
그들에게 붙잡혀 있을 때는 몰랐지만, 막상 그곳을 빠져나오고 넓은 세상에 몸을 두게 되니 온전한 삶을 영위하고 싶어진 것이다.
‘오딘 그자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드래곤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는 없는 노릇. 드래곤의 시중을 든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더군다나 놈은 그냥 드래곤도 아닌 블랙 드래곤이 아닌가. 난 필연코 그 괴물의 레어에서 생을 마감하게 생겼구나. 아아~ 저주받은 인생이여.’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여 눈물이 다 흐를 것 같았다.
음식을 앞에 두고도 상념에 잠겨 있는 그에게 게티롱은 의미심장한 눈길을 두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그의 포크는 파르티잔의 접시에 놓인 잘게 썰린 고기를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시선은 경계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 행동은 얼마 못 가 발각되고 말았다. 마음이 편치 않은데 괘씸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게티롱을 향해 파르티잔의 노기가 충천하다 못해 폭발하고 말았다.
“망할 녀석, 작작 좀 해!”
“너무한 거 아니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망할 녀석이라니.”
너무하달 수도 있었다.
그러나 파르티잔은 숙일 뜻을 보이지 않았다. 게티롱의 접시에 수북이 쌓인 음식들이 더욱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을 뿐.
‘벌름거리는 콧구멍에 확 포크를 쑤셔 넣어버릴까 보다. 자기 것이나 먹을 일이지. 욕심이 지나쳐도 유분수지. 거지새끼도 아니고… 쯧.’
염치없는 게티롱 때문에 파르티잔의 접시에는 고기가 몇 점 남아 있지 않았다.
파르티잔은 홧김에 접시를 한쪽으로 확 치우고서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두 숨 정도 쉴 시간이 지나니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파르티잔은 게티롱의 접시에서 자신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기들을 마구잡이로 거두어들였다.
이번엔 게티롱의 눈알이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앞뒤로 움직이며 옮겨지는 고기들을 좇았다.
그러다 덜미가 잡혔다.
“이보시오, 이건 내 것이오.”
“네놈이 먹은 것은?”
“허, 보자 보자 하니까 너무하는군. 계속 이렇게 하대하기요?”
“인간 같아야 존대를 해주지.”
“뭐가 어쩌고 어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상체를 일으켜 상대의 얼굴을 움켜쥐고는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 손 놓지 못해?”
“네놈이야말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원상태로 수복도 불가할 정도로 꼬집고 있었는데, 신음 소리라도 내면 졌다는 말을 들을까 봐 서로 아픈 내색도 하지 않았다.
급기야 식탁이 어지럽혀지고 둘은 바닥에 나뒹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용케 상대의 얼굴을 구긴 손들을 놓지 않았다.
난장을 피우는 두 사람. 그렇다고는 해도 식당이 워낙 컸기에 이 둘의 소동은 소동으로 비춰지지도 않았다.
그 옆으로 헤르미온과 마르크, 그리고 틴이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둘의 행동에 일행이 아닌 척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들의 소동은 근방의 종업원들이 달려옴으로써 일단락됐다.
소동이 잠잠해지자 다시 헤르미온은 간절한 ‘임’ 생각에 빠져 들었고, 마르크는 영초를 꿈꾸었으며, 틴은 같은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잔뜩 신경이 쏠리기 시작했다.
틴이 보기에 확실히 이 식당 안에는 위험한 사람들이 많은 듯했다.
주변의 여러 테이블들은 식탁 위, 혹은 아래쪽에 풀 플레이트 메일을 비롯한 여러 중장갑주들과 무기들이 놓여 있는 것만 보아도 그러했다.
결코 쉽게 구할 장비들이 아니었으며, 중고로 구입한다고 해도 꽤나 값이 나갈 것들이었다.
비단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조차 주변을 경계하던 까닭에 식당 안엔 적잖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숨이 막힐 지경이군.’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지 안 들어가는지 구별조차 못하고 틴은 무의식적으로 스테이크를 찌른 포크를 들어올렸다.
탁.
누군가 틴의 팔꿈치를 치는 바람에 스테이크를 물고 있는 포크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는 기분이 상해 사과라도 받을 요량으로 팔꿈치를 친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마르크 또래의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은 인식조차 못했는지 남아 있던 의자를 빼며 물었다.
“마침 여기 한 자리가 남는군. 합석해도 되겠지?”
틴은 청년에게 눈총을 보냈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의자에 엉덩일 깔고 앉아버렸다.
그러더니 손뼉을 딱딱 치며 종업원을 부르는 게 아닌가.
원래의 틴이었다면 그저 눈치 한 번 주고 말 일이었지만 청년의 행동이 너무 밉살스러워 불쾌한 낯빛을 지었다.
분위기에 아랑곳 않고 부름을 받은 종업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펼쳐들며 물었다.
“무엇으로 준비할까요?”
“얘네 먹는 거, 이걸로 똑같이 줘. 맛있어 보이네.”
관심을 딴 데 두던 마르크 역시 합석한 청년을 보았다.
“초면이신데…….”
“아, 그래. 초면이지. 어서 가져와.”
무례함을 지적하는 마르크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손을 휘적거려 종업원을 쫓는 청년.
틴의 기분은 바닥으로 착 가라앉았다.
“이보시오, 내 포크를 떨어뜨린 것은 그렇다 쳐도 사과는…….”
틴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청년이 식탁에 바짝 몸을 붙여 앞쪽에 앉은 헤르미온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기 때문이다.
“키야~ 예쁘다, 예뻐. 너 이름이 뭐야?”
그제야 헤르미온의 시선이 청년을 향했다.
하얀 피부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귀티가 좔좔 흘렀지만 절대 그녀의 이상형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이런 생김새를 싫어했다.
비위 상하게 생긴 녀석이 다짜고짜 반말을 하고 있으니 기분이 유쾌할 리가 없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인상을 쓰는 헤르미온의 시선에 머쓱했는지 청년은 허리를 틀어 식당 내부를 훑으며 딴청을 부렸다.
“뭐, 가르쳐 주기 싫으면 안 가르쳐 줘도 돼. 천천히 묻지, 뭐.”
급기야 틴의 이마에 핏대가 곤두섰다.
“내 말을 들을 생각은 있나?”
그에 근처에서 식사를 하던 쌍귀가 식사를 멈춘 채 마르크의 테이블 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워 청년을 의식했다.
청년은 쌍귀가 자신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계속 무시를 당해 참다못한 틴이 식탁을 쾅 치며 일어섰다.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너무하는군!”
부근에 웅성대던 소리마저 줄어들며 단박에 여럿의 이목이 틴에게로 쏠렸다.
창피보다는 두려움이 앞섰기에 마르크는 당황한 기색으로 틴의 팔꿈치를 잡아끌었다.
“저, 틴 님…….”
틴 역시 여럿의 시선을 느꼈던지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청년의 안중에는 틴이 없었다. 청년은 넉살 좋게 헤르미온이 마시던 물 컵에 팔을 뻗었다.
“아, 물을 안 가져왔네. 예쁜이 아가씨 것 좀 마셔도 되지?”
헤르미온이 그를 제지하고자 팔을 뻗었을 때 이미 물 컵은 청년의 입가에 있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녀의 입술 자국이 남아 있는 쪽에 입을 가져다대려 했으니 그녀는 눈에 불을 켜고 대들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내려놓지.”
그녀는 한 손에 포크를 쥐고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않았던지 그녀의 입술 자국이 묻은 곳에 입을 대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아, 좋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헤르미온이 쥐고 있던 포크가 청년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휘익!
하나, 포크는 목표물을 맞히지 못하고 계속 날아가 뒤쪽 테이블에 앉은 대머리 남자의 머리통에 꽂혔다.
봉변을 당한 남자가 눈썹을 씰룩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돌아섰다.
“어떤 놈이냐!”
족히 2미터는 될 것 같은 거구의 사내였다. 터질 듯한 근육질의 몸에다 험악하다 못해 더러운 인상. 여기저기의 자상들은 그가 매우 포악하다는 것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것을 빼먹고 있었다.
화가 치밀어 머리 뒤에 대롱대롱 매달린 포크를 뽑을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그를 목격한 사람들에게서 웃음이 터졌다.
“크크크큭.”
분명 자신의 실수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음에도 남자는 식당 안에 앉은 군중들을 향해 경고를 했다.
“기분이 더러우니 조용히들 하는 게 좋을 거유.”
경고는 일부는 먹혀들었으나 또 일부는 먹혀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경고가 다른 쪽에서의 반감을 불러왔다.
“아니, 웃기는 걸 웃지도 못하게 한단 말인가? 너무 이기적이군. 그럼 애초에 웃기지를 말든가.”
그 말에 식당 내의 여러 사람들이 박장대소했다.
“하하하하!”
“깔깔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남자는 발을 굴렀다.
쿵!
단지 발을 구른 것뿐이다. 한데, 그로 인해 식당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들썩거렸다.
좌중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러나 잠시 뿐이었다.
겁을 먹기는커녕 이를 아니꼽게 받아들이는 시선들이 있었다.
2층에서 식사를 하던 남자 하나가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난간에 팔을 걸치고 고개를 내밀어 타이르듯 말했다.
“거 실력 좀 있다고 너무 재지 마쇼. 보아하니 여긴 당신보다 무서운 사람들도 꽤 있는 것 같으니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곳엔 각지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실력자들과 제국의 군대들뿐 아니라 신성 제국에서 온 템플 기사들도 더러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자신 있는 자는 나서길 바라오. 하나, 나 역시도 혼자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외다!”
그에 모두가 할 말을 잊은 듯했다.
딱히 남자가 무서워서이기보다는 목표를 목전에 두고 불필요한 마찰은 피해야 해서이다.
다시금 좌중이 침묵에 휩싸였다. 간 큰 사람들은 계속 그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들조차도 이 일에 끼어들 생각은 없는 듯했다.
더 이상 훼방꾼들이 없다는 생각에 남자는 자신의 뒤통수에 포크를 던진 자의 자백을 요구했다.
“어떤 녀석이냐?”
헤르미온은 자신들과 합석한 청년에게 인상을 구기다가 험악한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애써 딴청을 피웠다.
마르크 역시 그녀를 대신해 희생하고픈 마음은 없었는지 입을 닫았다.
틴이 두 사람을 보다가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그랬소. 미안하오.”
“내 체면을 구겨 놓고 미안하다고? 이거 어쩌나, 난 사과로 끝내고 싶지는 않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소? 치료비라도 드리면 되겠습니까?”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치료비 따위는 받을 생각이 없다.”
그는 돌연 뒤통수에 꼽힌 포크를 빼어들며 이죽거렸다.
“일부러 날 겨냥한 것은 아닐 테지?”
“그렇소. 실수였소.”
“그럼 널 탓할 게 아니라 네 눈을 탓해야겠군.”
틴의 표정이 굳어갔다.
성큼성큼 앞으로 무거운 발을 디디며 틴을 향해 다가가는 남자는 위협적인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이걸로 네 눈을 파야겠어. 죄를 지은 녀석이 직접 벌을 받아야지.”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자 헤르미온은 이 사태를 무마시키고자 벌떡 일어섰다.
설마 여자에게 그렇게 할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내가 그랬어요.”
대머리 남자는 볼따구니를 긁으며 난감한 심정을 표출했다.
“아가씨가 그랬다고? 그런데 어쩌나? 난 여자나 남자나 똑같이 취급하는데. 그 전에 저 녀석이 거짓말을 했으니 이빨을 몽땅 털어놔야겠군.”
마르크가 이를 수습하고자 입을 열었다.
“실수였습니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일어나고 저런 일도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정 화가 나신다면 이 아가씨의 뒤통수에 포크를 꽂는 게 순리에 맞을 겁니다.”
헤르미온이 눈을 부릅뜨고 날선 목소리를 냈다.
“마르크!”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의 화를 북돋은 데 대해 그런 너그러움을 베풀 생각은 없었다.
“날더러 다시 한 번 웃음거리가 되라는 얘기냐?”
“그 또한 제가 사람들을 대신해 웃어드리지요.”
그럼에도 남자는 타협할 생각이 전혀 없는지 고개를 저었다.
“입에 발린 소리라고 함부로 나불대는군. 그것으로는 안 돼.”
굽힐 줄 모르는 남자의 태도에 참을성이 다해 헤르미온의 성깔이 도지고 말았다.
“좀생이 같으니라고, 살다가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머리에 구멍이 난 것도 아니고, 살짝 찔린 건데 그걸 가지고 눈을 파겠다고? 그래, 파라, 파!”
헤르미온이 강경한 태도로 나오자 식당 안의 분위기가 다시 한 번 술렁거렸다.
반면에 당사자인 대머리 남자의 눈알은 뒤집어지고 말았다.
“내가 못할 성싶으냐?”
헤르미온에게 무섭게 다가서는 대머리 남자를 어디선가 두 사람이 튀어나와 막아섰다.
쌍귀였다.
“네놈들은 또 뭐야?”
헤르미온은 더욱 기가 살아 대머리 남자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흥, 우리가 만만해 보였나 본데 착각했어. 무귀, 악귀, 어서 저놈을 썰어버리세요. 세상에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이에요.”
듣는 쌍귀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마치 명령권이 그녀에게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질 않은가.
쌍귀는 이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만 있었을 뿐 그녀의 명령에 따를 의무는 없었다.
그래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손을 써야 할지도 몰랐다.
-혹 이자가 죽게 된다면 서둘러 말을 타고 빠져나가십시오.
무귀는 생각해준 말인데 헤르미온은 대머리 남자와 정말 사생결단을 짓기를 바라는지 그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알았어요. 일단 저 못돼먹은 대머리부터 처리해요.”
그 말이 기가 찬 나머지 대머리 남자는 배를 부여잡고 고개를 젖혀 크게 웃었다.
“크하하, 크하하하하!”
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식당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가며 쩌렁쩌렁 울렸다.
“네놈들 보내줄 생각이 싹 가셨다. 모두 살아나갈 생각은 않는 게 좋아. 이 두 놈과 거기 테이블의 네놈들 다.”
파르티잔과 게티롱 역시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다 또 이런 불행이 닥치자 파르티잔은 행여 일이 잘못될까 염려스러웠다.
‘참으로 다행이로구나. 엮이지 않아서.’
파르티잔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게티롱을 보았다. 그는 먼 산 쳐다보듯 사태를 관망하는 중이었고, 또 계속 그럴 것 같았다.
‘흥, 이 자식. 또 이런 데는 나서지 않는군.’
동시에 파르티잔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야 했다.
‘날 감시하는 쌍귀라는 녀석들의 실력을 모르니 승부를 섣불리 점치기는 어렵지만, 저 대머리는 보통내기가 아닌 듯하구나. 저 녀석이 진다면 앞서 했던 말대로 그 일행들이 몰려올 거다. 어차피 이쪽에 승산은 없겠어. 쌍귀와 이 녀석들 모두가 죽는다면 어차피 난 자유의 몸이 된다. 죽인 후에 털어가지 않으면 좋으련만.’
파르티잔은 돈이 궁했다. 아직 그가 도주 시도조차 하지 않은 이유는 다 돈 때문이었다.
마르크 일행과 함께한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돈을 훔치지 못한 이유 또한 쌍귀 때문이었다. 저들의 눈치는 귀신같이 빨라서 약간 이상한 낌새만 느껴도 즉시 파르티잔에게 달라붙었던 것이다.
때문에 파르티잔의 주머니에는 심부름을 하고 남겨 먹은 푼돈들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이는 그에게 기회로 다가올 수 있는 일이었다. 하다못해 쌍귀만 처리한다고 해도 이후의 계획은 순조롭게 이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르티잔은 속으로나마 대머리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게 찰나라고 봐도 좋을 굉장히 짧은 시간에 이뤄진 일이었다. 마법 시전 속도는 몰라도 자신이 처한 일에 대한 사태 파악은 대륙 제일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었다.
대머리 사내의 경고에 가만히 앉아 있던 청년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봐, 난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의리도 없는 놈이군. 넌 이 녀석들과 동료가 아니냐?”
“아냐, 오늘 처음 봤다고. 그냥 합석한 것뿐이야.”
“그럼 넌 빠져라.”
허락이 떨어지자 청년은 몸을 일으켜 빈자리를 찾아 헤매려했다. 그런데 돌연 대머리 남자의 입이 열리며 그를 제지시켰다.
“잠깐!”
“응?”
“그냥 봐주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네 말투 역시 거슬리는구나.”
청년은 방금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여유 있게 돌아섰다. 얼굴에 미소까지 걸치고서 그는 알 듯 모를 듯 모호한 말을 내뱉었다.
“붙잡아줘서 고맙군. 안 그래도 미련이 생기려던 참이었어.”
“미련?”
“보면 볼수록 끌리는군, 저 아가씨는. 그래서 말인데, 저 아가씨는 놓아주면 안 될까? 대신 다른 사람은 상관 안 하지.”
“미친놈. 네놈이 뭐나 되는 모양인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그럼, 너보다는 나은 사람이야. 이래 보여도…….”
참을성에 한계가 닥쳤는지 기어이 대머리 남자가 검을 뽑았다.
육중한 덩치와 다르게 대머리 남자는 제법 빠른 속도로 청년에게 쇄도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남자는 청년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양단이라도 낼 기세로 무거운 검을 내리그었다.
우지끈.
단단한 나무 바닥이 형편없이 꺼져 버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힘에 만족하지 않고 도리어 표적을 놓친 것에 대한 불만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여기라고!”
청년의 목소리가 들린 쪽은 2층 난간이었다.
대머리 남자는 뒷발에 체중을 싣더니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난간에 몸을 걸치고 있는 청년을 향해 단숨에 날아갔다.
패도적인 기운을 머금은 일검에 난간은 고사하고 검에 닿지 않은 옆쪽의 테이블까지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머리 남자는 이맛살을 구겨야만 했다. 또다시 표적을 놓친 것이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계속될수록 식당 내부는 형편없이 망가졌다.
종업원들은 기가 죽어 그를 말릴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급기야 사태를 무마시키고자 주인이 뛰쳐나왔다.
“아이고! 손님들,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 소리는 두 사람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청년은 대머리 남자의 공격을 피해 벼룩처럼 자신의 키보다 월등히 높은 2층까지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청년은 식당 주인이 불쌍하게 보였던지 3층의 난간에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남자를 보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어때? 지는 사람이 수리비 물기.”
대머리 남자의 대답과 몸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보통 놈은 아니었구나. 좋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어느 순간부터 대머리 남자의 검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뻗어 나왔다.
그를 보며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 중 하나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를 주었다.
“하멜!”
이런 데서 괜한 힘을 써봐야 좋을 건 없었다.
각 세력은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어느 정도의 강자가 오게 되었는지, 요주의 인물은 누구인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멜은 분노가 정도를 넘어 그를 외면하고 있었다.
식당 주인의 원성은 더 커져 거의 통곡 소리에 가까워졌다.
“아이고, 누가 좀 말려 주세요. 어떻게 일으킨 가게인데-!”
가뜩이나 신경질이 나 있던 판국에 시끄럽게 해대는 게 짜증이 났던지 하멜은 식당 주인에게 눈을 돌렸다.
눈이 뒤집힌 상태이니 뵈는 게 없는 것이다.
그에게 짓쳐들던 하멜을 보고 청년 역시 신형을 날렸다.
분명 목표와 더 먼 거리였음에도 청년이 식당 주인에게 다가온 속도가 약간 더 빨랐다.
청년은 식당 주인의 뒷덜미를 잡아 뒤쪽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유유히 날아가던 식당 주인은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에 의해서인지 몰라도 쌍귀가 있는 쪽으로 하강했는데, 이를 본 무귀가 몸을 날려 그를 받았다.
그 순간 하멜과 청년의 검이 맞부딪치며 굉음을 터뜨렸다.
콰캉!
청년은 검끝이 땅 쪽을 향하게 든 상태로 다리를 베어오던 하멜의 오러 블레이드를 막았다.
그보다는 길지 못했지만 분명 청년의 검에도 오러가 맺혀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끼리 부딪쳐 불꽃이 튀길 무렵 청년은 날랜 동작으로 하멜의 복부를 위쪽으로 걷어찼다.
퍼억!
미처 피할 재간이 없었던지 하멜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때를 같이해 청년의 검이 휘둘러졌다.
부앙!
실로 놀라운 현상이었다.
이에 둘의 싸움을 주목하던 이들 중 상당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청년의 검에서 뻗어난 오러 블레이드가 눈 깜빡할 새에 엄청나게 길어지며 하멜의 옷자락을 찢었던 것이다.
이윽고 하멜이 땅으로 착지했다.
그는 가슴에 손을 대고 있었는데 살이 약간 찢겼는지 손가락 사이로 피가 새어나왔다.
청년이 당차게 물었다.
“더 할 생각인가?”
분하지만 실력의 차이를 깨달은 하멜은 한쪽 무릎을 땅에 댄 그대로 순순히 패배를 시인하는 길밖에 없었다.
“내가 졌다.”
* * *
철의 여왕.
오딘이 아레인 왕성을 비운 지 훌쩍 1년이 흘렀다.
예로부터 아레인 왕성은 외부인의 출입이 극히 적었지만 근래는 예외였다.
이 중 대부분이 아레인에서 취급하는 포목점과 상단의 일에 관심을 보여 방문하는 사람들이었다.
외교 역시 발을 뻗어갔다.
인접한 바리톤국과만 교류하던 아레인을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로만 공국이었다.
오딘이 자신들의 공세자와 만난 이후에 로만은 이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몇몇 군소 왕국과의 왕래도 오갔다. 이들은 필연, 아니면 우연에 의해 아레인을 알게 되어 인사차 방문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중 상당수의 소국들은 발길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아레인은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레인 왕성을 방문한 자들이 있었으니,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나이시스 신성 제국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태운 이두마차들이 아레인 성문들을 수직으로 내달렸다.
“조금 이색적이군. 이래서야 외세의 침입은 막을 수 있으려나?”
두꺼운 성벽이 없는 것을 꼬집은 말이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군.”
신성 제국 황성의 건물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이곳의 건물들은 세련됨이라고는 없었다.
그럼에도 칭찬을 섞은 말로 피력하는 것은 이곳의 분위기가 타국들과 너무도 남달랐기 때문이다.
마치 신천지에 온 것 같은 기분, 그것이었다.
“허업.”
어느 순간 말을 달리던 마부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에 마차 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다.
“암흑 투기?”
신성력과 반대되는 힘을 암흑 투기라고 한다.
이는 마족들만이 사용하는 것으로 예로부터 신성 제국은 이를 철저히 배척해왔다.
곁에 총명해 보이는 사제가 그를 부정했다.
“단언컨대 암흑 투기는 아닐 겁니다. 그 성질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마기를 오인한 것이다. 마기는 갈수록 짙어지다가 어느 순간 미약하게 느껴졌다.
이후에도 이들은 무려 10개 정도의 문을 더 지나쳐서야 마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인원은 10명.
구성원은 신관 두 사람과 사제 셋, 그리고 팔라딘 하나와 나머지는 성기사들이었다.
아직까지 이들의 얼굴에서는 대(大)국에서 왔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지워지지 않았다.
“살다 보니 아레인에도 와보게 되는군.”
이는 아레인을 폄한 말이었다.
오지나 다름없는 곳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는 데에서 오는 불만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귀빈실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저마다 내색은 않았지만 속으론 혀를 내둘렀다.
‘매우 독창적인 공간이로다.’
‘비록 군소 왕국이기는 하지만 아레인의 이런 점은 높이 사주어야 할 듯하다.’
확실히 아레인 왕성만의 독특한 개성과 자연 친화적인 분위기는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효과까지 가진 듯했다.
“분위기는 마음에 드십니까?”
여기까지 안내를 해준 집사가 살갑게 묻는 말이었다.
질문을 받은 신관은 일부러 딴청을 부렸다.
“크흠.”
머쓱해하는 집사가 안쓰러워 보였던지 다른 신관이 그를 대신해 답했다.
“뭐, 분위기는 나쁘지 않소.”
신성 제국의 신관.
이들이 가지는 위상이란 남다른 것이었다.
특히나 아레인 같은 군소 왕국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행여 눈 밖에 나게 되어 말 한마디라도 잘못 샐 때면 곤혹을 치를 수도 있기에.
하지만 이 집사는 그들과는 구별이 갔다. 어려워하는 기색이 전연 아니었다.
‘이런 후미진 왕국에 처박혀 있으니 세상 물정에 어두울 수도…….’
그를 눈여겨본 신관은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미리 얘기를 드렸지만 우린 아레인의 국왕님을 만나러 왔소. 시간이 많지 않으니 서둘러주셨으면 좋겠구려.”
“알겠습니다. 미리 말씀을 올렸으니 시간이 되실 때 이곳에 당도하실 것입니다. 잠시 다과라도 내어드릴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집사는 매우 친절한 태도로 일관했지만, 다른 군소 왕국에서 신관 자신들을 대하던 것과는 달리 너무 여유로워 보였다.
‘눈에 거슬리는군.’
결국 한 신관이 입을 열어 불편함을 피력했다.
“우린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자리를 비켜 줄 수 있소?”
이 또한 실례였다. 알아서 나갈 것인데 일부러 나가달라고 종용하고 있질 않은가.
그럼에도 집사는 얼굴에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요구에 응했다.
“마땅히 그래드리지요.”
집사가 나간 후 다과가 나왔고, 신성 제국에서 파견을 나온 자들만의 자리가 갖춰졌다.
주도권은 물론 신관들에게 있다.
사제들과 성기사들은 이들의 경호가 주된 임무였으며 팔라딘은 이의 총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레인은 처음이군. 전에부터 발걸음을 해본 적이 없소. 혹 우리가 처음 아니오?”
동료 신관의 질문에 다른 신관이 답했다.
“아마 그럴 거요.”
대화는 줄기차게 이어졌다.
“아무래도 의심이 가오. 이런 왕국에 소드마스터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소.”
“곧 국왕을 보게 될 것이니 정황을 알 수 있게 되겠지요. 조바심 내지 맙시다.”
잠시 후 집사가 다시 들어왔다.
“여왕 폐하께서 대전에서 보기를 청하고 계시니 자리를 옮기시지요.”
“여왕? 아레인의 통치자가 여성이오?”
“그렇습니다.”
집사를 따르는 신관들의 표정은 곱지 못했다.
“번거롭게 하는군.”
물고기들이 노니는 연못과 화사한 꽃들이 보이는 복도를 지나 얼마를 더 나아가자 상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왔다.
계단을 올라 죽 직진하니 중무장한 근위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하나같이 꿋꿋한 자세로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각 통로마다 시녀나 하인, 시종들을 비롯해 사람들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드나들었다.
드디어 앞에 다다랐는데 대전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잠시 기다리시지요. 아직 회의가 끝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집사의 말에 그만 신관들의 화가 폭발했다.
“뭣이 어쩌고 어째?”
“보자 보자 하니까 너무하는군. 우리가 누군 줄 모르는 건가?”
그들은 대접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륙 구석에 붙은 왕국에서 이런 수모를 겪게 되었으니 어찌 화가 나질 않겠는가.
그러나 그 행동은 대전 문을 지키고 있던 두 근위 기사의 노여움을 샀다.
근위 기사들의 얼음처럼 싸늘한 시선이 신관들을 향했다.
단지 시선을 마주친 것뿐인데 신관들은 유령을 마주친 것처럼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 근위 기사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경고를 주었다.
“이곳은 대전 앞이니 언행에 주의를 해주시오.”
그 목소리에는 거역하기 힘들 정도의 힘이 실려 있었다.
각 복도에서도 근위 기사들이 나와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함께 온 팔라딘과 사제들, 성기사들이 신관들의 기분을 살폈다.
신관들의 뜻은 한결같았다.
‘참으로 오만방자한 놈들이구나. 신성 제국 알기를 우습게 하다니. 그러나 대신관님의 명인지라 내 뜻대로 할 수도 없는 일.’
이 둘은 자신들의 지금 전력이 이 근방의 근위 기사들을 박살낼 힘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들이 대전 밖에 있는 동안 대전 안에서는 회의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대전 안에 모인 신하들은 14명. 그들은 왕좌를 중심으로 좌와 우에 열을 맞춰 서 있었다.
왕좌에는 엘레느가 착석해 있었다.
아레인을 통치한 지 불과 몇 년이 흘렀지만 그녀는 전보다 훨씬 성숙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단지 한 가지 문제가 따랐다.
아름다움이 한계를 넘어 보는 이들이 괴로웠던 것이다.
그녀의 굴곡 있는 몸매는 관능미가 물씬 풍기다 못해 뇌쇄적이기까지 했다. 얼굴 또한 감히 빗댈 데가 없어 신하들은 부러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럼 그 부분에 대해서 경들은 제 의견에 따라주시길 바라겠습니다.”
“화… 황공하옵니다.”
신하들의 대답은 여의치가 못했다.
그들은 애간장을 태우는 엘레느의 목소리에 엉덩이를 뒤로 뺀 채 몸을 배배 꼬았다. 사타구니가 한껏 팽창한 것이다.
‘미치겠구나.’
이는 불경한 짓이나 다름없었다.
하나, 몸의 반응을 뜻대로 제어할 수 있는 남자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이들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도 여왕을 존경하는 마음이 가득했으니 이들은 치미는 욕정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상상 속에서라도 그녀를 품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곧 여왕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흐, 또 집에 가서 부인이나 들볶아야겠구나.’
‘이제는 대전 회의가 두렵다.’
이런 까닭에 신하들은 가능하면 그녀를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녀가 이렇게 색을 발산하는 원인은 전적으로 오딘에게 있었다.
엘레느가 소녀였을 당시 오딘은 귀찮게 따라다니는 그녀를 떼어내려 이 수를 썼던 것이다.
처녀성을 떼어내지 못하는 한 그녀는 지금보다도 더한 색기를 발하게 될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오딘이 아레인에 한 번도 발을 들여 놓지 않은 원인 또한 이에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찾길 바랐으므로.
불행하게도 엘레느는 이 이상 현상을 모르고 있었다.
퇴청을 지시한 후 그녀는 바로 신성 제국에서 온 신관들을 들여보내라는 명을 내렸다.
신하들이 앞 다투어 대전 문을 빠져나갔다.
신성 제국 신관들의 눈이 자연 그들을 향했다.
“미치겠군, 미치겠어.”
문을 빠져나가던 귀족 중 한 명이 내뱉은 말에 신관들은 의문을 자아냈다.
귀족들이 사라진 후 궁내부대신이 대전 안에서 집사를 보며 물었다.
“그분들이오?”
“그렇습니다.”
궁내부대신은 환한 얼굴로 신관들에게 손짓을 했다.
“들어오시지요. 기왕이면 얘기를 나눌 분만 들어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신관들은 이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지요.”
팔라딘과 성기사들, 사제들을 밖에 두고서 신관 두 사람이 대전 안으로 걸음을 들여 놓자 문지기들에 의해 커다란 대전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때까지 신관들은 뒤쪽을 살펴보았을 뿐 왕좌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앞쪽에서 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것보다도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그제야 신관 둘의 시선이 앞쪽의 계단 위쪽에 있는 왕좌를 향했다.
그곳엔 너무도 아름다운 여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관들은 자신들의 눈에 의심이 갔는지 각자의 눈들을 비비고서 다시 왕좌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변한 건 없었다.
도리어 시야가 더 또렷해져 그녀가 더 아름답게만 보일 뿐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소리를 내던 심장 박동은 더 커지고 격렬해지며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까지 다다랐다.
한 신관이 재치를 발휘해 머리를 탈탈 턴 후 부지불식간에 물었다.
“다… 당신이 아레인의 국왕이오?”
당장에 근방에 있던 궁내부대신에게서 무례함을 책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행에 주의하시오. 이분은 우리 아레인의 여왕 폐하이시오.”
엄밀히 보자면 실책이었다.
아무리 신성 제국의 신관이라 해도 한 왕국을 책임지는 우두머리에게는 높임말을 써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신관은 이를 스스로 시인했다.
“미안하게 되었소. 내 정신이 몽롱해서 그만 실례를 범하고 말았소이다.”
궁내부대신에게 한 말이었다.
그러나 엘레느는 이를 물고 늘어질 생각은 없었던지 조금 전에 그가 했던 질문에 성실히 응해주었다.
“그래요. 내가 아레인의 여왕입니다. 두 분께서는 신성 제국에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옆의 신관을 대신해 조금 전에 말했던 신관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레인에 발을 디딘 것은 몇 가지 의문점이 있어서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신관은 되도록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싶어 하질 않았다. 옆의 신관 꼴이 날 것 같아서이다.
그는 나락에 빠져 있었다.
제대로 된 사고도, 판단도 못한 채 아레인의 여왕에게 홀려 멍한 얼굴이었다.
급기야 돌이킬 수 없는 실례를 하고 말았다.
그녀의 몸에 시선을 빼앗기며 벌어진 입에서 그만 침이 흘러내린 것이다.
조금 전의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사타구니 또한 팽창하기 시작했는데 걷잡을 수가 없었다.
욕정이 눈앞을 가려 사리분별을 못하고 있는 신관을 보며 그나마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신관은 치를 떨었다.
‘하는 수 없군. 나 혼자서 모두 얘기를 하는 수밖에.’
신관은 어금니를 꼭 깨물며 다짐을 굳히고는 땅을 내려다본 채 입을 열었다.
“저희 대신관께서는 로만 공국에 위치한 카반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해명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카반이라고 하시었나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아레인의 군사가 카반에 와 있다던데 사실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아레인에서 카반에 군대를 낸 적이 있습니까?”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단호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카반에 일부의 병력이 있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했었다. 아레인과 소드마스터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아레인이라는 국호를 팔아 분란을 조장하고 있다고 판단했는데, 그 판단이 어김없이 빗나가니 신관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땅을 쳐다보지 못하고 그만 엘레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게 문제가 되는지요?”
엘레느의 붉고 탐스런 입술이 열리는 것에 신관의 욕정이 꿈틀거렸다. 그는 다시 시선을 땅에 처박고서 항의하듯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아레인의 군사가 우리 나이시스 신성 제국의 성기사들과 팔라딘들을 죽였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까?”
곧 믿기지 않을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보고가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은 신관에게 적잖은 충격을 던져 주었다.
놀라고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잊어버렸지만 마냥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어 그는 애써 냉정을 되찾고는 물었다.
“그럼 두 명의 소드마스터는 아레인의 기사이거나 귀족일 텐데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그에 대한 일말의 책임도 느끼지 않으시는지요?”
“그 말씀은 흡사 우리 아레인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제가 듣기로는 그쪽이 저희 무사를 먼저 해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바가 틀린가요?”
이에 대해 신관은 미리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그것은 오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데, 그 소드마스터는 자세한 경위도 듣지 않고 무차별한 무력을 자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신성 제국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으며 대신관께서는 크게 노하신 상태입니다.”
“오해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어떤 오해를 말함이신지?”
여전히 그녀의 태도는 부드러웠다.
신관은 그녀의 질문에 길게 답했다.
“여왕께서도 우리 신성 제국에 대해 들으셨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우리는 주신을 믿고 정의를 행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찾아주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있는 법. 하여 ‘그것’을 찾으려 카반에 들어왔습니다. 주신을 위해 존재해야 할 ‘그것’을 데려가려는 때에 아레인의 무사가 거칠게 덤볐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자비를 행했습니다. 그때 그가 죽은 것은 사고였습니다.”
엘레느는 그의 말을 되뇌었다.
“사고였다고요?”
“그렇습니다.”
수긍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신관의 예측은 터져 나오는 그녀의 웃음으로 인해 뭉개지고 말았다.
“깔깔, 깔깔깔.”
요사스러운 웃음이 대전 안을 떠돌아다녔다.
돌연 엘레느는 웃음을 겨우 진정시키고서 물었다.
“댁이 지칭하는 그것이라는 것은 성녀겠죠?”
아직도 땅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신관은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들켜서 좋을 것이 없는 부분이었다. 성황이 알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가 모르는 상황이니 말이다.
이 일을 보고도 없이 비밀리에 추진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버젓이 살아 있는 성황을 무시했다는 의견이 신성 제국 안팎에서 일어날 것이므로.
신관의 기분 따위는 개의치 않고 엘레느는 계속 질문 공세를 이어갔다.
“대답하기 싫다면 안 하셔도 돼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의 신분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난 주신님의 뜻을 세상에 전파하는 신관입니다. 우리의 사정을 떠나 아레인은 신성 제국의 이름에 먹칠을 했습니다. 이를 어떻게 보상하실 것인지를 듣고 싶습니다.”
강하게 나오는 신관을 향해 엘레느는 못마땅한 심기를 드러냈다.
“추궁을 하시는군요. 스스로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신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소드마스터가 있는 왕국이라지만 해도 너무하는군. 몇 명의 마스터 따위를 가졌다고 안하무인이로구나.’
기분이 몹시 불쾌해 그는 이를 바드득 갈며 이제야 엘레느를 똑바로 직시하며 물었다.
“조금 전의 말로 미루어볼 때 아레인의 여왕께서는 분명 잘못을 인정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를 우리 신성 제국에 대한 도전이라고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이에 붉은 입술이 작게 열리며 신관을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성 제국의 신관 따위가 막말을 늘어놓다니.”
너무 황당해 할 말을 잊은 신관을 향해 엘레느는 무서운 분위기로 말을 이어갔다.
“이는 본인뿐 아니라 우리 아레인을 능멸함이니라. 오늘은 이만 보내주겠다만 다시 한 번 오늘 같은 일이 있을 시에는 아무리 신성 제국이라 한들 우리 아레인의 분노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신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여왕의 뜻을 확인한 근위 기사들이 두 신관들을 대전 밖으로 내쫓다시피 했다.
신관은 분을 금치 못했다.
‘지금은 여기서 물러난다만 언젠가 네년은 지금 이 일을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다. 너 하나로 인해 아레인은 파멸의 길로 치달을 것이니.’
대전 문이 닫혀 버려 당장에 더 이상 그녀를 볼 수는 없었다.
대전 밖에는 못 보던 얼굴이 있었다.
한 눈을 2개의 고리로 봉한 남자였는데,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상하게 간담이 서늘해지고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신관은 그것을 안에서 당한 일에 대한 울분 때문일 것이라고 치부해버렸다.
성기사들과 사제들, 그리고 팔라딘들은 안에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추리하려고 했지만 다른 신관은 그렇지 못했다.
“갑시다!”
신관에게서 돌아가자는 말이 떨어지고 나서도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려 대전 문을 계속 쳐다만 보는 중이었다.
결국 성기사들에 의해 억지로 붙들려 가면서도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가 있을 곳을 바라보며 멀어지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의 귀에는 안에서 있던 대화 내용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신관은 따끔한 눈치를 보냈지만 그의 심정을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조금만 더 늦게 땅을 쳐다보았더라면 그와 비슷한 결과를 겪었을 테니까.
발길을 돌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신관은 자신을 포함해 신성 제국이 당한 모멸감을 대신관에게 소상히 전할 것을 굳게 다짐했다.
분노로 가득 찬 그의 두 눈은 당장에라도 아레인의 파멸을 원하고 있었다.